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
高宗 乾隆帝
고종 건륭제
'''
'''묘호'''
'''고종(高宗)'''
'''시호'''
'''만주어'''
용캬하 황디
ᠶᠣᠩᡴᡳᠶᠠᡥᠠ ᡥᡡᠸᠠᠩᡩᡳ
'''한자'''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한호'''
압카이 워혜허 한
ᠠᠪᡴᠠᡳ ᠸᡝᡥᡳᠶᡝᡥᡝ ᡥᠠᠨ᠌
Abkai Wehiyehe Han
'''칸호'''
텡그린 테트국센 칸(ᠲᠩᠷᠢ ᠶ᠋ᠢᠨ ᠲᠡᠳᠭᠦᠭ᠍ᠰᠡᠨ ᠬᠠᠭᠠᠨ)[1]
'''연호'''
乾隆
ᠠᠪᡴᠠᡳ ᠸᡝᡥᡳᠶᡝᡥᡝ
건륭(압카이 워혜허)
''''''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훙리(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ᡠᠩ ᠯᡳ)
'''중국어'''
아이신줴뤄 훙리(愛新覺羅 弘曆)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홍력
'''생몰'''
양력 1711년 9월 25일 ~ 1799년 2월 7일 (88세 4개월)
음력 1711년 8월 13일 ~ 1799년 1월 4일 (88세 4개월)
'''신장'''
178cm[2]
'''재위기간'''
'''황제'''
음력 1735년 10월 8일 ~ 1796년 2월 9일 (60년 124일)[3]
'''태상황'''
음력 1796년 2월 9일 ~ 1799년 1월 4일 (2년 10개월 24일)[4]
1. 개요
2. 일생과 치세
3. 황제가 되기 전
4. 재위 기간
4.1. 개혁
4.2. 십전 무공
4.3. 말년
4.4. 성향
4.5.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5. 가정 관계
5.1. 아내
5.2. 첩
6. 평가
6.1. 일화
7. 각종 매체에서
8.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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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의 최대 강역'''[5][6]

'''강건성세(康乾盛世)'''[7]

청나라(淸)의 제6대 황제. 옹정제의 4남로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의 뒤를 이어 흔히 강건성세로 알려진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이며 그의 치세 동안 청나라의 경제, 군사, 문화는 절정을 맞이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잦은 대외원정과 니오후루 허션으로 대표되는 황족과 관료들의 부패[8]로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갔으며 문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청나라 정부에 비판적인 서적을 폐기해버리는 등 문화에 대한 탄압도 빈번히 일어나면서[9] 결과적으로 청나라 멸망의 씨를 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대 학계의 평가 역시 명군인지, 암군인지, 폭군인지로 갈리지만, 대체로 선대에는 못 미친다는 의견이 대세이며, 여러 모로 전한의 무제나 프랑스의 루이 14세, 인도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10]
중국 황제들 중 유일무이하게 자의에 의해 퇴위한 황제이기도 하다. 물론 퇴위 이후에도 3년간 상황으로 지내며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8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일생과 치세


[image]
갑옷을 입은 건륭제. 서양식 화법으로 그려졌다.
[image]
청년기의 모습 , 1736년 건륭 원년, 그의 나이 26세 때 모습이다. 위의 두 그림은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청나라의 6대 황제. 선대 황제인 옹정제의 아들로, 1711년에 태어났다.
1735년 옹정제가 57세로 사망하자 25세로 재위를 이었으며, 60년이나 재위하여 중국 역사상 강희제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하였으며, 이 시기에 청제국의 국력은 사상 최강, 국토 역시 사상 최대에 달하였다.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자의에 따라 퇴위한 황제이다. 이는 건륭제가 존경하는 조부인 강희제의 61년 치세라는 대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1795년 재위 60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이 되었다. 이에 따라 건륭제의 아들이 가경제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건륭제는 퇴위 후에도 권력을 아들한테 주지않고 사실상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가경제가 부패로 악명높은 건륭제의 총신 니오후루 허션을 건륭제가 죽은 뒤에야 처벌한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건륭제는 퇴위 4년 만인 1799년에 89세(…)로 사망하였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건륭제가 정치 실권을 쥐었음을 들어 현직 황제로서의 60년에 상황으로서의 4년을 더해 64년으로서 중국 사상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쥔 황제로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 황제가 되기 전


건륭제가 태어난 해는 강희제의 치세가 50년에 다다랐을 때였다. 건륭제는 (미래에 옹정제가 되는) 윤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건륭제의 어머니 희귀비 니오후루씨(熹貴妃 鈕祜祿氏)는 만주인이지만 정실 황후가 아닌 후궁이었다.[11] 건륭제는 황자들의 교육 기관인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를 했지만, 당시 강희제의 아들들은 20명이 훌쩍 넘었고 손자들까지 따지면 100명에 육박했다. 당연히 강희제가 얼굴조차 기억 못 하는 자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륭제는 금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였다. 문재가 탁월했고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사냥에서도 용감하게 곰과 싸워 곰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강희제는 건륭제를 칭찬하며 관심을 기울였고, 늙은 몸이었지만 직접 무예를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강희제의 마음에 가장 드는 것은 건륭제가 부모님인 옹정제와 적모(嫡母), 자신의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예를 다하며 문안을 올리는 것이었다. 유교 가르침에 감화된 강희제에게는 대단히 좋게 보일 수밖에 없는 광경.
강희제가 죽기 직전, 옹정제에게 건륭제를 후임으로 삼으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12] 자신에게 후계자의 가능성을 열어 준 사람은 강희제였기에 건륭제는 평생 동안 강희제를 대단히 존경했다. 강희제의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을 다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재위 60년에 상황으로 물러난 것도 강희제의 기록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후 아버지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륭제는 차기 황제 1순위가 되어 후계자는 이미 정해졌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옹정제의 아들은 총 10명이었지만 그들 중에 생존한 아들은 고작 4명으로, 장성한 아들은 셋째 홍시, 넷째 홍력, 다섯째 홍주 셋 뿐이였고 나머지 한 명은 옹정제의 재위 중 태어난 젖먹이였던 10황자 홍염 뿐이였다. 또한 다른 황자들의 생모는 한인 출신이었지만 홍력만이 유일하게 만주족 생모 소생의 황자였다. 물론 그것이 후계자로 지정된 진정한 이유는 아니었고 '''강희제가 옹정제에게 홍력을 후계자로 삼으라고 했던 칙서가 있었다.'''
실제로 건륭제는 아버지 옹정제의 가벼운 일을 도우며 정치에 관여했다. 강희제 때의 황태자 사건과 만주족의 전통 등의 요인으로 청나라는 다른 왕조들과 달리 차기 황제를 미리 정하지 않았지만 당시 3황자 경패륵 홍시는 패륵에 불과했는데 넷째 홍력만 혼자 군왕도 뛰어넘어 보친왕에 책봉되는 등, 거의 대놓고 옹정제가 홍력을 황태자이자 후계자로 대우하였고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렇듯 홍력의 위치가 공고해 보이자 3황자 홍시는 판세를 바꿔보려고도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옹정제의 눈 밖에 나는 결과밖에 되질 못했다. 결국엔 셋째 형 홍시는 사사당하고 황실 선원보에서 제명된다. 다섯째 홍주는 일찍부터 정치와 멀리하고 형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건륭제 즉위 후에도 상당히 예우받았다.[13] 옹정제는 워커 홀릭이었던 터라 재위 10년차에 건강이 악화돼서 않아눕게되자 건륭제가 이때부터 황태자 타이틀만 없다 뿐이지 실질적으로 황태자나 다름없는 감국(監國)에 임명[14]되며 사실상 옹정제의 업무를 상당 부분 떠맡았다. 3년 후 옹정제가 죽자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건륭제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건륭제는 25세의 나이로 청나라의 황제에 즉위한다.

