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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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무르 제국의 건국자.''' 풀네임은 '티무르 이븐 타라가이 바를라스(تيمور ابن ترغيى برلس, Tāāmūūr ibn Tāraġaiyi Bārlās)'.[4] 이름인 '티무르'는 몽골어로 '철'이란 뜻이다. 중국에서는 한자로 鐵木兒라고 음차했다. 현대 몽골어로는 트므르(төмөр)로 발음. 고려의 공민왕도 몽골 이름이 '바얀 테무르'고, 이지란의 개명 전 이름도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 칭기즈 칸의 아명인 '테무친'은 '철인'이라는 의미다. '테멀레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힘은 공평에서 나온다.'''
몽골 제국의 부활을 주창하면서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한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중 한 명으로[5] ,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는 지금도 영웅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거의 구국의 영웅 취급이라 소련 치하 당시 마르크스상이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을 정도.[6] 하지만 침략을 받은 중동이나 인도에서는 악의 축 취급을 받고 있다. 중근세 유럽에서도 잠시 인기가 있었는데, 이유는 당시 유럽의 적이던 오스만 제국을 완파했기 때문.[7]
티무르는 문맹이었지만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를 둘 다 유창하게 말하고, 학자들과 역사, 과학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길 정도로 학식과 무슬림으로서의 신심도 훌륭했다. 물론 자신에게 개기면 같은 무슬림이고 뭐고 없었지만.
2. 계통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어머니 쪽이 몽골계. 즉, 몽골계 칭기즈 칸의 혈통이다. 무슬림인 '''튀르크-몽골 + 페르시아인 혼혈'''이라고 볼 수 있다. 티무르가 몽골인이냐 튀르크인이냐로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8] 티무르 본인은 스스로 가문의 시조에 해당되는 카라샤르노반(kara-sharnoban)이라는 인물이 칭기즈 칸의 아들 차가타이 칸의 딸과 결혼했다는 전승을 근거로 자신을 칭기즈 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몽골 쪽에서 보자면 칭기즈 칸의 후손은 '''부계 혈통'''만 인정되며, 모계의 경우에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한시적으로 인정한다.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의 딸들이 수도 없이 많은 곳에 시집 갔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엉뚱한 나라의 왕이 현직 칸보다도 정통성이 높아지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티무르도 이를 알고 있었는지, 이로 인한 정치적 명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인과 아들, 손자들을 차례로 칭기즈 칸의 후예라고 공인된 몽골계 여인과 결혼시켜 가문의 격을 높이려 애썼다. 또한 아무리 결혼을 많이 하더라도 그의 가문이 정통 황금씨족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본인은 어디까지나 부마까지만 자칭했고, 칸의 자리에는 황금씨족 출신 허수아비를 앉혀서 정통성 시비를 최소화했다.
결론적으로 티무르의 출신은 꼭 찝어서 어느 한쪽 출신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점이 있다. 몽골과 투르크 둘 다 바이칼 호-내몽골의 생활권을 공유한 서로 흡사한 유목민이었기에 언어 외적인 구분은 무의미한데, 티무르는 페르시아어가 모어였다. 그의 출신지인 사마르칸트는 워낙 페르시아인이 많기도 하여 이란계와 몽골-튀르크계가 섞였다고 보면 편할지도 모른다. 또한 케임브리지 출간 론 셀라(Ron Sela) 저의 티무르의 생애에 대한 전설들을 다룬 책을 보면 티무르의 외모는 "아랍인과 같이 생겼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의 유골을 조사한 소련의 학자들도 알쏭달쏭해했다. 전술한 대로 페르시아계 백인+ 몽골-튀르크계 황인이면 충분히 아랍인과 같은 얼굴이 나올 만하다. 현재 우즈벡이나 위구르 사람들을 생각하면 편하다.
소련의 검시 결과에 따르면 인종적으로는 튀르크계 황인(몽골로이드)과 페르시아계 백인(코카소이드) 반반에 속했으며, 키는 173cm로 당시로선 큰 키였다고 한다. 또 엉덩이 쪽의 부상으로 그가 절름발이였음을 확인했다. 칭기즈 칸의 원정 때 처음 온 몽골계+튀르크계 부족의 후손이지만 오랜 시간 사마르칸트에 살다가 페르시아화 되어있었다고 한다.
부계 혈통은 몽골 혈통이었지만 두개골을 토대로 복원한 그의 외모가 완벽한 몽골로이드는 아닐 것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그의 가문이 중앙아시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차가타이 칸국에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원래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던 페르시아화 된 튀르크 혈통의 여성들(호라즘 왕국의 피지배민 출신들)과[9] 티무르의 조상들이 결혼하면서, 혼혈인 그의 외모가 순수한 몽골로이드에서 벗어났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과거 호라즘의 영역으로, 그곳에 사람들은 이미 페르시아인이 섞여 반쯤은 백인이었고, 튀르크-페르시아 문화가 발달되어있었다. 티무르가 무슬림인 것도 그런 연유 중 하나. 그리고 중앙아시아 동부의 튀르크인은 몽골계 및 퉁구스계와의 혼혈로 황인이다. 물론 터키인은 유럽인이기 때문에 튀르크=터키로 생각하면 이해가 잘 안 되지만, 튀르크계 카자흐족이나 키르기스족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야쿠트인이나 투바인 등은 아예 북방 몽골로이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튀르크인임을 자처했으며, 그의 자손들 또한 몽골 이름이 아닌 튀르크 이름을 썼다. 대표적인 경우가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 바부르는 티무르의 현손이다. 다만 몽골 계승 의식을 표방한 티무르 제국과 달리, 무굴 제국은 몽골보단 티무르 제국 계승을 표방한 차이는 있다.
