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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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
'''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
1941년 12월 7일, 항공모함 중심의 일본군 해군 연합함대가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 하와이 오아후 섬 진주만에 공습을 가한 사건. 이는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 즉 '''제 2차 세계대전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으로 확전된 사건'''이기도 하다.[8] 미해군의 주요 해군기지였던 진주만을 일본 항공모함이 기습하여 정박해 있던 미해군 함대를 궤멸시킨 전투로, 해전에 있어서 항공모함 시대를 개막한 이정표로 본다.[9] 또 전술적으로는 완벽한 일본의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패망'''의 길을 연 계기가 된 결정적인 실책으로 평가된다.[10]'''もしかすると、私たちは、眠れる獅子を触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2. 원인
2.1.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유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에 나온 이유로 일본제국은 미국과 전쟁을 결정한다. 이제 일본은 전쟁을 시작할 방법을 두고 논의를 벌이는데, 이때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쟁계획을 제안한다. 야마모토의 주장에 따르면 '그나마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방법'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거기에 기지를 둔 태평양 최강의 함대인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최소한 괴멸 직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이 힘을 회복하는 동안 일본에게 없는 석유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를 점령하고 섬들을 요새화해서 미국의 공세 의지를 꺾고, 가능하면 더 이상의 결전없이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고, 정 안 되면 태평양을 종심(縱深)[11] 이 깊은 전장으로 삼아 미국의 공세전력을 소모시켜 최종 결전에서 그들을 격멸하고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단, 이들이 놓친 점이 있었으니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말아먹고 앞으로 또 세계대전 하나를 말아먹을 계기인 '''전선이 이중화'''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12]
어차피 둘 사이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은 유럽 전선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태평양 전선으로 모든 여력을 돌릴 예정이었으며 일본의 점령지는 절대로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태평양 함대의 건조도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유럽 전선이 결판나기 전에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뒤, 적절히 협상하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 전선은 추축국이 매우 유리한 형세였으므로 그대로 종전된다면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일본은 미 대륙을 고립시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혹여라도 추축국이 패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병력이 분산될 때 결판을 지어야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즉, 미국과의 결전 자체는 충분히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이 모스크바까지 밀린 상태로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의 경제력이 초반에 입은 타격을 전부 복구하고도 남아돌 것이라고 당시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지형적 특성상 서로 간에 타격을 주려면 해군이 필수불가결했고 반대로 이것만 없으면 일본은 상당한 기간 동안 식민지의 점령을 공고히 하고 국제사회에서 이를 인정받을 기간을 벌 수 있었다.[13]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어도 적이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적이 나를 공격할 유일한 수단을 미리 잘라놓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14] 즉, 나를 공격할 도구인 적의 팔다리를 잘라놓고 회복되기 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그 당시 파악된 미국의 역량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있었으니 일본의 원래 의도대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15] 이와 거의 똑같은 사례가 독소전쟁인데 이 경우도 독일은 소련을 아주 호구로 여겨서 허접한 소련군 따위는 10주면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일을 저질렀지만 현실은 굳건히 버틴 소련에게 역으로 털리는 결말을 맞게 된다. 설사 적이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면전에서 상대방의 전력을 줄여놓는 것은 초반 전세의 승기를 잡고 후에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좀 더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히라타 신사쿠 제독이 1930년에 출간한 '우리가 싸운다면' 이란 책에서 일본이 먼저 미국의 하와이를 공습한다면 미군의 사기가 떨어져 미 해군이 괴멸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례가 당시 일본 군부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구상의 전제조건인,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일단 미국이 일본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일본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정치인들은 일본보다 유럽에 더 관심이 있었고 이는 심지어 진주만 공습을 당한 이후에도 유럽 전선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다.[16] 문제는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설치는 것을 미국이 계속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고 침략으로 먹은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는데 일본 군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물론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이쯤에서 미국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물러났겠지만 당시 일본은 그렇게 멀쩡한 나라가 아니었다.[17]
사실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도 주저없이 총력전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히틀러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인 것은 진주만 공습의 결과였다. 아무리 미국의 국력이 대단하더라도 총력전 태세 없이는 국력을 동원하는데 한계가 있다.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총력전 태세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그 역할을 일본과 독일이 해낸 셈이다.
특히 적당히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면 진주만 공습은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협상에 응할 것인가 여부는 물론 전세에도 좌우되지만, 국민 감정에 따른 여론에도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쟁에서의 유불리만을 고려했을 뿐 미국의 일반 국민 및 정치인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건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면 진주만 공습과 같은 방식을 협상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러일전쟁이 "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와 협상하는" 사례로 제시되기도 한다. 1904년 일본은 국력이 3~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러일전쟁을 벌였다. 유리한 전장상황과 1905년 미국의 중재에 힘입어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고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전쟁 당시 모스크바까지 공격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 인근인 블라디보스토크도 전장이 아니었다. 주요 전장은 만주와 대한해협으로 국한되었다.일본은 이 러일전쟁을 주목했고 그 대상이 미국과 태평양으로 변경되었으며 목표는 아시아로 확대된 것이다.[18] 물론 이번 전쟁의 중재자도 정해놨는데 그것은 진주만 공습 8개월 전인 1941년 4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본의 구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망하게 된다.
- 미국은 일본을 선공하지 않았고 무역봉쇄를 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중국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즉, 일본은 중국 침략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을 선제공격한 것이다. 이 전쟁은 당시 군국주의에 찌든 일본 군부가 정권을 몇 년 더 쥐는 데는 "피할 수 없었"을 지 몰라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관점에서, 아니 같은 일본 군부에서도 상식인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문제는 당시 일본제국을 지배하던 세력이 일본 군부, 그 중에서도 상식과 거리가 먼 파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 또한 거기에 동조하는 상황이었으니 기존의 일본 군부가 실각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 위에 설명된 작전술을 봤을 때 가장 결정적인 패인은 바로 미국의 국력은 이미 일본 혼자서 어찌 할 수 없을 수준으로 엄청났기에 일본이 미국의 팔다리를 잘라버려도 미국은 그것을 복구하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아니, 일본 따위가 아니라 당시 최강국의 하나로 여겨지는 영국이라고 하더라도 미국의 국력에는 못미친다. 가령 2차대전 동안 영국이 영연방과 타국에서 지원받은 수송선을 다 합쳐서 1,500만 톤의 수송선을 건조했는데 미국은 혼자서 2,500만 톤을 찍어냈다. 게다가 저짓을 하면서 주력함 수십척을 포함해서 수백대의 군함을 찍어낸 건 덤이다.
-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가 입장을 굽혔던 가장 큰 이유는 쓰시마 해전의 패배가 아니라 러시아의 내부 정치 사정이었다. 미국은 그런 약점이 없었고, 오히려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미국 역사상 전례없던 분노와 전쟁의지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국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을 몇 년 동안 문제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 일본은 점감요격작전을 세워 미국 해군을 잡으려 했는데 이 작전의 전제조건은 미국 해군이 수십년 전 1905년의 러시아 해군처럼 전함군을 몰고 와야했으나 미국은 전함 대신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해군을 운영했다.[19] 그리고 전함이라고 해도 제대로 정찰도 하지 않고 무모하게 진격하는 식으로 운용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지리적으로도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에 난점이 하나 있었으니 발트 함대는 유럽에 있었는데 이 발트함대가 거의 세계일주를 하다시피하며 쓰시마 섬까지 와야 했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수만 킬로미터를 항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태평양 전쟁 때는 이미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지 한참 지났었기 때문에 미국 대서양의 함대들이 태평양으로 합류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 일본이 중재자로 지목한 소련은 친미적이지 않지만 당연히 일본과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소련 입장에서 당장 1년 전에 일본과 짧지만 수만 명이 죽고 다치는 대규모 전투를 치렀고, 일본은 엄연히 소련과 전쟁 중이던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때문에 미국과 일본이 소모전할 때 일본 좋으라고 나서줄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한창 독일과 전쟁 중일 때도 모스크바 전투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병력을 극동 전선에 배치해 두었고, 태평양 전쟁 말에 일본군이 완전히 밀린 뒤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포고할 때 일본의 사정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20]
3. 전개
3.1. 일본의 준비
미국과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일본군 수뇌부는 남방작전을 수립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였다. 하지만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남방작전 이전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먼저 공격해두지 않으면 남방작전 내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은 일본군 수뇌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당시 일본해군의 기본적인 대미작전 개념은 점감(漸減)전법으로 개전 후 서진(西進)하는 미군 함대를 잠수함과 항공기로 위치를 파악하고 잠수함과 항공기로 이들에게 1차 손해를 준 후에 이어서 순양함과 구축함 전대를 동원하는 야간전투에서 2차 손해를 준 후 전함간 포격전으로 미군 함대를 최종적으로 격퇴한다는 것이었다.[21]
이러한 작전안의 문제는 '''미군이 일본군의 예상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미 해군도 일본 해군과 유사한 작전개념안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선전포고를 먼저 하고 실제 전투는 나중에 진행할 경우 미군도 일본군과 비슷하게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군이 일본이 예상한 경로 그대로 진격하지 않고 남방작전을 하러 떠나는 일본군을 측면에서 때린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진격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일본 해군의 머리가 굳으신 높으신 분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어디까지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이 해군의 주력'''이라는 사상을 지녔던 다른 제독들도 반대 의사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무엇보다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관을 사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수뇌부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남방작전과 동시에 진주만 공습을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에 앞서 연구한 것은 바로 영국군이 실시한 이탈리아의 타란토 공습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과 타란토의 조건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어뢰를 통한 공격이 가능하며 400기 정도의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만 동원한다면 진주만 공습도 성공할 것이란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일본해군의 조종사들은 여름부터 철갑탄을 이용한 폭격과 뇌격훈련에 돌입하였다. 더불어 진주만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모형을 보여주면서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정확하게 미국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식별할 수 있는 훈련도 병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정보계통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태평양 함대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요시카와 타케오라는 해군 소위 출신 첩보원[22] 이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에 상주하여 어디에 항공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어느 군함이 어디에 정박하고 있는가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전달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함대의 모든 군함이 토요일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장 최적의 공격시간이 일요일 새벽이란 보고서를 올릴 수 있었다. 이상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 수뇌부는 1941년 11월 17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몇 가지 사정이 겹쳐서 결국 12월 7일이 최종적인 공격일로 확정되었다.
작전일이 확정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조직하였다. 무엇보다 작전이 노출되면 안 되었기 때문에 11월 22일까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쿠릴 열도 부근의 히도카푸만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항해 중에는 절대 무선교신을 해선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졌다. 게다가 승조원들에게는 어디로 가기 위해 모인다는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더불어 집결지인 히도카푸는 미국 첩보원들이 전혀 파악하지 못한 조그만 항구였다.
11월 26일, 군함들이 한 척씩 따로 빠져나가는 방식을 채택하여 진주만을 향해 닻을 올렸다. 더불어 항로 역시 민간상선이 전혀 다니지 않는 곳과 미국 정찰기가 비행하지 않는 곳 위주로 선정하여 항해했으며 선박이 배출하는 배기가스로 인해 발각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군함의 연료로 '''경유를 사용'''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23] 태평양을 우회한 함선도 있고, 동해를 지난 함선도 있으며 전파 발신을 통제하고 전신키를 봉인 할 정도로 신중하였다.
제1항공함대 비행대가 철수한 큐슈 남부의 각 기지에는 다음날 바로 큐슈 북부 방면 소재의 제12연합 연습항공대의 교육부대가 이동하여 바로 다음날 부터 쉬지 않고 연습하며, 항공함대의 비행대 이동이 없는 것 처럼 위장하였다. 또한 통신 방첩도 고려하여, 각 기지는 그 전날 까지의 통신량과 차이가 없도록 동일한 호출 부호로 연습문을 주고 받았다. 기동부대 편지는 모두 밀봉하여 그대로 두고, 진주만 기습 성공 소식이 전해 진 이후에야 배달하는 등 보안이 철저하였다.
히도카푸 만에 집결한 병력은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 급유함 8척등 총 31척이였다. 이제는 누설될 우려가 없다고 판단된 11월 22일 나구모 사령장관은 기동부대 모든 승조원에게 공격의 목표가 진주만이라고 알렸다.
각 항모의 탑재기 대수는 1항공전대 아카기, 카가에는 각 60대. 2항공전대 소류, 히류에는 각 50대. 5항공전대 쇼카쿠와 즈이카쿠에는 각 70대로 합계 360대였다. 모든 탑재기가 한번에 발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1파 189대, 제2파 171대의 파상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첫 발진은 일출 30분전으로 정했다.[24] 1차와 2파는 45분의 간격을 두고 발진하기로 하고, 발진 지점은 오아후 섬의 정북쪽 230해리.
1차 목표는 하와이 방면에 있다고 예상되는 항모 2척, 전함 8척이며, 2차 목표는 갑 순양함 10척, 을 순양함 6척, 구축함, 잠수함, 기타 보조함정이었다. 또한 미군의 항공 병력을 봉쇄하기 위해 하와이 방면의 6개 항공기지 공습을 제2항공전대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더 이상 미국과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본군 수뇌부는 작전시작을 결정하였고 12월 2일 나구모 제독에게 '니타카 산(타이완 섬의 최고봉: 현재의 옥산)에 등반하라 1208(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암호문이 전달되었다.
12월 6일 현지시간 10시 30분.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전보를 보내왔다.
각 함의 돛대에는 Z기가 게양되었다. '어망투척중'을 뜻하는 깃발로, 러일전쟁 때 동해 해전 이후 무려 36년만에 게양된 것이다. 원래는 함대에 물자가 부족할때 그걸 메꾸기 위해 물고기를 직접 잡아 식량조달을 하던 때 걸던 깃발이었다.황국의 흥망이 이 정전(征戰)[25]
에 있으니, 분골쇄신하여 각자 그 책임을 완수하라
3.2. 미국의 준비
미국은 비록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시켰지만, 이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였을 뿐 전쟁을 하기 위한 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태평양의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고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비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특히 필리핀에 주둔 중인 연합군과 일본 본토와 근접한 주요 섬들이 공격대상으로 예측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작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는 개전되기 직전에 가까웠던 터라 긴급히 작업을 시작했어도 공사기간 등의 문제로 개전 당시 제대로 된 준비가 된 지역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대서양에서 독일군의 유보트가 악명을 날리자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일부 전력을 차출하여 대서양 함대에 편입시켰다. 태평양 방면의 전력 강화도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현재 보유한 전력과 무기만 있어도 일본군 따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근성이 없어서' 미국이 금방 협상 테이블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일본이나 '쬐끄만 뻐드렁니쟁이들이 뭐 대단하겠어?'라고 일본을 얕잡아 본 미국이나…. 어차피 전쟁은 잘 싸우는 쪽과 못 싸우는 쪽의 대결이 아니라 삽질하는 쪽과 더 많이 삽질하는 쪽의 대결이라는 말도 있으니.
특히 일본 해군의 목표인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은 '''"어차피 걔네들 여기까지는 공격하러 못 와."'''라고 생각하면서 모두들 퍼져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면 필리핀이나 태평양 섬에 있는 아군들이 좀 고생할 거고 거기서 지원 좀 해달라고 무전 때리면 그때 가서 일본군과 좀 놀아주다가 오는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일본에서 보낸 첩보원이나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일본인들, 특히 당시 하와이 인구의 30%가 일본계였으므로 이들이 벌이는 사보타주가 문제였다. 이에 따라 몇 가지 조치를 강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오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러 매체에서 사골로 등장하는 항공기들을 특정 장소에 빽빽하게 배치하고 감시병을 둔 사례가 있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미국도 슬슬 붙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주력이 서서히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집결하자 미군은 일본군이 그들의 예상대로 남방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소수 관계자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주장하였지만 완전히 묵살되었다. 다만 일본 해군이 전통적으로 6개월마다 바꾸던 함대 호출부호를 12월 1일에 1개월만에 바꾼점에 불안을 느낀 킴멜 제독은 정보 참모로부터 일본 해군의 제 1,2 항공전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정찰기의 수량이 부족한지라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였다.
