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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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란족은 중세에 랴오허와 시라무렌 허(河)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한 준 몽골어족[2] 동호계 유목민이다.
동호-선비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에 등장했으며 내몽골 지역을 영유하다가 10세기에 요나라를 세워 랴오둥과 중국 허베이성 일대, 막북(漠北 ; 사막의 북쪽이라는 뜻으로, 고비 사막 이북인 현재의 외몽골 지방을 이르는 말)지역을 모두 정복하여 동아시아 북방의 패자로 군림,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금나라 등의 지배를 받다가 몽골 제국이 발흥하자 사회 각지에서 활동했으며, 몽골 제국 당시까지는 거란족은 몽골족과 어느 정도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언어, 문화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몽골족에 동화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들이 농경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농반목 정주민인 여진-만주족과는 달리 이들은 더 유목민의 성격이 짙었다. 고려와의 오랜 전쟁으로 난폭한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독자적인 거란 문자를 만들고 위대한 불교 문화를 꽃피우는 등 고도의 문화를 향유하는 이면도 지니고 있었다.
한편 현존하는 민족 중에는 그나마 몽골족과 가까운 편이다. 중국 역사서에 몽골은 실위의 한 부족이었는데(몽올) 실위는 동호-선비의 후손이고 거란도 동호-선비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쓰여 있다. 몽골 고원의 유연-돌궐과 만주의 고구려, 화북의 북위 및 수, 당에게 지배받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위구르와 당에게 차례로 정복당했음에도 당을 약탈했으며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와는 대립했다.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후 내몽골의 실위, 해를 병합하고 당시 분열되어 있던 몽골 지역의 부족들을 모두 정복하여 초원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되지만 고려와의 전쟁에서 대패를 당해 성장 동력을 상실한다. 그 후 거란의 압제에 저항하여 온얀 아쿠타 아래 일거에 일어난 여진족의 금과 송의 연합 공격에 멸망당하고 만다. 이들 중 일부는 서역으로 도망가 서요를 건국했으며 피난가지 않고 남은 거란족들은 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부흥 운동을 몇 번 일으켰으나 모두 망하고 몽골 제국에 흡수되었다.
2. 명칭
거란이라는 이름은 고대의 진나라(China), 중세의 북위(탁발부)(Tabgach)에 이어, 근세 중국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다. 특이하게도 셋 모두 순수 한족과는 거리가 먼 최소 혼혈이었다.
거란족들은 자신들을 거란어로 '''키탄'''(Khitan)이라고 불렀다. '''키타이'''(Khitai)[4][5] 혹은 키단(Kidan)이라고도 한다. 키타이라는 발음의 경우는 서방 세계로 전해졌다. 그 영향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들과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 혹은 한족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위구르어의 히타이(خىتاي)나 포르투갈어의 카타이(Catai), 몽골의 햐타드(Хятад), 카자흐어의 크타이(Қытай) 등이 예이다. 영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과거 홍콩의 국적 항공사였던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의 캐세이(Cathay)는 영어의 고어로 중국을 뜻하는 또 다른 어휘이다.
'거란'(契丹)은 거란어 '키탄'을 음차한 것이다. 한국어 한자 독음은 '계단'이 아닌 '글단'으로, '거란'은 '글단'이 한국어 내부의 변화로 인해 변화한 것이다. 좀 옛날에 나온 무협물이나 중국 사극을 보면 역자들이 생각없이 계단족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종종 '글안'이라는 표기도 보이는데, 이는 원래 한자에 대응시키기 위해 한자 독음을 재해석한 것이다. 신채호가 남긴 글에도 '글안'이 보이고, 네이버 한자사전 해당 항목에서도 독음을 '''글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끝의 역삼각형 기호(▽)는 물론 "이 글자(丹;붉을 단)는 원래 이렇게 읽는 글자가 아닌데 이 단어에서만 이렇게 읽는 거임"이라는 뜻이다.
일본어에서도 '킷탄(きったん)'이라고 변칙적으로 읽는다. 용례가 하나밖에 없다보니 독음이 상용한자표에도 들어있지 않다.