즉, 당시 티무르 제국은 몽골+투르크+아랍(이슬람)+페르시아 문명 등이 다 섞여 존재했지만, 그 어느 쪽도 완전히 받아들이진 않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중앙아시아에선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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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의 부계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칭기즈 칸과 같은 조상을 공유하긴 한다. 칭기즈 칸의 고조부인 툼비나이 세첸[10] 의 장남의 증손이 바로 칭기즈 칸이고, 삼남의 증손이 티무르의 고조부인 카라차르(Qarachar)로, 칭기즈 칸의 사준사구 중의 한 명이었던 쿠빌라이[11] 의 동생이라고 전해진다. 카라차르의 씨족인 바를라스(Barlas) 부족은 칭기즈 칸과 혈통이 꽤나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의 보르지긴(Borjigin) 부족과 떨어져 살다가 칭기즈 칸이 세력을 키우자 쿠빌라이와 카라차르의 아버지이자 바를라스 부족의 수장인 소쿠 세첸이 부족을 이끌고 칭기즈 칸에게 귀순했다.
칭기즈 칸의 제국이 세워지자 카라차르는 영토를 받고 노얀(Noyan)[12] 의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카라차르 노얀은 칭기즈 칸의 차남 차가타이의 신임을 받고 그의 영지(領地)인 차가타이 한국(汗國)에서 살게 된다. 그 후로 카라차르의 후손들은 대대로 차가타이 한국에서 살았으며, 카라차르가 아들 이린기르를 낳고, 이린기르는 부르기르를 낳고, 부르기르는 티무르의 아버지인 타라가이를 낳는다. 타라가이 또한 조상의 작위를 이었기 때문에 차가타이 한국의 노얀이었으나 그의 대에 들어서는 바를라스 가문의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군사적으로 재능을 발휘하여 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등장했다.
3.1. 어린 시절
그의 행적을 보면 실제로 칭기즈 칸과 매우 유사하다. 칭기즈 칸과 같이 그도 비교적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타라가이(Taraqai)는 소지주에 불과했다. 물론 칭기즈 칸과 같은 불운은 겪지 않았지만. 잭 웨더퍼드가 지은《칭기즈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책의 평중에는 "칭기즈 칸만큼의 불행을 극복하고 승리한 다른 예는 거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칭기즈 칸의 젊은 시절은 안습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미 젊었을 적부터 타고난 군사적 천재였는지 25세 때 추적하는 1천 명의 적을 '''60명'''의 기병만으로 패퇴시키는 활약을 선보였다. 물론 이때 티무르 쪽도 피해가 커서 10명만 살아남았다지만...이후 적들에게 감금되기도 하며 칭기즈 칸 mk.2의 테크를 타게 된다. 젊어서 세력이 약했을 땐 항복했다가 뒤치기도 하고 남의 밑에 빌붙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했지만 한번 위치를 잡고 난 뒤부터는 무패기록을 달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요는 사서에서 뻥카날린 거고, 사실 패배한 것으로 의심되는 전쟁은 꽤 존재한다. 발린 게 없어서 그렇지.
티무르는 바를라스 부족의 수령 집안 출신으로, 1336년 사마르칸트 부근의 도시, 케슈에서 태어났다. 티무르는 1360년부터 시작된 투글륵 테무르 칸의 침공과 그로 인해 빚어진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족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369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유목집단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차가타이 칸국의 장수로서 원정을 지도했고 후에 권력을 얻으며 지도자들을 억누르고 실세가 되었다. 티무르의 매부이던 후세인과는 초기에는 동지였지만 후에 정치적 대립세력이 되었고 후세인은 결국 티무르에게 참수당하고 말았다. 의형제였던 자무카와 갈라선 칭기즈 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못하고 '부마'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들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라고 불리며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다.[13]
3.2. 정복왕의 일대기
마침내 왕위에 오른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자처하였고 또 지하드를 선포하고 다녔다. 실제 그가 무너뜨린 세력들은 대부분 현지화된 옛 몽골 제국의 세력과 각지의 이슬람 국가들이었다. 킵차크 칸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일 칸국에 성립해있던 여러 몽골계 왕조를 복속시켰다. 또 오스만 제국을 철저히 털어버리는 한편 북인도의 술탄들까지 모조리 굴복시키는 위엄을 선보였다.