4. 재위 기간



4.1. 개혁


[image]
  • 백마를 조공품으로 받은 건륭제
건륭제는 황제가 된 후 그가 존경하는 할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건륭제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벌였는데 대부분은 강희제처럼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보다는[15] 전쟁은 장군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독려를 하는 편이었다. 이때 건륭제의 부대는 팔기군 대신 만주족과 한족이 합쳐진 군대였는데, 준가르 정벌군 총사령관이었던 보르지기트 반디(Borjigit Bandi, 博爾濟吉特 班第), 준가르 및 동투르키스탄 정벌에서 활약한 우야 자오후이(Uya Jaohui, 烏雅 兆惠), 아구이(Agui, 阿桂), 건륭제의 처남인 푸차 푸헝(Fuca Fuheng, 富察 傅恒), 그의 아들인 푸차 푸캉간(Fuca Fukanggan, 富察 福康安)[16] 등이 활약하였다.
건륭제는 옹정제 때 탄압받은 숙부들을 사면하였는데,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드는 것만은 막았다.[17]
그 다음에는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라는 제도를 뜯어 고쳤다. 보갑제는 100 가구를 모아서 갑(甲), 그리고 그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로 나누어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였다.
본래 북송왕안석이 신법으로 쓰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이후 강희제가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옹정제 때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보·갑의 장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백성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그 기록을 관아에 바쳤고 수상한 촌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1740년(건륭 5년), 건륭제는 정확한 인구 조사를 위해 각지의 보·갑장에게 가구당 세는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하였는데 계산한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매년 인구 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총 인구 수를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여 사익을 취하려 한 경우를 차단하여 또한 이를 방치하거나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려 특히 이 중 그 행태가 심한 자는 참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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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륭제의 남순
강희제처럼 건륭제도 남순을 자주했다. 이때 건륭제가 한번 움직이면 기본으로 황제를 보좌하는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 등 3000여 명이 움직였다. 남순을 할때 건륭제는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풍류를 즐기는것을 좋아했다. 특히 시와 그림을 좋아하며 관심이 많았기에 이때 유명한 시인과 화가들도 초청해서 같이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시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강희제는 남순은 자주 했어도 예산을 철저하게 짜서 백성들의 부담은 없었는데,[18] 건륭제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신나게 놀고 없으면 다시 돈을 여기저기서 마련해서 계속 움직이는 식이라[19] 백성들의 부담이 극심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보다못한 신하들이 남순을 자제해달라고 간언했고 이 간언에 화가 난 건륭제가 신하들한테 화를 내는 등 남순을 하는 일로 신하들과 갈등했다.
그러고 훗날 사서 등을 편찬할 때 자신의 남순을 강희제의 남순, 사냥 원정[20]과 비교하며 정당화하는 한편 부정적인 의견은 없애는 엄청난 정치 공작을 펼쳤는데, 이걸 보면 자신도 이 행위가 정상적이거나 당연한 합리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 결과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서...

4.2. 십전 무공


건륭제는 60년의 치세 동안 총 10회의 원정을 수행했다 하여 자신의 별호를 십전노인(十全老人)으로 자칭하였다.[21][22] 이 10회의 원정은 위구르나 진촨(金川) 유역처럼 현재의 중국 영토인 곳으로 감행한 것도 있으며, 베트남이나 미얀마처럼 외국에 감행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총 10회의 원정으로 건륭제는 원나라 다음으로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그 영토는 현재의 캐나다보다 큰 약 1,300만㎢에 달한다. 이 시기 청나라의 판도 하에 있던 인구는 무려 3억을 넘었다.
이 당시 건륭제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준가르의 복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희제,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 온 청나라 최대의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을 신장 일대까지 넓혔고, 또한 이후 대금천과 소금천을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네팔을 정벌하여 티베트 서부 국경을 안정시킴으로써 청나라와 그 뒤를 잇는 현대 중국의 서부 국경을 확정한 것은 건륭제의 온전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 신강의 면적은 한반도의 10배 가까이 되며, 만주와 맞먹는다. 현재 중국 영토의 1/6을 늘려놨으니... 하지만 이 지역은 후에 이슬람교도의 난이 벌어지기도 하며, 100년 후에는 야쿱 벡이라는 중앙 아시아의 모험가가 침입해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19세기 안 그래도 흔들리는 청나라의 혼란을 더 증폭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건륭제의 정복 전쟁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남쪽의 버마베트남(여왕조) 정벌에 있어서는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하여 완혜에게 패하고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형식적인 복속을 얻어내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러한 정복 전쟁을 위해 건륭제는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여 이는 청나라의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23][24]

4.3. 말년


건륭제의 치세 후기에 총신 니오후루 허션이 막대한 축재를 감행하였고 이를 건륭제가 눈감아 주어 순식간에 청나라의 관료 사회는 부패하게 되었다. 허션이 해먹은 게 당시 청나라 20년치 예산에 맞먹는다고. 심지어 건륭제 본인도 말년에 생일 선물로 '''금'''불상 3만 개를 받는 등 재산을 모으는 데 골몰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곧바로 민생에 나쁜 영향을 주어서 건륭제가 퇴위한 이듬해인 1796년에는 한족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쇠퇴의 조짐은 보다 일찍부터 있었는데, 이미 1774년 백련교도 왕륜(王倫)이 난을 일으키다 진압된 바가 있고, 1786년에도 대만의 임상문(林爽文)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륭제 말년의 문제들은 가경제도광제 대에 고스란히 짐이 된다.
여담으로 건륭제는 8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는 중국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축에 속한다. 역대 중국의 황제들은 혹독한 과로나 스트레스 혹은 궁중 생활에서 비롯된 비만과 질병 등의 문제 때문에 의외로 수명이 길지 못해서 40~50세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25] 이에 반해 건륭제는 하루에 식사를 두 끼만 먹었으며[26], 콩과 나물류 등의 채식과 생선을 위주로 한 소박한 음식과[27] 제비집 요리를 즐기는 등[28] 극히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장수의 한 비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9]

4.4.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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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을 떠올리는 건륭제.[30] 참고로 이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이자 청나라 궁정 화가였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 이름은 낭세녕)가 그린 그림이다.
를 굉장히 좋아했고, 평생 동안 4만 자가 넘는 시를 썼다고 한다. 남아있는 시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하도 많이 쓰다보니 책 몇권을 채울 정도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는 문학성의 측면으로 봤을때 그닥 좋은 평가는 못 받는다고... 오죽하면 '''조조의 시는 몇십 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저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 아무튼 정말 좋아한 것은 맞아서 대신들에게도 이런 시를 선물로 줄 정도였으며, 평소에도 유명한 시인을 초청하기를 좋아했다.
만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주족의 한화(漢化)를 걱정한 황제이기도 하다. 강희제 이후, 궁궐 내에도 중국어가 스며들게 되자 건륭제는 이 때문에 만주 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중국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한 후,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새로운 만주어 단어를 만들 테스크 포스팀을 구성했다. 이들의 활약 덕택에 중국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는데,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고 한다.
한편, 건륭제는 막대한 문화 사업을 단행하여, 중국은 물론 그때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과사전 사업을 완수하였다. 이 사업의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그중 청나라가 진행한 '문자의 옥(文字之獄)'의 일환으로써, 전국의 책을 검열하여 백과사전에 등재하면서 청에 비판적인 서적을 삭제하고 수정하며 폐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4.5.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건륭제의 재위기는 당시 조선영조(재위 1724~1776년)와 정조(재위 1776~1800년)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서 그런지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참고로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년 ~ 1867년 / 1868년)의 쇼군은 8대 요시무네(吉宗, 재임 1716년 ~ 1745년), 9대 이에시게(家重, 재임 1745년 - 1760년), 10대 이에하루(家治, 재임 1760년 - 1786년), 11대 이에나리(家齊, 재임 1786년 - 1837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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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말년인 1793년, 영국의 대사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가 정식으로 교역을 하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청나라 신료들은 매카트니에게 청나라식 삼배 구고두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나 매카트니는 거부[31]했는데 동양권의 조공 문화에 익숙치 않은 서양인에게 행하라고 했으니 온전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던 것.[32]건륭제의 뒤편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결국 매카트니는 한쪽 무릎만 꿇었다고 한다. 이 경우 매카트니가 마냥 고집을 부렸다고 보기만도 어려운게, 서양에서는 이런 방식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하고, 조공국의 방문으로 여긴 건륭제와 대등한 관계의 접촉으로 여긴 영국의 입장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에 양보하기 어려운 순서이기도 했다. 여하튼 건륭제가 관대하게(?) 매카트니의 주장을 받아줘서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만 꿇는 것으로 예를 표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기록으론 건륭제의 요구대로 결국 절을 하고 말았다는 기록도 있다.
하여튼 이때 매카트니는 건륭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모직물과 기기묘묘한 완구 및 마차, 열기구와 지도 따위를 가져왔는데 하필이면 마차의 마부가 황제 바로 앞에 앉게 되는 식으로 설계가 된 바람에(...) 건륭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겠지만 하여간 건륭제는 '''"참 조잡한 장난감을 가져와서 별짓을 다하는구나. 우리 청나라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다(地大物博: 지대물박)."'''는 식으로 대답하며 요구를 거절했다. [33]
또한 매카트니는 당시 청나라의 공행 무역을 폐지하고 자유 무역[34], 교역량 증대, 대사관 설치, 대사의 상주를 허용, 덤으로 일부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엄밀하게는 매카트니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조지 3세의 친서에 들어있던 내용으로 작은 섬을 할양해서 영국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건륭제는 기분 나빠하며 ''청나라는 모든 것이 다 있는 천자의 나라다. 너희 오랑캐들이 우리 청나라에서 나는 , 비단, 도자기 수입도 감사하지 못할 망정 뭐가 어째? 안돼.'' 라는 식으로 대답하며 거부했다. 게다가 자유 무역은 그렇다 쳐도 영토 할양은 중화식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매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고 건륭제가 강제귀국을 명령해서 할수없이 영국으로 돌아간다.[35][36][37]
사실 이미 청나라의 기술적 수준은 영국 등 서양에 뒤쳐지고 있던 상태였다.일례로 청나라는 성냥이 없어서 메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이 성냥으로 불붙여 담배를 피우는 거 보고 청나라 관리들이 놀라서 '오랑캐가 요술 부리고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결국 반세기쯤 뒤에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자기들이 대국인줄 착각하던 청은 한낱 서양 오랑캐라고 무시한 당시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진짜 대국인 대영제국에게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게 된다.
건륭제의 치세는 동아시아가 유럽 세력에 패배했다는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아편전쟁 직전의 시대이기 때문에 건륭제 시대에 잘 대처했다면 이후 시대에서 국력의 차이를 무마할 수 있었을지, 아니면 이미 100여 년 전을 전후하여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편.
한편, 조선과 다른 쪽으로 연관이 있기도 한데,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때 조선 사신단에 끼어간 인물이 바로 박지원. 즉, 열하일기가 바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였던 것이다.

