표트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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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식 이름'''
'''표트르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Пётр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독일식 이름'''
'''카를 페터 울리히
(Karl Peter Ulrich)'''
'''생애'''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향년 35세)
'''재위'''
1762년 1월 5일 ~ 1762년 7월 9일(186일)
'''배우자'''
예카테리나 2세
'''출생지'''
홀슈타인 공국

'''사망지'''
러시아 제국
로프샤
1. 개요
2. 생애
2.1. 가문
2.1.1. 영토
2.2. 유년기
2.2.1. 12세까지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인연으로 포츠담에서 거주
2.2.2. 서기 1742년, 15세,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로 지목
2.2.3. 서기 1744년, 17세, 조피 프레데리케(16세)와 결혼
2.3. 황태자 시절
3. 즉위
4. 폐위와 의문사
5. 만약 러시아의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역사를 바꿨다고 볼 만한 사람들''' 중 가장 기묘한 케이스는 러시아의 표트르 3세다.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열성적인 팬'''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전쟁에서 재앙을 맞이하는 도중 딱 맞는 시간대에 즉위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교전을 중단시켰다.''' 표트르 3세는 곧 죽임을 당했지만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구할만큼 적절한 기간''' 동안 즉위해 있었다. '''멍청이답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본의 아니게 현대 유럽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원문]

『역사의 서문』 칼 G. 구스타브슨(Carl G. Gustavson)[1]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7대 황제.
재위기간은 극히 짧고 업적이랄 것도 없으며 오히려 본국에선 오명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방면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본명은 카를 페터 울리히이다.

2. 생애



2.1. 가문


홀슈타인-고토르프(Holstein-Gottorp) 가문으로 지위는 공작이지만 상급주군이 없는 엄연한 통치가문이라서 유럽내 왕족과 대등한 결혼이 가능한 집안이었고 혈통으로 보면 어머니는 표트르 대제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고 부계로는 독일계라기보단 스웨덴 및 덴마크 왕실과 혈연이 있있다.

2.1.1. 영토


영지인 홀슈타인-고토르프도 현재는 독일령이지만 지리상으로는 오히려 덴마크 본토에 가깝다.

2.2. 유년기


어머니는 자식을 낳고 곧 사망했고 10살을 갓 넘겼을 때 부친[2]을 잃고 작위를 이어받아 홀슈타인 공작이 되었다.
그런데 작위는 거의 명목상 작위로 선대때 덴마크왕에게 땅을 거의 대부분 뺏겼고 여러곳을 유랑하며 살아 불우했다. 사실 남은 영토도 어린 시절 유랑할 때 거의 다 뺏겼다.

2.2.1. 12세까지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인연으로 포츠담에서 거주


거의 망국의 왕자나 다름없었지만 스웨덴과 러시아 양쪽의 유력 계승자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결국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이 거둬줘서 12세까지 베를린 근처 포츠담 궁정에서 살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워낙 역사에 나올까 말까한 전무후무한 먼치킨인지라 생전에도 빠가 넘쳐나서 주목받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런 개인적 관계도 후술할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2.2.2. 서기 1742년, 15세,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로 지목


선대가 스웨덴 왕실 혈통도 있기 때문에 스웨덴 왕의 후계후보로도 꼽혔고,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매우 집착한 이모 옐리자베타 여제가 독신이었던 관계로 어린 나이 때부터 신체적 정신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1742년에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같은 해 스웨덴 의회도 '카를 울리히'를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선언했지만 그가 공식적으로 계승권을 포기하여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지는 않았다.
1742년 11월에 정식으로 정교회로 개종하고 '표트르 표도로비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2.3. 서기 1744년, 17세, 조피 프레데리케(16세)와 결혼


이모이자 양어머니인 옐리자베타의 뜻에 따라 같은 독일계인 작센-안할트의 조피 프레데리케와 결혼했다. 이 둘은 6촌이긴 하지만 근친혼의 영향으로 혈연상 꽤 가까운 편이어서 가족처럼 서로를 잘 봐줄거라 기대한 옐리자베타가 조피를 며느리로 낙점했다. 이윽고 표트르와 혼인해 러시아 황가의 일원이 된 조피 프레데리케는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한다.

