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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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1487년 7월 17일
사망일
1524년 3월 23일
재위
1501년 ~ 1524년
1. 개요
2. 즉위 이전
3. 즉위
4. 이란의 패권을 차지하다
5. 찰디란 전투에서의 참패
6. 이후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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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شاه اسماعیل
현대 이란의 모태가 된 사파비 왕조의 제 1대 왕(샤). 그가 건국한 사파비 제국 이후로 이란은 수니파에서 시아파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2. 즉위 이전


당시 이란은 티무르 제국의 몰락 이후 수많은 종교적, 민족적으로 다양한 군소 왕국들이 난립하면서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에 있었다. 지금은 이라크의 영토였지만 사파비 왕조의 발원지라고 볼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1]튀르크 계열이었던 흑양 왕조백양 왕조의 세력 다툼속에 있었고, 이란 지역은 페르시아계, 투르크계, 몽골계, 그리고 티무르 제국을 몰아낸 이란 동북부 지역의 우즈베크 계열의 군소 왕국이 세워졌다. 이러한 혼란하에서 당시 시아파 계통이었던 사파비 교단도 세력다툼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스마일 1세의 아버지 셰이르 하이다르는 백양 왕조의 명군 우준 하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우준 하산 사후 그를 계승한 야쿱과의 세력 다툼속에 전사하였고, 그의 가족들도 세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스마일 1세는 어릴 때부터 은신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 즉위


하지만 백양 왕조는 우준 하산 사후 이 지역의 전통대로 끝없는 내분 끝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이스마일 1세는 붕괴된 사파비 가의 세력을 규합하여 백양 왕조에 대항하기 시작하였고, 결정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는 투르크멘계 무장집단들 키질바시[2]가 그의 휘하에 규합하게 되었다. 키질바시의 도움으로 15살의 어린 나이로 1501년, 타브리즈를 수도로 하고, 시아파에서 가장 큰 종파인 12이맘파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를 건국하게 되었다.

4. 이란의 패권을 차지하다


이후 이스마일 1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란 중서부 지역을 지배했던 백양 왕조를 제압하면서 이란 고원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시아파를 주창하였기 때문에 이라크 남부 지역의 시아파 성지를 장악하게 되면서, 시아파의 종주국으로도 자리잡게 되었다. 1510년에는 티무르 제국 멸망 이후 이란 동북부에 잔존해 있던 우즈베크 족을 격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5. 찰디란 전투에서의 참패


하지만 하늘에는 해가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법. 사파비 왕조 말고도 메소포타미아 서부 지역에는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세력의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스마일은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에 거주하는 시아파와 알레비파를 회유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지만 진압되었고, 군사적으로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데다 독실한 수니파 신자이기도 했던 술탄 셀림 1세는 사파비 왕조의 책동을 명백한 적대행위로 간주하여 결국 1514년에 현재의 터키의 남동부 지역 중 하나인 찰디란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셀림 1세는 사파비 왕조의 수도인 타브리즈를 점령하였으나, 당시는 적지인 페르시아의 세력권인 메소포타미아였기 때문에 곧 철수하였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벌하여 칼리프를 자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슬람 세력의 정치, 종교적 지도자가 되었다.
찰디란 전투에서의 승전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게 된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와 달리, 찰디란 전투의 패자인 이스마일 1세는 패전의 결과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특히 어린 나이에 지도자적인 위치에 올라 군사를 통솔한 자신의 이미지를 정통 칼리파 시대의 4대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 겹쳐오며 확립시켰던 권위는 찰디란 전투의 패전 결과 산산조각이 났고, 그 결과 정교한 행정체계가 아닌 지도자 개인의 종교적, 군사적 카리스마에 크게 의존하던 이스마일 1세의 영향력과 통치력도 크게 저하된다. 결국 사파비 왕조의 중앙 정부는 왕조 설립 초기부터 귀족들과 종교집단, 지방세력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고, 아바스 1세 등장이전까지 이런 세력들의 영향력 제어에 실패하며 대체적으로 주변 국가들에게 짓눌리는 모양새를 가지게 된다.