어쨌든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했기에 전방기지에 항공기와 병력, 물자를 배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2월 3일에는 당시 해군참모총장이던 스타크 대장이 일본대사관과 영사관에서 퍼플 암호 기계를 해독하고 있다는 초 극비사항을 일선 사령부에 알렸으며 공습 전날에는 회의도중 하와이의 일본 영사관에서 서류 소각과 암호기계를 파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킴멜 제독은 전쟁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만 판단해 버렸다. 다만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항공모함이 없는 동안 주력함대를 출항시키는것은 위험하고 판단하여 항공모함들이 돌아올때까지 육군 항공기들이 지키고 있는 진주만에 함대를 그대로 두었으며 이 조치는 미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12월 7일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3.3. 선전포고 없는 전쟁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전쟁으로 국제 외교사에 있어 보기 드문 사례이지만, 진주만에 앞서 러일전쟁에서의 선전포고 이전에 러시아 전함과 함대등을 공격한 전례 또한 일본이 주체였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조선에서의 군사적 행위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비합법적인 방식이였다.[26]
선전포고 없이 벌인 공격이긴 한데 그래도 일본군이 이 당시에는 아주 맛이 간 건 아닌지 야마모토 제독은 선전포고를 한 후에 진주만 공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받아들인 일본 정부는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米国及英国ニ對スル宣戦ノ詔書)"란 이름의 선전포고문을 발표한다(일본어 원문). 그리고 따로 미국을 위한 선전포고문을 진주만 공습 직전에 주미일본대사관으로 보냈다. 이 문서는 총 14개 부분으로 이루어져있어서 일명 14 Part Message로 불린다. 처음 13개 부분은 영어로 적혀있었고, 마지막 14번째 부분은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정작 노무라 키치사부로[27] 주미일본대사가 '14 Part Message'라 불리는 13000자 내외의 선전포고 번역문을 들고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찾아갔을 때는 워싱턴 D.C. 시각으로 7일 오후 2시. 암호문에는 공습 직전인 오후 1시에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라고 나왔지만 노무라 대사는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2시로 연기한 것. 이 시각은 하와이 기준으로 8시 50분인지라 이미 헐 장관이 1시간 전에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은 뒤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선전포고문이 5000자나 되는 장문이라 암호 해독이 늦었고 보안 인가를 받은 타자기를 다룰 인원이 없어서 보안인가가 있는 고위 관료[28] 가 직접 독수리 타법으로 방금 해독한 선전포고문을 느리게 타자했기 때문이다. 원래 타자기를 다루는 사람이 외국인이었는데, 기밀문서란 이유로 관내의 모든 외국인들을 다 내보낸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 거기에 가장 중요한 일본군이 전쟁을 선포한다는 내용은 선언문 가장 마지막에 써 넣어 버려서 일본 대사관 직원들도 해독이 끝날 시점에야 전쟁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격 당시에도 선전포고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전포고문을 보낸 암호 해독이 늦어져서 공습 뒤에 미국 측에 선전포고문이 전달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더 웃긴 건 선전포고문을 처음 받았을 당시 주미 일본 대사관은 사실상 휴업 상태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대단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일반인도 뻔히 아는 상황인데 외교관들인 대사관 직원들이라면 더욱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대사관 직원들은 비상 근무는 커녕 평시 수준의 근무조차 하지 않았다. 오쿠무라 서기관이 암호문을 해독하느라 낑낑대고 있을 시각에 대다수의 대사관 직원들은 12월 6일(대사관이 있는 워싱턴 D.C. 기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전근 가는 직원의 송별 파티를 점심부터 오후 내내 하고 있었다. 물론 파티 후 주말이라며 일찍 퇴근해 버린 것은 덤. 그래서 안 그래도 느린 선전포고문 해독 및 정리가 더 늦어버렸다.
거기에 선전포고문인 14 Part Message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단히 엉망진창인데다(문맥이 안 맞는다든가 이리저리 헛소리만 잔뜩 들어 있다든가…) 결정적으로 선전포고문이 성립하려면 꼭 필요한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직접적인 언급(State of War 등)이 단 한 단어도 없다. 앞뒤사정을 모르고 보면 엄중한 경고로밖에 볼 수 없는 문장이다. 미군 측은 일본으로부터 오는 무선을 당연히 도청하고 있었고 14 Part Message를 '''일본 대사관보다 먼저 해독하는 데 성공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었고 그저 단교 선언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암호를 해독한 관계자들조차도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경고밖에 내릴 수 없었다.[31] 그리고 경고가 발령된 때는 이미 진주만이 공습을 당하고 있던 시점이었다....よって帝國政府はここに合衆国政府の態度に鑑み今後交渉を繼續するも妥結に達するを得ずと認むるの外なき旨を'''合衆國政府'''に通告するを遺憾とするものなり。
... The Japanese Government regrets to have to notify hereby the '''American Government''' that in view of the attitude of the American Government it cannot but consider that it is impossible to reach an agreement through further negotiations.
일본 정부는 '''미 정부'''[29]
에게 미 정부의 태도로 비추어볼 때 더 이상의 협상을 통하여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30] 이로써 통고해야 함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선전포고문 마지막 문장.
이런 상식에서 벗어난 작태를 목격한 헐 장관은 노무라 앞에서 분노에 차서 이렇게 일갈해 버린다. 그리고 축객령을 내려 버렸다. 외교관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만 갖췄지 이건 대놓고 폭언을 한 격. 그 정도로 심각했다.I must say that in all my conversations with you...during the last nine months I have never uttered one word of untruth. This is borne out absolutely by the record. In all my fifty years of public service I have never seen a document that was more crowded with infamous falsehoods and distortions on a scale so huge that '''I never imagined until today that any Government on this planet was capable of uttering them'''.
▷ 진심으로 말하건대, 지난 9개월 동안 본인은 거짓된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이는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공직 생활을 50년 동안 해 왔지만 이런 문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악질적인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나머지 '''지구상에 이런 문서를 낼 만한 정부가 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반대로 미국 측은 일본에 먼저 선전포고를 한 후, 일본의 편을 들어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에 차례차례로 선전 포고를 하고, 선전포고 권한이 있는 의회는 하원과 상원을 소집하여 선전포고문을 통과시켰다. 그 후 FDR이 서명을 완료하고 주일 미국대사관을 경유하여 주일 미국 공사[32] 를 통해 일본 쇼와 덴노 앞으로 직접 보내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의회가 대통령에게 제출한 전문을 읽어 보면 필요 없는 헛소리는 하나도 없이 짧고 단도직입적임을 볼 수 있다.JOINT RESOLUTION
Declaring that a state of war exists between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and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and making provisions to prosecute the same.
Whereas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has committed unprovoked acts of war against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refore be it Resolved by the Senate and House of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Congress assembled, That the state of war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which has thus been thrust upon the United States is hereby formally declared; and the President is hereby authorized and directed to employ the entire naval and military forces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resources of the Government to carry on war against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and, to bring the conflict to a successful termination, all the resources of the country are hereby pledged by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양원 합동 결의
일본 제국 정부와 미 합중국 정부 및 국민들 간에 전쟁 상태가 존재함을 선언하며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한다.
일본 제국 정부는 미 합중국 정부 및 국민들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전쟁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상원과 하원 합동 회의는 미 합중국이 불가피하게 일본 제국 정부와의 전쟁 상태에 들어갔음을 공식 선언하며 일본 제국 정부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종식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미 합중국의 해군과 육군 및 정부의 모든 자원의 동원을 허가하고 위임할 것을 결의한다.
- 미국 하원에서 발의되어 하원과 상원을 통과한 선전포고문.
미국과 일본이 종전 때까지 서로의 외교공관을 유지하여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잘못된 소리다. 전쟁이 나자 미국과 일본은 곧 단교하고 외교공관을 폐쇄했다. 다만 지리적 문제로 인해 체류 중이던 외교관들과 시민들을 바로 송환하지 못 했을 뿐이다. 나치독일은 영국과도 선전포고 후 곧 단교하고 외교관들과 시민들을 서로 송환했으며, 소련과도 그랬다. 소련은 독소전 발발 1주일 후 주소 독일대사관을 폐쇄했고, 외교관들의 송환은 당시 중립국이었던 터키를 통해 시행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중립국에서 협상하여 조셉 그루 대사를 위시한 모든 공관원들과 자국 시민들을 전쟁 중 2차례에 걸쳐 전시 교환선을 통해 지금의 모잠비크와 포르투갈령 고아 등지에서 일본과 교환하여 외교관들은 전부, 민간인들도 할 수 있는 한 귀국시킨다.(#) 따라서 전쟁 중반 이후로는 어떤 식으로든 연합국에 체류 중이던 일본 외교관도 일본에 체류 중이던 연합국 외교관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체 왜 단교는 안 했다는 얘기가 퍼진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일본은 진주만 이전에도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선전포고 없는 선공 전례가 많아 본건에서도 고의성을 의심할 만하다. 사실 위의 전달 지체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선전포고문이랍시고 써놓았지만 전쟁을 개시한다는 직접적인 문구가 없는 등 국제법상 선전포고문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설령 시간에 맞추었다고 해도 선전포고로 보기가 어렵다.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일본의 언급을 미국인들이 초월 해석해서 '이 정도면 개전 선포다'라고 인식해야 했을까?
4. 불타오르는 진주만
12월 7일 새벽 일본 연합함대는 하와이에서 북서쪽 370km 해상에 도착하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공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이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정보를 받았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태평양 함대에 항공모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가 소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크타운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깔짝대는 유보트와 싸우러 대서양에 가 있었고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으며 렉싱턴은 미드웨이 섬에 전투기 배달하러 간 상황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전투기 배달하고 전날인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열대폭풍 때문에 우회하느라 입항이 하루 늦어져서'''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
나구모 제독은 미국이 공습을 눈치 채고 항공모함을 진주만이 아닌 다른 곳에 배치한 것 아닌가 걱정했지만 미국 항공모함의 정보를 확인한 후에 움직일 정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차 공격대가 이륙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 후 2차 공격대가 준비를 마치고 이륙하였다.
사실 당시 미군 태평양 함대는 일본군의 이상징후를 두 차례 감지했으나 이것을 진주만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 첫번째 징후는 일본군 잠수함의 출현이었다. 공습직전 일본군은 갑표적을 파견하여 항공대의 공습작전에 호응하여 어뢰 몇 발 쏘고 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척은 좌초했고 최소 2척이 공습이 시작되기 전 진주만에 접근하다가 칸톤 섬(Canton Island)에 육군 804 공병대대 병력과 민간인, 물자 등을 내려 주고 돌아오던 해군 수송선 AG-10 USS 안타레스(Antares) 함에 발견되었다. 안타레스는 인근에 초계(哨戒) 중이던, 윌리엄 W. 아우터브리지(William W. Outerbridge)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DD-139 USS 워드(Ward) 함에 이를 알렸고, 아우터브리지 소령은 경보를 받은 직후 소해정 USS 콘돌과 함께 갑표적을 찾아내 격침시켰다. 그리고 이를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보고하지만, 관저에서 보고를 받은 사령관 허스번드 킴멜 제독은 "그 풋내기 함장한테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다음에 다시 보고하게."라고 답변하며 사실상 보고를 무시했다. 아우터브리지 소령은 구축함 함장으로 막 배치받은 신참이었고, 부임 일자도 불과 2일 전인 1941년 12월 5일이었기에, 킴멜 제독이 미숙한 초임 함장을 믿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두 번째 징후는 당시 진주만에 갓 설치한 육군의 통신중대 하와이 공습경보대(Signal Company Aircraft Warning Hawaii, SCAWH) 소속 SCR-270 방공용 레이더에서 감지됐다. 이 레이더는 고도까지는 알 수 없는 2차원 레이더였지만, 탐지 거리 240㎞에 달하는 최신 장비였고, 일본 해군기들을 탐지해내는 데 성공하며 레이더 자체는 밥값을 했다. 당직 근무중이던 두 육군 레이더병인 조지 엘리엇 주니어(George Elliot Jr.) 이병과 조셉 로카드(Joseph Lockard) 이병은 무수히 많은 점이 북서쪽에서 다가오는 장면이 포착된 것을 확인하고 당직사관인 육군 제78전투기편대 부편대장 커밋 아서 타일러(Kermit Arthur Tyler) 항공중위에게 보고했지만, 때마침 미 본토에서 육군항공대 B-17 폭격기 편대가 올 예정이었고, 하필 방향도 폭격기 편대의 진로와 얼추 일치했기에, 타일러 대위는 "별거 아냐, 신경 꺼(Well, Don't worry)."라며 무시했다. 얼핏 보면 타일러 대위가 안이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일 수 있고 실제로 공습 이후 해군의 군사 법원에 기소되기도 했으나, 당시엔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론이 나와 타일러 대위와 두 레이더병은 처벌 받지 않았다.[33] 이런 결론이 나온 이유는 진주만 공습이 그만큼 상식적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기에는 레이더가 없었고, 총대장기에만 미국에서 직수입한 '크루시(Kruesi)'라는 라디오 방향 탐지기 1대가 있었다. 후치다가 라디오 스위치를 키니 호놀룰루 방송국의 경쾌한 재즈가 크고 명료하게 들려왔다. 안테나를 이용한 방향 측정으로 무선 항법을 하였다. 이어진 호놀룰루 방송은 아침 일기예보를 하였다. "오아후 섬 날씨는 개었다 흐렸다 하겠으며, 산에는 구름이 끼겠지만 구름 높이는 3,500피트, 시야는 양호하며 북풍 10노트"라는 중요한 항공 기상 정보를 제공하였다.
오전 7시 30분. 비행대는 한 대의 낙오도 없이 순조롭게 예정된 계획에 따라 비행 방향을 크게 우회하여 섬의 남서쪽에서 진주만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비행총대장 후치다가 전개 명령으로 1발의 신호탄을 쏘자 강하폭격대는 고도를 높여 급강하 준비를 하고, 뇌격대는 고도를 낮춰 어뢰발사 준비를 하였다. 또 수평폭격대는 맞바람이 좋기에 바람 아래쪽에 위치하였다. 단, 제로센 제공대는 속도를 올려 앞으로 나가 제공작전을 하여야 하나 신호를 보지 못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후치다가 다시 한 번 1발의 신호탄을 쏘자 그제야 제공대는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강하폭격대가 이걸 신호탄 연속 2발로 착각하였다. 신호탄 연속 2발은 공격 개시였다. 뇌격대가 먼저 공격을 개시해야 하지만 이 착각으로 뇌격대와 강하폭격대는 동시에 공격에 들어갔다.
오전 7시 49분. 후치다 비행총대장은 전군 돌격을 명령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도쿄시간으로는 12월 8일 오전 3시 19분이었다.
도라 도라 도라}}}제로센 제공대가 먼저 나아갔지만 공중전의 기미는 없었다. 지상의 대공포화의 움직임도 없었다. 기습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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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53분 비행총대장의 명령으로 후방 전신석에 앉은 통신사 미즈기 토쿠신이치 1등 비행병조장은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그 유명한 암호명 '''"도라 도라 도라"'''를 사령부에 발송하였다.[34] 해당 암호는 호랑이란 뜻도 있지만 사실은 돌격을 뜻하는 '토츠게키(突撃)' 와 뇌격을 뜻하는 '라이게키(雷撃)' 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항공기에 탑재된 소형 전신기의 출력으로는 3000해리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모함인 항모 아카기는 물론, 도쿄 대본영에서도 직접 수신했다고 한다.
7시 55분. 다카하시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51대는 두 팀으로 나눠 있었다. 대장이 직접 이끄는 쇼카쿠 대는 히컴과 포드 섬 양 기지를 공격하고, 사카모토 아키라 대위가 이끄는 즈이카쿠 대는 휠러 기지를 공격하였다.