2.3. 황태자 시절


결혼한지 얼마 후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가 당연히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한편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바꾸는 등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 반면, 그는 프로이센 궁정시절 영향도 있고 당시 유럽 젊은이들의 우상이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추종자라 독일식 군대 문화에 빠졌고 러시아로 오기 전 표트르의 가정교사가 천박한 또라이라 양육 과정에서 학대를 받아 안그래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허약하던 차에 그게 더 심해졌다. 그의 지적 수준으론 새로운 학습이 어려워서 러시아어를 배우다 싫증을 내고 결국 때려쳤다. 사실 이 정도면 그러려니 하는데 정신연령이 현재 추산하기론 초등학생 수준이라서 괴상한 장난을 많이 쳤고 곧 러시아 귀족들은 물론 외교관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이모 옐리자베타가 워낙 혈통에 집착한지라 후계자 변경 건의는 완전히 무시했다.
무엇보다 러시아에 적응하고 있었던 아내와 크게 충돌하여 부부관계도 소원해졌다. 표트르 3세 사후, '''"사실 그는 고자였다!"'''부터 시작해서 지적장애나 반미치광이 등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그의 정신적 문제로 지적인 수준이 낮은건 맞는데 병크섞인 일화 등은 예카테리나 2세 시절 많이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표트르도 자신과 지적수준이 비슷한 애첩을 총애하며 대놓고 바람을 피는 등, 고자는 절대 아니었다. 러시아의 궁정은 원래 문란해서 애첩을 두는 정도는 워낙에 흔한 일이기 때문에 허물이 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집착한 옐리자베타 여제마저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장자 파벨이 태어나자마자 아이를 부모에게서 빼앗아 양육했고, 파벨이 장성하면 표트르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을 정도로 표트르 3세에게 문제가 많았던건 사실이다. 심지어 아내 예카테리나도 그녀의 어머니(즉, 표트르 3세의 장모)가 표트르처럼 어리석어서 처음에는 같이 욕을 먹다가 예카테리나의 묵인으로 자기 어머니를 러시아 궁정에서 추방하는 병크도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시집온 뒤에는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 정의하고 러시아의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도 많이 한 아내 예카테리나에게 신하들의 지지가 더 많이 몰릴 정도였다고 한다.
둘 사이는 결혼 초반을 제외하고 곧 냉랭해졌는데 장자 파벨은 어쨌든 일단 둘 사이의 자식으로 인정받았다. 서로 바람피웠다는 식으로 친아버지가 표트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있지만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다.[3] 이런 소문이 났던 건 표트르가 예카테리나를 죽이려고 여러번 간통구실 드립을 쳤기 때문인데 러시아 귀족들은 물론 홀슈타인에서 데려온 신하들조차 그건 좀 아니라고 표트르를 말릴 정도였다.
사실 아들인 파벨 1세를 보면 표트르 3세와 외모가 붕어빵이기 때문에 친아버지가 맞다는 의견이 주류. 표트르의 아버지 홀슈타인 고트로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3세'와 파벨 1세를 보면 진짜 못 생긴게 3대가 붕어빵이다.
7년 전쟁 시절 러시아 제국군은 적 프로이센군과 싸우는데 어려움 뿐만 아니라 궁정 눈치보기도 바빴는데 당시 차르 옐리자베타 여제는 현재 백혈병으로 추정되는 불치병으로 전쟁 초반부터 건강상태가 심각했고, 표트르는 대놓고 친프로이센이라 장군들은 이겨도 속이 타는 판국이었다.
그렇다고 못 싸운건 아니어서 역시 많은 피해를 입긴 했지만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프로이센군을 오데르 강까지 밀어붙이는데 성공했다. 다만 보급 한계로 인해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는데...