5. 가정 관계



5.1. 아내


'''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
1712년 출생 ~ 1748년 사망
영련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옹정제가 지어준 것으로 璉자에는 이어지다라는 뜻이 있다. 건륭 원년에 밀건법으로 황태자에 임명하였다. 영련이 죽자 건륭은 슬퍼하며 무덤을 성대하게 만들었다.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났는데 가뭄이 오래 지속되었다가 마침내 단비가 내렸다고 하며 태어나자 마자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천연두로 요절하게 되며 친형이 안치되어있는 단혜황태자원에 안치되었다.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건륭제도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효현순황후는 성정이 어질고 소박했으며 태후에게도 효성스러웠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다. 한번은 건륭제가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쾌유한 뒤에도 어의는 "반드시 100일은 푹 쉬어야만 원기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부했다. 황후는 매일 밤 건륭제의 침실 밖에 거주하면서 정성을 다해 100일 동안 시중을 든 뒤에야 비로소 합방했다.[38]
하지만 효현순황후는 건륭 13년에 지방 순행 중 더저우(德州)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그 지역에는 건륭제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의 개혁 성향이 이즈음부터 크게 꺾이고 본인은 천자 놀음에 더 신경 쓰면서 제국은 슬슬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런데 건륭제는 이 황후의 남동생인 푸차 푸헝(富察 傅恒)의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야사가 있다.
'''계황후 호이파나라씨(繼皇后 輝発羅拉氏)'''
1718년 출생 ~ 1766년 사망
건륭제가 보친왕이던 시절 왕부에 측복진(첩)으로 들어왔다. 건륭제 즉위 후 ‘우아할 한’의 봉호를 받고 한비(嫻妃)에 봉해졌으며, 후에 귀비(嫻貴妃)로 올랐다. 첫 황후의 죽음 이후 황귀비(嫻皇貴妃)에 봉해져 황후 대리로 육궁을 통솔했다.[39]
황후가 된 호이파나라씨는 일가가 만군 팔기 상삼기인 정황기로 승격되었으며, 건륭 사이에서 아이를 연이어 셋이나 낳으며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건륭 30년 남순 중 미스터리하게 북경으로 돌려 보내지고, 총애를 잃은 채 냉대를 받다가 죽게 된다. 심지어는 죽고 난 후의 장례 절차마저도 황귀비의 예에 따라 치르도록 건륭제가 명령하였으며, 건륭제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친자인 12황자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40] 그녀가 갑작스럽게 총애를 잃은 이유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있으며,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뒤끝이 장난아니던 건륭제는 계황후가 그려진 초상화를 모두 태우거나 얼굴을 고쳐 그렸으며, 계황후에 대한 처사가 부당하다는 대신들 역시 파면되거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유일하게 장성한 12황자 영기 역시 죽고 나서야 동생 가경제에 의해 패륵으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효의순황후 워이기야씨(孝儀純皇后 魏佳氏)'''
1727년 출생 ~ 1775년 사망
한족 출신인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위씨를 총애하였다. 청나라는 기인 중에서 후궁을 뽑고 상삼기 포의 중에서 궁녀를 뽑는데 위씨는 정황기 포의 출신이라 처음에는 궁녀였을 것으로 본다. 건륭의 눈에 띄어 건륭 10년 귀인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하여금 영(令)’의 봉호를 받고 영빈으로 오르고 4년 뒤에 다시 영비로 오르는 역대급 초고속 승진을 했다. 황7녀, 황14자를 낳은 후 건륭 24년에 귀비에 봉해졌다. 계황후가 유폐된 후 황귀비(令皇貴妃)로 승격되어 육궁을 다스렸다. 황후가 될 수 없었던 한족으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총애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황7녀 고륜화정공주를 출산한 이후 계속 임신 - 출산 - 산후조리를 반복하며 거의 연년생으로 아이를 출산해 역대 청나라 후비를 통틀어 제일 아이가 많다. 건륭 치세 후반기에 낳은 아이들은 거의 효의순황후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이렇듯 임신과 출산만 반복했으니 몸이 멀쩡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49세라는 나이로 건륭제보다 먼저 사망한다. 그녀의 아들인 15황자 영염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경제가 된다. 그녀는 사후 남편인 건륭제가 직접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로 추증해주었으며, 성씨에 ~가(佳)가 붙여져[41] 일가가 만주족 팔기에 편입된다.