7시 57분. 무라타 소좌가 이끄는 뇌격대는 전함 USS 웨스트 버지니아에 첫 어뢰를 명중시킨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어뢰 공격을 하였다.
8시 정각. 비행총대장이 이끄는 수평폭격대 50대는 10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에는 9대가 각 1발씩 발사하면 1발쯤은 맞추겠지. 하는 생각으로 9대가 1개 팀이였지만, 명중률의 상승으로 5대면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1개 중대 5대 편제였다. 비행총대장이 소속된 제1중대가 포드 섬 동측 계류장 가장 북쪽에 있던 전함 USS 네바다에 명중탄을 냈다. 그 순간 제2중대가 북쪽에서 2번째 위치한 전함 USS 애리조나의 2번 포탑에 명중탄을 냈다. 화약고가 위치한 자리라 대폭발이 일어났다. 다른 전대에 진동이 올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이어 3번째 위치한 USS 웨스트 버지니아와 테네시도 타올랐고, 4번째 위치한 USS 오클라호마와 USS 메릴랜드와 5번째 USS 캘리포니아도 타오르며, 포드섬 동측 계류장 북쪽에 계류되어 있던 전함 8척 중 무려 7척에 명중탄이 났다. 포드섬 남쪽에서는 전함 USS 펜실베니아 함만 타격을 입었다.
8시 30분. 이타야 소좌의 제공대는 적 전투기가 나타나지 않아 할 일이 없었다. 이에 6개 반으로 나눠 각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미군 항공기들도 공습 와중에 간신히 일부가 이륙, 반격에 성공했다. 먼저 해리 브라운 육군 소위가 P-36을 타고 이륙하여 휠러 비행장에서 이륙한 육군 제46전투비행대대의 말콤 무어 육군 소위와 짝을 이루어 일본기를 요격, 브라운 소위는 이 과정에서 오아후 섬 북쪽에서 일본기 1기를 격추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조종사로서 최초의 격추를 기록했다. 뒤이어 오아후의 북쪽에 있는 할레이와 육군 비행장에서 육군 제 47전투비행대대 조지 웰치 소위와 케네스 테일러 소위가 탑승한 P-40 전투기가 이륙하여 에바 해병대 비행장 부근에서 일본 해군기와 조우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2대를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1기를 격추했다. 휠러 비행장에 내려 무장과 연료를 채우고 다시 이륙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2기 추가로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추가로 1기를 격추했다.
8시 40분.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 2파 공중공격대 167대가 도착하였다.
휠러 비행장에서 8시 50분에 제 46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36 전투기 4기가 이륙했다. 이들은 카네오헤 기지 상공에서 제로기 8기와 교전하여 제로기 2기를 격추하고 전투기 1기가 격추되었다. 휠러 비행장에서는 이날 약 25회에 걸쳐 전투기들을 출격시켰다.
8시 54분. 제 2파에서 에구사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78대가 공격 개시하였다. 진주만은 이미 불바다여서 검은 연기가 자욱해 목표물 확인이 어려울 지경이였다. 이때 1차 공격에서 살아남은 일부 미 군함이 대공포들을 발포하였는데 강하폭격대는 이 포격 불빛을 보고 공격하였다.
벨로우즈 육군 항공기지에 일본기가 공격해 왔을 때 제 44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 전투기 12대 중 3대만 발진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고 조지 화이트맨 소위는 이륙하다가 격추되어 전사, 한스 크리스티안 소위는 전투기 탑승 중 기총 소사를 받아 전사, 새뮤얼 비숍 소위도 이륙 직후 공격을 받아 격추되어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해안까지 헤엄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2파 대장 시마자키 소좌가 직접 이끄는 수평폭격대 54대는 히컴 해군 비행장 격납고, 일부는 포드 섬과 카네오헤 격납고를 공격하였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지만 20대가 탄환에 맞아 반복 공격시에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2파 신도 사부로우 대위의 제공대 35대는 1파의 제공대와 마찬가지로 할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1, 2파 전투가 모두 끝나고도 비행총대장 후치다의 기체는 계속하여 진주만 상공을 돌고 있었다. 전과 확인 때문이였다. 전과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공격해오는 미군기는 단 1기도 볼 수 없었다. 귀환한 후치다는 일단 전함 4척 격침은 확실하며 나머지 4척도 대파하였다고 보고하였다.
-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 및 묘사들
2차대전 다큐멘터리 『배틀360』 중에서.}}}"진주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군요. 그래서 후방사수한테 말했죠. '''"육군 새끼들은 대체 일요일 아침부터 뭔 짓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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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용사의 증언 중.}}}"우린 이렇게 말했지. '''"해군 새끼들 훈련 한 번 요란하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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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 함 승조원 '얼 나이팅게일'.}}}갑판에 있던 난 모든 게 불타는 것을 보고 소령님께 배가 불탄다고 보고했다. 소령님은 배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난 마지막으로 배를 떠났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고, 온몸이 불이 붙은 승조원들이 후갑판으로 달려가 뛰어내렸다. 그 결과 모두 죽거나 크게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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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수병들은 일본 전투기가 진입하고 있음에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는 상당 수 수병들이 일본 항공기의 기습을 '''하와이 주둔 육군 항공대가 훈련 비행을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 폭격이 시작됐을 때도 어떤 수병은 감동하며 '''"와!! 훈련 한 번 존내 맛깔나게 하네!!"''' 라고 감탄하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폭탄이 떨어지자 그제야 적의 공격을 인지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것은 주둔중이던 미국 육군에게도 처음에는 '''해군이 훈련을 하는 것'''으로 오인 받았다.
포드 섬 항공기지가 제일 먼저 폭탄에 얻어맞았으며 곧 포드 섬 인근에 정박 중인 전함—일명 '''전함 열(Battleship's row)'''—들이 폭탄과 어뢰를 얻어맞았다. 폭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뢰의 경우 평상시의 군항(軍港)에는 주요 함선 주변에 어뢰 방지용 그물이 설치된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진주만의 군함에는 어뢰 그물이 없었다. 어차피 진주만은 수심이 얕아서 어뢰를 쏴도 어뢰가 자세를 잡기 전에 진흙에 처박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달지 않았지만 일본은 이걸 알고 어뢰에 목재 부품을 장착하여 어뢰가 중간에 흙에 처박히는 문제를 해결했다.
공습을 목격한 해군항공대 작전참모인 로건 C. 램지(Logan C. Ramsey) 소령은 방송실로 뛰어 들어가 총원전투배치(General quarters) 신호와 함께
이라는 전문을 보냈는데, 훗날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위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내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까지 전문이 그대로 전달된다.
제일 먼저 5발의 어뢰[35] 를 얻어맞은 BB-37 USS 오클라호마는 20분 만에 전복되어 승조원 1,354명중 전사자 429명 부상자 32명이 발생했으며 비슷한 시각 BB-48 USS 웨스트 버지니아도 2발의 폭탄과 7발의 어뢰를 맞아[36] 필사의 데미지컨트롤[37] 로 전복은 면했지만 침수가 심하여 착저(着底) 중이었다. 다만 공격 초기에 화재사고가 발생한걸로 오인하고 당직사관이 소화 및 인명 구조 요원 배치 지시를 내린 덕분에 공격 초기에 많은 인원이 갑판위로 올라와 오클라호마와 비슷한 공격을 받고도 인명피해는 오클라호마보다 훨씬 작았다. 승조원 1,541명중 함장 머빈 베닝언 대령을 포함해 전사자 105명, 부상자 52명이 발생했다.
그나마 BB-38 USS 펜실베니아가 1발의 폭탄 명중, BB-43 USS 테네시[38] , BB-46 USS 메릴랜드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메릴랜드의 경우 공격당한 전함들 중에서 가장 먼저 복귀하였다. 테네시는 1,666명의 승조원중 98명이 전사하고 6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메릴랜드는 승조원 1,604명중 4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BB-36 USS 네바다는 공습 당시 진주만의 장병들에게 희망과 기운을 준 함선이었다. 어뢰 한 발을 맞았지만 신속한 조치로 피해 확산을 막았으며, 공습이 벌어지는 동안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항행한 전함이 되었다. 네바다의 승조원들도 필사적이어서 훗줄을 풀 시간이 없자 부두에서 도끼로 훗줄을 내리찍었고, 훗줄들을 내리찍느라 배에 승선하지 못한 그 승조원은 훗줄을 다 풀자마자 바다에 뛰어들어 배에서 내려준 사다리를 타고 승선했다. 항해 중 불타오르는 아군함의 옆을 지나갈 땐 '''방화복을 입고 몸으로 벽을 세워''' 함의 주요 무장과 시설물들에 불이 옮겨붙는 것을 막았다. 네바다가 진주만을 빠져나가려고 움직이며 좌초, 착저된 다른 아군함들을 지나갈 때 해당 함선의 승조원들이 일제히 환호성과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렇게 네바다는 필사적으로 응전하면서 어떻게든 진주만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함에 승함하고 있다 현장 지휘관으로 지휘권을 행사한, 태평양함대 기뢰전단장인 윌리엄 펄롱 소장은 네바다가 탈출하다가 수로상에 있을지도 모를 일본군의 기뢰나 항공기의 공격에 격침될 경우 오히려 진주만으로 드나드는 진입로를 봉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좌초를 지시했다. 이에 네바다는 펄롱 제독의 지시에 따라 폭탄을 얻어맞으며 자력으로 좌초했다가 바닥이 단단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2척의 예인선이 다가가 네바다를 끌어내어 바닥이 단단한 곳에 재좌초시켰다. 어쨌거나 항구가 봉쇄당하는 상황은 면했다. 실제로 일본 해군은 항구의 봉쇄를 노리고 진주만을 탈출하려는 네바다에게 급강하폭격기를 집중시켰으므로 당시 펄롱 제독의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네바다는 승조원 1,354명중 60명이 전사하고 109명이 부상을 입었다.
더불어 진주만 공습의 상징이 되어버린 BB-39 USS 애리조나도 카가와 히류의 항공대로부터 4발의 폭탄을 맞았다. 마지막 철갑탄[39] 이 1번 포탑 근처를 뚫고 들어와서 2번 포탑의 탄약고 바로 옆에서 폭발했고, 7초 후에 탄약고가 유폭한다.
그 충격으로 함수 부근 갑판부터 전방 함교 앞 선저까지 함체가 통째로 찢겨지면서 들려 올라가 1, 2번 포탑들이 있는 갑판과 분리되었고, 그 결과 배가 대각선 '''가로로''' 두동강이 났다. 당연히 함수부 및 전방 함체 내 모든 설비가 파괴되었고, 지지해주던 힘이 사라진 전방 포탑 2기와 전방 마스트도 자신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앞으로 기울어져버린다. 그리고 폭발의 충격파로 함교의 장비와 시설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그 결과 용골이 절단되고 전투 갑판의 수평이 깨지게 되었고, 전함 운용에 필요한 장비마저 대부분 손상된 애리조나는 순식간에 폐함이 되었다.
함교 바로 앞에 위치한 2번 포탑 탄약고의 유폭은 당연히 그 승조원들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애리조나에 승선했던 1전함분대 지휘관인 아이작 켐벨 키드 제독[40] 과 함장인 프랭클린 반 바르켄버그 대령을 비롯해 승조원 1,511명 중 1,177명이 전사했고, USS 애리조나는 21세기 현재까지의 미 해군 역사를 통틀어서 1척의 배로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하게 된다. 탄약고 유폭 후 발생한 화재가 어찌나 엄청났던지 화재 진압 후 함교에서 시신을 수습하러간 대원들이 발견한 건 하정복 단추와 함교 내 철판에 늘러 붙은 해사 임관 반지가 전부였다고 한다. 키드 제독은 이 진주만 공습에서 전사한 미군 최고위 인사이다.
애리조나 바로 옆에는 군수지원함(공작함) AR-4 USS 베스탈이 있었는데 함교에 있던 함장 캐신 영 대령은 이 폭발에 바다로 날아갔다가 자력으로 헤엄쳐 돌아와 다른 배들을 구조했다. 공습에 피해를 본 BB-44 USS 캘리포니아는 한창 데미지 컨트롤 중이었는데 폭발한 애리조나에서 흘러나온 불타는 중유가 캘리포니아를 덮쳐 함정 뒤쪽이 온통 불길과 연기에 휩싸이게 되자 함장이 퇴함 명령을 내렸는데, 그로 인해 어뢰에 맞아 생긴 침수를 제대로 막지 못하게 되었고 애리조나에서 흘러나온 불붙은 기름이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자 다시금 배수가 진행되었지만 캘리포니아의 침수는 계속되었고 결국 착저했다.
전함 이외에도 순양함, 구축함, 기타 함정 등 여러 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주요 항공기지들도 공습을 당해서 많은 비행기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상태가 좀 멀쩡했던 몇몇 지상 기지에서 항공기를 날려 보내기는 했지만 미군 전투기들은 수적 열세로 인해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격추당했으며 이미 정신줄을 놔버린 대공포들이 마구잡이로 쏴대면서 오히려 팀킬도 벌어졌다. 게다가 다른 곳은 공격을 받고 있는데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비행장은 늦게야 상황을 알아차리는 등 이래저래 막장행보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2명의 육군 소위가 조종하는 P-40 전투기 두 대가 일본 해군 폭격기 몇 대를 격추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육상의 육해군 및 민간 시설, 차량 등도 공격받았다. 사상자 명단에는 민간인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도 사령부 건물에 날아온 딱 한 발의 기관총탄에 죽을 뻔 했다. 7.7mm 총탄 한 발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는데 그게 킴멜 제독의 가슴을 툭 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말 그대로 툭 하는, 지나가던 사람과 살짝 부딪힌 정도의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후임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과 대화하다가 이때를 회상하면서 "차라리 그 때 총탄 맞고 죽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함대 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금쪽같은 전력을 날려먹은 책임감에서 나온 말로 추정된다.
1차 공격대가 철수하고 약 30분만에 2차 공격대가 진주만 상공에 돌입하였다. 원래 항공모함을 처리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일본군으로서는 미 항모들이 죄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던 관계로 1차 공격대가 처리하지 못한 잔여 함선과 비행장을 공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무렵 미군은 이미 한 차례 공격을 받았으므로 운용 가능한 얼마 안 되는 전투기도 이륙시키고 대공포도 쏴대면서 맹렬히 대응하였고 그 결과 일본군은 예정된 목표물들은 공격하지 못하고 공격 가능한 임의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한편, 당시 서쪽에서 진주만으로 오던 USS 엔터프라이즈는 남쪽을 수색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일본 항공기가 남서쪽에서 접근했기 때문이었지만 정작 일본 해군은 북서쪽에 있었던 관계로 실패.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기들의 엄청난 항속(航續)능력 때문이었다. A6M의 경우 7시간의 비행이 가능했을 정도였는데 이 장거리 비행능력을 이용해 일본군은 전투기들이 일부러 빙 둘러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방법으로 항모의 위치를 숨겼다. 이러한 장거리 비행능력은 전쟁 후기까지 일본기들이 가진 유일한 이점이었지만 대신 저속으로 장시간 비행해야만 하므로 조종사가 피로로 인해 전투력 자체가 떨어지게 하는 문제점이기도 했다.[41][42] 또한 이 수색에 동원된 함재기 중 일부는 엔터프라이즈에 착함하지 않고 진주만 비행장으로 귀환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공포 부대의 오인사격으로 격추당하는 피해도 있었다. 물론 사전에 대공포 부대에게 통지했지만, 공습으로 인해 대공포 인원들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
한편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의 조리병 도리스 밀러(Doris Miller)[43] 는 함장 멜빈 베니온 대령의 명령을 받은 화이트 중위의 지휘하에 50구경 기관총을 철거하러 갔다가 자발적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화이트 중위도 같이 향한 빅터 델라노 소위와 함께 대공사격을 시작했다.[44] 그리고 적기의 공격이 잦아들자 밀러는 다른 수병들과 함께 폭탄같은 위험물을 배에서 내리는 등 피해복구 작업에도 공을 세웠다. 이후 베니온 대령은 상처가 악화되어 전사하고, 웨스트버지니아는 착저했지만 전복은 면했다.
