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준 하산
[image]
같은 튀르크계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에서 발행된 그의 기념 우표
페르시아어 اوزون حسن
영어 Uzun Hassan
재위 1453 ~ 1478년 1월 6일
생몰 1423 ~ 1478년 1월 6일
백양 왕조의 9번째 샤한샤. 페르시아어로 우준 하산은 '키다리 핫산'을 뜻한다. 그는 본래 티무르 제국의 속국이자 흑양 왕조에 눌려 지내던 백양 왕조를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서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격돌하였는데, 1473년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역시 정복왕이던 메흐메트 2세에게 대패하며 더이상의 확장은 못하였다.
본래 백양 왕조 (아크 코윤루)는 1402년에 티무르에 의해 임명된 디야르바크르 총독 가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15세기 초반 티무르가 사망하고 흑양 왕조 (카라 코윤루)가 돌아와 이라크의 패권을 장악하자 백양 조는 그에 복속되었다. 다만 카라 유수프가 사망한 1420년부터 그의 아들들이 경쟁하며 흑양 조는 분열되어 백양 조는 사실상 독립하였고, 그 즈음 우준 하산이 태어났다. 부왕 알리가 사망한 후 (1438년) 숙부 함자[1] 를 거쳐 하산의 형인 자한기르가 계승하였다. 한편, 분열되었던 흑양 왕조는 자한 샤[2] 가 1446년에 조카 알반드로부터 바그다드를 접수하며 통일되었다.
1447년, 바그다드를 지배하다가 모술 총독으로 강등된 알반드는 삼촌 자한 샤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패배하고 자한기르의 궁정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반환 요청이 거부당하자 자한 샤는 전쟁을 선포하였고, 패배한 자한기르는 백양 왕조에 복속하였고 딸을 자한 샤의 삼남 미르자 무함마드와 결혼시켜야 했다. 이에 우준 하산은 형의 나약함을 비난하며 봉기하였고, 결국 그를 축출하고 디야르바크르를 장악하였다. 자한기르는 자한 샤의 궁정으로 도주하였다.
흑양 왕조와 친했던 형에 대한 쿠데타로 인해 즉위 직후부터 자한 샤와 대립하게 된 우준 하산[3] 은 흑양 왕조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포섭하며 힘을 길렀다. 그중엔 아제르바이잔[4] 세력을 키우던 사파비 가문[5] 도 있었는데, 하산은 그 수장인 셰이크 주나이드에게 자신의 여동생 카디자를 결혼시키고 이후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셰이크 하이다르와 자신의 딸 베굼을 결혼시키는 등 인척을 맺었다. 이후 하이다르와 베굼의 사이에서 사파비 왕조의 창건자 이스마일 1세가 태어나는 것은 덤. 그는 또한 처가인 트레비존드 제국를 돕지 않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과 화친하며 배후를 안정시켰고 1457년 5월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흑양 왕조군에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자한 샤는 1452년에 이스파한, 1458년에 헤라트를 점령하는 등 티무르 제국에 대한 원정에 집중하느라 하산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1458년 말, 마침내 하산과 겨루기로 마음먹은 자한 샤는 이란 북부와 헤라트를 반환하는 등 티무르 술탄 아부 사이드[6] 와 강화를 체결하고 회군하였다. 하지만 하산에 대결할 겨를도 없이 그는 장남 피르부다그와 차남 하산 알리의 반란에 대처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1464년, 피르부다그를 처형하며 내부를 안정시킨 자한 샤는 대군을 하산에 맞설 준비를 하였다. 그 사이에 디야르바크르에서 1만 군대를 모은 하산은 주변을 약탈하였고 1466년에는 조지아를 원정하는 등 힘을 비축하였다. 하산이 조지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그해 5월 16일, 자한 샤는 대군을 소집하여 타브리즈에서 출정하였다.