티무르의 원정은 1370년부터 1405년까지 35년간 지속되었는데, 초기 10년 가량은 동부의 모굴 칸국, 서부의 호레즘, 북부의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에 대해 이루어졌다. 당시 모굴 칸국의 카마르 앗 딘은 칭기즈 칸의 혈족인 황금씨족이 아니었음에도 칸을 참칭하였고 이를 빌미로 티무르는 1370년 모굴 원정을 감행하여 이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이어 1372년부터 1373까지는 호레즘 지방을 공략하였다. 이때 주치 울루스 좌익의 군주 우루스 칸에 반발하던 토크타미쉬 칸라는 인물이 도망쳐 와 도움을 청하자, 티무르는 이를 빌미로 1375년부터 1377년까지 킵차크 초원 원정을 단행, 우루스 칸을 패퇴시켰다. 1379년 호레즘의 쿵그라트 왕조와 다시 전쟁을 벌인 티무르는 수도 우르겐치를 함락하여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
1380년 이후 티무르의 관심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 미란샤를 후라산 총독으로 임명하고, 1381년에는 아프간 지방의 헤라트를, 1383~84년에는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이어 서부 이란으로 진출하여 마잔다란, 라이, 술타니야 등을 함락한 뒤 1386년 귀환했다. 그 사이에 자신의 후원으로 주치 울루스의 군주가 된 톡타미쉬가 타브리즈를 점령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자, 티무르는 그를 응징하기 위해 이란과 킵차크 등지에 대한 원정을 계속했고, 1395년 사라이를 파괴했다. 그리고 인도로 관심을 돌린 티무르는 1398년 말 델리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14]
1392년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소위 '7년 원정'을 단행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부(카라 코윤루) 세력을 격파한 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 세력을 몰아내고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술탄국과 전쟁을 벌여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트 1세를 생포했고, 1404년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
이렇듯 티무르 시절 몽골-튀르크계통의 차카타이 칸국과 일 칸국, 킵차크 칸국의 잔재를 말 그대로 갈아버렸으며, 중동-인도지역의 여러 이슬람 세력도 줄줄이 개발살내버렸다. 게다가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에서 잘나가던 오스만 술탄국마저도 앙카라 지역에서 시원하게 털렸을 정도.[15] 이를 통해 중동지역의 패자로 군림하였으며, 이후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도중에 1405년 2월 시르다리야 하반의 도시 오트라르에서 티무르가 병사하는 바람에 명나라 원정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그의 목적은 몽골 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으로, 평생에 걸쳐 중서부 아시아를 돌며 정복사업을 단행하였다. 그가 무너뜨리거나 박살낸 왕조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 즉 오스만 술탄국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내로라하는 아시아계 군사세력들이 싹 다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두들겨 팬 국가들은 다른 몽골계나 이슬람 계열 국가들이라서 이걸로 까는 사람들도 있다. 바예지드 1세에게 처음으로 보낸 친서에는 "넌 같은 무슬림이라 지금까지 봐줬는데 왜 지금 와서 개기니?"라는 식의 내용이 적혀있었다.[16] 하지만 결국 싸움이 시작되고 나니 칭기즈 칸 mk.2답게 권력 앞에선 동포나 같은 종교인이고 뭐 없었다. 사실 티무르가 주장한 전쟁 명분의 대부분은 지하드였다.
군사적으로 탁월한 천재였는데, 체스 애호가였던 그는 체스를 통해 군사적 능력을 키웠고, 탁월한 군사전략과 전술은 기병을 활용한 기동전법과 현지의 무기와 전술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및 공포에 기반한 제압정책 등으로, 이 또한 칭기즈 칸의 그것과 유사하다. 또한 정벌을 나가기 1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그 동안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첩보와 정보공작으로 상대방의 사기를 깎아먹는 데도 능했다. 칭기즈 칸이 몽골인들의 잔인성을 과장했던 것처럼 티무르도 출전하기 전에 그의 군대의 잔학함을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려 상대의 사기를 꺾었다. 그의 군대를 아끼긴 했지만 봉급을 안 줘서(…) 군인들의 수입은 약탈 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군대가 잔인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화약병기, 코끼리, 기병 등 자신의, 혹은 상대방의 전술적 요소들을 모조리 흡수하는 티무르의 탁월한 능력과 이렇듯 광대한 전선이 결합되었으니, 티무르 제국의 군대가 당대 중서부 아시아 최강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동유럽의 공포이자 신흥강국으로 성장하는 중 이었던 오스만 술탄국의 바예지드 1세도 그에게 참패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이때 티무르는 전성기를 지난 노인이었다. 한미한 시작 이후로 제대로 된 세력을 갖추곤 난 뒤로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고, 오스만과 맘루크 제국이 복속하여 사실상 몽골 제국 옛 영토의 서쪽 절반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 강대함은 당시 유럽 국가들은 전혀 상대가 안될 정도.
오스만 술탄국과의 전투 중 오른팔과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그에 부정적인 기록에서는 양을 훔치다가 양치기의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반신마비가 되었다고 한다.[17][18] 이 부상 때문에 그의 적들은 티무르를 멸시할 때 "절름발이 티무르(Tīmūr-e Lang)"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영어에서 티무르를 부르는 말인 '태멀레인(Tamerlane)'은 이것이 변형된 것이다. 어찌되었든 여기서 유래된 별명이 ''''루스벨트 이전 세계 최강의 절름발이''''.