3. 즉위


이전 표트르 3세는 7년 전쟁 중 자기 입으로 '''적국인 프로이센에게 군사기밀을 넘기겠다'''는 등의 실언을 여러 차례 하면서 민심까지 잃어버렸다. 그래도 그냥 고향이 독일이니까 안타까워 하는 말 정도로 치부했지만…
여하간 1761년 12월 25일,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자 표트르 3세가 러시아 제국차르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로 러시아의 왕조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 왕조로 교체된다.
그리고 그는 즉위한 직후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그만둔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요약 만화) 7년 전쟁 문서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 시점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프랑스-스웨덴으로 연결되는 4국 동맹은 독일 지역 지상전에서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4] 프로이센의 최대 요새인 콜베르크[5]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고, 영국은 지상전에서 프로이센에 현금 지원을 하다 그마저도 끊긴 지라[6] 러시아군의 우세가 여전했다.
워낙 전쟁사에 황당하고 전무후무한 일이라 오죽하면 전쟁에 고통받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내린 결단이라는 패러디까지 있을 정도다. 심지어 단순히 전쟁을 중단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프로이센에 2만명에 달하는 지원군까지 보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그저 표트르 3세의 빠심으로 항복 받아낼 일만 남은 전쟁을 엎었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것은 러시아쪽 연구를 무시한 사례에 불과하다. 일단 러시아군의 보급선이 매우 길어서 전쟁 초기에는 이겨도 후퇴한게 옳았다는 판단이고 1760년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함락하긴 했는데 역시 후방위협 때문에 금방 후퇴했다.[7] 사실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잃는 것보단 차라리 땅을 잃는 것을 선호해 아까운 병력을 수비에 쓰지 않았고, 1760년 상황이 최악이긴 했는데 1761년엔 오스트리아군을 조금씩 밀어내서 조금 호전되는 추세였다.
프랑스는 유럽 지상전에서 로스바흐 전투 후에 거의 제2차 세계 대전 마냥 도움이 안됐고, 스웨덴도 전쟁 후반 소극적인건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처럼 많은 손해가 누적되어서 러시아 의존도가 컸다.[8]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옐리자베타가 죽어가던 당시엔 슐레지엔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협상으로 동맹이 성사되어서 봄이 되면 투르크가 러시아를 공격할거란 희망에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문서에도 나오지만 오스만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조너선 듈(Jonathan Dull)과 같은 근대사학자들의 최근 견해에서는 표트르 3세가 외교상으로 실용적인 판단을 했다는 견해가 중론이다. 1762년 러시아가 패색이 짙어진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적인 스탠스를 계속 유지했을 때 프로이센이 완전히 패망할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이렇게 되면 프로이센은 당시 폴란드처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당해 과거의 패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프로이센이 몰락한다는 것은 곧 중부유럽에서 오스트리아가 단일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은 더 나아가 유럽 대륙의 힘의 균형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문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표트르 3세는 러시아군이 직접 베를린까지 진격하는 것보다는 콜베르크와 같은 북독일의 거점만을 장악해 중부유럽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면서도 프로이센의 패권은 어느 정도 유지시켜 오스트리아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중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된 상황에서 마침 새로운 차르가 즉위했으니 전쟁을 종결짓고자 협상을 할 수도 있다. '''문제는 협상의 내용이 패전국이나 내걸 법한 조건이었다.''' 사실 옐리자베타 시절에도 7년 전쟁에서 이겨봐야 얻을게 별로 없다는 이유로 개전 초에 반대가 상당했고 러시아도 많은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계속 전쟁을 수행한 것인데,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배상금도 안받고 돌려주고 병력까지 대여해줄 것을 제의'''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얼쑤하고 이 제의를 받아들인 건 당연지사. 러시아가 물러나자 스웨덴도 판세가 나가리가 된걸 보고 프로이센과 강화했다.[9]
거기다 러시아 정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성직자들에게 개신교의 목사들처럼 하고 다닐 것을 강요하는 등 국가 권력의 중요한 축인 교회마저 적으로 돌려버렸으니 실각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거기에 농노들이 봉기하자 전통적인 귀족의 권리를 지키시켔다고 잔혹하게 진압한 것은 덤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러시아의 모든 군인들과 평민들, 귀족들, 성직자들은 모두 멍청한 차르에게 분노했고[10]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을 외치며 차르를 갈아치우려는 반란이 일어났다.