마르코 폴로는 흔히 "동방견문록"으로 번역되는 자신의 책에서, 북중국을 카타이(Catai), 남중국을 만지(Mangi, 蠻子)라고 불렀다.
3. 역사
3.1. 기원과 형성
거란의 족원은 대체로 흉노와 동호설로 대비된다. 거란족사와 요사를 연구자들은 대체로 거란이 동호 선비족 우문부의 분파로써 우문부, 고막해와 분리되었다고 인식된다. 4세기경 거란은 전연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고막해의 영향력하에 있게 되었다. 388년 고막해가 북위에게 토벌당하자, 이후 독립하게 되었다. 고막해가 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생각해 족보를 따지면, 거란은 선비족의 별종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거란은 고팔부(古八部) 시대 나름 세력을 키웠으나 주변 한국, 중원, 막북의 강호들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 신세였다. 7세기경 거란의 지배 세력 가운데 대하(大賀)씨가 당에 귀부하여 이씨 성을 하사받게 된다. 고구려 멸망 뒤 거란에 대한 당의 지배권이 공고해지는 듯했으나, 696년에 이진충이 무상가한(無上可汗)을 칭하며 독립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진충이 죽고 후계자 손만영이 집권한 시기, 돌궐의 도움을 받은 측천무후에 의해 멸망당한다.[7] 이후 당과 돌궐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돌궐의 영향력에 강하게 종속된다. 이후 발해, 당, 돌궐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고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위구르(회흘) 역시 이런 열강 구도에 끼어든다. 이런 상황은 요련(遙輦)씨를 거쳐 야율아보기 등장 이전까지 계속된다.등국 중에 북위의 군대가 크게 깨뜨리자, 마침내 달아나 흩어져 고막해와 나뉘었다. 수십 년이 지나 점차 커져서, 부락이 화룡의 북쪽 수백 리에 있게 되었다.
─ 위서 거란전[6]
3.2. 요나라의 건국
907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대통합했다.그리고 해족과 습족, 실위를 정복하고 서하, 회골, 조복을 복속시킨 다음 발해까지 멸망시킨 후 요나라를 건국했다. 요 건국 뒤에도 거란(키타이)이라는 이름은 요와 함께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된다.
최종적으로 야율아보기의 요 제국은 영토가 몽골,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 만주에 이르게 되었다.[8] 그러나 몽골 고원은 직할 지배가 아닌 간접 지배의 형태였고 만주 역시 요동, 연해주와 발해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여진족과 발해 유민의 반동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그래서 실효적인 지배력이 미친 영토만 따지면 영토가 매우 축소된다(…) 요나라 항목 참조. 다만 실효적인 지배장소들은 모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적합한 곳이었고 거란의 중심지와도 가까웠다. 외몽골 남부도 그나마 발해 유민들이 있었던 옛 부여(만주 평원/동북 평원) 지역에 비하면 나름 직접통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한편 건국 이후에는 북송을 뜯어먹고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으나 대패를 당해 군사력이 많이 약해진다. 하지만 거란의 여자, 매 등의 착취로 인해 분개한 여진족이 완안아골타 아래에 규합하여 요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결국 1125년 여진의 금나라와 북송의 협공을 받게 되는데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 때 금에 영향권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던 요나라의 잔존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 이주하여 서요를 건국했다.
그런데 요나라와 관련된 설명에서 의아한 것은 요하 유역과 하북성 일대에서 웅거하던 요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왕족인 야율대석이 거란족 유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 서요를 건국하여 요나라를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천조제 이후 공중 분해된 것처럼 설명되곤 한다는 것. 서요가 몽골에 갈려나간 뒤에도 일부 거란족의 유민들은 이란까지 이주해 다시 요나라를 이어갔다. 얼마안가서 또 다시 원나라한테 멸망당하지만. 이란, 즉 페르시아 남동부 케르만 주에 세웠던 거란족의 국가는 키르만 왕국 혹은 치얼만(중국어로 케르만/키르만을 칭함) 왕조라고 부르며, 후서요(後西遼)라고도 표기한다.