오스만 술탄국 정벌 당시 오스만의 술탄인 바예지드 1세를 잡은 뒤 그의 앞에서 그의 아내와 딸들을 벌거벗기고 접대를 하게 했으며 그가 보는 앞에서 겁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19][20] 이런 악명높은 이미지가 나중엔 그의 조상인 칭기즈 칸에까지 번져서 칭기즈 칸의 악인화에 한 몫 하였다는게 잭 웨더퍼드의 주장.
오스만을 쓰러뜨리고 난 다음엔 이집트를 통해 유럽 정벌을 하려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이끌던 때와는 달라진 이집트는 잔뜩 쫄아 사정을 하자, 같은 무슬림으로서 쳐들어가기 뭐해져서 방향을 동쪽으로 돌리게 된다. 이때 마침 명나라가 들어서자, 티무르는 몽골-튀르크계 후손으로서의 복수심과 중국에 이슬람 국가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생각까지 들게 되어 동진을 개시하게 된다. 참고로 당시 명나라 황제는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영락제. 허나 티무르가 사망하면서 끝내 이 세기의 대전은 벌어지지 않게 되는데, 때문에 역덕후들 사이에선 소소한 if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3.3. 급사, 그리고 그 이후
말년에 명나라를 치기 위해 동정을 준비하던 티무르는 행군 도중에 사망하고 만다. 한겨울에 무리한 원정을 한 것이 병의 원인이었다. 그것도 경솔하게 한겨울에 얼음물을 마셔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난 뒤 티무르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들게 되지만, 그래도 바로 붕괴하진 않고 백 년 이상을 지탱했다. 사실상 티무르 개인의 탁월한 재능 하나로 세워진 제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존속기간도 사실 긴 편이다.
후손들의 수준도 꽤 좋았다. 제국의 영토가 축소된 건 그 많은 원정을 치르면서도 뒷감당을 제대로 못한 티무르 탓이었고, 그나마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후손들의 능력 덕분이었다. 사마르칸트가 발전한 건 티무르가 보물들과 기술자들을 끌어 모은 것도 있지만 후손들이 이들을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후손들의 시대에는 주변 상대국들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가능하지만, 티무르의 시대도 그건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샤루흐 미르자(Shahrukh Mirza)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티무르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그 아들인 울루그 베그(Ulug Beg) 또한 술탄인 동시에 뛰어난 수학자 겸 천문학자였다.[21] 그리고 티무르의 현손(손자의 손자)이 바로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Babur)다.
4. 칭기즈 칸과의 차이
4.1. 원정 방식의 차이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바로 원정 방식이다. 티무르는 대부분 원정에서 어느 한 곳을 확실하게 정복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 부분은 원정이라기보다 국가 규모의 노략질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 게다가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중동 지방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는 몽골보다 존재감이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위 혹평과 반대로 사마르칸트가 중심지인 티무르 제국의 수입만으로 정복한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에 두기 버거워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또 다른 의견으로 티무르가 원정을 행한 목적에 대해서 유의할 필요성을 환기하는 것이 있다. 이에 따르면 티무르의 초기 원정은 외부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내부에는 티무르 외에도 여러 부족 세력들이 존재했다. 칭기즈 칸의 시대에 몽골 고원은 자무카 덕분에 적을 절멸시키는 것이 이미 등장했었다. 그나마도 몽골 비사 등에 기록이 남을만큼 일반적이지 않았다. 반면 티무르의 시대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부족장을 죽이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짓이었다. 티무르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이들 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부하들을 키우려고 했다. 그 결과 티무르는 치세 중반에 차가타이 칸국의 대부족 2개를 해산시켰고, 그의 사후에는 나머지 부족들도 힘을 못 썼다. 역사에 이름만 겨우 올릴 정도.
후기 원정은 애초에 티무르가 정복할 의지가 없었던 땅과 정복하려 한 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티무르가 여러 차례 원정을 행했던 킵차크, 동부 이란은 여러 부족 연합체의 지배하에 있었다. 티무르는 초기 권력 장악 과정에서 부족 세력을 해체하거나 약화시키는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았기 때문에 굳이 이 땅을 세력화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호라즘 왕조를 세 번 털었고, 일리에는 무려 여섯 내지 일곱 번 원정을 수행했다. 동부 페르시아엔 두 번, 서부 페르시아는 최소 세 번, 러시아에도 두 번의 원정을 수행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무너진 국가는 의외로 적다. 오스만 제국, 킵차크 칸국, 차카타이 칸국 등 다른 칸국들, 인도 술탄국, 중앙아시아 일대의 여러 국가들은 전면전에서는 티무르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휩쓸고 지나가자마자 연거푸 다시 일어서곤 했다.
점령해야 할, 또는 점령한 도시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칭기즈 칸은 살아 생전, 도시는 몇 번 본 적도 없고 방해되는 도시는 초토화시키는 유목민 생활에 익숙했다. 부하라가 그가 발을 들여놓은 유일한 도시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티무르는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사마르칸트만큼은 아니지만 인근의 케슈(Kesh)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서는 케슈 인근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케슈 인근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티무르의 가문이 아주 쇠락하여 케슈와 같은 도시에도 거주하지 못했다는 근거로 보는 학자도 있다. 티무르도 사마르칸트 안에서 지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전쟁 중이 아니라도 사마르칸트와 케슈를 오가며 지냈다. 어쨌거나 티무르는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도시인이었다.