하산은 무리하게 그의 대군과 정면 충돌하기 보다 그를 자극하는 동시에 협상을 진행하는 척 후퇴하며 흑양 왕조 군대를 반 호수 건너편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1년여간 산지에서의 숨바꼭질이 계속되자 원정군 내에서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에 자한 샤는 후퇴하게 되었다. 사기가 저하된 채로 흑양 왕조 측이 후퇴하자, 이틈을 노린 하산은 그 후방을 습격하였다. (차팍추르 전투, 1467년 11월) 지친 흑양 군대는 붕괴되었고, 자한 샤 역시 도주하다가 전사하였다. 흑양 왕조의 정예병이 단 한번의 전투로 괴멸된 것이다. 한편, 자한 샤의 삼남 미르자 무함마드와 사남 미르자 유수프는 포로가 되었는데 전자는 처형되었고 후자는 장님이 되어 풀려났다.
흑양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던 자한 샤가 사망하자 이란 일대는 혼란에 휩쌓였다. 반란을 일으킨 후 마쿠에 감금되어 있던 그의 차남 하산 알리가 풀려나 술탄이 되었으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산 알리는 가까스로 타브리즈의 후세인 (그의 사촌)과 케르만의 카심 (그의 동생) 등을 평정하고 안정을 회복하는듯 하였으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우준 하산이 아니었다. 우준 하산 자신이 이라크 일대를 평정하는 동안 아들 우굴루가 출정하여 마란에서 하산 알리를 패배시켰다. 타브리즈를 잃고 동쪽으로 패주한 하산 알리는 기존의 적국이었던 티무르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7] 1468년, 결국 사로잡힌 하산 알리가 압송되던 중에 하마단에서 자살하며 흑양 왕조는 사실상 끝났지만 티무르 조의 아부 사이드 샤는 그의 구원 요청을 수락하며 새로운 전쟁으로 이어졌다.
자한 샤의 넷째이자 장님인 미르자 유수프가 흑양 조의 술탄으로 옹립되자 아부 사이드 샤는 그를 지지하며 출정하였다. 이에 하산은 흑양 왕조의 소통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사마르칸트에 편지를 보내어 대대로 이어진 티무르 가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겠다고 청하였다. 오스만 제국과의 격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티무르 측과도 싸워 양면 전선을 펴는 것은 신생 백양 왕조에겐 벅찬 것이었다. 하지만 아부 사이드는 하산의 충성이 진심이 아닐 것이라 판단하였고, 또 그는 증조부인 티무르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1468년 말, 손쉽게 아제르바이잔을 접수한 아부 사이드는 군대를 삼분하여 본대 외에 하나는 흑양 조의 술탄 유수프와 함께 루리스탄 일대로, 나머지는 파르스 정복을 위해 파견하였다. 이에 우준 하산은 재차 협상을 청하였으나 아부 사이드는 하산 본인이 직접 진영으로 와서 티무르의 후계자에게 복종을 표하라는 무리한 요구만 이어나갔다. 전쟁이 불가피함을 깨달은 하산은 자한 샤와의 대결 때와 마찬가지로 고원 지대로 후퇴한 후 정면 대결을 피하며 청야 전술을 폈다. 146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혹독하였다. 광야에서 물자가 부족한 채로 행군하던 원정군은 적과 마주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14일간 술탄의 명마가 건초를 먹지 못해 쓰러지는 일도 있었으니 일반 병사들이 기아에 시달린 것은 명약관화 하였다. 탈영병이 줄을 이었고 아부 사이드 샤 역시 무질서하게 후퇴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우준 하산은 아들들에게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그를 추격하게 하였고, 그들은 카라바그 (현재 아제르바이잔 서남부)에서 아부 사이드 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1469년 2월 4일에 벌어진 전투는 백양 왕조의 압승이었고 포로가 된 아부 사이드는 3일 후에 그의 칠촌이자 하산의 동맹이던 야드가르에게 넘겨져 살해되었다.[8] 이 전투는 이라키 아잠의 참사라는 이름으로 아부 사이드의 손자이자 무굴 제국의 창건자 바부르에 의해 자주 언급되었다고 한다.
