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미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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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명: 윌리엄 렌드럼 미첼 (William Lendrum Mitchell)
  • 출생: 1879년 12월 29일
  • 사망: 1936년 2월 19일

1. 소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했던 미국의 군인. 최종 계급은 준장.[1] 헨리 아놀드와 더불어 미국 공군의 아버지로 꼽히는 인물이다.
육군 소속이었지만, 당시에 막 등장한 항공기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하여 미군 내에서 공군력의 위상 강화를 역설했다. 동 시대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 등과 함께, 공군력 발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

2. 생애


1879년 12월, 프랑스 니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이었고, 덕분에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898년 스페인과의 미서전쟁 발발을 계기로 미 육군에 입대했다. 처음 입대할 당시에는 일반 병사 자격이었지만, 곧 통신 장교로 임관했다.
항공기가 등장하자 일찌감치 그 군사적 가치에 주목했고, 1916년 38세의 나이로 비행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했는데, 당시 중령이었던 미첼은 유럽으로 파견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항공 전투 경험을 열심히 배우고, 프랑스군 조종사들과 함께 서부전선을 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전쟁 말기 유럽 전선에 투입된 미 육군 항공단장으로 활약하였다. 계급도 준장으로 올라가 일약 장성의 반열에 올라섰다. 미군 내에서 단연 항공력에 관한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종전 직후인 1920년의 미 육군 조직 개편에서 항공 병과가 보병, 포병의 뒤를 잇는 3대 병과로 강화된 것도 그의 공로였다.
기세가 오른 미첼은 더 나아가 육군, 해군과 동등한 독립 군종으로서 공군의 창설을 강력히 주창했다.[2] 이 과정에서 그는 "전함 1척이면 항공기 1,000대를 확보할 수 있다"면서 항공기의 기술적 우위를 강조하였고, 1921년에는 항공기로 군함을 공격하는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미첼이 기획한 항공기의 군함 공격 시범 영상)
이러한 그의 공군 강화, 독립론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군 내부에서는 기존 육군과 해군의 견제, 반발을 야기했고, 미첼은 점차 미군 내부에서 골칫거리로 여겨지게 되었다. 급기야 상부에서는 미첼을 항공 병과와 무관한 부처로 전출, 파견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미첼은 1922년 이탈리아에서 항공력 이론의 원조인 줄리오 두헤를 만나 교류하였고, 자신의 공군력 독립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24년에는 일본과의 전쟁을 예견한 보고서를 작성, 진주만 공습의 가능성까지 제시했다.
결국 1925년 미첼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5년간 직무 정지를 선고받았고, 이에 반발하여 이듬해 사표를 내어 군을 떠났다. 이후 강연 활동에 주력하며 살다가 10년만인 1936년, 57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별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3년 전이었다.
그의 평생 숙원이었던 미 공군의 독립은 2차 세계대전의 미국 육군항공대 사령관으로 공군의 가치를 입증한 헨리 아놀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3. 기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두리틀 공습 등의 임무에 활약한 B-25 폭격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고향인 위스콘신 주 밀워키의 밀워키 미첼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미 공군사관학교에서도 생도들의 식사실을 '미첼 홀'로 명명해 그를 기리고 있다.
2007년에는 미 공군협회(Air Force Association) 내부의 연구소가 '미첼 항공우주력 연구소'(Mitchell Institute for Aerospace Studies)로 명명되었다.

[1] 사후 소장 계급이 추서되었다.[2] 당시 독립 군종으로서 공군을 창설한 국가는 영국 등 소수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