5.2. 첩


'''혜현황귀비 고기야씨(慧賢皇貴妃 高佳氏)'''
1711년 출생 ~ 1745년 사망
고빈의 딸로 일찍이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건륭제의 사랑을 받았다. 건륭제는 즉위하면서 고씨를 첩의 작위 중 제일 높은 등급인 귀비(貴妃)로 봉했고 그의 가족들도 만주족으로 편입되어 만주 팔기의 일원이 되었다. 이는 고씨가 측복진으로 수년간이나 건륭제와 함께했다는 명분 외에도,[42] 한비보다 승진이 빠른것으로 보아 꽤 아꼈다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따로 봉호를 주지는 않았는데, 이는 만주족이던 황후 푸차씨와 격차를 늘리고, 역시 만주족이지만 지위는 고씨보다 낮던 한비(嫻妃) 호이포나라씨와는 격차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고씨는 명문가의 숙녀로 오랜 시간 건륭제를 성심성의껏 모셨지만, 몸이 약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일찍 사망했다. 건륭제는 그가 죽기 직전에 황귀비로 특진시켜 주었다. 몸이 약해 일찍 죽었기에 자식은 없다. 고귀비 사후 권세를 누리던 고씨 일가는 몰락했다. 건륭의 부황인 옹정제의 총비였던 연황귀비(돈숙황귀비 연씨)와 매우 흡사한 인생을 살았다. 사후 집안이 몰락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순혜황귀비 소씨(純惠皇貴妃 蘇氏)'''
1713년 출생 ~ 1760년 사망
  • 황3자 순군왕 영장(永璋) 1735년~1760년[43]
  • 황6자 화석질장친왕 영용(永瑢) 1743년~1790년[44]
  • 황4녀 화석화가공주 1745년~1767년[45]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즉위 후 도탑고 순수하다는 뜻의 순(純)의 봉호를 받고 순빈(純嬪)에 책봉되었다. 한족 출신에 한미하기 그지없는 집안이었으나 건륭제가 사랑한 사람 중 하나였다. 건륭제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고, 귀비(純貴妃)까지 올라갔다. 병을 얻어 죽기 직전 건륭제가 직접 황귀비로 특진시켰다.
'''숙가황귀비 긴기야씨(淑嘉皇貴妃 金佳氏)'''
1711년 출생 ~ 1755년 사망
  • 황4자 화석이단친왕 영성(永珹) 1739년~1777년[46]
  • 황8자 화석의신친왕 영선(永璇) 1746년~1832년
  • 황9자 영유(永瑜) 1748년~1749년
  • 황11자 화석성철친왕 영성(永瑆) 1752년~1823년[47]
숙가황귀비의 조상은 조선인 출신으로 정묘호란 당시 청에 잡혀간 김신다리 형제로 숙가황귀비 김씨는 이 사람의 후손이다. 신다리 형제는 병자호란 당시 통역 일을 하며 청나라에 공을 세워 만군 팔기 정황기의 포의 니루[48] 중 하나인 ‘고려니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숙가황귀비의 증조할머니는 순치제의 유모였고[49], 그들의 후손들은 정1품, 정2품 관원을 배출했다. 숙가황귀비는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즉위 후 귀인(貴人) 작위를 받았으며, 후에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가(嘉)의 봉호를 받고 가귀인(嘉貴人)의 작위를 받았다. 빈(嘉嬪), 비(嘉妃)를 거쳐서 귀비(嘉貴妃)까지 올라갔다. 매우 아름다워 건륭제가 사랑한 이 중 하나였고 황태후와의 관계도 좋았다. 건륭제와의 사이에서 아들만 4명을 줄줄이 낳았다. 대부분 장성해 황족 최고 작위인 친왕(親王)을 부여받았고 11황자 영성은 건륭제의 후계자 후보에도 들었다.[50] 죽은 후 곧바로 숭경황태후에 의해 황귀비로 추증되었다. 건륭제는 숙가황귀비를 비롯한 김씨 일가 모두 만주 정황기로 편입시켜 신분을 높여 주었다.[51] 만주족 성씨의 ~가(佳)가 붙여져 일가가 긴기야씨(金佳氏)가 되어 만주족에 편입되었다.
'''유귀비 커리예트씨(愉貴妃 珂里葉特氏)'''
1714년 출생 ~ 1792년
건륭제 시기의 거의 없다시피 한 몽골 출신의 후궁.
커리예트 씨가 낳은 영기는 매우 총명하고 출중했다고 한다. 장수한 자기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긴 했지만.
'''완귀비 진씨(婉貴妃 陳氏)'''
1716년 출생 ~ 1807년 사망
건륭제가 보친왕이던 시절부터 격격으로 들어왔다. 보친왕부 시절부터 건륭제와 함께한 후비들 가운데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건륭제가 죽은 후까지 살아 태비가 된 인물.''' 다만 총애는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빈(嬪), 비(妃)로 올라갈 때도 굉장히 느리게 올라갔다. 십몇 년에 한 번씩 가끔 생각날 때마다 올려준 수준. 효의황후 워이기야씨나 용비 화탁씨는 아이도 안 낳고 한방에 비까지 올라가고 일찍 죽은 걸 보면 가늘고 길게 산 것이 뭔지 알 수 있다. 후임 가경제는 그가 건륭제의 잠저 시절부터 함께한 모비(母妃)임을 존중해 귀비(貴妃)로 존숭했다. 그래서 죽었을 때 작위는 완귀태비(婉貴太妃).
'''용비 화탁씨'''
'''향비'''
1734년 출생 ~ 1788년 사망
이야기에 따르면 건륭제가 위구르의 소화곽탁집점을 쳐 그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성이고, 소화곽탁집점의 딸 혹은 첩이었다고 한다. 출생이 출생인지라 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여성이다. 외모는 아주 아름다웠고 페로몬 내음이 강하게 났기 때문에 건륭제는 그녀를 아주 깊게 사랑했다고 한다. 건륭제는 출신과 문화가 달랐던 용비 화탁씨를 위해 자금성 밖 북경 황성 중난하이에 보월루를 지어 궁에서도 이슬람식 생활을 영유할 수 있도록 특별히 보장해주고 보월루에 갈 때마다 그녀와 강제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또한 용비에게 회족 요리사를 붙여주었으며 보월루에서 매일 내려다 볼 수 있는 거리에 회족거리를 조성해 그녀가 고향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도록 해주었다. 건륭제는 위구르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문제 없이 이뤄졌다고 한다.
'''돈비 왕씨(惇妃 汪氏)'''
1746년 출생 ~ 1806년 사망
65세 때 돈비 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늦둥이 딸을 특별히 총애했다고 한다.[52] 자연히 어미였던 왕씨도 총애를 많이 받았다. 화효 공주는 건륭제의 외모며 성격, 재능을 유난히 닮아 여러 면에서 출중했던지라 건륭제는 그녀를 보며 '네가 아들이었다면 너를 태자로 삼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딸을 각별히 사랑한 건륭제는 그녀가 후궁 소생의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고륜 공주로 봉해주었으며[53], 미행이나 사냥에도 그녀를 동반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또 본인이 각별히 총애했던 권신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巨富)였던 허션의 장남 니오후루 펑션연더허(Niohuru Fengšen Yendehe, 紐祜祿 豊紳殷德)와 일찍이 정혼시켰고, 1789년 11월 17일에 결혼시켰다. 조선 왕조 실록에 남은 기록에 의하면, 그녀의 혼인 당시 융숭한 총애와 사치스러운 혼수는 저번 공주의 혼사에 비해 10배나 되었고, 공주의 집으로 실어 보내는 물건들은 대충 어림잡아 봐도 수백만 금이 넘었으며, 그녀가 시가로 가던 날에는 수천 수백 명에 달하는 고관들이 참석하여 작별을 고하는 절을 했다고 한다.

