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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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지도와 부여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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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길림성 길림시의 부여성 관련 유적. 오른쪽의 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용담산성이며, 그 아래의 평지성이 관지성지이다. 사진을 찍은 지점이 동단산성과 동단산 평지성이 있는 지점. 이 성곽들은 모두 부여의 초기 도읍과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사진출처]
1. 개요
扶餘城
현재 위치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집안성) 농안 지역 혹은 길림시 용담산성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와 부여 시대의 성이다. 고구려가 세웠던 천리장성의 북쪽 끝이 부여성이었으며, 남쪽 끝은 비사성이었다.
2. 역사
원래 부여의 성이였다. 정확한 축조시기는 나타나지 않지만 농안에 위치한 후기 부여의 왕성으로 본다면 늦어도 4세기에는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담산성이라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부여가 강성했던 기원 전후 시기에 축조되었다가 광개토왕~장수왕 대에 수축되었다.
5세기 고구려의 북진 과정 또는 6세기 후반 고구려가 말갈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세력 내에 편입되었다. 이후로는 고구려 말기에 세워진 천리장성의 북쪽 끝이 되었다.
668년 2월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薛仁貴) 등이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부여성 주변의 40여 성이 당나라에 항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여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669년 2월에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 하나라고 한다.[1][2]
당나라의 만주 지배가 약화되자 발해는 부여의 고지에 부여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말하는 부여성은 오늘날 길림시 용담산성이 아니라 농안 일대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발해 15대왕 대인선 때인 925년 12월, 거란족의 요나라군에 포위되어 다음 해인 926년 1월에 함락되었다. 부여성을 함락시킨 후 요는 별다른 저항없이 상경용천부에 도착하였다.
3. 기타
고구려와 부여를 배경으로 한 게임 바람의 나라에 당연히도 부여성이 구현되어 있다. 유저들은 부여 지역에서 나오는 BGM을 '부여성 노래'라고도 부른다.
고구려 천리장성의 동북 기점이 되기도 하였다.
[사진출처]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iskc.d_0007_0030[1] 이외에도 666년에 연남생 등과 함께 항복한 국내성이나 667년 신성이 함락된 후 당나라에 의해 함락당한 목저성이나 남소성이 당시 항복한 성으로 분류된 점 등 미스테리한 점이 있다.[2] 발해 멸망시기에 요나라에 의해 부여성이 함락된 후 홀한성으로의 고속질주 기습공격 가능해져 발해가 멸망했지만, 부여성이 다시 요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요군이 본국으로 돌아가는길이 순탄치 않았고, 요나라에서 태자를 앉혀서 발해땅을 다스리려 세운 동단국이 발해 유민들의 반발로 결국 요동으로 옮겨간 일을 상기해보면, 항복했던 부여성이 다시 반기를 들고 저항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