5. 진주만 공격 이후
히틀러 역시 '전쟁은 저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일단 극히 일부 독일 고위층을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 육군과 공군 장교들은 당시 10주 만에 소련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준비하지 못했던 동계전투, 즉 모스크바 공방전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맞닥뜨렸고, 동부전선을 끝내기 위한 1941년 동계 대공세에서 거센 소련의 반격때문에 일본이 뭘 하는지 신경쓸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 진주만이 공격당하자 경악하면서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질적으로 거의 대부분 육군을 채우고 있던 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군과 직접 싸워본 경험이 있는 장교들이었고 이들은 영국과 자유프랑스 망명정부가 미국을 끌여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주만 공습 4일 후 위대한 총통각하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니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라는 반응. 특히 에르빈 롬멜은 영국 해외 원정군의 역습을 제21기갑사단 2개의 연대로 물리친 직후 보도를 듣고 아내에게 "이제 올 것이 왔소. 동쪽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우리와 전쟁을 하게되었소. 앞날이 걱정이요"라고 편지를 보냈다.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경악하며 일기에 하면 안될 짓을 했다고 기술했다. 일선의 장병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180개의 연대를 6개의 연대로 전멸시키니까 360개의 연대가 반격해오는 것에 지칠대로 지친 독일 병사들에게 대미전은 상상도 못할 악몽이었던 것이다.[45]
한편 일본 함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것에 기뻐하고 있었으며 3차 공격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2항공전대를 이끌던 야마구치 다몬 소장과 몇몇 참모, 조종사들은 3차 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나구모 제독은 미군들이 정신 차리고 대비를 하고 있으므로 기습의 효과가 줄어들어 오히려 피해가 증가할 것이란 점과 미국 항공모함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공격 중지를 결정하였다.|| ||
(일본 군가 바다에 가면 방송)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대본영 육해군부 12월 8일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이 본 8일 새벽에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제국 육해군이 본 8일 새벽에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제국 해군은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하고, 싱가폴 등지도 대폭격하였습니다.
대본영 해군부 오늘 오후 1시 발표.
하나.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함.
둘,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상하이에서 영국 포함(砲艦) '페트렐'호를 격침함. 미국 포함 '웨이크'호는 동 시각 우리에게 항복함.
셋,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싱가포르를 폭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거두었음.
넷, 제국 해군은 오늘 8일 이른 아침 '다바오', '웨이크', '괌'에 있는 적 군사시설을 폭격함."
(일본 군가 군함행진곡 방송)
태평양 전쟁을 알리는 NHK라디오 방송.
모든 항모가 출항해 있다는 점으로 보건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실패가 된다. 나구모로서는 도상 연습에서 일본 함대에도 반수의 피해가 나올 거라는 결과도 있었고 야마모토 이외의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반대하는 작전을 수행했지만 운이 좋게도 함선의 피해가 없는 이 정도의 전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상술했듯이 해군 군령부에서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계속 반려하자 야마모토는 총사령관직을 사퇴하겠다며 반협박을 한 끝에 겨우 승인을 얻어냈었다. 사실 항공부대 지휘 경험이 전무한 나구모가 기습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도 그가 수뢰전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해군에서 손꼽히는 조함 전문가라는 이유였다. 요는 작전은 실패한다 해도 배는 어떻게든 살려서 끌고 오라는 생각으로 그를 임명했던 것이다.
나구모의 이런 결정은 전후에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나구모는 현재 일본에서는 전범 혹은 역적과 비슷한 위치다. 당장 일본의 태평양 전쟁 관련 서적에서 나구모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겁쟁이 혹은 새가슴 정도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당시 월등한 생산력을 가진 미국과 대결하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항모(航母)를 한 대라도 잃으면 큰 타격을 입는 데다가, 원래부터가 일본군은 강화를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는 몰라도 당시의 판단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레이테 해전과 같은 이후의 일본군의 작전을 봐도 이 판단은 나구모의 오판이 아니라 일본군이 가진 단기결전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부하들은 "좋다. 대장이 그만 하고 돌아가자고 하면 따르겠다. 그런데 돌아갈 때는 올 때 처럼 빙 돌아 가지 말고 중앙 항로를 타고 직진하자"고 건의하였다. 항공기 정찰을 통해 돌아가면서 진주만에서 보지 못한 적 항모 2척을 찾아 격멸하자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것도 기각됐다. 나구모 장관은 정찰을 경시하였다. 그냥 전력을 보존한 채로, 왔을 때 처럼 빙 돌아서 퇴각하였다.
나구모 제독의 지시에 따라 일본 함대가 신속하게 퇴각하면서 진주만 공습은 종료되었고 이 결정이 알려지자 일본 연합함대 사령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참에 태평양 함대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야마모토 제독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야 된다고 진언했지만 야마모토 제독은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는 나구모 제독의 결정이니 그게 최선일 것이란 이유로 묵살해버렸다.
기지로 복귀한 후 진주만 공격대원들은 그야말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신문에서는 대서 특필하였고 일본 쇼와 천황이 직접 치하하였다. 그에비해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비교를 하자면, 진주만 공격 당일 별도로 출격한 특수 잠수정 10명 중 9명은 전사로 취급되어 2계급 특진을 받고 9군신(軍神)으로 모셔지며 장례도 국장으로 치러졌다. 나머지 1명인 공격대의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포로로 잡혔으나 일본군은 이를 기밀 취급하여, 공격대 정장 5명이 서명한 서장에서 서명을 지우고, 출격전 10명의 단체 사진에서도 삭제해 버렸다. 다만 이들이 전과가 0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중 공격대의 최대의 전과였던 애리조나 함 격침을 특수 잠수정의 전과로 돌렸다. 제3국을 통해 들어온 뉴스 사진에 애리조나 격침 사진이 들어왔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 국민이 열광하는 가운데 성대한 국장이 치려졌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2월 11일 표창장을 수여하며 이들에게 "무훈발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에 비해 공중공격대 55명에 대한 2계급 특진 소식은 없었다.(일본군은 전사자에 한하여만 특진이 가능하였다.) 최대의 전과인 애리조나 격침을 빼았기는 수모를 당하였다. 잠수정 공격대의 전과는 전혀 없었고, 공중 공격대는 1개 함대 자체를 괴멸시킨 대전과였음을 생각해 봤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차별이였다. 여기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표창장이 한참이나 지난 4월 15일에 나왔고, 그것도 잠수정 공격대 보다 한단계 낮은 "무훈현저"였다.
알고 보니 연합함대 참모였던 미와 요시타케 대좌가 "무훈발군"으로 상신하였으나, 야마모토는 "나구모 장관이 더 적극적으로 연속 공격을 가했더라면 당연히 '무훈발군'이었는데, 한 번에 끝냈기 때문에 '현저'로 하라"고 한 것이다. 그외에도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중장이 자신의 일지에 "도둑이 작은 성공에 만족하여 달아나는 것 같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불과 30대를 손상한 수준에서는 전과의 확대는 매우 중요함"이라고 기록하는등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나구모가 한번의 공격으로 끝낸 것에 대해 매우 강한 유감을 갖고 있었다.
5.1. 무사했던 전함 외 시설물들과 숙련된 승조원들
일본 해군은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전함 전력을 굴리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정작 뻔히 보이는 데 있는 '''태평양 함대의 유류저장시설은 멀쩡했다'''. 사실 당시 이 시설에는 고작 정박시 두 달 치 분량의 연료만 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지만 4,500,000 갤런의 연료가 폭발했다면 인명피해는 고사하고 화재 진화가 불가능했을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주 적은 양의 연료가 있었더라도 '''이거 날리면 그 순간 잔존한 태평양 함대 군함들은 연료가 없어서 항구에 주저앉게 된다'''. 이럴 경우 미국 군함들은 공격은 고사하고 다시 공습이 날아와도 탈출도 못하고 항구에서 그대로 고철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연료도 미국 본토에서 느린 수송선으로 호위도 별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험하게 운송해야 한다. 거기다 유류저장시설이 살아 있으면 나중에라도 연료를 채워서 보급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완전히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남겨뒀던 셈.
여기엔 여러 요인이 겹쳤는데 우선 진주만 공습을 입안하였던 야마모토 대장과 겐다 중좌, 오니시 소장은 목표에 적의 함대의 균형을 무너트리기 위해 순양함들을 공격해야 한다는 등 약간의 견해차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목표를 진주만의 미 해군 함정과 지상발진 항공기로 잡았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 애당초 진주만의 중유저장소와 공창, 건선거와 잠수함 기지등은 목표가 아니였다. 이는 태평양함대가 남방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였다.
그 다음으로 작용한건 진주만을 살펴보고 온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이였다. 스즈키 소좌는 성실하게 미군의 전력을 파악하긴 했으나 오아후섬의 항공세력을 과다평가하였는데 그의 판단에 따르면 B-17 40대를 포함한 폭격기 140대, 최신형이던 P-38을 포함한 전투기 270대, 기타 45대로 판단하였는데 실제로 사용가능한 항공기는 143대에 불과하였고 신형인 P-38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런 정보부의 오아후섬의 항공세력에 대한 과다평가는 나구모 중장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기습으로 큰 피해를 주었음에도 아직 미군의 지상 항공세력이 충분히 반격을 가할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3차 공격을 감행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자세한 내용이 있다.
게다가 해군 공창과 잠수함 기지[46] 도 아주 멀쩡했다. 사실 일부 드라이 독에 들어가 있던 배들은 폭격을 받았으나 독 자체는 무사했다. 게다가 잠수함 기지는 처음부터 폭격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서 공격 받아도 별 타격이 없었을 거라고 한다. 이 점도 치명적이었는데 격침된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제외한 모든 전함들은 인양되어 수리를 마치고 다시 전열에 복귀했기 때문에 진주만에서 침몰당한 전함은 5척이 아니라 사실상 2척이 된다.[47] 격침된 전함인 애리조나는 완전히 아작나서 21세기인 지금까지 포탑과 상부 구조물 등 수면 위로 나온 부분만 철거한 채 선체는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고, 오클라호마는 전복되면서 상부 구조물이 완전히 망가져서 인양된 후 해체를 위해 본토로 이송되다가 풍랑에 침몰되었다. 그리고 산호해 해전에서 중파당한 미 항모 요크타운이 신속하게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살아남은 드라이 독 덕분. 한편 이때 살아남은 미 해군의 잠수함들은 이후 사방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요크타운과 잠수함 함대가 미드웨이 해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등의 전장에서 일본 해군에 엄청난 손실을 입힌 걸 생각해보면….
그렇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70기가 넘는 함재기들의 공습에도 불과하고 미드웨이 비행장이 마비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해군 공창 같은 대규모 기반시설을 폭장량이 낮은 함재기들의 1회성 공습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48] 진주만의 대규모 기반시설들을 파괴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폭장량이 보장되는 중/대형 폭격기들로 지속적인 공습이 가해져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주만의 유류저장고는 단순히 커다란 하나의 시설이 아닌 54개의 탱크로 된 시설이며 중유는 끓는점이 높은 관계로 불이 붙기 어려워서 연쇄적인 유폭을 기대할 수가 없으며 미군의 대공포화와 남아있는 전투기들의 요격을 감안하면 충분한 타격을 주기란 무척 힘들다. 당시 일본군 측 동원 가능한 폭격기가 75기 정도고 200미터가 넘어가는 전함을 상대로 명중률이 20%에 지나지 않아서 전함보다 훨씬 작은 유류저장고에 폭격기를 모두 투입하더라도 많이 파괴해봐야 54개중 10개도 파괴 못한다.
그리고 그정도 피해는 미국 입장에선 극히 미미한 피해다.
또한 3차 공격을 감행하고 나면 겨울인지라 해가 빨리 지는 관계로 야간 착함을 해야 하는데 필리핀해 해전에서 미군이 등화관제까지 무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야간 착함 과정에서 80기가 넘는 함재기 손실이 난 것을 보면 3차 공격을 감행할 경우 일본군의 함재기 손실이 엄청날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진주만 공습때 2차 공격 후 공격대가 귀환한 시간이 12시 15 분 가량인데, 그날 하와이의 일몰은 5시 12 분이였다.
거기에 비록 3,000여명의 희생자를 내긴 했지만 숙련된 승조원들이 다수 살아남은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만약 출항하여 해전을 벌였다면 대부분의 함정이 침몰하고 숙련된 승조원 2만여 명을 잃을거라 추산하였는데 정박 중 그것도 일요일이라 다수의 승조원들이 상륙(외출, 외박)을 나가고 영외자들의 경우 당직자 빼고 육상 거주지에서 쉬고 있는 상태에서 공습을 받았기에 대부분의 승조원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급팽창하는 미 해군의 근간이 되었는데 2만명에 달하는 숙련된 승조원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면 미 해군의 어려움이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일본 해군은 공습 당시 승조원들이 일요일엔 영외로 나가거나 쉬는 인원이 많이 대응이 느릴 것을 노렸고, 실제로 의도대로 되었으나, 그 반대 급부로 숙련된 인원들을 손실시키진 못할 것을 감수한 것이며 그 대가도 전쟁 기간 내내 치르게 된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분명히 '''전술적, '단기' 전략적으로는 매우 완벽'''했다. 괜히 완벽한 기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태평양 함대의 전함을 불구로 만든 것은 좋았으나 운이 나쁘게도 항공모함이 거기에 없었는데 당시엔 몰랐으나 나중엔 이게 거대한 실책으로 돌아왔다. 더불어 미국에게 반격의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이는 바로 몇달 후에 둘리틀 특공대로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를 대놓고 폭격당하면서 단 한 대의 폭격기도 격추를 못 시키는 치욕을 당할 뿐 아니라, 나중에 미드웨이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49]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초래함으로써 ''''장기' 전략적'''으로는 대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50]
5.2. 일본군의 하와이 상륙?
한편 진주만에서는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미군들이 잔뜩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활동가능한 군함들을 바다로 내보내서 일본함대에 대한 수색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공습에 대한 노이로제가 생겨서 비행기만 지나가면 피아식별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대공사격부터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아군의 대공포에 파손되거나 격추된 전투기도 여럿 있었다.
미국이 조금만 생각했다면, 일본군이 제정신이라면 그렇게 철벽같이 요새화된 섬에 상륙할 리가 없다는 걸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인데, 결과는 상륙이 아니라 공습이었다. 당시 기습을 당한 미국의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하와이 자체의 방어력도 무시무시하다. 미국은 45년 초부터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드넖은 본토에 단 1개의 연방 육군 사단도 남겨두지 않고 전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으로 파견하고 본토 방어는 주방위군 육군에게 맡겼다. 그러나 진주만에는 종전 그 순간까지 1개 육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진주만 공습 당시에는 2개 육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병대 빼고도 말이다. 그리고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 섬은 미국이 20세기 초부터 공을 들여 요새화시킨 세계 최강의 요새였다. 일본군이 하와이를 상륙하는 것보다 차라리 미 본토에 상륙하는 게 더 현실성이 느껴질 정도라는 얘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참조
6. 뒷이야기
6.1. 최선의 전략과 오판
기습을 통해 태평양의 미군을 빈사상태로 만들어버린 뒤,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방향으로의 남하를 미국이 용인하게 하는 유리한 조건 하 강화를 맺겠다는 전략이 당시 일본이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미국의 전쟁수행능력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본토를 공격받은적이 없기 때문에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의 미군 함대는 미드웨이 해전까지 계속 수세에서 작전을 했어야 할 정도로 약화되었던 것도 사실이나, 진주만 공습의 손실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시간만이 주어진다면 복구 가능한 손실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의 공업력을 일본 역시 인식하고 있었으나, 일본군 대본영은 미 해군을 진주만에서 전멸 혹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고 이후 증원되는 미국 함대 역시 점감요격작전에 따라 차례차례 요격하여 큰 성과 없이 지속적인 피해를 미 해군에 강요한다면, 경제적 문제 및 정치적 문제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에서 철수하고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을 용인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뒤통수를 친 일본의 행동이 미국의 반전여론에 크게 불을 붙였으며,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인종차별적 사상도 만연해 있었던지라 진주만 공습은 전미적으로 큰 공분을 샀고 미국의 반전주의자들조차 일본에 대한 전쟁에는 찬성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켜 전면전을 강요당하는 역효과만 내고 협상이 불가능했다.