6. 평가


'''할어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중국 역사상 가장 과대평가된 군주'''
건륭제의 치세는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와 함께 '''강건성세'''[54]라고 불리며 청나라 최대 전성기로 여겨졌고, 음습한(?) 느낌에 내치에 주력한 아버지 옹정제의 치세와 달리 건륭제는 정복 전쟁이라는 화려한 군공도 세웠기에 오랜 시간 고평가를 받았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학자들에겐 건륭제 치세가 '기아의 성세', '속빈 강정'이라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대충 요약하면, 옹정제 때까지 쌓아놓은 국부가 이후 건륭제의 무리한 원정으로 인한 군사력과 재정 소모,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와 축재 진행 등으로 건륭제 말기엔 이미 청나라 쇠퇴의 전주곡을 울렸다는 것이 요지. 즉, 속으로 곪아가고 있음은 모른 채 겉으로의 화려함이 과시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말년의 '암군' 건륭제는 신하들과 상인, 거부들로부터 금전을 우려내는(?) 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전체적인 치세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고 선망하던 황제이자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를 본받기 위해 부단해 애썼으나,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이런 점은 아버지 카를 5세를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존경하여 따르려고 했던 펠리페 2세와도 비슷하달까? 물론 건륭제는 전체적으로 펠리페 2세보단 여러모로 활발한 편이긴 했다.
옹정제 시절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황무지 개간 사업에서 아버지와 달리 자신에게 올라오는 보고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실례로 옹정제는 초기 개간의 성과가 좋자 크게 기뻐했으나, 계속되는 보고에 '이렇게 빨리 개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의심해 실상을 자세하게 조사했고 그에 따라 엄청난 토지가 서류에만 등록된 개간지임을 밝혀냈다. 이는 관료들이 황무지를 개간지로 등록해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관료들은 격분한 옹정제에게 갈렸다. 허나 건륭제는 '나만 한 군주가 어디 있어'라며 자뻑에 빠져 살았다.
게다가 할아버지를 본떠 다섯 차례에 걸친 강남 유람을 단행해 그 지역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는데,[55] 강희제가 국비로 예산을 철저하게 편성하고 그나마도 아껴 사용해 돈을 남겨온 것이나 옹정제가 국비 부담을 우려해 아예 유람을 떠나지 않던 것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 운하와 양쯔 강 주변의 백성들에게 유람 비용을 징수하여 주변 지역에서는 거듭되는 세금 징수를 피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인구의 씨가 마를 지경으로 황폐해졌으며, 말년에는 황금 불상을 모으는 취미를 들여 백성들의 삶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차려놓은 밥상을 지 손으로 차 버린 셈.
또한 서양에서 중국에 대한 평가가 하락하던 것도 건륭제 시기였다. 건륭제의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는 '''가톨릭 군주가 아니라는 점만 빼곤 최고의 군주'''라는 극찬과 함께 엄청난 학구열과 뛰어난 군공과 정치력을 선보여 서양 선교사들을 감격시켰고, 그 영향으로 서양에서 중국학이 널리 유행하게 되게 한 명군 중의 명군이었다. 또한 건륭제의 아버지였던 옹정제는 '''가톨릭을 탄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능력은 있는 군주'''라는 평가를 받으며, 서양의 일부 학자들에겐 중국이야말로 유토피아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게 했다. 그렇게 강희제 - 옹정제 시기 청은 전 유럽이 단합해야 겨우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당대 유럽의 지식인과 왕족들을 충격에 빠트리는 강대국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가톨릭을 안 믿는데도 윤리 의식이 뛰어난 동방의 대국이 있다더라는 신기함도 한몫 했다. 즉, 가톨릭 따위 없어도 대국이 될 수 있다는 표본으로 동방의 대국인 청나라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가톨릭의 교리와 유교를 엮으려는 경향이 있었다.[56] 또한 강희 - 옹정 시기의 청나라가 세계 최강을 논하는 압도적인 국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예카테리나 여제, 루이 14세 같은 절대 왕권으로 유명한 왕들조차 중국 문화 애호가임을 자처하며 자신들을 중국 황제로, 주변 귀족들을 중국 문관에 비유하는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고평가가 이루어진 시기가 강희 - 옹정 연간의 청나라였다. 이때의 중국 문화 애호를 가리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부른다.
허나 건륭제 시기부터 청나라의 힘이 예전만큼이 아니라는 평가가 꾸준히 이어지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매카트니의 중국 방문으로 그 이후 중국에 대한 평가는 '''그저 그런 제국'''으로 내려앉았으며, 서양에서 일었던 중국에 대한 찬양과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애호도 침체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이나 유럽 인문학자들의 평가가 강희 - 옹정 시대엔 가톨릭을 믿지 않거나 탄압했지만 뛰어난 무공, 검소함, 국가 체제 정비 등을 이유로 로마 제국 오현제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등과 비견되는 명군이라는 찬양일색에서[57] 건륭 시대엔 당시 유럽에서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막장으로 통하던 루이 14세로 절하된 점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58][59]
특히 매카트니는 "중국 제국은 늙고 미친 일급 군함인데, 유능하고 추호도 방심하지 않는 관리들이 과거 150년 동안 이 배(중국)을 용케 물에 떠 있게 하고 그 외관상의 덩치만으로 이웃들을 위압해왔지만, 능력이 부족한 사람[60]이 갑판에 올라 명령권을 갖기만 하면 배의 규율이나 안전과는 고별이다. 그 배는 아마도 철저히 파괴되어 가라앉지는 않고, 난파선으로 한참 떠돌다 산산조각 나서 해안으로 밀려들 것이다. 그러나 그 배는 이전의 기반 위에서 절대 다시 건설될 수 없을 것이다."[61]라고 평가했는데, 즉 강희제 시절만 해도 젊고, 정력적이고, 무력적이고, 학술적이며, 윤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전문적인 관리들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이미지였던 청나라는 건륭제 시절부터 침몰하는 배와 병자의 이미지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
당장 건륭제 때 파견된 조선 사신들이 남긴 기록만 봐도 당시 "황제에 대한 비방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예전보다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진 것 같다."고 평한 걸로 봐서는 인심도 그다지 얻지 못한 모양이다. 연행사로 다녀왔던 실학자 홍대용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라면서 '''정조와 노론들 앞에서''' 칭송할 정도였지만, 원명원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사실 건륭제의 치세가 매우 중요한 시기였던 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당시 청나라의 국력이 가장 왕성하긴 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인구 폭발'''이 그것이다. 실제로 강희 - 옹정 시대에 청나라의 치세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중국의 인구는 이 시기 이전까지는 주기적으로 증감을 되풀이 하면서 1억 5천만 정도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100년 남짓한 시기에 '''세 배'''로 늘어난다.[62] 이 때문에 이전 왕조에선 인구가 줄어들었거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던 곳에까지도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연히 인구가 증가하면 식량 수요가 증가하는 건 당연한 이치고... 이 때문에 옹정제 때부터 이미 황무지 개간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63]
이런 폭발적인 인구 증가라는 추세에도 청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은의 유입이었다. 건륭제 초기에 잠시 은의 유입량이 주춤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후 다시 회복세를 드러냈다. 즉 건륭제 시기는 세계의 은 대부분이 청으로 몰려들었을 정도로 청의 입장에선 엄청난 호황기였다. 이 때문에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청의 경제가 버티고 국가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건륭제가 이런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면 저런 사치를 부렸어야 하는 건지는 의문이다. 은이 쏟아져 들어오니 무슨 상관이랴 싶었겠지만. 결국 식량 생산량의 증가는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청에게 고도로 유리한 무역 체제로 인한 대호황에 안주하다가 건륭제 이후로 청이 막장 테크를 타게 된 걸 보면 건륭제가 적어도 할아버지 강희제나 아버지 옹정제 수준의 전망만 있었어도 이 중대한 시기를 그냥 넘기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건륭제의 치세를 살펴보면 대외적으로는 가장 크고 화려한 시기였으나, 속으로는 곪고 곪아가는 시대였다. 물론 위와 같은 정확한 분석은 중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던 일부만이 가능했으며, 중국의 쇠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던 시기는 엄밀히는 도광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탓에 중국은 가경제까지만 하더라도 겉으로는 강국이었고, 이 때문에 역사가 진순신은 그의 저서에서 이 시대를 '가장 행복했던 세대'라고 기술하였다.
한편, 건륭제는 강희제 때부터 청제국의 골치를 썩이던 준가르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멸족'''을 결정한 학살자이기도 하다. 준가르의 멸족으로 신장은 위구르 땅이 되는데 근세 이전의 역사 시대 일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지금으로부터 그다지 오래된 일도 아니란 점에서 서글픈 일. 물론 그 준가르도 위구르족 등 피지배민족들을 잔혹하게 수탈하고 더 나아가 학살하기까지 했음을 감안하면 자업자득으로 볼 수도 있지만...

6.1. 일화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에게 비판도 꽤 받고 있으나, 어쨌건 강희-옹정 치세를 이어받은 건륭제 당시의 청나라가 국력이 가장 왕성할 때이기도 했고, 풍류를 좋아하고 장난도 치는 친근한 이미지 때문인지 각종 매체에선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건륭제 당시부터 내려오는 민간 야사의 숫자도 엄청난 수준.
전해지는 일화들을 보면 확실히 성격이 재미있는 사람이긴 했다. 특히 밀복을 하고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렇게 백성들 속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신하들 집으로 찾아가서는 온 식구들이 넙죽 엎드리고 혼비백산하는 꼴을 보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 현상유지만 하는 데에도 황제를 갈아넣어야 할만큼 크고 아름다운 청 제국의 황제보단 풍류를 아는 유쾌한 부자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건륭제가 강희, 옹정 시절부터 권력다툼으로 형제, 삼촌들이 죽어나가고 아버지도 일하느라 건강을 심하게 해치는걸 보며 자란 인물임을 감안하면 이런 다채로운 면모는 온 힘들 다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던 아버지에 비하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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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화 매니아이기도 해서 황제의 권력으로 저명한 고서화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신은 '''고서화의 운치를 망쳐버린''' 인물로 악명이 자자하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중국화 학자로 유명한 마이크 설리번이 '''탐욕스러운 미술 수집가이자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안의 소유자'''라고 비꼬았을 정도. 왼쪽 작품은 건륭제가 망쳐놓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원대의 화가 방종희의 "고고정도(高高亭圖)"가 꼽히는데, 운치 있는 절벽을 그려놓은 작품에 눈에 확 띄는 최상단 중앙부에다가 '''떡하니 자기 인장을 찍어 놨다.''' 덕분에 고고정도를 감상하는 사람은 그림 자체보다 건륭제의 큼지막한 인장이 먼저 눈에 들어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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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부의 걸작인 위쪽의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에도 건륭제의 흔적이 많은데 여러 도장을 찍고 시를 적는 등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는 북송휘종이 직접 그린 "계산추색도"라는 걸작을 수집하고 나서, 상술한 "고고정도"에 찍힌 것과 동일한, 큼지막한 인장을 찍어놓고, 여러 자잘한 인감을 찍은 뒤, 좌측 상단부에 자신의 엉터리 시까지 적어놓았다.
한국 민족 사학계에서는 '흠정만주원류고'를 쓴 황제라며 칭송하기도 한다. 국내에는 오랜 기간 소개되지 않다가, 어찌어찌 '만주원류고'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었다. 다만 지금은 절판 상태.
베트남과의 전쟁에서도 이겼다며 자칭 '십전 무공'이라고 칭했지만, 실제로는 상기되어있듯 승리하지 못하고 형식적 복속을 받는 수준에 그쳤다. 즉, 황제가 정신승리한 셈.(...)
아내들과 딸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은 후한 편이지만 반대로 아들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에는 다소 매정한 편이다. 가장 총애하는 효의순황후의 가문을 2번이나 대기(抬旗)[64]시켜줬고, 측실부인 소생의 공주들에게조차 화석공주가 아닌 고륜공주로 승격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들들 중에서 건륭제로부터 직접 친왕 자리를 받은 아들들은 몇 없다.[65][66]
베이징시에 있는 궁주펀역 인근 공주묘가 건륭제의 수양딸이 묻힌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현재도 입증되지 못하였다.