4. 폐위와 의문사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틈을 타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가 주도했다는 설이 있는데 예카테리나의 역할이 별로 크지 않았다는 설이 새로 제기되고 있다. 근위대가 왜 반란을 일으켰냐면 고위 귀족자제들이 주축인 근위대를 홀대하고 홀슈타인 출신 떨거지 양아치들을 데려와서 근위대 대신 자신의 호위병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쓸모가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주색잡기나 하는 잉여들이라 이들의 비행까지 합쳐져서 민심은 완전히 떠났다.
실각한 표트르 3세는 성에 유폐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했는데, 공식 사인은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급사라고는 하지만 정황을 봐선 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폐위된 군주가 살아있으면 현재 군주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니.
부인 조피가 예카테리나 2세로 차리나에 즉위했지만, 권력기반이 전무한지라 기득권층인 귀족들에게 이권을 퍼주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러시아는 전근대적인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되면서 전제군주제에서 벗어나서 서유럽처럼 근대적 개혁을 통해서 한단계 도약할 기회를 상실하였다. 문제는 그러고도 재위 중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난데다가, 외교적으로도 고립돼서 훗날 프로이센을 적대하지 않고 폴란드를 분할해야 했다.
개인사적으로는 참으로 안습한 결말을 맞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멍청이가 '''예카테리나 2세 이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트로프-로마노프 황조의 직계 조상이 된다'''.[11] 표트르 3세와 파벨 1세는 초상화만 봐도 부자가 쌍으로 추남이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게 파벨 1세의 후처 마리야 표도로브나(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가 '''로마노프 가문에 뷔르템베르크의 잘생긴 외모를 가져왔다'''고 평가될 정도로, 미인에 장신이어서[12] 자식과 후손들에게 이 미인 유전자를 물려줬다. 덕분에 로마노프 황가는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하며, 로마노프 황가의 대공들 대다수는 상당히 장신이었다. 특히 후손 중에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차녀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미인이다.[13]

5. 만약 러시아의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만약 표트르 3세가 반대로 러시아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스웨덴 왕위에 오르거나 아예 군주가 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그냥 프로이센 왕국의 귀족으로 평생을 보냈다면[14], 당연한 일이지만 러시아의 매국노 황제가 될 가능성은 1%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아내의 쿠데타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당연히 없었겠고 말이다. 그 대신 로마노프 왕조는 꼼짝없이 단절될 가능성이 높다. 옐리자베타 여제와 그녀의 정부인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의 두 딸은 사생아인 관계로 옐리자베타 여제가 무리수를 쓰지 않는 이상 황위 계승 자체가 불가능하니 말이다.
이 경우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할 것이다. 일단 로마노프 왕조 이전 류리크 왕조의 후예들 중 누군가가 황위를 계승하는 방법이 있는데, 애초에 로마노프 왕조부터가 류리크 왕조의 단절을 공식 선언하고 나서 세워진 왕조라 옐리자베타 여제의 입장에선 자신의 정통성을 조상째로 부정하는 꼴이 되므로 가능성은 높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류리크 왕조의 직계혈통이 단절될 당시 러시아는 서유럽으로부터 살리카법귀천상혼 개념이 들어오기 전이었던 관계로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먼 방계의 왕위 계승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에 류리크의 후손이 많이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러시아가 공화국인 21세기까지도 류리크의 후손이 이어지고 있음) 해당 후손들이 러시아의 통일군주 이반 3세나 러시아 최초의 차르 이반 4세의 후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은 러시아 차르위 계승권에서 배제되었다. 만약 류리크 왕조 때 서유럽의 제도가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도입되었다면 류리크 왕조는 변수에 따라 근현대까지 계속 이어졌을 수도 있으며 이 경우 로마노프 왕조 자체가 들어서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다른 변수로는 러시아 황실의 외척이었던 가문들 중 하나가 러시아의 새로운 왕조로 등극하는 경우가 있다. 애초에 로마노프 왕조부터가 이반 4세의 사돈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례에 따라 러시아 황실의 역대 외척가문들 중 한 가문의 인물을 골라 러시아의 새 왕조를 열 황제로 즉위시킬 가능성도 있다. 대표적으로 옐리자베타 여제와 귀천상혼하여 부군이 된 신하의 가문을 예로 들 수 있다. 비록 귀천상혼이긴 해도 옐리자베타 여제의 빽 덕분에 실질적인 지위는 다른 귀족 가문보다 높아졌을 테니 말이다. 표트르 대제의 전부인 에우도키아의 가문도 예로 들 수 있겠지만 애초에 옐리자베타 여제의 어머니 예카테리나 1세는 표트르 대제가 에우도키아를 황후 자리에서 쫓아내고 새로 들인 황후였기 때문에 옐리자베타 여제의 입장에선 상술한 류리크 왕조의 부활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꼴이 되므로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외국 왕실 인물들 중 누군가를 무작위로 골라 러시아 황제로 등극시키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벨기에, 불가리아 왕국, 영국, 포르투갈 왕국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핀란드 왕국의 헤센 왕조, 그리스 왕국비텔스바흐 왕조글뤽스부르크 왕조처럼 기존 왕조의 피가 흐르지 않는 다른 외국 왕실의 인물을 자국의 왕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부터가 이민족인 바랑기아인(지금의 러시아 땅으로 이주한 바이킹) 출신이었다. 옐리자베타 여제가 프로이센 왕국에 적대적이었음을 감안하면 오스트리아 등 프로이센과 사이가 좋지 않은 다른 나라의 왕족을 데려와 후계자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누군가에게 러시아 황위를 물려준다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미약하게나마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피가 흐르는 만큼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서 기존의 류리크 왕조 및 로마노프 왕조와는 다른 의미에서 엄청난 정통성을 가지게 될 수 있다.