이후 하산은 야드가르를 티무르 조의 술탄으로 선포하고 그가 호라산의 후세인[9] 을 꺾게 도와 백양 왕조의 동쪽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1469년 9월 15일, 야드가르는 체나란 전투에서 후세인에게 패배하였다. 그러자 하산은 두 아들과 정예병을 파견하였고 후세인의 동맹인 흑양 왕조의 마지막 술탄 유수프가 시라즈에서 잡혀 처형되었다. (10월 22일) 백양 조 - 야드가르 연합군은 이듬해 7월 7일, 헤라트에서 후세인을 축출하며 목표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후세인은 8월 말에 도시를 수복하였고 혼란을 틈타 사마르칸트에서 진군해온 아부 사이드의 아들 아흐메드마저 격퇴한 후, 야드가르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현실주의자였던 후세인은 루트 사막을 경계로 백양 왕조를 자극하지 않았고, 하산 역시 오스만 제국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휴전이 지속될 수 있었다.
1463년, 하산에게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절단이 도착하였다. 그해 발발한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에서 대오스만 동맹을 맺자는 것이었다. 당시 흑양 조와 대립하던 터라 여력이 없던 하산은 제의를 거절하였으나 답례로 자신의 사절을 베네치아에 보내며 동맹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다. 그역시 오스만을 넘어야 할 산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흑양 조와 티무르 조를 격파한 후인 1471년, 베네치아 측은 하산의 처가쪽 친척인 제노[10] 를 필두로 재차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미 1464년부터 카라만 후국의 내분을 통해 오스만 제국과 대리전을 치르던 하산은 흔쾌히 수락하였다.
한편, 앞서 제시되었던 카라만 내전은 오스만과 백양 왕조 간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464년, 카라만 조의 이브라힘 베이가 사망하였고 장남이나 서자였던 이샥과 차남인 적장자 피르 아흐메트 간에 벌어진 내전에로 하산은 전자, 오스만 측은 후자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결과는 피르 아흐메트의 승리. 하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에 약속했던 영토 할양을 번복하였고, 이에 메메드 2세가 콘야 등 카라만 후국의 내륙 영토를 점령하였다. (1466년) 남은 해안 영토마저 메흐메트 2세의 명장 게딕 파샤에 의해 정복되자 피르 아흐메트와 동생 카심은 하산의 궁전으로 피신하였다. (1471년) 그들은 하산을 설득하여 군대를 얻은 후 진격하여 콘야를 수복, 일시적으로 카라만 왕조를 복원하였다. 심각성을 실감한 메흐메트 2세는 본격적인 유럽 진격에 앞서 하산과 대결하여 후환을 없애기로 하였다.
1471년 말엽, 하산은 오스만 제국이 네그로폰테 공방전 등 그리스 문제에 신경쓰는 틈을 타 아나톨리아로 진군하였다. 토카트를 함락시킨 백양 군대는 반도 서부에 위치한 아크셰히르까지 진격하였다.
1472년, 하산은 재차 조지아를 침공하여 트빌리시에 무혈입성 하였고 이후로도 그 일대를 지배한다.
1473년 7월 27일, 메흐메드 2세와 하산의 군대는 말라티야 인근의 유프라테스 (파라트) 강가에서 대치하였다. 메흐메드 2세는 무려 22만의 대군을 이끌고 왔기에 7만의 백양 왕조 진영보다 우세했지만 전쟁에 잔뼈가 굵은 하산을 경계하며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서로가 상대의 매복을 의심하며 며칠이 흐르던 8월 1일, 수적으로 우세였던 오스만 군대 진영의 선발대는 참지 못하고 도강하였다. 하산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포위 섬멸하였고, 강 건너편에 있던 메흐메드 2세는 그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본군을 재정비 하였다. 하산이 베네치아 측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날 하루에 오스만 기병 5만 6천이 전사하고 선봉장 무라드 파샤를 포함한 150명의 장교단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어느정도의 과장은 있는 걸로 보인다.