둘째는 미 해군의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상실시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초반에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의 전함전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후 이어진 자바 해전에서 USS 랭글리(CV-1)을 대파시켜 미군이 자침시키도록 하고 산호해 해전에서는 렉싱턴급 항공모함 USS 렉싱턴(CV-2)를 격침시키는 등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여전히 태평양 함대의 최후의 주요 전력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3척이 끝까지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전멸시켜 미국의 태평양 전역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주만 공습의 주역들인 카가, 아카기, 소류, 히류와 공고급 순양전함 2척까지 끌고와 미드웨이 해전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미 해군은 위 3척 중 1척을 잃으면서도 위 진주만의 주역들을 모조리 수장시켜버렸다. 거기다가 그 살아남은 2척 중 1척인 USS 엔터프라이즈(CV-6)은 미 해군이 항모를 지속적으로 1척씩 상실하는 동안에도 과달카날 해전까지 끈질기게 버티면서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아 미 해군의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엔터프라이즈가 쓰러지지 않아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해전까지 미 해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태평양 전역에서 미 해군의 제해권을 상실시키지 못했고, 이후 시기적절하게 미 해군이 증원되자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며 막장화되어버렸다.
셋째로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태평양의 지배권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경우처럼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력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주요 동맹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를 일본군이 침략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 역시 당시 유럽전선에서 협력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논외인 부분이었다.
이외에 결정적이라 볼 수는 없으나 진주만 공습시 전술적 오판 중 하나로 언급된 항공모함과 유류창고를 파괴하지 못했고, 기반시설을 파괴하지 못했다는 점,[51][52] 공격하기로 한 일자가 하필 주말이라 상당수의 인원들이 외박 중이었어서 기지의 방어태세도 낮은 편이었지만 동시에 인명피해가 적어 수병 전력의 피해가 기습적 공격에 비해 적었다는 점 때문에 미 해군은 우월한 본토의 공업력에 의해 배만 찍어내면 바로바로 전력을 복구할 수 있었던 점 등이 있다. 그로 인해 일본 해군은 공습 4개월 뒤 곧장 수도인 도쿄를 비롯 주요도시에 미군의 보복공습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53]
결국 진주만 공습은 일본 해군에게 큰 전술적 승리를 가져다 주고 시간은 벌어주었지만, 일본군 대본영은 미국의 전쟁수행의지를 지나치게 얕보았고 일본 해군은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쓰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이후 끈질기게 일본군을 상대로 열세의 위치에서도 우월한 전략과 우수한 인적 자원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군의 공세를 버텨낸 미군이 전력을 회복하자 자신들이 예상했던대로 태평양 전쟁은 장기화 되어 자신들을 파멸시키게 되었다.
6.2. 미국의 극대노
'''말 그대로 이 공습은 미국의 꼭지를 돌려버렸다'''. 일부에선 "격노한 미 정부가 국력의 10%를 태평양 전선에 썼다"[54] 는 식으로 약간 잘못 알려져있기도 한데, 물론 미국이 일본보다 독일을 때려잡는데 더 많은 국력을 쏟아부은 것은 사실이다.[55] 그러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국력 10%설은 '''거짓'''이다. 당시 미 해군이 실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르고 나서 당시 일본군이 절대 만만히 볼 세력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집중하고 있는데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며 사실상 태평양 전쟁의 기세를 빼앗아오자 미 육군 쪽에서 '''"미드웨이에서 이겼으니까 이제 유럽 쪽에 집중해도 되지?"'''라는 식의 뉘앙스로 보급 우선권을 주장했다. 이에 열받은 미 해군이 1942년 12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유럽으로 보내지만 말고 우리한테도 보내주세요, 징징"'''거리는 근거로 댔던 게 연합군의 전체 전쟁자산 중 '''15%''' 정도만 태평양 방면에 투입된다는 것인데 이것도 정확한 산출이 아닌 왜곡이 살짝 들어간 수치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당시 미 육군은 지중해 방면에 군을 집중하려 했던 처칠에게 반감을 가진 상태였고[56] , 이 말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직설적으로 하질 못하니 걍 해군 보고서를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모색했다고 한다. 결국 보급권을 가지고 갈등하던 미 육해군이 처칠이라는 공공의 적(?) 앞에선 한데 힘을 모은 셈. 그런데 그것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작금에 와선 10%로 변질되어서 사실인 양 통용되고 있다. 다만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확실히 전력을 다한건 아니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이 투입한 군사력은 전체의 3할을 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일본도 중국과 중일전쟁을 치르는 중이긴 했지만 해군은 이쪽도 거의 몰빵한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100% 전력이 아닌 미국에게 일본이 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 해군의 주력함들은 거의 태평양쪽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전쟁 발발 이후 해군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전력을 태평양으로 차출하기도 했으니[57] 적어도 해군의 경우에는 오히려 태평양이 주 전장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대서양에는 크릭스마리네가 잠수함을 제외하면 별볼일 없는 상대인데다가 동맹인 영국 해군이 크릭스마리네를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 해군 전사를 봐도 2차대전 내내 대서양에서는 이렇다 할 주력함간 대규모 해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 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의 첫 부분.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항목 참조. 참고로 이 부분은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 인트로 영상에도 나온다. 유튜브 자동재생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 the Japanese language will be spoken only in hell."'''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
진주만 공습 전날에 진주만에 입항할 예정이었다가 열대폭풍으로 하루가 늦어져서 공습이 끝나고 나서 도착한 후 진주만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윌리엄 홀시 제독의 말.[58]
공습 전까지는 무의미한 전쟁은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지지를 받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히틀러가 얼마나 또라이인지 아는 사람들은 추축국과 싸워야 한다는 의견을 폈지만, 다수의 미국 국민들은 20년 전 유럽의 지옥과 그 지옥불에 딸려온 연옥을 겪어봤기에 고립주의자의 의견에 더 동조하고 있었고[59] , 미국 전통의 외교정책인 먼로 독트린에 따라 "우리한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괜히 끼어들 필요없다"라는 주장이 강했다. 그러나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에 선빵을 날리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은 고립주의자들이 말하던 "무의미한 전쟁"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잠자던 거인을 '잠에서 깨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빡돌게 만든 셈.''' 아닌게 아니라 공화당의 대표적 고립주의 정치인들조차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백악관으로 연락을 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일종의 충성 맹세와 함께 전쟁 수행에 대한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한 의원은, 기자들 앞에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일본 놈들을 철저하게 때려 눕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정계의 고립주의 계열은 사실상 소멸, 와해되었다.'''우리는 일본군을 다시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주만 공습 직후 니미츠 제독의 말.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며[60]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분노한 미국 국민들의 입대 러쉬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자진입대율은 90%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는데, 특히 공수부대나 해병대 같은 일부 월급도 높은 특수전투병과는 지원율이 100%를 넘기며 경쟁적으로 입대했다고 한다.[61] 심지어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한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62] 자원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배우나 운동선수 같은 유명인사들도 많았는데, 조 디마지오처럼 위문공연을 다녔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폭격기 승무원이였던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63] 나 해군 대공포 사수 밥 펠러처럼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중에서도 몇 명이서 항해국[64] 장이던 니미츠 제독을 찾아와 해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은 "해군을 위한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 달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다만 일부 국회의원들은 진짜 참전했는데[65]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66] 거기에 '''물량공세'''가 더해졌다.
참고로 유일한 참전 반대표는 공화당의 지넷 P. 랜킨(Jeannette P. Rankin) 의원이 던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국회의원이자 반전주의자였던 랜킨은, 이전 임기인 1917년때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하나였다. 1940년에도 이전 임기처럼 랜킨은 "여성이기 때문에 저는 전쟁에 나갈 수 없습니다. 허나 남자들을[67] 군대에 보내는 것도 반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는 말로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때는 국민적인 분노가 1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컸던 상황이라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서 신변보호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제도'''"라며 맞섰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이런 의미 있는 반대도 기려져 사후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에 랜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68]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니미츠 대장으로 교체되어 일본 해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전함들이 죄다 상실된 까닭에 항공모함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너무 심하게 털려버려 쓸 수 있는 전력이 빈약한데다 항공모함조차 상실하게 될까봐 휘하 제독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니미츠 제독은 이들을 무마하고 작전을 입안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며, 일본군의 대응도 거의 없어서 전과다운 전과는 거의 거두지 못했고 일본의 남방작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아무 작전도 못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한데, 사실 없지는 않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 가능성을 없앤 산호해 해전이 당시 미 해군의 대표적인 활약이었다. 하여간 이때의 충격이 무척 강렬했던 탓인지 지금도 미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 편제와 함께 강력한 대공망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항공모함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으로 진주만이라는 대성과를 거두었던 일본군은 점점 항공모함의 활용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에서의 소모전을 거치면서 항공모함과 함재기들과 숙련병들이 다 수장되는 바람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분노는 일부 인종차별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났는데, 바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독일, 이태리, 일본계 미국인들을 죄다 수용소로 몰아버린 사례가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69] , 물론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 중 진짜로 간첩 비슷하게 활동한 케이스도 있었고, 일본계 미국인 1세대 심지어 2세대들도 옛 고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 미국이 선빵을 맞은 와중에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병크짓을 하기도 했다. 물론 국적이나 사상적 문제 등으로 일본인의 삶을 잊고 미국인으로 살고 있던 이들도 있기야 했겠지만 전쟁 와중에 온건 소수파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이런 기타 내용은 니하우 사건 문서도 참고.
한편, 이승만은 1939년 11월에 집필을 시작하여 1941년 여름에 내놓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통해 '조만간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출판 직후에는 무시당했으나[70]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은 재발굴돼 저자인 이승만 역시 미국에서 어느정도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근데 사실 이미 1차대전 직후부터 미국과 일본이 한 판 붙을것이라는 예측은 난무했다. 다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면서 가십거리 정도로 전락한 얘기를 1930년대 후반 들어 웬 동양인 듣보잡 망명가가 해봐야 "또 그소리임? 그만 좀 우려먹어라" 하는 반응이 나오는게 이상할건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들의 가상 전쟁 시나리오설은 돌지만, 현실에서 실현되는건 극소수에 불과하니...
6.2.1. 음모론
진주만 공습은 미국 정계에도 상당한 후폭풍을 남겼는데, 미국사 최초로 3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진주만 공습 이후 세계대전을 정리하겠다는 명분하에 4선까지 도전하려 하자 정적들 사이에선 미국 정부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2차대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 진주만을 방치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생겨났다. 이 음모론은 루즈벨트의 4선 저지를 위해 당시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 후보 진영에서 주장한 것이었는데 정작 이 주장을 들은 미국민들의 반응은 이뭐병.[71] 당연히 선거도 관광당했고 다음 선거에서도 민주당 해리 S. 트루먼에게 또 발렸다.
이걸 훗날 한도 가즈토시 같은 일본 학자들이 받아가지고 비슷하게 주장하기도 했으며, 데즈카 오사무의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정설인냥 등장했다 신나게 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모론을 놓지 못하는 집착인들도 있는데, 혹자는 당시 뉴딜 정책의 약빨이 떨어진 루스벨트 정부가 생산과잉 및 그에 따른 고용부족을 한방에 해결하고자 전쟁에 참여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건 팩트부터 틀린게 루즈벨트 1기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던 뉴딜 정책이 집권 2기 초 2년간 이전보다 약빨이 떨어진건 사실이었다.[72] 하지만 1939년 들어 경기는 다시 호조세로 돌아섰고 1940년 나치의 프랑스 침공 등으로 서유럽이 대대적인 전쟁 상황에 들어가면서 미국은 오히려 호황을 맞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이 작살나든 말든 우리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고립주의도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선거 역시 대선, 상하원 가릴 것 없이 루스벨트 정부가 큰 격차로 연승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이 와중에 FDR 정권이 굳이 전쟁 참가라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진주만의 급소였던 지상의 원유 공급 시설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고, 많은 수의 전함들과 유조선 역시 살아남았다는 결과론적인 이유로 자꾸 이걸 정치적인 음모론으로 엮으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후술된 음모론에 대한 반론 항목 참조.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역사 편에 따르면 1941년 초 일본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그루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미국 정부에 알렸지만 "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쏠린" 미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73]
대놓고 노렸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공격이 들어올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장소나 방법, 피해 규모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당시 미국은 중일전쟁을 벌이는 일본을 좋게 보지 않고 중국에서의 철수를 압박하며 석유 제한 조치 등 각종 딴지를 걸고 있었기에 미일 관계가 험악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협상으로 풀려는 와중에 선빵을 때린건 결국 일본이었다.
6.2.2. 음모론에 대한 반론
우선 중요한 항공모함들을 미리 빼두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바뀐 주장으로 항공모함이 주력이 된 이유는 진주만에서 전함들이 다 털려서였다.[74] 그 당시 미군의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전부 다른 곳에서 정비[75] 나 임무 중[76] 이라 흩어져 있었으며. 진주만에 들어올 예정이던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 한 척은 예정대로라면 공습 전날에 들어왔어야 했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서 우회하느라 공습 당일에도 못 들어왔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항공모함은 해상작전의 보조격으로만 활동했고 해군력의 주력은 진주만에서 가라앉아 버린 전함들이었다. '즉 항공모함이 중요하니까 빼놓은 게 아니라, 비행기 수송이나, 수리를 이유로 당시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없었고, '''박살난 태평양 함대가 운용할 수 있는 게 항공모함뿐이라 급하게 항공모함만 가지고 운용했는데 의외로 항공모함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전력이었던 것을 발견한 것.''' 천대받던 항공모함들이 항공기의 발전으로 성능이 올라갔고, 전함들이 전투 불능이 돼서 주전력이 될 기회를 얻어 실전을 치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당장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이 뭐하다가 진주만에 없었는지 보라. 우리가 아는 함대의 중심 항공모함이라는 이미지와는 영 딴판인 '''비행기 배달''' 하다 왔다.[77]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는 항공모함이 전함을 보조하는 편성이였으나, 태평양 전쟁 중반쯤 되면 전함들이 항공모함을 보조하고 호위하는 편제로 변화한다. 여담으로 일본 역시 야마토와 무사시 같은 대형 전함들을 '''아끼기 위해''' 꽁꽁 숨겨두고 항공모함을 들이밀었는데 훗날 미군은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전력을 모조리 털어먹고 강제로 전함 위주 교리를 하도록 해준다.