3.3. 요나라 멸망 이후
몽골의 발흥과 함께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멸망해 사라졌다기보다는 페르시아와 파르티아와의 관계와 비슷하게 둘 다 동호에서 갈라져나온 종족들인지라 문화적인 차이도 적고, 금나라와 싸울 때부터 뜻을 함께한 몽골에 이들이 딱히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동화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한 요나라 시절 몽골에 대한 정책도, 몽골에게 가혹한 강경책으로 일관한 금나라와는 달리 요나라는 대부분 간접적인 통치를 행해서 몽골을 직접 탄압한 일도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 때문에 몽골의 거란-요에 대한 적대심 역시 적었다.
특히 금나라가 요나라의 원수이기 때문에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에 많은 거란인들이 협력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야율초재'''. 그 외에도 칭기즈 칸의 참모로 활약한 야율아해(耶律阿海)와 장군으로 활약한 야율독화(耶律禿花) 형제가 있다.[9] 야율유가(耶律留哥)라는 거란인도 동요(東遼)라는 국가를 세웠으나 나중에 몽골에 들어가서 몽골의 신하로 활약하기도 했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일부 거란인들은 만주에 대요수국을 세우고 할거했다가 칭기즈 칸에게 복속되었다.
몽골과 중국은 이 종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안습인 점은 거란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한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거란은 그저 오랑캐였다 보니 역사 문제와 달리 이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진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사는 소수민족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2005년 기준으로 중국의 소수 민족[10] 중 34번째로 많다. 약 12만 명.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분포 범위도 거란족의 강역과 대강 일치하고 스스로 거란을 계승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이들이 거란족의 후예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주국 황제이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선통제의 부인인 고불로 완룽(郭布羅 婉容)이 바로 이 다우르족 출신이다. 베이징 등 화북 한족들 역시 거란족과 몽골족의 피가 진하게 섞여 있다. 또한 윈난성 바오산(保山) 시에는 거란족 황실 후예들이 산다고 한다. 서요의 거란 황족 출신 중 야율아소루(耶律阿蘇魯)라는 사람이 몽골 제국의 부하가 되어 윈난성까지 파병되었고, 아소루를 포함한 거란인들이 여기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리국 사람들이 거란인을 학살하자 야율씨 일족은 성씨를 장씨, 뤼씨, 화씨, 양씨 등으로 바꾸어서 살아남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곳 마을에는 아소루의 무덤을 포함하여, 거란 왕족들을 기리는 사당과 족보도 있다고 한다. 사당에는 야율(耶律)이라고 쓰인 간판들이 있다고 한다. 또한 1473년까지 서역의 하미를 지배하였다고 한다.
4. 한국사와의 관계
한국사와는 악연이 상당히 깊은데, 거란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8년 (서기 378년) 가을 9월의 기록으로, 이 때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의 부락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일부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토벌 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그 번병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세력을 키워 그 후손인 발해와 대립하기도 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부흥운동을 게속진압하였으며. 그리고 발해 정복을 완료한 뒤에는 한반도까지 노려 여요전쟁을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고려의 선전으로 결국 막아내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11]
거란 멸망의 원인 중의 하나는 역시 발해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한 채 발해유민들이 세운 후발해, 정안국과 올야국, 흥료국, 대발해 그리고 발해 유민들을 받은 고려 등 남쪽에 적들이 산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영토는 작지만 북송보다 군사력이 강해 바로 내부사정이 좋아지자 마자 요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흥료국의 경우 왕의 동생인 대연정이 여진의 군사를 이끌고 요나라 정벌을 시도했고 고려 역시 정안국, 흥료국과 연합해 요나라의 국경을 2차례나 선제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빡친 요나라가 전쟁을 벌였지만 북송의 경우와 달리 군사력이 강했던 정안국, 흥료국, 고려는 꽤 잘 버텼다. 이에 장기전과 체계적인 전투계획으로 정안국과 흥료국을 겨우 멸망시켰고 그 뒤 고려를 침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땅만 뜯기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고려와 치열하게 혈전을 벌이다보니 글만 읽을 줄 알면 무관으로 뽑을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관료 및 병력들이 이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이 때문에 군사력이 약해진 것. 이에 크리티컬로 발해 출신 장군인 연파, 대연림, 고욕, 고영창이 연달아 간헐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버렸다.