7. 각종 매체에서


그야말로 인생 전체가 맛깔나는 드라마의 연속. 강건성세의 주요 사극 소재인 강희 연간 황자들의 암투에서부터 아역, 그것도 유아기-사춘기-청년기로 깨알같이 배역을 나눠 등장할만큼 큰 존재감을 보인다. 아역으로서는 자식들 쌈박질에 질려버린 강희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옹친왕의 히든카드 포지션인데, 당국강이 옹정제로 출연한 <옹정황제>가 그 예로, 여기서는 열하에서의 사냥에서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서 불참한 사이 제법 많은 동물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생포해낸 8아거 윤사와 가장 많은 동물을 잡은 13아거 윤상 중 누구에게 상을 줘야 하는지 강희제가 묻자 아버지의 만류에도 더 많은 짐승을 잡은 윤상에게 주는 것이 옳다고 또박또박 자신의 주장을 읊자 강희제가 매우 이뻐하며 아들에게 주려던 상을 손자에게 줘버린다. 윤상과 14아거 윤정이 주먹질을 하다 걸려서 말대답이나 하는 윤정에게 칼을 겨누면서까지 역정을 내다 혼절하는 사건 후에 동복 동생 윤정을 포박해서 어머니랑 같이 싹싹 빌러 온 윤진에게 홍력이 좀 데려오라 하면서 본격적으로 손주 사랑이 묘사된다. 눈밭에서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며 대청 황제와 내관과 시위들까지 눈밭에서 휘청이게 만드는 깨알같은 재롱도 보이고, 더 커서는 강희제가 백발 노인의 몸으로 손자에게 손수 무예를 가르치는걸 보고 신하들이 황상 아직 정정하시구나 감탄한다. 극중에서 등장할 때마다 자식들 싸움질에 혈압만 오르며 고통받는 강희제가 아무 근심 없이 진심으로 웃는 장면은 전부 홍력과 보내는 시간인데, 이를 보면 부모에게 잘 보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손주 자랑이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황제의 딸>의 인기로 유명하다. 용서의 아이콘 혹은 주인공 일행이 친 사고를 수습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나온다. 그 때문에 건륭제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드라마에서 건륭제로 나온 배우인 장철림은 쌍룡회나 철치동아 기효람 등에서도 건륭제를 맡았던 건륭제 전문 배우로서 북경 전영 학원 출신의 연기파 배우다. 워낙 장철림이 불같으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잘 연기했기 때문에 자녀 및 신하들에게 다소 박정한 면이 있었던 건륭제의 본래 모습이 많이 희석되기도 했다.
고천락 주연의 건륭대제에 보면 강대위가 맡은 증정과 연적 관계로 나온다. 증정이 무림 고수라는 설정.
후궁견환전(옹정 황제의 여인)에서는 아버지인 옹정제가 메인이다 보니 본인은 4황자 홍력으로 나오며 마지막화에는 아버지 사후 황제로 즉위한다. 또한 후궁견환전의 후속작 후궁여의전은 건륭제의 2번째 황후인 계황후 호이포나라씨이다 보니 메인으로 등장.
연희공략에서 메인 남주로 나오며, 후궁여의전과 같은 배경이나 이쪽은 여의전보다는 훨씬 나은 성격이다. 주인공에게는 처음에는 주인공이 충성하는 황후를 박정하게 대하는 일로 매우 싫어하는 존재였으나 나중에는 주인공의 사랑을 얻고[67] 승리자가 된다. 성격도 츤데레에 가까운 편이며 주인공의 사랑을 얻은 뒤에는 과도한 집착이나 의심을 하지도 않는다. 의처증 수준으로 집착했던 후궁여의전과는 다르다.
김용서검은구록[68]에서도 건륭제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건륭제가 한족인데 아기 때 황후가 딸을 낳자 한족 대신의 아들과 바꿔치기를 해서 태후에 올랐다는 설정이다. 한족 출신인데 아기를 바꾸면서 황족이 되었다는 전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사실 정사에서도 건륭제는 증조할머니가 한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미약하게나마 한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건륭제가 실은 완전히 한족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주인공인 진가락의 친형으로 그가 한족이라는 증거와 교환 및 진가락의 연인이자 히로인 객사려(향향 공주)와의 결혼 등의 대가로 한족의 나라를 만들기로 계약하나 태후가 그 일에 대해 알아채고 황제 자리에서 몰아낼 것 같자 대뜸 배신을 때린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챈 객사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진가락이 건륭제의 배신을 눈치채고 홍화회 동료들과 떠난다. 작중에 주인공 진가락이 이끄는 홍화회에 사로잡혀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당하는 장면도 있는데 김용은 이 부분에 덧붙여 쓰기를 '''이때 손모가지가 날아갔어야 명작에 도장 찍고 글자 끄적거리는 미친 짓을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까기도. 이외에 불륜까지 저질러 사생아 부찰 복강안을 두는 등 전반적으로 찌질한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2020년, <후궁의 법칙>이라는 게임에서 남안 4명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여주인공을 후궁으로 맞이한 황제.

8. 더 보기



'''청의 연호'''
옹정
(1723 ~ 1735)[69]

'''건륭
(1736 ~ 1796)
'''

가경
(1796 ~ 1820)