또 칭기즈 칸은 일부 페르시아 측 사서에 보면 항복한 튀르크군을 칭기즈 칸이 죽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대체로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은 살려준 반면 티무르는 항복자도 모조리 학살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을 따라 공예인이나 학자 등은 살려주었다. 그러나 정통성이 부족한 티무르는 학살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했다. 칭기즈 칸을 연상시키는 학살을 통해 몽골족 부하들의 신임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의 정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슬람 문화로의 도시 건설을 제외하면 약탈과 파괴에 집중되어 있었다. 티무르의 군대는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수입은 약탈에 의존해야 했다. 칭기즈 칸의 후예(혹은 그렇게 자처하는 자)답게 그 또한 엄청나게 잔인한 학살과 약탈의 명수였다. 칭기즈 칸처럼 해골로 탑을 쌓고 어린아이들을 말로 밟아죽였다.
사마르칸트의 건설은 그에 비해 페르시아와 무슬림 부하들의 신임을 얻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수도 사마르칸트의 역사도 '''칭기즈 칸은 파괴하고 티무르는 건설했다.'''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 티무르에 대한 책을 쓴 저널리스트 저스틴 마로치(Justin Marozzi)는 저서 티무르, 이슬람의 칼이자 세계의 정복자(Tamerlane: Sword of Islam, Conqueror of the World)에서 사마르칸트를 티무르의 '''애인'''처럼 묘사했다. 무슨 보물을 가져다줘도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으로.
4.2. 정치적 역량
칭기즈 칸과 대비되는 점으로 티무르는 정복한 지역에 믿을 만한 대리인을 남기지 않았고 그리하여 반란이 계속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자의 권력에는 손을 안 댄 적도 있었다. 그 외의 수많은 정복 사업들은 사마르칸트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재력을 모으는 방도였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확실히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의 발전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정작 사마르칸트에 계속해서 오래 머무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 머문 게 2년 정도고, 나머지 기간은 정복사업에 집중했다고. 또한 사마르칸트에 돌아오면 사마르칸트에 지어놓은 정원들에서 지냈는데 이는 유목민들인 몽골계의 풍습을 따랐기 때문이다. 즉 사마르칸트의 정원은 도시민인 이슬람계의 문화를 따름과 동시에 정원에서 막사치고 지냄으로써 유목민인 몽골계의 문화도 따른 것이다.
티무르는 국정지도는 지도자에게, 종교지도는 종교지도자에게 맡겼다.[22]
칭기즈 칸은 기반이 잡히고 난 다음에는 진두에서 지휘하기보단 부하들에게 맡긴 편이었지만(호라즘 정벌 때 부하가 고생하자 직접 가서 부하를 도와준 적은 있다) 티무르는 평생 진두에서 싸웠다. 한 번은 포위전 중 적이 "우리 둘 때문에 백성들이 고생하니 슬프다. 우리 둘의 결투로 끝장을 내도록 하자"고 말하자 '''진짜로''' 결투하러 갔다. 이때 부하들이 말렸지만 뿌리치고 적병들이 활로 쏴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문 앞에서 적에게 성에서 나오라고 요구했고, 적은 겁에 질려서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티무르는 "자기 말도 못 지키는 놈은 살 가치가 없다"며 적과 그의 성을 갈아버렸다.[23]
5. 우즈베키스탄에서
우즈벡인들은 주치의 후손으로 티무르 제국을 몰아내고 그들의 국가를 세웠지만 현재 우즈베키스탄인들은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고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우즈벡인들은 원래 유목민족이었는데, 소련이 정권을 잡고 우즈베키스탄을 장악하면서 공산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관을 내세웠다. 그러다보니 정착 생활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유목민족은 취급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유목민족인 본인들의 조상보다 자신들이 정복한 땅의 조상인 티무르를 우대하게 된 것.(...) 물론 티무르 본인도 유목민족 출신이었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칭기즈 칸 같은 철저한 유목민은 아니었다.
또한 티무르 제국은 그 문화적 역량이 극에 달했을 때 멸망해서 나라는 멸망해도 예술인이나 학자들은 그대로였고, 이 문화적 자원들은 그대로 우즈베키스탄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티무르 제국을 이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제적으로 '''티무르보다 유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 점도 컸다.(...) 소련 붕괴 후에 우즈베키스탄은 자신들을 홍보하고 국제 사회에서 우대받기 위해 국가홍보에 힘을 기울였는데, 티무르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던 것. 티무르는 몽골-튀르크/무슬림이자 유목민과 도시민의 적절한 혼합과 문화 발전에 힘을 기울인 동시에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정복자라 정치적으로 선전하기에도 매우 유용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티무르의 후손들을 몰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우즈베키스탄은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는 것이다. 근데 이때 홍보하면서 티무르가 몽골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해방시키려 했다고 말하다, 팩트가 틀린 걸 알았는지 나중엔 몽골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다고 은근슬쩍 바꿨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이런 여파인지, 현대의 사마르칸트에는 소련 치하의 마르크스 동상이 있던 자리에 티무르의 동상이 들어서있다.[24]
6. 평가
이런 정복자형 역사인물들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기 쉽지만, 티무르는 좀 다른 의미로 평가가 엇갈린다. 한편에선 "그냥 인간백정일 뿐"으로 치부하지만, 한편으론 "역사를 바꾼 인물인데 다른 인간들이 철저히 묻어버렸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적들의 몰락을 그들의 단점으로 돌린 것처럼, 티무르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알레포의 카디(이슬람 법관)에게 티무르는 "과인은 결코 잔학한 자가 아니오. 알라께서 과인이 치른 모든 전쟁에 대해 알고 계시오. 과인은 학살자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과인의 적들이 겪는 고난은 결국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것을 알라 앞에 맹세하오." 정도의 말을 했다는 소리가 있다.