거란은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막상 살펴보면 상당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고려로부터 고구려 계승권을 따내러 왔다고 알려진 서희의 담판도 막상 담판에서 거란이 고구려 계승권을 내세우는 부분을 보면 상당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예를 들자면 거란은 그냥 "우리가 고구려 요동 땅을 점령했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 땅이다, 니들은 신라에서 나왔잖냐"[12] 라는 정도로 하고 마는데 고려는 우리가 고구려를 계승해서 국호도 고려로 했고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서경) 니들 논리대로라면 동경(요양)은 우리 땅 아니냐고 하는 식. 요사에서 기자의 팔조금법 운운하며 고조선을 계승하는 듯한 뉘앙스를 품기기도 했는데[13] 그냥 단순한 지역의 내력 소개일 수도 있다.
2017년에는 거란어에는 다른 몽골계 언어와 상이하게 한국어와 어원이 같은 단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면서 거란어가 어떤 식으로든 실제 고구려어와 관련되었을 것을 가정하는 연구도 나오기도 했다. 해당연구 고구려어 항목에서 고구려어와 고대 한국어 관련해 소개된 바 있는 동아시아 제어연구의 권위자 중 한명인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연구이다. 거란인들이 고구려인들의 후손이라는 환빠스틱한 주장이 아니라, 거란어에서 몽골어, 중국어, 기타 퉁구스어나 만주어 등에서 유래하지 않은 기원이 불분명한 단어와 고대 한국어를 함께 분석해서 고구려어 단어를 많이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거란어 해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서 한자 어휘를 수용하는 것처럼 인접국끼리 문화 교류를 통해 어휘를 주고받는 언어동조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거란족이 유독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역사적 연원과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만 하다.[14]
고려시대 남경, 즉 현재의 서울은 여요전쟁 때 항복한 거란족 포로를 수용하던 곳이 있었다. 왕이 남경을 방문했을 때 왕을 맞이하는 거란인들이 거란 가무를 추고 거란 악기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거란 포로들 10명 중 1명은 기술자들이었는데 고려 조정은 이들을 옷과 그릇을 만드는 일에 종사케 하여 고려의 제조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고 적혀 있다.
요나라가 멸망할 때 보주[15] 가 고려의 영토가 되면서 그곳에 살던 요나라 주민들 다수가 고려로 귀순했다. 그 외에도 일부 거란인들이 고려로 망명해오기도 했다. 당시 기록에 거란인들뿐만 아니라 요나라에 살던 발해인, 해족, 한족, 일부 여진인들의 귀순이 이어졌다고 적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로 동화되었는데 일부는 무관 등으로 등용되기도 했다. 병든 아버지에게 자신의 살을 잘라 먹여 명종에게 상을 받은 거란인 무관(산원동정[16] ) 위초(尉貂)의 효행이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나온다.
고종 때 토벌된 뒤 고려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었다. 대요수국의 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몽골에 쫓겨 대거 고려로 침공해오기도 했는데 고려로 내려와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웅거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 어찌 보면 고려와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한 원흉인셈.
강동성에서 포로로 잡힌 8만의 거란 유민들은 고려에서 도살업을 하거나 갖바치, 고리, 광대 등의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불교에 대한 신앙이 강한 국가에서 안 그래도 이런 일들은 천대받은 일들이었고, 거란은 역사적으로도 고려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유민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리 만무했다. 이는 조선시대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아서 백정 집단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로 이어진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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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를 몽땅 밀어버리고 주변 머리만 남겨놓는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을 가진 민족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변발이다.
성에 은근 개방적이었는지 춘화도 남아있다.
잔인하고 난폭하기로 주위에 유명한 거란족이었지만, 정작 그런 그들은 여진족의 무력을 알고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동북쪽(현재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흐르는 흑룡강의 동북쪽)에 사는 흑수말갈이라 추정되는 말겁자(韈劫子)라는 부족을 만나기만 하면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고 한다(...)거란족이 만나기만 하면, 무서워서 도망쳤던 부족
겨울에는 얼은 호수에서 얼음 낚시하거나 사냥을 하여 잡은 물고기와 짐승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두어연(頭魚宴)"이라는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장례 풍습의 경우 귀족과 왕족 등 높은 신분층들 한정으로 시신을 건조하게 하여 미라를 만들고, 시신 얼굴에 금으로 만들었거나 금으로 도금한 은제 가면들을 덮었는데, 일종의 데드마스크였다.