다른 것을 제쳐두고라도 명분이 필요했다면 상식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당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엄청난 피해를 입을 필요까지는 굳이 없는 것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비록 미 해군의 군함들이 일본군함보다 속도면에서 열세이기는 했지만[78] 당시 진주만의 미 해군전력은 전함 8척에 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등 일본군 전력과 비등한 규모였고 전투기도 400여 대 정도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육상 대공포대와 비행장 등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방어전인 것을 생각해보면, 진주만 공습 직전에 초계를 하고 방어태세를 갖추기만 했더라도 피해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기습 선빵을 맞는다는 시점에서 전쟁 명분은 충분히 서기 때문에 미리 공습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주방어를 하면 되었지 루즈벨트 입장에서는 굳이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다. '''자뻑과 아전인수의 달인인 일본군조차도 족히 절반 정도는 피해를 감수했던 작전인데''' 미군이 굳이 연합함대를 거의 온존시켜 돌려보내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실제로 훗날 미군은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이 공격받아 경미한 피해를 입은것을 과장해서 베트남전에 참전할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박살나서 6개월간 패전을 거듭 필리핀 등지에 지어놓았던 요새, 장비, 병력을 신나게 날려먹고 엄청나게 후퇴하고. 그 6개월 뒤인 미드웨이 해전으로 겨우 공세를 저지시키고 음모론자의 주장대로 미국이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한 것은 1년 뒤인 과달카날 점령 이후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국력을 총동원했는데도 일본군에게 반격을 시작하기까지 1년은 걸렸는데 루즈벨트가 아무리 명분이 필요했어도 이런 도박을 했을 이유는 없다. 음모론대로면 새러토가는 공창에 들어가있고 요크타운은 대서양으로 돌려놓은 상태에서 6개월 넘게 고생할 필요도 없이 둘을 만반의 준비상태로 만들어놓고 진주만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묵사발내 준 뒤에 곧바로 항모 4척의 드림팀(?)을 결성해 일본해군을 조져버려야 정상이다.
그리고 음모론의 근거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첫째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정말로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던 드라이 독이나 원유 공급 시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해군의 지휘관들이 지원시설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공습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79] 만약 이런 시설의 공습이 이뤄졌다면 태평양 함대는 더 오랜 시간 진주만에 발이 묶였을 수도 있고, 추가 공습에 의해 궤멸당할 위기에 빠졌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연합군은 동남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교두보들은 물론 무방비 상태였던 호주와 뉴질랜드도 모두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떤 지도자도 전쟁에 참전하고자 이런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진주만에서 가라앉거나 손상을 입은 전함들이 1차 대전부터 사용되던 구형 전함이라고 하지만 당시 미 해군의 주력함들이었다. 진주만이 공습당했을때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은 건조중이었고 노스캐롤라아나급은 취역했으나 함체의 진동이 문제가 돼서 실전 투입을 미루고있는 상태였다.[80] 그리고 그렇게 가라앉은 전함들이 정말로 쓸모가 없었으면 비싼 돈과 인력을 들여가며 굳이 인양해서 수리+개장해서 다시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함만 공격하고 보급시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이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하되 하와이의 보급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합의를 하고, 더불어 보급시설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에 하와이와 태평양 함대의 정밀 지도같은 중요정보를 넘겨줬다고 봐야하는데 상식선에서 이해하기도 힘든 음모론이다.
둘째로 일본이 위협적인 행동을 거듭하자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은 미국 정부도 이미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전포고 이전부터 일본 본토에 가까운 섬들의 방어태세를 강화한 것도 그런 이유다. 미국이 한 '실수'는 전쟁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설마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점과, 첫 공격을 일본이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미군 기지를 놔두고 일본에서 한참 떨어진 태평양 한복판의 하와이 진주만에 가할 것, 그리고 공격 이후에야 이런 선전포고문같지도 않은 날림 선전포고문을 들이밀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점이다.
셋쩨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참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진주만 공습을 사전에 알았으면서도 일부러 '묵과했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공허한 주장이라는 점이다. 현실 정치나 군사는 게임이 아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진주만 공습을 알았다면 이는 대통령에게 바로 보고되는게 아니라 정보기관이나 외교관을 거쳐 국무장관과 국무회의라는 복잡한 정식 절차에 따라 해당 부처에 보고된다. 보고 과정에서 사실을 알게된 모든 중간 관료들의 입을 대통령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또는 적의 공습이 예상된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를 듣고도 대응하지 말라고 막을 수 있을까? 둘 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진주만 공습은 '쟤들이 설마 여길 때리겠어' 라고 모두가 상식으로 생각했고, 상식이 통하지 않던 일본군이 저지른 기습이었기에 기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6.3. 일본의 동남아 침공과 대전략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의 견제가 사라진 일본은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의 미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연합국 식민지를 점령했다. 이후 미국에게 충격을 선사했다고 본 일본은 향후 전략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부터 일본 외무성에서는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대한 준비작업을 시작했고, 이에 대본영, 육군, 해군, 야마모토 제독 모두 평화협상을 일본이 먼저 제안하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반대했으나, 미국이 평화협상을 제안해오면 받아줘야 한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본대로 미국은 역사상 전례가 없던 분노 속에서 칼을 갈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 정계와 군부는 이보다 더 큰 충격을 줘서 미국이 협상장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건 동의했으나 그 방법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우선 일본 육군은 자기들이 점령한 동남아의 방어를 굳히고 지배를 공고히 하면, 동남아 점령으로 막강해진 일본제국의 힘을 상대하기 부담스러워진 미국이 협상하러 나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81] 해군은 호주 점령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점작요격 따위 때려치고 하와이를 바로 점령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호주는 처음부터 점령을 위한 병력 및 물자가 모자랐고 하와이는 보급선 유지가 안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육군, 해군, 야마모토 제독이 각각 자기들 주장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와중에 미국의 항공모함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공습을 하고 있었고[82] 이 모습을 본 야마모토 제독은 미 항공모함이 가장 큰 적이라 결론을 내리고 미국의 항공모함을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미드웨이를 공격하지만...
6.4. 추축국(樞軸國)의 대미 선전포고
일본과 동맹관계이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4일 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 사태는 추축국 최대이자 최후의 삽질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물론 이 선전포고가 없었다고 해도 미국은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무기지원, 경제원조 등을 넘는 수준의 대대적인 참전은 나치 독일이 미국에 먼저 선빵을 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치욕의 날 연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진주만 공습 직후 추축국이 아닌 오직 일본에게만 선전 포고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주만 공습이 있는 상황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미국이 일본보다 독일과의 전쟁을 우선시하는 것은 미국 국민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진주만 공습이 터지고, 아돌프 히틀러는 '''환호작약하며 선전포고를 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곧바로 카이텔과 요들에게 달려가서 환호하면서 소리쳤다.
독일은 이 선전포고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해주기를 바랐지만, '''일본은 1945년 8월에 소-일 불가침 협약이 만료되어 소련의 공세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 평화를 유지했다'''. 웃긴 것은 독일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무기를 팔아 일본군을 골탕 먹였다는 것. 물론 의도는 중국 공산당을 국민당을 이용하여 없애기 위해 지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일본을 더 위협적인 적으로 봤었기 때문에 문제, 아예 장제스 휘하 부대는 중일전쟁 전부터 독일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군사고문관으로 한스 폰 젝트 장군까지 파견된 판이었다.[85] 물론 동맹을 맺고 일본의 요청에 따라 위의 조치는 동맹을 맺은 1936년을 전후하여 거의 시정되었으니 동맹을 의도적으로 엿먹인 것은 아니다.'''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84]
ㅡ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360P
히틀러의 반응과 별개로 일선에서 소련군과 영국군을 맞아 싸우고 있던 상당수의 육공군상급장교들이나 하급 장교들을 비롯한 일반 사병들은 공식 방송이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로 정황이 없었고 그만큼 구체적인 반응 역시 기록되어있지 않다. 41년 12월 당시 최대 공방전이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이 진행 중이었고 그외에도 독일군의 빈약한 동계전투 준비로 소련군의 전전선으로 부터 반격을 받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독일은 일본이 소련 뒤를 쳐서 극동 소련 정예군을 붙들어 주기를 바랬으나 일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소련은 이 겨울 동안 긴급수송으로 극동 정예군을 투입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만큼 당시 동부전선은 급박하게 전투가 전개 중이었기 때문에 상급장교들이 일본이 동쪽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든 신경쓸 상황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독일 해군은 이전부터 미국과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찬성하는 편이었는데 이미 대서양에서 미국과 독일 해군간의 대립이 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86] 그리고 추가적으로 일본이 극동의 영국군을 공격해 영국 해군의 시선을 인도양으로 끌어주어 고전을 하고 있던 독일 해군의 상황을 개선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오히려 일본은 극동 영국 해군을 박살내긴 했지만 인도양보다 미국의 반격으로 인해 태평양 방면으로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인도양 방면의 극동영국해군은 살아남았고 미국이 일본 해군을 상대하는 동안 영국은 안심하고 이미 노르웨이에서 상당수의 구축함을 잃어버리고 독일 해군의 자존심 비스마르크 까지 침몰당해 껍데기만 남아있던 지중해의 크릭스마리네+이탈리아 해군을 심해끝까지 털었다. 그리고 그덕에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전역의 북아프리카군단은 연료 및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더하여 선전포고 이후 미국은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질 때마다 꼬박꼬박 U보트를 사냥하러 해군을 지원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군사 동맹은 동맹국이 3자로부터 공격받았을 경우 원조의 의무가 부여되지만 동맹국이 3자를 공격했을 때 원조의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각자 선제공격했기 때문이지 주축의 동맹이 연합에 비해 특별히 약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련의 경우에는 폴란드 분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독일의 우호국이었으니…. 즉 '동맹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외교가 따로 놀았다는 것이 문제. 거기다 6호 전차 티거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유럽의 추축국과 완전히 반대편인 아시아에 있던 일본 제국 사이에는 소련이라는 장애물이 있어 어떻게 상호 지원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다로 가자니 보급 문제도 문제인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연합국의 해상 세력에 완전히 궤멸될 판이었다.[87] 그리고 일본은 이전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에서 처들어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일본이 착해서는 당연히 아니고 소련군한테 크게 데인 적도 있었고 이미 중국, 미국과 싸우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전선을 늘릴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 크다. 그래도 양국은 동맹국이랍시고 어떻게든 기술지원을 해주었지만[88] 양쪽 다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어쨋든 히틀러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는데 생각만큼 잘 안풀려서 힘들어 죽을 려는 상황에다가 이탈리아의 관종짓으로 강제 참전하게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전역에서 영국세력을 축출하지도 못했는데 아무생각없이 루즈벨트가 바라던대로[89] '''선전포고를 하면서 파멸을 앞당겼다.'''
6.5. 관련인물들의 후일담
6.5.1. 미군측 인물
아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다수의 전함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를 눈 뜨고 당했기에 책임자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허즈번드 킴멜 대장은 소장으로 2계급이 강등되고 퇴역 처리 되었다. 또한, 월터 쇼트 육군 중장도 1계급 강등되어 소장이 되며 퇴역되었다. 또한, 전역과는 달리 퇴역 처리되며 예비역 소집 대상에서조차 제외당했다. 이는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모든 명예를 몰수당하여 그야말로 군대에서 완전 추방당하는 최고 수준인 불명예 전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에 버금가는 징계에 해당한다. 판단 미스로 기습을 불러 경계에 실패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징계로 2계급 강등한 뒤 나이가 있어서 어차피 예비역 소집은 불가능한 상태라 그냥 강등 후 강제전역시킨 것인데, 이게 진주만 공습 대처 미스라는 배경과 겹쳐서 사실상 불명예 전역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퇴역군인으로써의 혜택은 제대로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급 강등 후 전역당한 것 자체가 오명인지라 본인들 스스로 명예회복에 힘썼고, 그들 사후에 유족들 또한 명예를 회복해달라며 계속 대통령에게 청원을 냈다.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면 무죄가 되어 명예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 킴멜 제독은 본래 소장 계급이었고 대장이 부임하는 자리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부임시키기 위해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시킨 것이라, 어차피 사령관에서 다른 직책으로 이동하면 다시 소장으로 환원될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의미의 강등과는 다르다. 후임인 니미츠 제독 역시 소장 계급이었는데,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물론 니미츠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이후 정식으로 대장 계급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 달았다.
진주만 공습을 허용한 것에 킴멜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만 책임을 몽땅 전가하는 것은 확실히 과한감이 없잖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논란이 존재한다. 헐노트가 거부당한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개전이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일본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기습으로 개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해두고 있었다. 일본군이 과연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미국의 전략가와 정책 결정자 중에 진주만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국무부 장관 헐은 마닐라나 괌을 예측했고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동남아시아에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관련글
이 둘도 억울했는지 군사재판을 자진해서 신청하는 걸로 시작해서 거절당하고 전역한 뒤에도 계속 회고록을 펴내서 자신들을 스스로 변호했고 이들이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르포 작가들의 책도 자주 나왔다. 특히, 킴멜의 자식들 중 1944년에 잠수함 USS 로발로(Robalo) 함의 함장으로 재직 중 함을 잃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미군의 공습 때 포로 수감 시설에 떨어진 폭탄에 전사했던 장남 매닝 킴멜 소령을 제외하고 차남 토마스 K. 킴멜(해군 대령 퇴역)과 삼남 매닝 킴멜 3세는 부친이 작고한 이후로도 부친의 명예회복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킴멜 소령 역시 살아생전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킴멜 소령은 복무 시절 무리하게 교전에 임한 경우가 많아서 상부에서도 이를 우려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전공에 매달린 것으로 추정한다. 킴멜 소령은 해군 내에서 자식에게까지 패장의 자식이라고 욕하거나 하진 않고, 도리어 연좌제 안 먹힐 테니 제발 좀 자제해 달라고 할 정도로 의욕있게 복무했다.
이러한 청을 받아들여 1999년 미국 상원은 투표에 부쳤는데 찬성 52 반대 47이라는 아슬아슬한 결과가 나와 이들의 계급을 회복시켜주도록 대통령에 권고했으나 당시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물론 후임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도 거절했다. 물론 유족들은 승복하지 않고 계속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일단 현재까지는 되지 않았으며 이들은 따라서 퇴역(retired) 소장 신분으로 되어 있다.
두 척의 갑표적 잠수함을 격침한 USS 워드 함의 함장 아우터브리지 소령은 구축함 함장으로 근무한 지는 며칠 되지 않았으나, 갑표적을 발견해 격침시킨 공로로 능력을 인정받아 해군 십자장을 수훈했다. 이듬해엔 워싱턴 DC의 해군수송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DD-725 오브라이언(O'brien) 함의 함장으로 다시 바다에 나갔고, 이 구축함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으로 배치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 오브라이언은 다시 태평양으로 돌아와 레이테 해전에도 참가했으며, 이 때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손상을 입는다. 공교롭게도 그가 첫 함장을 맡았던 구축함 워드 역시, 진주만 공습 3년 뒤인 1944년 12월 7일에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종전 후 해군대학 교장 및 구축함 전대장 등 구축함 관련 업무를 맡다 소장으로 1957년 퇴역, 1986년 9월 20일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본 해군 항공기들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도 제대로 경보하지 않아 재판에 회부되었던 당직사관 커밋 타일러 육군 대위는 무죄를 선고받아 계속 근무했다. 무죄판결의 가장 결정적 사유는, B-17 폭격기들의 비행일정을 통보받은 이후이기 때문에 레이더의 항적을 적기가 아닌 본토에서 오는 B-17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는 것. 이후의 경력도 딱히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미합중국 공군 창설 후엔 공군으로 전군해 중령으로 퇴역했다. 후일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의 판단을 후회하고 여러 번 악몽에 시달리긴 하였다. 또한 당시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편지들이 종종 오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 때의 판단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2010년 1월 23일, 96세로 샌디에이고에서 사망했다. 커밋 타일러의 부고 기사
위의 유명한 전문을 보냈던 램지 소령은 미드웨이 주둔 부대의 작전관으로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전했고, 항공모함 CVE-21 USS 블록 아일랜드(Block Island) 함의 함장을 지내며 항모가 격침됐을 때 생존한 50명 중 한 명이 되기도 했다. 이후 소장 계급으로 퇴역한 뒤 1972년 9월 26일, 73세로 사망했다.