7. 그 외
7.1. 체스 덕후
티무르는 체스를 즐기는[25] 온화한 인물로서 문화 진흥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집권기 사마르칸트는 당대 최대 규모의 대도시로 성장하고, 문화 또한 발전한다. 여담으로 말로우의 희곡 템버레인에서는 "내 고향 사마르칸트는 대륙의 가장 먼 곳까지 유명해지리라. 그곳에 나의 왕궁이 세워질 터인데, 그 빛나는 탑으로 인해 하늘이 무색해지고 트로이의 탑이 떨치는 명성도 지옥으로 떨어지리라."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상당한 체스덕후로 새로 점령한 마을을 왕과 룩을 동시에 공격해서 체스 한판 이기고 샤루키아(왕:Shah+룩)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막내아들 이름은 아예 샤루흐(룩). 오죽하면 기존의 체스는 재미없다고 자신이 고안한 말 몇 가지를 더 추가하고 승급의 방식을 바꾼 '티무르 체스'라는걸 만들었다. 다만 학자에 따라선 당시 이미 유행하던 형식이었다는 말도 한다.
7.2. 저주
그와 관련된 괴담이 있는데, 티무르의 무덤에는
...라는 문구가 있었다(혹은 그런 전승이 전해졌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먼 훗날에 소련 고고학자들이 조사차 그의 무덤을 열었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1941년 6월 22일'''이였고, 이에 쫄은 소련인들이 관뚜껑을 납으로 봉인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괴담이 있다."누구든지 감히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 나라에 닥칠 것이다."
"whoever would dare disturb the tomb would bring demons of war onto his land."
1984년에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촬영 과정에서 당시 발굴에 참여한 소련 촬영기사 카유모프를 인터뷰했는데, 그의 증언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촬영이 시작된 당일 찻집에서 쉬고 있을 때 초라한 모습을 한 노인 3명 중 1명이 아랍어[26] 로 쓰여진, 위 인용문과 비슷한 구절이 적힌 책을 들이대며 경고했다. 하지만 나(카유모프)는 조사단의 고고학자들을 불러왔고, 그들은 노인들을 지팡이로 쫓아버렸다.(이후 그는 그 노인들과 책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을 유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덤을 연 것이 1941년 6월 22일이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무덤 주위에는 호기심에 천 명도 넘는 군중이 모여있었다. 더운 계절이라 새벽 5시부터 발굴을 시작했고,[27] 대리석 판자를 걷어내자 절반 이상 썩은 나무 관이 나왔고 곧 티무르의 유해가 보였다. 인류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1907-1970)가 관 속으로 내려가 티무르의 뼈를 하나씩 주워 위로 올렸다.(중략) 무덤의 학술조사는 그날 하루로 끝났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이튿날에 듣고 놀랐다. 발굴을 마친 뒤 나는 24일 타슈켄트로 돌아갔고 바로 독소전쟁 전선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8. 대중문화에서의 티무르
아틸라처럼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및 동유럽에서 '''사람 인명(...)'''으로 자주 쓰인다. 파생어인 타메를랑(Tamerlan)으로도 쓰이지만 원어로도 쓰이는 편. 예를 들면 우즈베키스탄의 축구선수 티무르 카파제. 상술한 1980년대 NHK의 <실크로드> 촬영팀은 티무르의 고향 마을에서 티무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 교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피오네르 산하의 봉사단체로 티무르 소년단 운동(Тимуровское движение)이라는 게 있었다. '티무르'라는 청소년(작가의 아들 티무르 가이다르[28] 가 모티브인 듯한)과 그의 친구들이 선행(善行)하는 내용의, 소련 아동문학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의 1940년작 소설 <티무르 소년단>이 영화화도 되는 등 인기를 얻자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에서는 시나리오 4 '''서역을 출발한 늑대'''에서 주인공급으로 등장. 시나리오 2에서도 등장은 한다. 좀 시간이 걸려야되지만. 시나리오 설명부터가 티무르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원래부터 능력치가 더럽게 높다. 칭기즈 칸과 능력치 차이가 1 정도 뿐. 아무래도 자칭 후손임을 인식한 듯. 이벤트를 몇번 보면 모든 능력치가 90 이상에 내정과 전투는 '''100'''을 찍는다.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는 정치 90 전투 100 지모 100으로 작중 인물들 중 가장 능력치가 좋다. 거의 혼자서 세계를 쓸어버릴수 있는 수준의 능력치이다. 거기다가 처음부터 '''모든 전투 특기를 가지고 있고''' 병과적성이 보병S 궁병A 기병S다. 수군은 적당한 도시를 항해의 도시로 만들거나 약한 놈들 몇놈 물위에서 박살내면 올라간다. 이벤트 다 찍은 티무르는 여포의 무력과 제갈량의 지력을 갖춘 존재.