전군의 30%가 소멸되는 패배를 겪은 메흐메드 2세는 하산에게 강화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패배를 틈타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공격해 올 것을 염려한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니예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백양 조의 제후들과 카라만 후국의 왕자들은 하산에게 오스만 군을 추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우수한 화력을 갖춘 오스만 정예병을 튀르크멘 기병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하산은 승낙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듭되는 요청에 그는 결국 메흐메드 2세를 추격하기로 하였다. 8월 11일, 오틀루크벨리에서 오스만 군대를 따라잡은 하산은 그들을 포위하고 끊임없이 기병들을 보내 괴롭혔다. 8시간 내내 지속된 전투에서, 가까스로 버텨내던 메흐메드 2세는 전열이 무너져 내릴 즈음 숨겨두었던 포대에게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는 전투의 향방을 결정하였다. 오스만 대포에 튀르크멘 기병대는 붕괴되었고 말들은 포성에 놀라 도망가버렸다. 하산은 7만의 군대 중 절반을 잃고 퇴각하였다.[11] 비록 오스만 측도 많은 사상자를 낸 피로스의 승리였지만 그 효과는 상당했다.
예니체리의 화력을 제대로 경험한 하산은 메흐메드 2세가 재차 강화를 요구하자 수용하였고, 이후 이후로 오스만 제국을 자극하지 않았다. 따라서 메흐메드 2세는 베네치아와의 남은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베네치아는 1479년에 메흐메드 2세와 강화 조약을 맺으며 많은 영토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하산에게 버림받은 카라만 후국의 운명도 뒤를 따랐다. 비록 카심이 베네치아의 도움으로 해안을 수복하였으나 1475년 게딕 파샤에게 축출되었고, 1482년 바예지트 2세와 젬 간의 내전에서 카심은 후자와 동맹하여 콘야를 일시적으로 수복하였지만 패배하자 결국 오스만 측에 투항하였다. (1483년) 이후 그는 앙카라 총독으로 지내다 1494년에 죽었다. 남은 카라만 잔당 세력은 그의 조카 (여동생의 아들) 투그루토글루 베이를 옹립하였고, 1487년 맘루크 왕조와 연합하여 오스만과 맞섰으나 패배하고 알레포로 도주하였다. 이후 1501년의 반란을 제외하면 카라만 왕조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오틀라루크벨리 전투 이후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던 하산은 장남 우글룰루가 시라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반란은 실패하였고 우그룰루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여 메흐메드 2세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하산은 오스만과의 충돌을 피하였고 1476년 경 조지아를 침공, 트빌리시를 재차 점령하는 것으로 울분을 달랬다. 70을 넘기며 당시 기준으로도 장수한 하산은 1478년 1월에 사망하였다. 이후 터키로 망명한 장남 우그룰루 대신 차남 할릴이 계승하였으나 그해 7월, 코이 전투에서 동생 야쿠브에게 패하였다. 야쿠브는 사파비 가문을 포함한 7개의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을 유지시켰으나 1490년, 부인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하산의 손자들이 내전을 벌이는 동안 성장한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1501년 백양 군대를 격파하고 1508년, 디야르바크르를 함락하며 하산의 영토를 이어받았다. 그는 하산의 외손자였다.
같은 튀르크계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에서 발행된 그의 기념 우표
페르시아어 اوزون حسن
영어 Uzun Hassan
재위 1453 ~ 1478년 1월 6일
생몰 1423 ~ 1478년 1월 6일
1. 개요
백양 왕조의 9번째 샤한샤. 페르시아어로 우준 하산은 '키다리 핫산'을 뜻한다. 그는 본래 티무르 제국의 속국이자 흑양 왕조에 눌려 지내던 백양 왕조를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서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격돌하였는데, 1473년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역시 정복왕이던 메흐메트 2세에게 대패하며 더이상의 확장은 못하였다.
2. 생애
본래 백양 왕조 (아크 코윤루)는 1402년에 티무르에 의해 임명된 디야르바크르 총독 가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15세기 초반 티무르가 사망하고 흑양 왕조 (카라 코윤루)가 돌아와 이라크의 패권을 장악하자 백양 조는 그에 복속되었다. 다만 카라 유수프가 사망한 1420년부터 그의 아들들이 경쟁하며 흑양 조는 분열되어 백양 조는 사실상 독립하였고, 그 즈음 우준 하산이 태어났다. 부왕 알리가 사망한 후 (1438년) 숙부 함자[1] 를 거쳐 하산의 형인 자한기르가 계승하였다. 한편, 분열되었던 흑양 왕조는 자한 샤[2] 가 1446년에 조카 알반드로부터 바그다드를 접수하며 통일되었다.