[1] Tengryin Tedqügsen[2] 건륭제의 키가 160cm가 안 된다는 말이 있고 또 키가 160cm~165cm라는 설도 있고 또 건륭제의 키가 180cm라는 설이 있다. 구글 프로필에서는 178cm로 나오는데 어진을 보면 건륭제의 키는 약 170cm대 후반으로 보인다.[3] 역대 중국의 군주들 중 강희제 다음으로 오랜 기간 동안 재위했다.[4] 태상황의 재위 기간까지 합치면 63.24년 정도로 역대 중국 황제 중 가장 오랫동안 다스린 황제가 된다.[5] 빨간 선은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6] 동쪽의 흑룡강 이북 땅과 연해주 지역은 아이훈 조약베이징 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귀속되었고, 외몽골은 1921년 소련에 의해 독립하였다.[7] 강희, 옹정, 건륭을 거치며 이어진 청나라의 번영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 강건성세는 건륭제 때에 절정을 맞이했다. 이시기 청나라는 중국 통일왕조 중 원나라와 더불어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여 중국의 인구는 명나라 때부터 유지되던 1억 선을 훌쩍 뛰어넘어 무려 4억에 달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흥하여 청나라는 전대에 확립됐던 지정은제의 영향으로 은의 블랙홀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추었다.[8] 뒤에 나오겠지만 황제 본인도 금불상 3만 개를 생일 선물로 받는 등 재산 축재에 골몰하여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9] 문자의 옥으로 한족들이 탄압을 당한 것 자체는 할아버지인 강희제와 아버지인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온 거였지만 최소한 이 두 황제는 문자의 옥으로 숙청한 대상도 거의 대부분이 반청복명을 추구하던 이들이나 부패한 관리들이었으며, 청나라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적절한 비판은 대부분 수용했다.(물론 옹정제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황위 정통성에 대한 시시비비 문제가 있었기에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경우에는 최대한 죽이기보다는 회유하고자 하였다.) 반면 건륭제는 정당한 비판마저 반역 행위로 간주하는 막장 행각을 보이면서 정작 청나라의 번영에 걸림돌이 되는 부패한 관리들은 숙청하지 않고 방치한 탓에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지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이나 청렴한 관리들에게 피해를 주었으므로,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질이 나쁘다.[10]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모두 외정에 집중해서 내정에 악영향을 끼친 왕들이다. 건륭제 역시 이들처럼 선대의 강희제와 옹정제에 비해 중국 내외에서 평가가 좋지 못한 편.[11] 기록에 따라서는 건륭제의 생모는 효성현황후 니오후루씨가 아니라 '''전씨'''라고 설명하지만,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이라고 보는 편이다.[12] 조선 왕조 실록 경종 시대에 사신이 가져온 강희제 전위 조서에서도 실린다. (덤으로 저 오랑캐 놈들 태자를 정하지 않았으니 한바탕 쌈박질하지 않겠냐는 호조판서 이태좌의 첨언까지도.) 실록에는 '윤진의 제2자는 영웅의 기상이 있으니 반드시 봉하여 태자를 삼도록 하라' 했다고 전해지는데, 홍력보다 앞서 태어난 형들은 셋째인 홍시를 제외하면 강희 연간에 모두 요절했으므로 홍력을 2자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13] 홍주는 그야말로 개망나니짓을 저지르면서 수차례 사고를 쳤지만 형인 건륭제가 감싸준 덕분에 별 탈없이 잘 먹고 잘 살다 가버렸다.[14] 감국은 나라 전반을 감독하라는 특별 직책으로, 섭정으로 봐도 무리가 없으나 섭정왕이라는 타이틀은 이때까지 온전히 복권되지 못하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라는 영 거시기한 예가 있어서 다른 직책명을 쓴 듯 하다.[15] 다만 강희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한 것은 준가르의 갈단 칸 정벌 때뿐이다. 그리고 친정할 이때에는 갈단이 동으로 공격해와서 외몽골지역을 점거하여, 청의 북변을 위협했기 때문이였다.[16] 여담이지만 황제의 딸에 등장하는 이강과 이태가 복(福)씨로, 극중 영비의 사촌 친정(즉 영비가 이강과 이태의 이모 뻘)으로 나온다.[17] 이는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들어 제위쟁탈을 벌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18] 최소한의 인원으로 편성해서 최대한 조용한 방식으로 갔다왔으며, 지나가는 길에 총신들의 집에서 유숙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아꼈다. 이에 강희 말년 부정부패에서 위동정이라는 총신이 이 비용을 부담하느라 국고에서 돈을 빌렸다가 큰일이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강희제는 내탕금을 써서 위동정의 돈을 갚아주었다.[19] 이는 건륭제의 남순이 순방이라기보다 여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20] 강희제는 몽골 귀족들을 모아 놓고 사냥으로 군사 훈련을 병행했는데, 청나라의 부와 번영을 과시하고 청에 대한 몽골 귀족들의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시행했다. 강희제의 유조에 남아있는 사냥에서 어쩌구~는 이 사냥 원정의 결과물들이다. 강희제 시기에는 산해관 입관 이전까지의 정책적 영향과 조모였던 몽골 출신의 효장문황후가 생존하였고 , 삼번의 난으로 북변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이후 갈단의 공격에 외몽골의 부족들이 남하하면서 이들에 대한 충성을 받아야 하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에는 변방이 안정되어 그런 것들이 거의 없었고,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21]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몇 개의 원정은 하나의 원정을 10이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쪼갠 것에 가깝다(...). [22] 준가르 2회, 위구르 1회, 진촨 유역 2회, 대만(민중반란), 베트남, 미얀마, 그리고 네팔 샤왕조 2회[23] 비슷한 케이스로 요나라가 있다. 요나라 또한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처참하게 패한 후 고려를 형식상 요나라의 제후국으로 만들었을 뿐 상국으로서 고려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지는 못했다.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제압하는데 실패하여 송나라를 제후국이 아닌 형제국으로 그치게되었다. 나중에는 발해 멸망, 발해부흥운동 진압, 고려-거란 전쟁 등 한민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와 군사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결국 요나라의 국가 재정과 인력 문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 고려를 공격하는 와중에 발해멸망 이후 압록강 서안에 자립하고 있던 여진족들을 복속시켰으며,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의 황제가 동생이 되었지만, 소태후가 송황제의 숙모가 되면서 가장 윗자리를 가지면서 막대한 세폐를 지급받으면서 경제적 풍요를 가지게 되었다. 오히려 거란의 멸망은 정치체제 자체적인 결함 과 세폐로 인한 경제적 풍요에 거란인들이 무사적인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곳, 그리고 황실 내부 권력 암투 속에서 찾는 편이 맞을 것 같다.[24] 또한 이러한 점은 수나라도 비슷한 편이다. 수나라 역시 수문제까지는 정치가 잘 발전되어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수양제 이후 잦은 원정으로 수나라의 영토를 넓혔고 왠만한 나라들을 복속시켜 수나라의 부하처럼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긴 군사원정은 후기로 갈수록 국력이 약화되고, 고구려 침략에 대한 집착과 고구려 원정에 실패를 하면서 역으로 수나라만 더 심해졌다. 통일하여 대국을 만들고 웅장하고 온화한 문화를 만들었음에도 지나치게 잦은 군사원정은 훗날 대운하를 다시 공사 및 억지로 빨리 완성시켜 백성들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 것과 더불어 단명왕조가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고 훗날 수나라가 망한 후 수나라 전역은 빈 공간처럼 되다가 훗날 당나라가 차지했다. 그나마 건륭제는 강남 유람을 즐겼을지언정 진나라의 만리장성이나 수나라의 대운하처럼 무리한 대규모의 공사 작업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폭정도 수양제나 진시황 같은 폭정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준가르 학살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도 있다보니 이 점은 명백히 비판받는다.[25] 특히 암살당하거나 살해된 황제들도 많다.[26] 다만 중간에 간식을 먹기도 했다.[27]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두부와 생선조림이었다.[28] 다만 그렇다고 고기를 안먹은것은 아니고 닭고기, 오리고기, 양고기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다. 오리알과 거위알도 좋아해서 자주 먹었다.[29] 이는 조선에서 가장 장수했던 국왕인 영조와도 흡사하다. 영조 또한 채식을 좋아하며 규칙적이면서도 매우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장수의 비결로 손꼽힌다. [30] 아이러니하게도, 한족들의 한푸 착용을 금지한 것과 반대로 만주인 귀족들이랑 심지어 청의 황제들은 한푸를 입고 생활한 적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물론 변발 풍습은 청이 망할때까지 계속 유지되었지만, 대신 시대가 흐르면서 청나라의 변발도 점차 머리를 덜 밀어내는 형태로 변해갔으며 그로 인해 청나라 말기에는 청나라 변발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인 음양두가 보편화되기에 이른다.[31] 3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3번씩 총 9번 머리를 찧는 의식으로,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고 삼전도의 굴욕인조가 시행한 바로 그 의식이다.[32] 매카트니는 이때 “내가 영국 국왕 폐하의 신하지, 귀국 황제의 신하인 줄 아는가?” 라고 거부했다.[33] 차라리 이 체형은 다음 황제인 가경제와 잘 맞는다.[34] 당시 청나라는 외국과의 무역에 대한 규제가 강해서 외국 상인들의 불만이 컷다.