도리스 밀러는 항모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니미츠 제독에게 직접 해군십자장을 수여받았고, 이는 최초의 흑인 수병 출신 훈장 서훈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해군 모병 포스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후 호위항공모함 CVE-56 USS 리스컴 베이에 배치되어 근무하다, 타라와 전투가 끝난 직후 길버트 제도에서 이 항모가 격침될 때 전사했다. 최종 계급은 조리하사였다. 2015년에는 오바마 정부 때 밀러 하사의 훈장을 명예 훈장으로 승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며[90] , 2020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 4번함(CVN-81)의 함명이 도리스 밀러로 확정되었다. 전통적으로 미해군 항공모함에는 미해군에 대한 업적이 있는 전직 대통령, 전직 장관, 전직 제독 또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함선의 이름이 붙었다. 도리스 밀러는 사병 및 흑인 최초로 미해군 항공모함의 이름이 될 파격적인 사례다.
6.5.1.1. 진주만의 명예훈장 수훈자들
공습 이후 여러 사후평가들을 통해 12월 7일 개전 당시의 공훈을 사 진주만에서 총 15명의 명예훈장 수훈자가 탄생했고, 그중 10명이 사후 수훈이었다.
아래는 사후 수훈자 명단이다.
- 아이작 C. 키드(Isaac C. Kidd) : 공습 당시 해군 준장으로 제1전함부대 사령관이었다. 공습 당시에는 함에 머물지 않았지만, 공습을 인지하자마자 기함 애리조나로 복귀하고 함대를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나 진주만 비극의 상징이 된 애리조나 탄약고 유폭과 동시에 실종, 사실상 전사했다. 사후 소장 추서.
- 프랭클린 반 바르켄버그(Franklin Van Valkenburgh) : 공습 당시 해군 대령으로 전함 애리조나의 함장이었다. 키드와 마찬가지로 애리조나에서 최후까지 지휘를 하다가 역시 실종, 사실상 전사했다.
- 머빈 S. 베니온(Mervyn S. Bennion) : 공습 당시 해군 대령으로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의 함장이었다. 공습으로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자신의 치료보다는 최후까지 함과 부하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죽는 순간까지 지휘에 전념했다.
- 프랜시스 S. 플래허티(Francis C. Flaherty) : 공습 당시 해군 소위로 전함 오클라호마에서 근무 중이었다. 연거푸 어뢰를 맞은 오클라호마가 전복하고 전원 퇴함명령이 내려졌을 때, 플래허티는 전우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스스로의 탈출을 포기하고 정전으로 암흑이 된 포탑 속에서 손전등으로 탈출로를 알려주어 수많은 장병들을 살렸다. 플래허티는 끝내 탈출하지 못해 실종되었고, 그의 헌신덕에 살아난 이들의 증언으로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플래허티의 시신은 2019년이 되어서야 확인되었다.
- 제임스 R. 워드(James R. Ward) : 전함 오클라호마 소속 수병. 플래허티와 함께 포탑 속에서 다른 동료들의 탈출을 끝까지 돕다가 정작 본인은 탈출하지 못했다.
- 에드윈 J. 힐(Edwin J. Hill) : 전함 네바다의 갑판사관. 공습이 시작되자 도끼를 들고 바다로 다이빙하여 부두로 헤엄쳐 올라간 뒤 그 도끼로 정박 중인 네바다를 묶고 있던 훗줄들을 모조리 내리찍어 네바다가 항해에 나서는데 1등 공신이 되었다. 공습 당시 전함들 중 조금이라도 항해한 함선은 네바다가 유일하다. 그렇게 훗줄을 다 끊은 후 네바다가 출항하자 다시 바다로 다이빙하여 헤엄쳐 함에 복귀, 원래 업무로 복귀하여 네바다를 노리는 일본군의 공습에 맞서다가 전사했다.
- 허버트 C. 존스(Herbert C. Jones) : 전함 캘리포니아의 소위. 캘리포니아에 대한 첫 공격 직후 연기 속으로 들어가 질식 위험에 처한 전우들을 구해냈으며, 이후 자신의 보직이 아님에도 주인없이 방치되어 있던 대공포를 붙잡고 공격해오는 일본기들에 맞섰다. 탄약이 떨어지자 자원하여 탄약고로 내려가 탄약들을 옮기기 시작하다 공습에 피탄되어 탈출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그를 어떻게든 데리고 탈출하려던 전우에게 배가 언제 침몰할 지 모르니 나까지 살리려하지 말고 어서 탈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토머스 J. 리브스(Thomas J. Reeves) : 전함 캘리포니아 소속 통신부사관으로 위의 허버트 C. 존스와 함께 불길과 연기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탄약고에서 손으로 탄약을 대공포좌로 옮겼다.
- 로버트 R. 스콧(Robert_R. Scott) : 전함 캘리포니아 소속 기관부사관. 캘리포니아가 피격되어 침수되기 시작할 때 그의 업무구역인 에어 컴프레셔가 있는 곳도 침수되어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모두들 탈출하자고 외쳤지만 스콧은 이곳은 내 관할이다. 전우들에게 끝까지 공기를 공급해야 한다.며 탈출을 거부했다.
- 피터 토미치(Peter Tomich) : 전함 유타 소속 기관부사관. 유타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그는 다른 기관실 요원들을 모두 탈출시킨 후 최후의 순간까지 함에 전력을 공급하는 작업을 계속 했다.
- 존 W. 핀(John W. Finn) : 미 해군항공대 카네오헤 만 비행장에서 근무하던 항공병기사. 기습으로 주기된 기체들이 모두 파괴당했음에도, 멀쩡한 기관총들을 꺼내어 긴급 거치, 2시간여에 걸쳐 일본군들과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 치열한 교전으로 왼팔 어깨 등에 심각한 총상을 입고 공습이 끝난 후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응급치료만 한 후 당일 저녁에 기지에 복귀하여 기지를 정비하는 데 합세, 모두를 놀라게 했다. 1942년 9월 항모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니미츠로부터 직접 명예훈장을 수훈받았다. 2010년 타계했는데, 진주만의 명예훈장 수훈자 중 가장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 사무엘 G. 푸쿠아(Samuel G. Fuqua) : 해군 소령으로 전함 애리조나에 소속되어 있었다. 애리조나 탄약고 유폭 이후 살아남은 최선임 장교로서 잔존 인원들을 지휘하여 화재확산을 막고 생존자 구출 및 퇴함을 지휘하여 추가 피해를 막은 공로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대서양 방면에 배치되었다가 1945년에 태평양으로 돌아와 필리핀, 보르네오 전역에 종군하였고 1987년 타계했다.
- 잭슨 C. 패리스(Jackson C. Pharris) : 전함 캘리포니아에 배속된 병기사로, 대공사격을 위한 탄약이 부족하자 침수된 구역을 잠수해 들어가 탄약고에서 탄약을 꺼낸 후 다시 침수된 구역을 잠수해 통과하여 탄약을 전달했다. 이하 반복. 그 와중에도 침수구역때문에 탈출을 못하는 동료들 몇 명을 탈출시키는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잠수 과정에서 유출된 기름을 흡입하는 바람에 폐에 기름이 들어가 약 2년여를 병원에 있었다. 퇴원 후 일선에 복귀하여 순양함 세인트 폴에서 복무했으나 이번에는 가미카제 공격으로 등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1966년 타계했다.
- 도널드 K. 로스(Donald K. Ross) : 전함 네바다의 기관부사관. 상술한 에드윈 J. 힐의 공로로 네바다가 출항한 이후 함에 지속적으로 동력을 공급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그가 근무하던 전방 발전기실이 열기와 연기로 가득차자 부하들을 모두 탈출시킨 후 홀로 남아 모든 작업을 수행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히 그가 걱정되어 온 전우에 의해 구조되어 의식을 차렸으나 이번에는 후방 발전기실로 가서 네바다가 좌초할 때까지 동력공급 업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시력을 일시적으로나마 거의 잃었다. 치료 이후로도 계속 네바다에서 근무하여 주로 유럽 전역에서 종군했다. 1992년 타계했다.
- 캐신 영(Cassin Young) : 해군 대령. 수리함 USS 베스탈의 함장. 애리조나의 유폭때 충격으로 바다로 튕겨졌다가 자력으로 함에 복귀 후, 언제 추가폭발할 지 모르는 애리조나를 구원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애리조나에 근접하여 지원 및 구조업무를 수행했다. 공습 이후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의 함장이 되어 여러 차례 공훈을 세웠으나 1942년 사보 섬 해전에서 전사했다. 진주만 공습때 생존한 명예 훈장 수훈자 중 유일하게 종전 이전에 죽은 인물.
6.5.2. 일본군측 인물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 공격과 연이은 남방작전에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한 공을 세웠지만, 야마모토와 달리 일본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6개월여 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면서 나구모는 항공모함 부대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역에 참가했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상처뿐인 승리[91] 를 거둔 끝에 결국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수상함대 사령관직을 이어가다가 사이판 전투에서 자살했다.
- 이 이면에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의 불편한 관계가 있었다. 애초부터 나구모는 전함을 중시하는 함대파의 핵심 인물중 하나였던 터라 조약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야마모토와는 이전부터 대립하던 사이였다.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연공서열 때문에 앉게 된 것[92] 이어서 나구모 스스로도 이 자리를 불편해했고, 나구모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야마모토 역시 이런 상황을 그리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당시 일본 해군내에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진주만 공습을 전후로 더욱 심해졌다. 진주만 공습을 강하게 반대했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나구모였으며, 이후 진주만에서 3차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온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진주만 공습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야마모토의 불만이 반영되면서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공이 격하되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바로 해임해버리고 싶었지만 승리한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는 커다란 후폭풍이 닥칠게 뻔했고, 이후 남방작전의 공이 더해지자 나구모를 끌어내릴 명분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속사정 때문에 연합함대 내에서 나구모의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으며, 남방작전 이후의 전략적 행보에 대해 육군에서 주장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지지했다가 연합함대 내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나구모가 항공전 분야에 무지했던게 역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으로 이어지자 야마모토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선에서 만족하던 터였지만...
후치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 때까지 지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보도를 하는 한편 귀환한 부상병들에게 연금생활을 강요했으며 이에 후치다는 전쟁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패전 후 진주한 미군 조종사에 의해 기독교를 접하고, 선교사가 되어서 간증하러 1970년대 한국도 방문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회고록을 펴내면서 태평양 해전사 연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한 <진주만 공격 총대장의 회심>이라는 회고록을 내어 진주만 공습의 준비와 전투 과정을 잘 증언해 놓았다.[94]
한편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연합함대 참모장 쿠로지마 카메오 대좌는 소장으로 전쟁을 마쳤고 전후 기업가로 변신했다.
6.6. 평가
지금도 정신 나간 극우파들이나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일부 일본인들은 이 진주만 공습을 일본이 초강대국 미국에 타격을 가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5ch 등에서는 넷 우익들이 "우린 전함과 전투기를 가지고 세계최대 규모의 전쟁을 치른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라고 정신승리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다. 또한 극우들이 일본제국을 옹호할 때 '''태평양 전쟁과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강제로 유도하여 일본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인 일이라고 정당화'''하며 여기에서 헐 노트를 만능 카드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허나 이것이 일본에 대한 면피라는 건 당시 중일전쟁을 벌인 주체가 누구이며, 열강들의 중화 대륙에 대한 이권다툼이 왜 중요했는지만 논해도 답이 나온다. 중요한 건 중일전쟁을 왜, 누가 시작했는지만 봐도 답이 나온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이 진주만 공습의 화려해보이는 전과와는 달리 역사와 군사사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전사에 대하여 조금아나마 아는 자들은 ''''진주만 공습이 일본제국의 패배로 향하는 시발점이었다.''''는 역사적 분석에 의의를 둔다. 이는 후대인들뿐 아니라 야마모토 이소로쿠와도 같은 당대의 일본 식자들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바였다. 결국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95] 선제 공격은 미국인들을 분격하게 만들었으며, 초강대국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결과, 일본은 압도적인 미국의 힘에 결국 밀려 처참하게 허덕이다가 패하여 몰락하기에 이른다.
6.7. 소련
흥미로운 점으로는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가 소련으로 새어나갔다는 사실이 있다.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를 알아내 소련에 보냈기 때문. 조르게는 독일침공도 미리 알고 보고했었던 성과가 있으니 보고 자체는 믿었겠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진주만 공습과 미국참전의 시작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불명이다. 당시 미국이 유럽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소련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진격하는 등, 제 코가 석자라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혹은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해서 자신들의 랜드리스 보급선을 막는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르게가 빼낸 일본군 남방작전은 소련에 큰 도움이 됐다. 조르게는 "모스크바가 함락되지 않는 한은 일본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타전했다. 소련은 그 정보를 접하고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정예사단중 일부를 열차로 실어 와서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일본은 독일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소련을 후방에서 공격하겠다고 독일에게 알렸었는데 일본의 행동으로 결국 독일의 모스크바 공략이 더 어렵게 됐으니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의 팀웍은커녕 팀킬도 이런 팀킬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동맹이랍시고 할힌골 전투 직후의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과,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소련과 일본의 불가침 조약을 생각해보면 애초에 팀워크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7. 창작물에서 묘사한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공습이어서,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창작물에선 직간접적으로 1번 이상은 언급하는 편이다. 진주만 공습 자체를 묘사한 창작물로는 다음의 예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미국의 고립주의를 깨트린 중요한 분기였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에서 분기하는 대체역사의 가능성들에서 중요한 트리거중 하나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 하와이 말레이 충해전: 1942년에 만들어진 일본 전쟁 영화로 일종의 해군 입대를 권유하는 홍보 영화에 가깝지만 후반부의 진주만 공습신은 볼만했다.
- 태평양의 폭풍: 1960년 당시 일본 명 배우들이 다수 동원된 영화로 초반부에 진주만 공습하는 씬이 잠깐 나오는데 마치 하와이 말레이 충해전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 도라 도라 도라: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창작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상세하게 묘사했다.
- 벽람항로: 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함선 모에화 게임답게 도입부인 1장이 진주만 공습을 모티브로 했다. 아예 1장 챕터 이름이 일섭은 '도라 도라 도라'고,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에 서비스하고 있는 글섭에서마저 'TORA! TORA! TORA!'로 나온다. 그 외의 서비스 국가들에서는 '진주만을 기억하라'로 나온다. 참고로 여기 중국 회사다. 그래서 일본 눈치를 안본다.
- 진주만: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공습 장면은 매우 화려하고 고증에 맞게 잘 표현했으나 빈약하고 지루한 분위기의 스토리 때문에 영화 자체는 혹평을 받았다.
- 미드웨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미드웨이 해전이 중심인 영화라 길게 다뤄지지는 않지만,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지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알리고 주요 인물들의 전투 의지를 불사르는 계기가 되게 한다. 20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진주만에 비해 할리우드씬을 많이 줄이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할 수 있는게 영화 진주만과는 달리 한 사람이 여러 대의 일본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씬이 등장하지 않는다. 확실히 현실고증을 맞추려는 각고한 노력을 보인 셈.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둘리틀 특공대까지 같이 나온다(엔터프라이즈가 호넷을 호위했기 때문).
- 패러독스 사의 2차 대전 배경 대전략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선 역사 재현 테크 트리인 국가 중점 트리에서 진주만 도박(Pear Harbour Gambit)이라는 이름으로 묘사했다.
연구 조건이 국가 중점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일본에 대한 무역 차단) 완료. 하와이에 주력함 7척 이하 주둔시 실행가능으로 사실상 일부러 취약한 해군 기지에 주전력처럼 보이지만 잃어도 치명적인 타격은 아닌 함대를 방치시킴으로써 일본의 공격을 유도하는 도박을 했다고 위의 음모론을 차용했다.
다만 맨더건 DLC와 패치에서는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와 '진주만 도박' 중점이 사라지고 디시전 발동시 대동아공영권 상대로 전투력이 오르거나 일본의 미국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는 '전쟁 계획 주황'과 태평양 섬들의 방어력과 해군기지를 늘려주는 '태평양 방어' 중점이 기존 대일 국가중점들을 대채했다. 아마 미국이 진주만 공습을 유도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음모론이 설득이 없어서 그런듯 하다.