1447년, 바그다드를 지배하다가 모술 총독으로 강등된 알반드는 삼촌 자한 샤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패배하고 자한기르의 궁정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반환 요청이 거부당하자 자한 샤는 전쟁을 선포하였고, 패배한 자한기르는 백양 왕조에 복속하였고 딸을 자한 샤의 삼남 미르자 무함마드와 결혼시켜야 했다. 이에 우준 하산은 형의 나약함을 비난하며 봉기하였고, 결국 그를 축출하고 디야르바크르를 장악하였다. 자한기르는 자한 샤의 궁정으로 도주하였다.
3. 치세
흑양 왕조와 친했던 형에 대한 쿠데타로 인해 즉위 직후부터 자한 샤와 대립하게 된 우준 하산[3] 은 흑양 왕조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포섭하며 힘을 길렀다. 그중엔 아제르바이잔[4] 세력을 키우던 사파비 가문[5] 도 있었는데, 하산은 그 수장인 셰이크 주나이드에게 자신의 여동생 카디자를 결혼시키고 이후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셰이크 하이다르와 자신의 딸 베굼을 결혼시키는 등 인척을 맺었다. 이후 하이다르와 베굼의 사이에서 사파비 왕조의 창건자 이스마일 1세가 태어나는 것은 덤. 그는 또한 처가인 트레비존드 제국를 돕지 않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과 화친하며 배후를 안정시켰고 1457년 5월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흑양 왕조군에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자한 샤는 1452년에 이스파한, 1458년에 헤라트를 점령하는 등 티무르 제국에 대한 원정에 집중하느라 하산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1458년 말, 마침내 하산과 겨루기로 마음먹은 자한 샤는 이란 북부와 헤라트를 반환하는 등 티무르 술탄 아부 사이드[6] 와 강화를 체결하고 회군하였다. 하지만 하산에 대결할 겨를도 없이 그는 장남 피르부다그와 차남 하산 알리의 반란에 대처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1464년, 피르부다그를 처형하며 내부를 안정시킨 자한 샤는 대군을 하산에 맞설 준비를 하였다. 그 사이에 디야르바크르에서 1만 군대를 모은 하산은 주변을 약탈하였고 1466년에는 조지아를 원정하는 등 힘을 비축하였다. 하산이 조지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그해 5월 16일, 자한 샤는 대군을 소집하여 타브리즈에서 출정하였다.
3.1. vs 흑양 왕조
하산은 무리하게 그의 대군과 정면 충돌하기 보다 그를 자극하는 동시에 협상을 진행하는 척 후퇴하며 흑양 왕조 군대를 반 호수 건너편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1년여간 산지에서의 숨바꼭질이 계속되자 원정군 내에서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에 자한 샤는 후퇴하게 되었다. 사기가 저하된 채로 흑양 왕조 측이 후퇴하자, 이틈을 노린 하산은 그 후방을 습격하였다. (차팍추르 전투, 1467년 11월) 지친 흑양 군대는 붕괴되었고, 자한 샤 역시 도주하다가 전사하였다. 흑양 왕조의 정예병이 단 한번의 전투로 괴멸된 것이다. 한편, 자한 샤의 삼남 미르자 무함마드와 사남 미르자 유수프는 포로가 되었는데 전자는 처형되었고 후자는 장님이 되어 풀려났다.
흑양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던 자한 샤가 사망하자 이란 일대는 혼란에 휩쌓였다. 반란을 일으킨 후 마쿠에 감금되어 있던 그의 차남 하산 알리가 풀려나 술탄이 되었으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산 알리는 가까스로 타브리즈의 후세인 (그의 사촌)과 케르만의 카심 (그의 동생) 등을 평정하고 안정을 회복하는듯 하였으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우준 하산이 아니었다. 우준 하산 자신이 이라크 일대를 평정하는 동안 아들 우굴루가 출정하여 마란에서 하산 알리를 패배시켰다. 타브리즈를 잃고 동쪽으로 패주한 하산 알리는 기존의 적국이었던 티무르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7] 1468년, 결국 사로잡힌 하산 알리가 압송되던 중에 하마단에서 자살하며 흑양 왕조는 사실상 끝났지만 티무르 조의 아부 사이드 샤는 그의 구원 요청을 수락하며 새로운 전쟁으로 이어졌다.