[35] 당시 영국이 대중국 외교 노하우가 떨어진 원인도 있다고 봐야 한다. 포르투갈의 경우 명나라 시대부터 마카오를 실효지배를 하고 있었다. 법적 지배는 아편전쟁 이후지만 이미 몇백년 동안 실질적 자국영토로 관리하고 있었으며 이는 포르투갈이 오랫동안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중국정부의 비위를 안상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도 네덜란드 사절단과 그들의 수장 이삭 티치가 건륭제의 6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을때 영국 사절단이 거부하던 삼배 구고두예를 건륭제에게 하자 건륭제가 기뻐하며 이삭 티치와 네덜란드 사절단을 특별대우하면서 선물도 많이 챙겨주었다.[36] 추가적으로 러시아 역시 청과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을 맺어 중국과 교류 중이었으며 당시 베이징에는 러시아 외교 공관과(근대적 의미의 외교 공관은 아니나, 러시아 외교관들이 상주했다.) 정교회 신학교가 있었다(이 정교회 신학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카톨릭 교회가 다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멀쩡히 남아서 근현대까지 존속했다. 신학교에서 중국어를 러시아인들에게 가르치고 통역관을 육성하며 중국어 사전과 한자 사전을 편찬한 것은 덤.) 러시아도 영국과 비슷하게 고두 문제로 청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으나, 러시아가 고두를 하겠다고 양보함에 따라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래서 매카트니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는 러시아 사절단도 와 있었고, '영국놈들' 앞에서 고두를 하는 '추태'를 보이기 싫어서 천자 앞에서의 고두를 거부했다가 '이제까지 잘만 해오다가 왜 안하냐?' 면서 청측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37] 만약 이들이 강희제 시기에 왔었다면 약간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강희제는 서양의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서 자신이 직접 배우기도 하였다. 영국의 사절단들이 바라는 바를 전부 들어주는 않더라도 상호간에 타협 볼 수 있는 정도까지는 진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38] 출처: 옌 총니엔 저, 대청 제국 12군주 열전.[39] 책봉문마다 “자애로운 태후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문구가 있어 태후픽으로 승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0] 건륭은 황후가 화를 내며 머리를 잘랐다며, 머리를 자른것은 부모나 남편이 죽었을 때나 하는 행동인데, 이는 매우 큰 불경이라며 황후를 유폐한 이유를 말했다.[41] 만주족 성씨에는 ~가(佳)씨로 끝나는 성이 많아, 한족을 만주족으로 편입시킬 때는 성씨 뒤에 가(佳)를 붙여 승격시켜주었다. [42] 한비는 만주 양람기 출신으로 처음부터 측복진으로 들어왔으나 고씨는 격격으로 들어와 측복진이 되었는데 이는 건륭제가 한비보다 고씨를 총애했다고 볼 수 있다.[43] 적모인 효현순황후의 장례에 슬퍼함이 부족하여 황위계승권을 박탈 당했으며 생모인 순혜황귀비가 죽은 후 3개월 뒤에 죽었다.[44] 강희제의 21황자인 윤희의 양자로 출사하였으며 그의 복진은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참장 부겸의 딸이다.[45] 복륭안에게 하가하였으며 복륭안은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대학사 군기대신 부항의 차남이다.[46] 강희제의 12황자인 이의친왕 윤도의 양자로 출사하였다. 윤도의 복진은 의정대신 마제의 딸이고 마제는 효현순황후의 백부이다.[47]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부항의 딸 중 하나가 적복진으로 시집을 갔다. 부항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들이 모두 총애를 받았으며, 다른 딸은 예친왕 도르곤의 후계자에게 적복진으로 시집을 갔다.[48] 포의란 황실 직속의 도우미, 노복 신분을 말한다.[49] 이때부터 김씨 일가의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한다.[50] 다만 11황자 영성은 무예를 싫어해서 동생인 15황자 영염이 후계자가 된다.[51] 이전에는 가경제가 추증하였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 가귀비의 집안을 만주 정황기로 편입시킨 인물은 엄연히 부군인 건륭제이다. 그리고 가귀비가 죽은 직후 건륭제와 숭경황태후는 가귀비를 황귀비로 추증하고 김가씨(金佳氏)의 성을 하사하였다.[52] 다만 돈비 왕씨는 자신의 딸을 믿고 궁녀를 때려 죽이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돈빈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후 다시 돈비로 돌아왔는데 어찌나 성격이 나빴던지 어지간한 후궁은 모두 2등급 이상의 품계를 올려주었던 가경제조차 그녀를 그냥 돈태비로 놔두었다. 건륭제가 죽고 난 뒤 그녀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황궁 내 태비들 사이에서도 왕따 신세가 되고 기고만장하던 과거와는 달리 초라한 말년을 보냈다.[53] 일반적으로 청나라에서 황제의 적녀는 고륜 공주로 봉해졌고 서녀는 화석 공주로 봉해졌다. 조선으로 치면 고륜 공주는 '공주' 에, 화석 공주는 '옹주'에 해당하는 셈. 물론 조선의 공주, 옹주와는 달리 모친의 지위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예외도 있었다.[54] 원래는 강옹건성세라고 해야 하겠지만, 옹정제의 재위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도 있고, 묘하게 옹정제는 전통적으로 폭군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평가가 박했다.[55] 일단 정식으로 식사할때 올리는 반찬 숫자가 강희제, 옹정제보다 더 많았는데 강희제는 한번의 식사에 한가지 맛만 올리게 했고 옹정제는 반찬 숫자가 7개는 넘지 않게 했다. 반면에 건륭제는 반찬 숫자가 무려 50가지나 되었다. 물론 건륭제 본인이 대식가가 아니지만 황후와 비빈들, 황자, 공주들, 신하들에게 호의를 표시하기 위해 일부러 많이 했던 것. 이때문에 건륭제의 식비로 쓰이는 돈도 상당했다.[56] 다만 이는 계몽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의도가 더 강했다. 어느 날 갑자기 "너희 생각은 다 틀렸다"고 하는 것보다는, "공맹께서 하시던 말씀으로 보더라도 가톨릭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는 게 훨씬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 이러한 경향을 '보유론(補儒論)'이라 하는데 명나라 시대의 예수회 선교에서부터 나타난 경향이며, 훗날 조선에서 특히 많은 공감을 받았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이 생각하기에도, 가톨릭은 인류 보편적 논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쪽이 훨씬 와닿는 설명이기도 하고.[57] 참고로 옹정제는 유럽 현지에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다 처형한다는 악평까지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옹호론까지 등장했다. 비록 순교자들을 탄생시켰지만 검소하고 정력적이며 능력 있는 황제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것이 일명 오현제들과의 비교.[58] 그런데 이 비교들은 은근히 황제들의 성향과 잘 어울린다. 강희제 - 트라야누스, 옹정제 - 하드리아누스 그런데 갑자기 건륭제 - 루이 14세 크리.[59] 루이14세 이전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강력한 국가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목상 유럽의 유일한 제국 밑에 있었다. 거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차지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여러 강대한 세력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면서 원 신성 로마 제국의 지역인 독일을 벗어나 스페인까지 통치하는 등 유럽 제1의 위치에 있었다. 이에 루이 14세는 이전에 축적한 자본을 가지고서 팽창할 당의성이라도 있었다.(이후 가톨릭적인 성향으로 인하여서 위그노들을 탄압하여 상업은 붕괴시켰지만, 이것은 신/구교간의 차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프랑스의 대다수는 가톨릭이었고, 왕은 다수의 의견을 청취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건륭제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제1의 위치에 이미 올라있었던 만큼 본인 스스로의 사치와 향락으로 나라를 붕괴시켰으니 엄격하게 말하면 다르다.[60] 누구를 뜻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당시 황제는 건륭제였다.[61] 피터 C. 퍼듀작 중국의 서진에서 인용[62] 그리고 이렇게 4억 정도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까지 유지되다가, 인구는 국력을 주장한 마오쩌둥 시절에 2배가 늘어 9억을 돌파하고, 현재는 13억을 넘는 인구를 자랑하고 있다.[63] 취소선이 쳐져 있긴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건륭제의 정복전쟁으로 완전히 청나라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던 오늘날의 독립국가 몽골(외몽골), 러시아령 투바 공화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대체로 척박한 편이다.[64] 팔기가문에 속하는 기(旗)를 변경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65] 17명이나 되는 황자들 가운데, 5황자 영기, 8황자 영선, 11황자 영성, 15황자 영염만이 친왕을 받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건륭제로부터 봉작을 받지 못한 황자들은 나중에 형제로부터 봉작을 받게 된다.[66] 다만 아들들에게 친왕직을 안준 이유는 조부 강희제 시절의 숙부들과 아버지 옹정제의 궁정암투를 보고 자랐고 본인도 셋째형 홍시에게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황자들에게 청나라는 다 친왕직을 주지는 않았는데 친왕직을 준다는것은 그만큼 후계자 후보로 생각한다는 뜻이나 매한가지이니 친왕직을 주는걸 꺼릴수밖에 없었을 것. 실제로 8황자 영성을 제외하면 5황자 영기나 11황자 영성도 후계자 후보로 추정되던 황자들이다.[67] 주인공인 위영락이 임신했을 때 직접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작품에서 인증했다.[68] 우리나라에서는 청향비로 소개되었다.[69] 독자적 연호가 아닌 청나라의 연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