그렇지만 명나라가 국력은 훨씬 더 강력하다. 거기다가 칭기즈 칸과 비교하면 부하들이 너무 부실하기 때문에 재빨리 사마르칸트를 전술의 도시로 만든 다음에 등용으로 좋은 인재들을 뽑는 것이 좋다. 근처의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고 운이 좋게 바예지드 1세가 등용되거나 킵차크 칸국에서 토크타미쉬를 물리치고 부하로 등용하면 좀 쉬울지도. 하지만 배신한 토크타미쉬를 죽여야 티무르의 능력치가 더 오른다는 문제가 있지만...안 그래도 이미 강한 인물인지라 딱히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부하들이 부실한 나머지 티무르에게 능력치를 몰빵한 모양.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부하들 없어도 충분히 혼자서 세계를 쓸어버릴 수 있긴 하다. 또한 티무르가 생존했던 시기 중앙아시아 지역은 적지 않은 군소국가가 난립하여 티무르에게 저항하거나 위기에도 몰아넣었던 세력이 적지 않았지만, 게임에서는 이 국가들이 전부 구현되지 않아서 의외로 쾌적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생애가 잘 정리되어 있는 블로그. 해당 블로그에서 부여한 능력치는 칭기즈 칸 통솔이 124이니 티무르 118이면 말 다했다.
암체어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장 top 100에 3위로 들어갔다[29]
미디블2: 토탈 워에서의 티무르 제국의 군대는 이벤트성이긴 하지만 탱크에 해당되는 코끼리 포병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최강의 군대. 덕분에 몽골과 더불어 튀르크 팩션의 난이도를 극악적으로 올려주시는 원인중 하나다 . Game FAQs의 공략 중에는 몽골은 '''두번째로 끔찍한 악몽'''이라고 해놓고 티무르 제국을 묘사할때 '''최악의 악몽'''이라고 써놨다. 물론 첫째 웨이브에서의 출연 순서상 칸은 아니지만 티무르 본인도 등장한다. 대신 이름도 듣지 못한 사람이 칸으로 나와서 가끔 유저가 티무르 본인을 매수하는 충공깽한 일도 일어난다.
에드거 앨런 포가 Tamerlane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시를 썼다. 그 외에 크리스토퍼 말로가 템버레인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쓰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스키타이인으로 나온다. 사실 유럽인들은 스키타이인과 튀르크인을 잘 구분 못했다는 설도 있다. 페르시아 제국부터 시작해서 터키와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고 마침내는 자신이 신보다 위대하다며 쿠란을 불태우지만 결국 그것이 저주가 되어 사망한다는 내용이다. 쓰일 당시 영국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했고 티무르는 거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이 작품은 특유의 무신론적인 요소(티무르는 자신이 전쟁의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얘기한다. 거기다가 아내가 죽자 신을 저주한다.)와 잔인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바예지드 1세의 아내의 손가락을 자른다.
그외에 타메를라노(Tamerlano)라는 제목의 오페라도 있다. 하지만 극중 위치는 악역(…). 바예지드 1세를 물리치고 바예지드 1세의 딸과 결혼하려 하자 그 딸과 샤바샤바하던 그리스 왕자와 원래 티무르와 결혼하기로 되어있던 이레네라는 여인이 끼어들어 방해하게 된다는 얘기.
그의 이름을 딴 테머레인 체스라는 변종 체스도 존재한다. 기존의 체스에 낙타, 공성병기, 기린 등의 새로운 말이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캠페인이 나왔다. 자세한 것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캠페인 공략/티무르를 참고. 구글에서 'Age of empires 2 the last khans art'로 이미지 검색을 하면 나오는 라스트 칸의 자켓 또는 팬아트에 해당되는 아트에서 중앙에 있으며 투구를 쓰고어깨 위에 외투 비슷한 것을 걸치고 있는 인물이 티무르다.[30]
아래는 티무르를 소재로 한 은행광고(…). 지금은 사라진 은행이지만 역사를 소재로 많은 광고를 찍었고 아래의 동영상도 그 중 하나.
14세기의 티무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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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의 명령으로 그의 전사들은 전장에 나갈때 길에 돌을 쌓아두어야 했다. 언덕은 점점 커져갔다.
불과 승리가 있었다. 그후에 전사들은 돌아오며 그들의 돌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남겨진 돌들이 있었다.