3.2. vs 티무르 제국
자한 샤의 넷째이자 장님인 미르자 유수프가 흑양 조의 술탄으로 옹립되자 아부 사이드 샤는 그를 지지하며 출정하였다. 이에 하산은 흑양 왕조의 소통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사마르칸트에 편지를 보내어 대대로 이어진 티무르 가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겠다고 청하였다. 오스만 제국과의 격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티무르 측과도 싸워 양면 전선을 펴는 것은 신생 백양 왕조에겐 벅찬 것이었다. 하지만 아부 사이드는 하산의 충성이 진심이 아닐 것이라 판단하였고, 또 그는 증조부인 티무르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1468년 말, 손쉽게 아제르바이잔을 접수한 아부 사이드는 군대를 삼분하여 본대 외에 하나는 흑양 조의 술탄 유수프와 함께 루리스탄 일대로, 나머지는 파르스 정복을 위해 파견하였다. 이에 우준 하산은 재차 협상을 청하였으나 아부 사이드는 하산 본인이 직접 진영으로 와서 티무르의 후계자에게 복종을 표하라는 무리한 요구만 이어나갔다. 전쟁이 불가피함을 깨달은 하산은 자한 샤와의 대결 때와 마찬가지로 고원 지대로 후퇴한 후 정면 대결을 피하며 청야 전술을 폈다. 146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혹독하였다. 광야에서 물자가 부족한 채로 행군하던 원정군은 적과 마주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14일간 술탄의 명마가 건초를 먹지 못해 쓰러지는 일도 있었으니 일반 병사들이 기아에 시달린 것은 명약관화 하였다. 탈영병이 줄을 이었고 아부 사이드 샤 역시 무질서하게 후퇴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우준 하산은 아들들에게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그를 추격하게 하였고, 그들은 카라바그 (현재 아제르바이잔 서남부)에서 아부 사이드 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1469년 2월 4일에 벌어진 전투는 백양 왕조의 압승이었고 포로가 된 아부 사이드는 3일 후에 그의 칠촌이자 하산의 동맹이던 야드가르에게 넘겨져 살해되었다.[8] 이 전투는 이라키 아잠의 참사라는 이름으로 아부 사이드의 손자이자 무굴 제국의 창건자 바부르에 의해 자주 언급되었다고 한다.
이후 하산은 야드가르를 티무르 조의 술탄으로 선포하고 그가 호라산의 후세인[9] 을 꺾게 도와 백양 왕조의 동쪽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1469년 9월 15일, 야드가르는 체나란 전투에서 후세인에게 패배하였다. 그러자 하산은 두 아들과 정예병을 파견하였고 후세인의 동맹인 흑양 왕조의 마지막 술탄 유수프가 시라즈에서 잡혀 처형되었다. (10월 22일) 백양 조 - 야드가르 연합군은 이듬해 7월 7일, 헤라트에서 후세인을 축출하며 목표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후세인은 8월 말에 도시를 수복하였고 혼란을 틈타 사마르칸트에서 진군해온 아부 사이드의 아들 아흐메드마저 격퇴한 후, 야드가르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현실주의자였던 후세인은 루트 사막을 경계로 백양 왕조를 자극하지 않았고, 하산 역시 오스만 제국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휴전이 지속될 수 있었다.
3.3.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
1463년, 하산에게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절단이 도착하였다. 그해 발발한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에서 대오스만 동맹을 맺자는 것이었다. 당시 흑양 조와 대립하던 터라 여력이 없던 하산은 제의를 거절하였으나 답례로 자신의 사절을 베네치아에 보내며 동맹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다. 그역시 오스만을 넘어야 할 산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흑양 조와 티무르 조를 격파한 후인 1471년, 베네치아 측은 하산의 처가쪽 친척인 제노[10] 를 필두로 재차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미 1464년부터 카라만 후국의 내분을 통해 오스만 제국과 대리전을 치르던 하산은 흔쾌히 수락하였다.
