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찰 복강안

 


富察 福康安
(1754년 ~ 1796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


청나라의 인물.
상황기 출신이며, 그의 집안은 명문 귀족이자 당시 외척 집안으로 건륭제의 처남인 부찰 부항(傅恒)의 3남이다.

2. 생애


무술이 뛰어났고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시위를 거쳐 20대 초반부터 三等嘉勇男(1776년), 길림 장군과 성경 장군(1777년~80년), 운귀 총독(1780년), 사천총독 겸 성도 장군(1781년), 어전대신 太子太保(1782년), 공부상서(1783년), 병부상서 총관내무부대신(1784년), 참찬대신과 섬감 총독(1784년), 一等嘉勇侯(1784년), 호부상서(1785년), 이부상서 협판대학사(1786년), 대만장군{대만 반란 토벌} 一等嘉勇公(1787년), 민절 총독(1788년), 양광 총독(1789년), 서장장군{서장 반란 토벌}(1791년), 무영전 대학사 겸 이부상서 영시위내대신 世职[1]으로 一等轻骑都尉(1792년), 嘉勇忠锐公 사천총독(1793년) 운귀총독(1794년), 민절총독 固山贝子(1795년) 등을 역임했으며, 사후 '''文襄'''이라는 시호와 '''嘉勇郡王'''에 추봉되었으며, 태묘에 배향되었다. 건륭제 통치 기간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 그 유명한 화신도 복강안과는 겨룰 수 없었다고 한다.[2][4]
1772년에 온복을 따라 2번에 걸쳐 대금천, 소금천을 공격하고 1784년에는 감숙성에 일어난 이슬람 교도의 반란에 진압했다. 1787년에 대만의 임상문의 반란을 진압했고 1791년에는 네팔의 구르카족을 공격했으며, 양광 총독으로 있을 때 외국 상인에 대해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1793년조지 매카트니가 영국의 사절단으로 오면서 북경과 열하에 올 때 영국 사신들에게 삼궤구고의 알현 대례를 올리라고 했다.
1795년에는 묘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패자에 봉해지고 가경제 원년에 전투 도중에 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에 군왕으로 봉해졌다. 건국 초기 일부 개국 공신들을 제외하면 황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씨가 아니면서 군왕에 봉해진 인물은 복강안 밖에 없다고 한다.[5]
건륭제 재위 내내 엄청난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야사에는 건륭제가 부항의 부인과 간통하여 나은 사생아라는 이야기도 있다. 부항의 다른 아들 중 복륭안은 건륭제의 딸과 결혼해서 부마가 되었는데, 정작 형제 중에서 가장 건륭제의 총애를 받은 복강안은 공주와 결혼하지 않았다. 건륭제의 사생아라서 공주들과는 배다른 남매이기 때문에 결혼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낭설일 뿐이다.
[1] 복강안의 아들이 관직에 나갈 때에 처음 받을 수 있는 작위[2] 복강안은 무장으로 주로 外征사업을 담당하였고, 화신은 문관으로 주로 행정업무를 맡았는데, 건륭제는 十全武功을 자랑할만큼 外征에 많은 물자를 소모시켰던 인간이면서, 末年이 되면서는 생활이 매우 사치스러워진 인물이였다. 이러한 성향 덕에 둘은 함께 총애를 받았지만, 가문자체에서 대대로 고위직을 역임한 부찰씨(부항의 高祖 哈什屯은 의정대신, 曾祖 米思翰도 호부상서-의정대신, 伯父 馬齊도 병부상서-의정대신)이고, 고모가 건륭제의 첫 황후 효현순황후였으며, 父兄弟(父 부항은 一等忠勇公(贈郡王)-호부상서-군기대신, 큰형 福靈安은 駙馬(건륭의 사촌 愉郡王 弘慶의 사위)-정백기만주부도통, 둘째형 복륭안은 駙馬(건륭의 4女 화석화가공주의 남편)-一等忠勇公-태자태보-병부상서-군기대신, 동생 福長安은 駙馬-一等誠靖侯-호부상서-군기대신, 자매 중 하나는 건륭의 11子 和碩成哲親王 永瑆<조선인 출신 김신다리의 후손인 淑嘉皇貴妃 金佳氏의 소생>의 적복진, 다른 1명은 鐵帽子王인 睿親王 도르곤의 후손 和碩睿恭親王 淳穎의 적복진)가 모두 총애를 받은 복강안과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 총애를 받은 화신(아들 풍신은덕이 건륭의 10女 고륜화효공주의 남편 )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애신각라씨만 받을 수 있는 郡王직을 받았다는 것에서 복강안은 화신이 아니라 청나라에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이다.[3] 청나라의 팔기는 만주8기, 몽고8기, 한군8기로 총 24기인데, '만주-몽고-한군'순으로 서열이 존재하였다.[4] 4살 연상인 화신이 69년 과거에서 낙방한 직후 3등경거도위를 세습받고서 72년에서야 점간처(비밀첩보활동)에 3등시위, 75년에 건청문시위와 어전시위, 정람기 만주부도통, 76년에는 호부우시랑, 군기대신 상행주(상행주는 임시파견직을 지칭), 총관내무부대신, 양황기 만주부도통, 국사관 부총재 등이 된 것과는 달리 복강안은 67년 이미 운기위를 계승받고 건청문(내조와 외조를 구분하는 곳으로 경복궁으로 치면 사정전과 강녕전 사이의 문) 3등시위에 임명되었으며, 69년에는 御前 2등시위로, 70년에는 1등시위에 올랐으며, 71년에는 호부우시랑과 양람기 몽고부도통에 올랐다. 72년에는 군기처에 학습 파견되었다가 대/소금천 정벌에 四川领队로 참전하였는데,(전쟁중 우시랑에서 좌시랑으로 변경) 완전하게 해결되지도 않았던 75년에는 내대신(시위처에 종1품직)에, 승리한 76년 정월에는 三等嘉勇男이라는 작위와 4월에는 정백기 몽고도통(정백기부터는 황제 직속인 상삼기), 9월에는 정백기 만주도통[3]에 올랐음[5] 1795년에 봉해진 '고산패자'부터가 皇族 애신각라씨만이 받을 수있는 작위라는 점에서 이미 말도 안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며, 死後에 받은 郡王은 異姓들이 봉해 질 수있는 최고 작위인 公을 넘는다.(다라패륵과 고산패자의 위계가 公보다 더 높다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