티무르는 마지막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무거운 돌들을 들고 오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이름들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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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세계의 역사. 임피리얼 은행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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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물과 유골을 토대로 만들어진 티무르의 두상이다.[2] 티무르(Tīmūr/Taymūr) 帖木兒, تيمور 서양에서는 'Tamerlane'이라 불린다.[3] 페르시아어: تیمور لنگ 테무리 랑, 영어: Tamerlane 태멀레인[4] '바를라스 부족의 타라가이의 아들 티무르'라는 뜻이다. 참고로 바를라스는 니룬 몽골(몽골 울루스의 지배층)에 속했던 부족이다.[5] 2008년 미국의 밀리터리 잡지인 암체어에서 인류 역사상 위대한 장군 100을 꼽았는데, 티무르는 칭기즈 칸,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이어 3위에 랭크되었다.[6] 근데 정작 우즈벡인들은 티무르의 후손들을 몰아내고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케이스라 묘하긴 하다.(...) 물론 이쪽도 몽골계 주치의 후손이긴 하다만. 티무르를 숭배하는 이유는 후술된 '우즈베키스탄에서' 문단 참조.[7] '잠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 지방)를 약탈하는 티무르군을 보고 '얘네도 투르크만큼 잔인한 애들인데, 둘 다 잔인하지만 그래도 잘 모르는 애들보단 잘 아는 애가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 실제로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 이탈리아 해양도시국가들은 티무르군을 피하여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오스만 인들을 실어다주기도 했다.[8] 국수주의 병림픽이 시도때도 없이 벌어지는 유튜브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양 역사 서적들을 봐도 몽골, 튀르크, 몽골-튀르크계라는 식으로 그의 인종이 제대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한 책에선 몽골이라고 하고 다른 책에선 튀르크라고 하는 식.[9] 튀르크도 원래는 황인이므로 순혈이 아닌 페르시아 피가 섞인 페르시아화 된 튀르크인이라고 봐야 할 듯.[10] 현명한 자라는 뜻.[11] 쿠빌라이 칸이 아닌 동명이인이다. 둘을 구별하기 위해 쿠빌라이 칸은 한자로 '忽必烈' 이라고 쓰고, 쿠빌라이는 '忽必來' 라고 쓴다.[12] 몽골에서 장군을 이르는 말로, 일종의 작위다.[13] 당시 1인자는 무능하고 권력도 없었다[14] 인도는 우상 숭배의 나라이자 재화의 나라였다. 이슬람에서 경멸하는 이교도의 나라였기에 이를 빌미로 지하드를 표방하여 쳐들어 간 다음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른바 '티무르식 성전'. 그런데 정작 당시 북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델리를 수도로 삼은 이슬람 국가인 델리 술탄국이었다. [15] 이전 버전에서는 '아직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이전'이라 되어 있었는데, 술탄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 술탄국을 확고부동한 남동부 유럽의 패자로 만들어 오스만의 1차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인물이다. 티무르가 오스만을 갈아버린 이후 오스만은 공위시대를 맞이하여 10년 넘게 내전을 벌이며 잠시 팽창이 저지되었으나 메흐메트 1세와 무라트 2세가 수습한 이후 다시 한 번 도약하게 된다.[16] 이 친서에 대해 첨언하면 오스만을 비롯해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에 할거해 있던 여러 투르크계 공국들은 룸 술탄국에서 갈라져 나갔는데, 룸 술탄국이 결정적으로 약해져 각지의 지방 세력들이 독립해나가게 된 계기가 일 칸국의 침공을 받아 신하국이 된 것이었다. 즉, 티무르의 논리는 '한때 아나톨리아 반도를 일 칸국. 즉 몽골이 통치했었으니 이제 내가 통치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17] 열전에서 티무르는 자신이 정통성이 없다는걸 알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는 걸 꺼리는 걸로 보여지며 그의 신체적 장애에 대해선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는것으로 묘사된다. 이런 절름발이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름발이 증세를 고칠수 있는데도 알라의 뜻이라며 치료를 거부한다.[18] 앞에서 언급된 열전은 반쯤 판타지에 가깝지만 원래 이런 저서들은 그 인물이 어떻게 평가받았는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이용한다.[19] 다만 이건 세르비아 쪽의 얘기고 이슬람 쪽에선 잘 접대했다고 한다.[20] 다른 주장으로는 바예지드 1세의 아내와 딸을 면사포를 씌우지 않은 채 하녀들과 함께 있게 해서 바예지드 1세가 열이 뻗쳤다는 설도 있다.[21] 다만 티무르 제국은 티무르 사후부터 불안정했고, 샤루흐 미르자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각지의 반란들을 진압할 수 있었는데, 울루그 베그에겐 군사적 재능은 없었다. 그 때문에 재위 2년 만에 끔살.[22]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 관례처럼 종교와 국정을 지도자 한 명이 통치했다.[23]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유목제국사에 따르면 우르겐치 성 공략전에서 발생한 일화라고 한다.[24] 또 다른 국부이자 다른 동상의 모델은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시인 알리세르 나보이.[25] 체스를 통해 군사학을 연마했다고도 한다.[26] 아랍 문자로 쓰여진 다른 언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증언을 따름.[27] 참고로 바르바로사 작전은 새벽 4시에 시작됐다.즉,시간이 안 맞는다.[28] 후에 소련 해군제독. 이 사람의 아들은 1990년대 초 혼란기에 러시아 총리 권한대행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29] 참고로 1위는 칭기즈 칸, 2위는 알렉산더 대왕 [30] 티무르의 우측에 검을 든 인물은 이바일로, 티무르의 좌측에 활을 들고 있고 쿠만 마스크를 쓴 인물은 코티얀(쾨텐) 칸이다. 모두 결정판에서 개인 캠페인이 있다.(티무르 - 타타르, 이바일로 - 불가리아, 코티얀 칸 - 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