3.3.1. 카라만 후국 부흥운동
한편, 앞서 제시되었던 카라만 내전은 오스만과 백양 왕조 간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464년, 카라만 조의 이브라힘 베이가 사망하였고 장남이나 서자였던 이샥과 차남인 적장자 피르 아흐메트 간에 벌어진 내전에로 하산은 전자, 오스만 측은 후자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결과는 피르 아흐메트의 승리. 하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에 약속했던 영토 할양을 번복하였고, 이에 메메드 2세가 콘야 등 카라만 후국의 내륙 영토를 점령하였다. (1466년) 남은 해안 영토마저 메흐메트 2세의 명장 게딕 파샤에 의해 정복되자 피르 아흐메트와 동생 카심은 하산의 궁전으로 피신하였다. (1471년) 그들은 하산을 설득하여 군대를 얻은 후 진격하여 콘야를 수복, 일시적으로 카라만 왕조를 복원하였다. 심각성을 실감한 메흐메트 2세는 본격적인 유럽 진격에 앞서 하산과 대결하여 후환을 없애기로 하였다.
3.3.2. 말라티야-오틀루크벨리 전투
1471년 말엽, 하산은 오스만 제국이 네그로폰테 공방전 등 그리스 문제에 신경쓰는 틈을 타 아나톨리아로 진군하였다. 토카트를 함락시킨 백양 군대는 반도 서부에 위치한 아크셰히르까지 진격하였다.
1472년, 하산은 재차 조지아를 침공하여 트빌리시에 무혈입성 하였고 이후로도 그 일대를 지배한다.
1473년 7월 27일, 메흐메드 2세와 하산의 군대는 말라티야 인근의 유프라테스 (파라트) 강가에서 대치하였다. 메흐메드 2세는 무려 22만의 대군을 이끌고 왔기에 7만의 백양 왕조 진영보다 우세했지만 전쟁에 잔뼈가 굵은 하산을 경계하며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서로가 상대의 매복을 의심하며 며칠이 흐르던 8월 1일, 수적으로 우세였던 오스만 군대 진영의 선발대는 참지 못하고 도강하였다. 하산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포위 섬멸하였고, 강 건너편에 있던 메흐메드 2세는 그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본군을 재정비 하였다. 하산이 베네치아 측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날 하루에 오스만 기병 5만 6천이 전사하고 선봉장 무라드 파샤를 포함한 150명의 장교단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어느정도의 과장은 있는 걸로 보인다.
전군의 30%가 소멸되는 패배를 겪은 메흐메드 2세는 하산에게 강화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패배를 틈타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공격해 올 것을 염려한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니예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백양 조의 제후들과 카라만 후국의 왕자들은 하산에게 오스만 군을 추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우수한 화력을 갖춘 오스만 정예병을 튀르크멘 기병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하산은 승낙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듭되는 요청에 그는 결국 메흐메드 2세를 추격하기로 하였다. 8월 11일, 오틀루크벨리에서 오스만 군대를 따라잡은 하산은 그들을 포위하고 끊임없이 기병들을 보내 괴롭혔다. 8시간 내내 지속된 전투에서, 가까스로 버텨내던 메흐메드 2세는 전열이 무너져 내릴 즈음 숨겨두었던 포대에게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는 전투의 향방을 결정하였다. 오스만 대포에 튀르크멘 기병대는 붕괴되었고 말들은 포성에 놀라 도망가버렸다. 하산은 7만의 군대 중 절반을 잃고 퇴각하였다.[11] 비록 오스만 측도 많은 사상자를 낸 피로스의 승리였지만 그 효과는 상당했다.