6. 이후


찰디란 전투의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스마일 1세는 이후에는 군주로서의 의욕을 모조리 잃어버린 채 정치를 재상에게 맡기고 술독에 빠져들었다.[3] 그리고 결국 과음 때문인지 1524년에 만 36세 나이로 요절한다. 하지만 이후 사파비 왕조는 서부에서는 오스만 제국[4], 동부에는 우즈베크 족의 끝없는 침입과 더불어 이란 내부에서도 사파비 왕조 건국의 주역이었던 키질바시의 전횡[5]으로 인해 당분간 정체기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혼란 상황은 5대 왕인 아바스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폐인이 된 이후 정치에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고, 어느정도 정신은 남아있었다. 찰디란 전투 패전 이후에도 키질바시들은 이스마일 1세를 광신적으로 지지했지만 페르시아인 순니파 신민들은 자신의 권위에 대한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키질바시들이 '''영토 내에서''' 페르시아인 순니파 신민들을 마구 학살하는 일이 계속되자, 이스마일 1세와 재상은 절충안으로 아랍인 12이맘파 성직자들을 대거 초빙하고, 시아파 마드라사를 만들어서 시아파 12이맘파를 선교,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스마일 1세와 신격화와 12이맘파 자파리파 교리 사이에서는 차이가 있었으나 불려온 성직자들은 키질바시들과 적당한 타협을 보면서 오늘날 이란의 12이맘파와 같은 형태의 문화와 정체성을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7. 여담


당시 시아파를 주창하였던 사파비 왕조였기 때문에 시아파에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본인이 7대 이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큰 관련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쿠르드족이나 튀르크 계통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렸을 때부터 사파비 수피 교단에서 신격화되어 애지중지 자랐는데, 자신이 쿠란에 나오는 모세에게 가르침을 준 선지자 알 키드르의 화신이라고 여겼으며, 그리스도의 혼이라고 주장하고, 조로아스터교의 성스러운 불을 지키는 존재라고 자기 스스로부터 진지하게 믿었다. 놀랍게도 이런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경우 보통 금치산자가 되기 일쑤임에도 불구 이스마일은 소년 시절부터 전략 전술과 무용에 대단히 뛰어났다고 한다. 물론 자신을 신격화한 믿음이 지나쳐서 상술한 것처럼 찰디란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에는 폐인이 되었다.
[1] 수니파나 시아파를 가리지 않고 이슬람의 성지라고 하면 흔히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이지만 그와 별개로 시아파의 성지는 현재의 이라크 남부 지역의 카르발라에 있다. 이 곳에서 시아파에서 우상시하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수니파였던 우마이야 왕조칼리프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을 떠나서 정치, 군사적으로 사파비 왕조는 현재의 이란 북서부와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 걸친 지역에서 성립되었다.[2] 이들은 시아파의 일파인 12이맘파를 추종하였다. 원래 키질바시라는 뜻이 붉은 두건이라는 뜻인데, 이들은 두건을 12번 감음으로써 자기 종파에 대해 충성심을 드러내었다.[3] 애초에 앞에서 언급했듯이 찰디란 전투의 패배의 결과 이스마일 1세의 권위와 영향력은 심각한 타격을 받아 이전같은 통치는 불가능한데다, 어린 시절부터 알리와 이미지를 겹치며 떠받들어지는데 익숙해져 자신을 반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기미마저 보이던 상태에서 당한 패전이라 더욱 큰 충격을 받고 통치 의욕을 잃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4] 셀림 1세도 인물이지만 그 다음 인물이 더...[5] 이스마일 1세가 국가 체계를 갖추기 위해 페르시아인들을 관리에 중용하자 순니파가 관리가 돼서는 안 된다면 영토 내 페르시아인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