6. 번외: 차르 스체판


1766년 크리스마스날, 표트르 3세라고 자칭하는 남자가 몬테네그로에 나타났다. 후에 '작은 스체판'(Scepan Mali)라고 불리게 될 그가 진짜 표트르 3세라고 믿었던 몬테네그로인들은 스체판을 차르로 추대하였다. 당시 몬테네그로의 통치자였던 블라디카(주교공) 사바는 그가 사기꾼임을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오히려 역관광당하고 구금당하였다. 몬테네그로의 이웃 국가인 오스만 제국베네치아는 이 가짜 차르를 토벌하기 위해 각각 1768년과 1770년에 군대를 보냈으나 전부 실패하였다.
가짜 드미트리라는 선례가 있던 러시아는 이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스체판을 제거하기 위해 게오르기 돌고루코프 공을 특사로 보냈다. 돌고루코프 공은 스체판의 정체를 밝히는 데 성공했지만 몬테네그로인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스체판을 여전히 차르로 모셨다. 결국 돌고루코프 공은 스체판을 제거하는 것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진짜 표트르 3세와는 달리 스체판은 유능한 통치자였다. 스체판의 제위 기간 6년 동안 몬테네그로의 부족들 사이에 만연했던 분쟁이 사라졌고, 1771년에는 유력 부족장들로 구성된 상설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그의 명으로 도로망이 건설되었고 러시아군을 본떠서 편성된 상비군이 만들어졌으며 처음으로 전국적인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표트르 3세가 아닌 것이 공개된 이상 러시아 황실에서 스체판과 적대할 이유가 없어진데다가 스체판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고 있었으므로 러시아는 스체판과 손을 잡기로 결정, 스체판은 1772년 예카테리나 대제로부터 러시아군 중장 계급과 성 블라디미르 훈장 2급을 받았으나, 1773년에 오스만의 사주를 받은 이발사에게 암살당하였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만화 슈발리에에 등장한다. 원판이 찌질한 위인이었던지라 애니에서도 인간 쓰레기로 묘사되었다. 툭하면 술 마시고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며 이모 옐리자베타 여제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걸 아내에게 덮어씌우려 하는 등. 결국 이모가 시해되자 이젠 내가 황제라며 희희낙락하지만, 여제의 유지를 이어받아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반격에 나선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그의 음모를 공표하고 귀족들의 동의하에 황제가 되면서 졸지에 폐위당하고 궁전의 정원에서 교수형당했다.
  • 2020년에는 훌루에서[15] 공개된 청년기의 예카테리나 2세를 그리는 드라마 '더 그레이트'에서 니콜라스 홀트가 표트르 3세 역을 맡았다.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 역은 엘 패닝이 맡았다.