-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썰트에서도 초반에 등장한다. 미션 시작 전 항공모함에서 일본 전투기가 출격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후 애리조나함에 배치받기 위해 지프를 타고 이동하다 마주친 야한잡지를 보던 수병 무리와 만담을 나누던 도중 일본 전투기가 나타난다. 맨처음 일본 전투기를 발견한 수병하나가 자국 육군측 전투기인줄 알고 육군을 욕하지만, 이후 다른 수병이 일본측 전투기임을 알아챈 순간 일본 전투기들의 기총소사가 시작되며 진주만은 혼돈의 아수라장이 된다. 이후 부두로 가서 PT 보트에 올라타 전투기와 싸우다가 어뢰를 맞고 옆구리에 구멍이 난 전함에 올라타는데 그게 바로 웨스트 버지니아.
- 코에이의 전략 시뮬레이션인 제독의 결단 시리즈에서는 단기 캠페인으로 항상 등장하며, 장기 캠페인인 개전 직전 시나리오에서도 항모기동부대가 공습을 위해 태평양에 진출해 있는 상태로 등장한다. 항모는 해상에 빠져나가 있고 전함을 잡는게 고작이기 때문에 기습에 성공해 봐야 그다지 좋을게 없다. 차라리 진주만 대신 해상의 미 항모를 찾아내서 섬멸하는 편이 낫다. 미국 측으로 개전 직전 시나리오를 플레이할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일본 기동함대가 진주만을 공습하는데, 이걸 사전에 찾아내 섬멸하면 게임 진행이 매우 쉬워진다.
8. 여담
- 진주만과는 별개로 일본은 나머지 연합군인 영국, 네덜란드에는 진짜 선전포고조차 안 하고[96] 전쟁을 벌여버렸다.
- 야사에 의하면 독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게 바로 전쟁이다. 우선 공격부터 하고 선전포고는 나중에 하면 된다"고 크게 기뻐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런데 히틀러는 선전포고를 나중에 한 수준이 아니라 불가침조약이나 평화협정 같은 것도 다 무시하고 쳐들어갔고 독소전쟁 내내 선전포고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진주만 공습보다 먼저이므로 저 야사는 사실일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다.
- 진주만을 폭격한 뒤로 캐나다나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전쟁 끝날때까지 차별당하고, 감옥에 갇혀있었다.[97]
- 한편 진주만 공습이 알려지자, 일본 전 국토는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고, 일본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일본 해군에 자원 입대를 하러 몰려들었다. 이는 일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진심으로 지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일본 국민들은 전쟁을 원치 않았는데, 군부가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따른 희생양이라는 주장은 이 사례에 비추어 보건대 들어맞지 않을 뿐이다.[98]
9. 관련 어록
'''우리는 진주만을 향해 진격했고, 나는 암호를 크게 외쳤다. 도라, 도라, 도라'''
'''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99]
'''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른다."'''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한 독백.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가루가 돼버리겠지."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진주만 공습을 부관으로부터 보고 받은 어니스트 킹 제독의 반응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진주만 공습 이후 선전 포고 연설문 서문.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우리는 3000년 동안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국가를 동맹국으로 두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의 소식을 듣고 아돌프 히틀러가 한 말
대표적인 것이 이 짤.[55] 소련이라는 막강한 동맹의 존재에도 독일을 때려잡는게 쉬운 일은 아니라 투입된 물자와 병력, 피해가 훨씬 많았다.[56] 당시 미 육군의 마셜 장군은 1943년에 프랑스에 상륙해서 1944년에 독일을 항복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57] 이 때문에 윈스턴 처칠이 유보트에 공격당하는 영국 말아먹는다고 미 해군 제독 어니스트 킹을 비난하기도 했다. [58] J. Bryan (1947). Admiral Halsey's Story. Whittlesey House. pp. 75–76. ISBN 978-1-4325-6693-7.[59] 예를 들어 미국 민간 함선들이 대영제국으로 향하다 독일 U보트에 의해 침몰해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해도 보상금 정도만 받고 끝내려 했을 정도였다. 다만 미국 정부는 유럽의 전체주의화를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무기 대여법 등을 통해 서유럽을 최대한 지원하고 있었다. 이때 FDR이 한 말이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되어야 한다는 것.[60] 후술하겠지만 모든 의원이 전쟁에 동의하는 이 와중에 혼자 반대를 누른 이 의원은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래 내내 전쟁을 반대해온 공화당 여성의원이었다.[61] 물론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자진 입대율이 높다는 것을 이용해 군대를 빠진 사람들도 상당했다.[62]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참전 용사 인터뷰 장면에서 이 얘기가 언급된다.[63] 폭격기 승무원으로 전후 준장까지 진급했다.[64] 당시 미 해군의 인사사령부 역할도 맡는 부서였다.[65] 주 단위에선 주지사외에 그 휘하, 의회의 정치인이나 공무원들, 그 외에 소도시의 시장들, 각 지역의 중견 명사들(전문직 종사자)이 전쟁 전 부터 주방위군 장교/장성으로 복무했던 경우가 많았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 내내 풀타임으로 참전했다.[66] 전쟁 이전에 하원의원 재직 중에 해군소령으로 복무했는데 진주만 공습이 터졌고 주로 감독관으로 활동했다.[67] 원문은 "다른 사람"이나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생각해보면 남자들을 뜻한다.[68]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랜킨 스스로 각오한 엄청난 자충수여서, 1942년 중간선거를 포기하고 정계은퇴를 해야 했다. 상술한 한국전 및 베트남전 반전운동은 정치인이 아닌 사회운동가로서 했다. 1차대전 참전에 대한 반대투표때는 높아진 인지도를 바탕으로 상원의원에 도전했었는데 완전히 상황이 반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랜킨의 선거구인 (공화당에게 매우 유리한) 몬태나 주 제1선거구는 랜킨이 은퇴한 1943년부터 선거구가 사라지는 1993년까지의 50년 중 '''겨우 4년''', 즉 선거로는 단 2번만 공화당이 이겼으니 당 입장에서는 피해가 컸다.[69] 다만 당시 조선인들은 미국에서도 별개로 봐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70] 《대지》의 작가 펄 벅 등 아시아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일제의 팽창욕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어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주시하기도 했으나, 당시 미국은 관동 대지진 때 수많은 시민들이 기모노를 입고 뉴욕에서 일본을 돕자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로 자포네스크 정서가 위나 아래로 깔려있었기에 대부분은 헛소리로 치부했다. (일본을 개항시킨게 미국이었기에, 일본 입장에선 대부격인 미국을 이때까진 잘 따랐고 미국도 이에 일본을 자기들 말 잘듣는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 물론 미국 수뇌부는 좀 더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미국은 1920년대부터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긴 했다. 1937년 벌어진 중일전쟁도 그래서 뒤로는 중국에 물자 대주고 앞으로는 일본 수출 막아가며 온갖 딴지를 걸었던 것.[71] 위의 선전포고문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되지만 선전포고문을 먼저 입수하고 '''먼저 해독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문서 내용이 워낙 애매모호해서 별다른 대응책을 수립하지 못한 상황이었다.[72] 다만 이것 역시 대공황 시절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고, 무엇보다 애초에 이때 뉴딜 정책은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에 오히려 예산이 감축되는 등 후퇴했던 상태라 오늘날 경제학자들간에도 갑론을박이 다분한 주제이다. 폴 크루그먼 교수같은 경우엔 오히려 이때 경제적 보수주의자들의 반발로 뉴딜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면서 일시적 불황이 왔다고 분석할 정도.[73] 한편 조셉 그루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과의 국교를 스스로 단절한 때까지 주일대사로 근무했으며 개전 즉시 억류되었다가(둘리틀 특공대의 공습 당시에도 아직 억류되어 있었다) 미일간 합의에 의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모잠비크)에서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키치사부로, 대미 특사 쿠루스 사부로 등과 교환되어 반 년 간의 억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74] 당시 미국의 전함이 총 16척이었는데 그중 8척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었다. 운이 좋아 인양, 수리할수 있었던거지 거함거포주의가 만연했던 해군들 시각에선 해군력의 절반이라고 해도 무방한 규모가 전멸 가능하게 놔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75] 항공기 엘리베이터나 케터펄트등은 다른함선에서는 쓰는게 더 이상한수준인지라 수리시설이 제한적이다. 하지만 하와이쪽에 그런 시설이 없었고 기술진도 부족한지라 본토에가야 정비가 가능했다.대공황시즌에 하와이에 그런거 건설하자하면 욕먹는건 기본이고 당장 생사가 불분명해진다.[76] 미드웨이섬으로 항공기운송.[77] 다만 이미지에 안맞는것 뿐이지 비행기 싫으라고 군이 만든배가 군용기를 싣고 최전방 항공기지에 전해주는건 원래 목적대로 쓴거다. 항공모함에 기본은 효율적인 항공기적제라는것을 생각하자.[78] 일본군은 급유함과 잠수함 말고는 28노트의 카가가 가장 느린 함이었다.(게다가 카가 역시 원래 항공모함이 아닌 전함이었다가 개장해서 항공모함이 된 것이니....) 미국 전함은 거의 21노트 정도. 거기에 상당히 까이는 새장형 마스트를 필수적으로 장착했다.[79] 실제로 일본군은 이후에도 지원함보다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우선 공습, 뇌격한다. 적 주력전력의 궤멸에 집착하고 보급 및 지원세력을 경시하는 풍조는 일본군의 매우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라 일본군 전사를 조금만 파봤으면 애초부터 이상함을 느낄 것도 없다. 현실적으로도 이들 표적에 대한 공습은 쉽지 않았다. 원유저장고가 하나의 탱크가 아니라는 점은 앞서도 설명했을뿐더러, 일단 공습 규모에 비해 한번에 출격시킬 수 있는 함재기의 규모가 한정되었기 때문에 최대한 고가치 주력전투함 격침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그나마도 적의 요격을 대비해 요격기들을 섞어서 보냈기 때문에 실제 폭격전력은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진주만 공습을 흔히 현대 항모전술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하지만, 따지고 보면 항모 타격 전술의 한계 역시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80] 사우스다코타급 전함들은 1942년 4월부터 취역하기 시작한다.[81] 정확하게는 육군은 더 이상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을 확대하는 것보다 이미 교착 상태인 중일전쟁을 마무리 하고자 이런 주장을 했다. 태평양 전선은 바다를 끼고 작전을 하기 때문에 해군이 주연이고 육군은 조연 취급을 받는 반면 중일전쟁을 승리한다면 온전히 육군의 공적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82] 대표적인 게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킨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백주대낮에 도쿄를 공습한 둘리틀 특공대가 있다..[83] 애초에 수도 함락 기준도 말이 안 되는게, 일본이 무사했던 건 전쟁을 잘해서가 아니라 섬인데다가 주변국들이 일본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십만 군세가 부딪히는 국가 대 국가의 총력전 경험은 임진왜란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84] 물론 애초에 3천년 드립부터가 말이 안되는게 일단 일본 역사가 신화 시대를 빼면 그 정도까지 안되며, 수도가 함락당한 기준으로 보면 모르겠으나 일본이 쳐들어갔다 깨진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한국 관련으로만 봐도 백강 전투, 성덕왕 시절 침입, 임진왜란 등.[83] 한마디로 역알못 히틀러의 행복회로 돌리기. 한편, 윈스턴 처칠은 동일한 소식을 듣고서도 '''"3천년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 번 되었군"'''이라는 낙관적인 결론을 말했다고 한다. 사실 처칠은 이전부터 어떻게 해서든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85] 심지어 중국군이 슈탈헬름까지 착용한 사진까지 있다. 후일 중국군이 한국 광복군을 원조하면서, 광복군이 독일군의 장비를 들고 나오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86] 이런 이유로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는 미국의 선박이라도 봐주지말고 공격해야 한다는 되니츠를 오히려 히틀러가 반대할 정도였었다.[87] 사실 이런 지정학적 사항은 독일과 일본에 둘러쌓인 상태였던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연합국은 북대서양 서부와 대서양 남부 전체 그리고 인도양 서부의 수상함 세력에서 완벽한 우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미의 북서대서양에서 출발한 수송선이 남동대서양으로 쭉 내려와서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 서부의 이란에 하역하여 지상으로 옮기는 어마어마한 여정의 운송로를 실행이라도 할 수 있었고 또한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하던 시기에도 소련측 배는 태평양을 통해 미국발 비전투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기에 사정이 훨신 나았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가장 잘 나가던 시절에도 인도양 동쪽의 제해권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물론 그 정도라도 영국은 똥줄이 타들어갔지만. 정확히는 양쪽 다 더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에 가깝기는 하다. 일본은 다시 태평양 쪽으로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고 영국도 유럽 전선이 급하다보니...[88] 믿기 힘들지만 일본도 군함 건조기술을 독일에 전수해주기도 했다. 바로 그 유명한 그라프 체펠린. 그런데 하필이면 원 모델이 '''아카기'''라....[89] 진주만 공습이전 미국의 참전론자들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것을 주장했다.[90] 당시 프랭크 녹스 해군 장관은 밀러의 명예 훈장 서훈에 반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녹스의 이름을 딴 녹스급 호위함 FF-1091에 밀러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91] 함정 피해는 미군이 컸지만 항공력의 피해는 일본군이 더욱 컸고, 이후 일본 항공모함 부대는 필리핀 해 해전때까지 재건에만 매달려야 했다.[92] 연공서열만 아니었으면 나구모보다 먼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앉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레이테 만 해전에서 윌리엄 홀시 제독을 항공모함 즈이카쿠로 낚은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이다.[93] 아카기의 비행대장. 항공모함에서 지휘하는 비행단장은 중좌, 직접 비행하며 지휘하는 비행대장은 소좌이다. 후치다는 소좌 계급으로 항모 아카기의 비행대장이였다. 그러나 기존의 함장/비행단장이 비행대를 지휘하던 방식 대신, 공중에서 항모 4척의 비행대 전체를 통합지휘할 필요성 때문에 후치다가 실질적으로 비행대를 총 지휘하였고, 공습 직전에는 중좌로 승진하였다.[94] 후치다는 회고록 초안에 '전 진주만 공중 공격대 총지휘관, 현 기독교 평신도 전도사'라고 직함을 썼는데, 출판사 측에서 '공중'이라는 단어를 빼놓아 "진주만 공격 총대장은 나구모 주이치인데? 얘는 누구?"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출판사 측의 네이밍 마케팅? 책에는 다른 중요한 순간에는 하느님이 직접 자신에게 나아갈 바를 귀뜀해주어 난관을 해쳐나갔다고 했는데, 유독 진주만 공습에만은 이러한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다고 한다.[95] 선제공격 후 선전포고는 국제법 위반이다.[96] 자국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대한 선전 포고를 발표했지만 선전 포고문을 영국측에 전달하지 않았다.[97] 문제는 한국인들과 중화민국계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말은 즉, 한국- 중화민국계 중국인들도 차별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조치가 취해졌던 시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던 전시에 벌어진 극단적 제제였으며, 미국도 이게 너무 극단적이었다는 걸 깨달은 뒤에는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즉, 서기 2020년이 다가오는 현대에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를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당장 트럼프 정부와 중국이 무역 갈등을 겪고 있다고 미국에 사는 화교들이 체포당하거나 탄압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98] 애초에 1905년 러일전쟁의 와중에 포츠머스 회담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국민들은 러시아로부터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 및 30억 엔의 배상금을 받기 전까지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며 히비야 방화 사건을 일으킬 만큼 제국주의의 열망에 불타 있었다.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즘 국가라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천황제 파시즘 참조.[99] 뭐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이 작전을 시작으로 일본이 멸망할 운명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닐지도...[100]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막대한 피해를 입자 전세계가 미국을 안타까워 했지만 유일하게 처칠만이 미국이 참전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