후발주자인 몽골족의 명성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상당히 강력한 전투민족이었는데 인구가 1억 명인 송나라에 반해 인구가 1천 만 명도 안 되었던 거란족들은 송나라를 상대로 싸우면 대부분 우세를 보였다. 심지어 여진족의 침략을 받고 다 망해가던 1122년, 여진족을 피해 도망쳐 온 거란족 피난민들로 만들어진 군대인 수천 명의 수군(瘦軍 빼빼마르고 볼품이 없는 군대라는 뜻)이 무려 송나라 10만 대군을 물리친 일도 있었다(...)[17]#
6. 거란족의 국가 목록
7. 관련 항목
[1] 거란 문자 대자 표기, 거란 문자 소자 표기[2] 영어권에서는 para mongolic이라고도 부르며 몽골어와 자매 그룹으로서 관련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을 뜻한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학자로는 유하 얀후넨이 있다.[3] 구글에 거란이라고 치면 십중팔구가 요대 영역만 나와서 그 이전의 영역을 나타낸 지도는 찾기 힘든 편이다.[4]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나, 로버트 E 하워드의 코난 사가에서도 동방의 부족을 가리키는 말로 키타이와 그 칸의 이야기는 가끔씩 나온다.[5] 이 키타이라는 단어의 뜻은 '칼날'이라고 한다. 즉, 거란족은 '칼날의 부족'이라는 뜻인 셈. 출처: 박원길 저/ 유라시아 대륙에 피어났던 야망의 바람/ 민속원/ 2003년 6년 발간[6] 登國中、國軍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7] 다만 이때에 이진충과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족들은 당나라의 17만 대군을 무려 두 번이나 격파하는 용맹함을 보여, 당나라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진충과 손만영 항목을 참조 바람.[8] 야율아보기의 아들이자 요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 야율덕광 시기에 중원 내부로 쳐들어가 잠시 하남성 일대를 지배하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야율덕광을 비롯한 거란족들이 중원의 토착민인 한족들을 상대로 너무나 잔인하고 난폭하게 굴어서, 이를 견디지 못한 한족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켜 맞서는 바람에 결국 야율덕광과 거란족들은 요나라 본국으로 후퇴하였다.[9] 이 두 형제는 칭기즈칸이 초원 통일 전쟁부터 칭기즈칸을 보좌하며 서방정벌까지 나섰다. 그 유명한 발주나의 맹약에도 참가한 인물들이다.[10] 공식적으로 56개로 집계됨.[11] 한국 고대사 서적의 상당량이 이 때 불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고려실록의 기초인 7대실록이 편찬되었고, 고려사를 읽어봐도 혜종부터 목종까지는 거의 이전 삼국시대 급으로 분량이 없는데 현종부터 분량이 상당히 늘어난다. 즉 여요전쟁으로 많은 원사료가 소실되었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12] 이후에도 요사에서 고려를 진변(진한과 변한)이나 "동한"으로 표기하는 등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인식하는 듯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쩔 때에는 고구려라는 표기가 등장한다(...).[13] "요(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기자(箕子) 8조의 가르침이 풍속으로 남아 있다."[14] 근세 이후에 비유하자면 식민지가 식민제국에게 지배를 받으며 언어나 문화가 동화되거나 반대로 식민제국 본토가 언어, 문화적으로 식민지의 영향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영어권의 경우 옛 영국 식민지들은 전자에 해당하고 영국 본토가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후자에 해당한다.[15] 오늘날의 의주군.[16] 정 8품에 해당하는 무관.[17] 심지어 이때 송나라 10만 대군의 지휘관은 방랍의 난을 진압하고 서하와 싸워 승리를 거둔 노련한 장수인 동관(童貫)이었다. 단순히 송나라 군대가 허접이어서 거란족 피난민들한테 패배한 게 아니라는 뜻.[18] 현재 거란족의 직계 후손으로 유력한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