[원문] One of the most peculiar cases of the right man at the right time was Peter III of Russia. An ardent admirer of Prussian miloiterism and Fredrick the Great, he became tsar just in time to take Russia out of the coalition against Frederick at the moment when the latter was facing catastrophe. Peter III, soon thereafter killed, was on the throne just long enough to save Prussian militarism. A nincompoop himself, a man who certainly had no conception of the importance of his act, he nevertheless indirectly 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molding of modern Europe.[1] 해당 글귀는 구스타브슨 교수의 역사 입문서 『역사의 서문(A Preface to History)』에 있는, 영웅론에 대한 반박 중 일부분이다. 참고로 함께 언급되는 인물들은 '''윈스턴 처칠''', '''나폴레옹''', '''표트르 1세''', '''프리드리히 2세''' 같은 당대의 쟁쟁한 영웅들 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은 모두 하나씩 이유를 붙여서 어떻게 이들의 재능 하나가 역사를 뒤바꾼게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는데 표트르 3세는 케이스가 하도 황당해서 그런지 '''의도가 없었다'''라는 식으로 그냥 퉁치는 느낌이 강하다.[2]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1700년 ~ 1739년). 그는 스웨덴 국왕 칼 11세의 외손자다. 원래는 울리카 엘레오노라보다도 왕위계승권이 앞서는 스웨덴의 추정 왕위계승자였지만, 오만방자하고 무능한 탓에 공식적으로 스웨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다.[3] 예카테리나의 다른 자식, 딸 하나는 친부를 놓고 의견이 갈리며 마지막 낳은 아들은 사생아라 백작 작위만 주었다.[4] 프랑스는 사실 전쟁초반 독일 전역에서 로스바흐에서 참패하고 주전장을 식민지로 시선을 돌렸으나 캐나다 인도 등지에서 영국에 완전 쳐발렸다.[5] 이곳은 단순히 최대 요새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왜냐하면 항구 도시였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최대 약점은 보급로가 너무나 길다는 것인데, 항구도시를 점령하면 해상으로 빠르고 대규모의 배급이 가능해져 보급 문제가 해결된다.[6] 영국이 유럽 지상전에 나서지 않은건 아니다. 조지 2세의 3남 컴벌랜드 공작에게 원정군을 맡겼다가 실패하자 친척이자 프로이센 궁정의 장수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 영국군을 맡기기도 했다. 친척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과 헤센 공국도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동맹이었다.[7] 정확히는 베를린 시장에게서 사례금을 받고 약탈은 면제했다. 대신 프로이센 왕의 궁전인 포츠담은 베를린 시의 바깥이므로 철저히 약탈했다. 왕족들은 미리 소식을 듣고 피신해서 잡지 못했다고.[8]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7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전쟁으로 파산 직전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러시아의 보급까지 책임져야 했다. 러시아군은 본국이 워낙 멀어 항상 보급 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7년 전쟁 말기에는 보급 지원 문제로 러시아 장교들과 오스트리아 간의 갈등도 심해진다.[9] 스웨덴 왕비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인 영향도 있었다.[10] 심지어 같은 독일인인 아내 또한 분노했다. 이 아내는 멍청한 남편과 달리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어를 배우는 등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서 러시아 귀족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11] '''표트르 3세 - 파벨 1세 - 니콜라이 1세 - 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로 이어지는 황제 계보가 바로 표트르 3세의 직계다. 하지만 이러한 표트르 3세의 대는 러시아 내전때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이 모두 암살당하면서 대가 끊겼다.[12] 남편인 파벨 1세보다도 키가 훨씬 컸다고 한다.[13] 사실 니콜라이 2세에겐 딸이 4명이 있었는데, 4명의 딸들이 다 하나같이 미인이다. 그중에서도 차녀 타티아나의 미모가 특출났다고 한다.[14] 다만 전자의 경우 애초에 표트르 3세가 군주로서의 역량이 심하게 부족했기 때문에 표트르 3세 본인의 개인적인 삶은 실제 역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영 좋지 않게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후자의 경우가 표트르 3세 본인에게는 더욱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15] 한국에서는 캐치온 독점 배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