예니체리의 화력을 제대로 경험한 하산은 메흐메드 2세가 재차 강화를 요구하자 수용하였고, 이후 이후로 오스만 제국을 자극하지 않았다. 따라서 메흐메드 2세는 베네치아와의 남은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베네치아는 1479년에 메흐메드 2세와 강화 조약을 맺으며 많은 영토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하산에게 버림받은 카라만 후국의 운명도 뒤를 따랐다. 비록 카심이 베네치아의 도움으로 해안을 수복하였으나 1475년 게딕 파샤에게 축출되었고, 1482년 바예지트 2세와 젬 간의 내전에서 카심은 후자와 동맹하여 콘야를 일시적으로 수복하였지만 패배하자 결국 오스만 측에 투항하였다. (1483년) 이후 그는 앙카라 총독으로 지내다 1494년에 죽었다. 남은 카라만 잔당 세력은 그의 조카 (여동생의 아들) 투그루토글루 베이를 옹립하였고, 1487년 맘루크 왕조와 연합하여 오스만과 맞섰으나 패배하고 알레포로 도주하였다. 이후 1501년의 반란을 제외하면 카라만 왕조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3.4. 말년
오틀라루크벨리 전투 이후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던 하산은 장남 우글룰루가 시라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반란은 실패하였고 우그룰루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여 메흐메드 2세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하산은 오스만과의 충돌을 피하였고 1476년 경 조지아를 침공, 트빌리시를 재차 점령하는 것으로 울분을 달랬다. 70을 넘기며 당시 기준으로도 장수한 하산은 1478년 1월에 사망하였다. 이후 터키로 망명한 장남 우그룰루 대신 차남 할릴이 계승하였으나 그해 7월, 코이 전투에서 동생 야쿠브에게 패하였다. 야쿠브는 사파비 가문을 포함한 7개의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을 유지시켰으나 1490년, 부인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하산의 손자들이 내전을 벌이는 동안 성장한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1501년 백양 군대를 격파하고 1508년, 디야르바크르를 함락하며 하산의 영토를 이어받았다. 그는 하산의 외손자였다.
4. 여담
- 1458년 하산은 트레비존드 제국의 황녀 데스피나 카툰과 결혼하였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사파비 조의 창건자 이스마일 1세의 모친이다. 사파비 제국도 오스만 황실처럼 동로마 황가의 혈통이 섞인 것이다.
- 하산이 메흐메드 2세와 화해한 후로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재차 그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협공을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다만 사절단 대표였던 바르바로는 하산의 총애를 얻어 궁정에서 상주할 수 있었다. 그외의 베네치아 사절들은 대부분 추방되었다. 하산이 사망하는 1478년까지 이란에 체류한 바르바로는 하산과 그의 가족, 이란의 여러 도시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겨 15세기판 동방견문록으로 평가된다.
- 터키 동부 하산 케이프에 그의 아들 자이날 베이의 영묘 (모졸렘)이 남아있다. 최근 유적의 수몰 위기로 하맘과 함께 3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능력치 4/5/6의 명군으로 등장한다.
[1] 1437년에 흑양왕조 침공군을 격파하였다[2] 재위 1436 ~ 1467년. 카라 유수프의 네번째 아들. 1440년에 조지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치렀으며 1445년부터 단독 군주였다. 타브리즈의 랜드마크인 블루 모스크를 건설한 사람[3] 앞으로 하산이라 칭함[4] 현재는 이란령 아제르바이잔.[5] 당시 쉬아파 교단을 만들고 아르다빌을 근거지로 자립하려 하였다[6] 재위 1451 ~ 1469년. 티무르의 증손자. 1451년 사마르칸트를 기습 점령한 후 자한 샤와의 협상을 통해 1458년 12월 22일 헤라트에 입성하였고 그 주인이었던 알라 웃 다울라와 이브라힘 부자마저 1459년 3월 사라크스 전투에서 격파하며 제국을 통일하였다. 1461년에는 헤라트를 공격해온 후세인도 격파하였다.[7] 아부 사이드 샤는 메르브에서 그의 편지를 받았다[8] 사이드가 야드가르의 증조할머니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정당화 하였다.[9] 아부 사이드가 패배하자 봉기하여 그해 3월 24일에 헤라트를 접수하였다[10] 그의 아내가 하산과 결혼한 트라브존 출신 데스피나 카툰의 조카였다고.[11] 17세기 오스만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에 의하면 그곳의 농민들은 가끔 땅을 파다가 인골과 병장기 등을 발견한다고 한다. 현재 전적지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