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비야

 

1. 개요
2. 역사


1. 개요


수피 종단의 일파였으나 후에 열두이맘파 시아파로 개종한 후 사파비 제국으로 성장한 단체.

2. 역사


14세기 초엽, 일 칸국이 붕괴될 무렵에 아르다빌에는 11세기부터 거주해 오던 쿠르드 계 가문이 있었다. 그 시조인 피루즈 샤는 부자였으며 알리의 후손임을 자처하였다. 그의 6대손인 사피 앗 딘은 수피 교단인 자헤디야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무르쉬드 (교주)인 자히드 길라니의 외동딸 파티마와 결혼한 후 그 후계자가 되었다. 1301년, 자히드가 사망하자 사피는 교단을 장악한 후 시아파 교리를 적용하여[1] 계승되는 이맘 체제로 변모시켰다. 사파비아 교단의 탄생이었다. 1334년, 사피가 사망하자 그와 파티마 사이에서 태어난 사드르 앗 딘이 계승하였다. 그는 1391년까지 무려 58년간 교단을 이끌었고 티무르의 호감을 사 아르다빌의 수조권을 부여받았다.[2]
또한 티무르는 사드르 앗 딘에게 무엇이든 좋으니 소원 한가지를 말해보라 하였다. 이에 그는 티무르 군대가 디야르바크르 일대에서 사로잡은 튀르크인 포로들을 자신에게 줄 것을 부탁하였고 곧 실현되었다. 사드르는 튀르크 인들을 해방시켜 주었고 그들은 사파비야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로써 소규모로 시작된 교단은 군사 조직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사드르를 계승한 아들 알리 사파비 역시 티무르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열두이맘파 (시아파)를 신봉하던 튀르크 수하들의 설득으로 마침내 그로 개종하였다. 알리의 아들인 이브라힘 (1427 ~ 1447년)은 인근의 조지아에 지하드를 선포하고 세력을 키웠다. 그를 계승한 셰이크 주나이드는 교단의 조직화, 국가화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를 위협으로 간주한 흑양 왕조의 자한 샤에 의해 아르다빌에서 축출되었다. (1448년)
주나이드는 흑양 조와 대립하던 디야르바크르의 백양 왕조로 망명하였다. 그 군주인 우준 하산은 주나이드와 자신의 여동생을 결혼시켰고 (1456년) 그 사이에서 태어난 하이다르에게는 자신의 딸을 혼인시킬만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주나이드는 아르다빌로 돌아가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을 지나다 살해되었다. (1460년) 그를 계승한 셰이크 하이다르는 겨우 2살에 불과하였으나 흑양 왕조를 멸망시킨 삼촌 우준 하산의 도움으로 1469년 아르다빌을 수복할 수 있었다. 하산의 딸과 결혼한 하이다르는 세력을 규합하여 다게스탄, 오세티아 일대의 '이교도'들과 싸우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1473년) 그러나 그를 경계한 아제르바이잔의 쉬르반샤 왕조는 백양 왕조와 동맹하였고 1488년, 하이다르가 재차 침공해오자 기습하였다. 그를 생포한 백양 조의 술탄 야쿠브 (하산의 아들)는 사촌을 처형한 후 수급을 타브리즈에 묻었다.[3]
하이다르를 계승한 장남 알리 미르자는 부친의 복수를 꾀하다가 백양 왕조의 공격을 받아 일가와 함께 사로잡혔다. 이때 야쿠브의 모친의 간청으로 그들은 사형에 처해지는 대신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의 이스타크르로 유배되었다. 그러던 1490년, 야쿠브가 사망하자 백양 조는 내전에 휩쌓였다. 1493년, 왕위를 노리던 루스탐 왕자[4]는 알리 미르자를 석방하고 사파비야 세력을 이용하여 권좌에 오르고자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루스탐은 알리에게 반란이 성공한다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며 설득했다고 한다. 사파비야 군대는 루스탐을 도와 야쿠브의 아들 바이손코르를 패배시켰고 루스탐은 술탄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며 사파비야의 세력을 실감한 루스탐은 약속과 달리 그들을 숙청하기로 하여 체포하였다.
루스탐에게 압송되던 알리와 동생 이스마일은 간신히 탈출하였지만, 아르다빌로 향하던 도중 백양 왕조의 추격군와 조우하였다. 이에 알리는 당시 7세에 불과하던 동생 이스마일에게 후일을 부탁하곤 그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곤 잡혀 처형되었다. (1494년) 그리고 5년간 길란 지방에서 은둔하던 이스마일은 1499년, 아르다빌로 돌아왔고 카자르, 아프샤르 부족 등으로 구성된 튀르크 군대를 모아 제국의 주력군이 될 키질바시를 구성하였다. 그는 1500년 말에 시르반샤 왕조를 공격, 파루크 샤를 전사시키고 그 일대를 복속시켰다.[5] 그러자 1501년, 타브리즈의 백양 조 군주 알반드[6]가 도전해 왔는데 4배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나히체반 지방에서 벌어진 사루르 전투에서 피리 베그가 이끈 사파비 군에게 대패하였다. 그해 7월, 이스마일 1세는 타브리즈에서 이란의 샤한샤로 즉위하였다. 1502년, 이스마일 1세는 이라크 일대까지 정복하였고 1503년에 파르스, 1507년에 디야르바크르, 1508년에 케르만을 정복하며 백양 왕조를 멸망시켰다.


[1] 본래 사파비야의 모태인 자헤디야는 수니파의 5대 법학파 중 하나인 샤피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 수피 앗 딘의 거대한 영묘가 지어진 것도 티무르의 후원 덕이었다[3] 여담으로 공교롭게도 부친과 거의 같은 장소에서 살해되었다[4] 야쿠브의 조카[5] 시르반샤 조는 1538년에야 멸망한다[6] 유수프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