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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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1세 시대의 강역
정식 명칭: ملک وسیعالفضای ایران(Mulk-i Vasi' al-Fazā-yi Īrān, 광활한 이란 왕국)
일반적인 명칭 : دودمان صفوی(Dudmâne Safavi, 사파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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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이란을 지배한 시아파 왕조. 정식 명칭부터 사파비가 아니라 이란인데서 알 수 있듯, 튀르크계인 아제르바이잔인들에 의해 건국되었으나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위 지도에 나온 영토는 전성기 때의 최대 영토인데 저 영토에 가까운 시기는 기껏 2년 정도에 불과하며, 오히려 이란 고원의 상당부분을 오스만과 우즈벡 칸국들에 빼앗겼던 쭈그리 시절이 훨씬 길다. 사실 사파비 왕조가 저 영토를 진짜로 동시에 점유했던 적은 없다... 사실 저 영토는 사파비 왕조가 서쪽으로 최대였던 시기(1510년경)과 동쪽으로 영토가 최대였던 시기(1570년경)의 영토를 짜집기 한 것이며, 특히 서쪽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 동부까지 점유했던 위 지도상의 시기는 2년여에 불과했다.
사파비 왕조는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동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 계열 투르크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했으며, 상당 기간 오스만에 열세에 놓여 있었고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고전하고 있었다. 지도상에 사파비의 영토로 표시된 아나톨리아 동부은 2년 정도 일시적으로 점유한 것에 불과하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사파비의 영토였던 시기보다 오스만이 점유했던 시기가 더 길었기 때문에 사파비보다는 오스만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뿐만 아니라 사파비의 첫 수도였던 타브리즈를 비롯한 북부 아제리 지역도 주기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했고, 서쪽 이란 고원을 오스만이 상당기간 점유하는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우즈벡과 계속 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쪽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부침을 겪었는데 아프가니스탄의 상당부분을 우즈베키스탄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 시절을 제외한 평균적 영토는 역대 이란 왕조 중에서 넓은 편은 못된다.
초기에는 수니파에 가까웠으나, 시아파의 입단을 허용했고 시아파 교단원의 비중이 늘어 결국 완전히 시아파로 개종했다.
시아파로 개종한 후 페르시아 지역에서 핍박받는 시아파들을 자극하여 당시 이란을 지배하던 백양 왕조에 도전했으나 토벌당하였다.
사파비의 지도자도 살해당했으나 그 아들인 이스마일이 살아남았다. 사파비의 잔존세력은 비밀 지하단체로 몸을 숨긴 채 어린 이스마일을 실질적인 지도자로 추앙했다.
세력을 재건한 사파비 일파는 자신들을 핍박했던 백양 왕조를 비롯한 수니파 세력들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스마일은 이스마일 1세가 되어 사파비 왕조를 세웠다.
시아파 7대 이맘의 후손으로 일컬어진 이스마일 1세(재위: 1501~1524)에 의해 타브리즈를 수도로 하여 건국되었다. 이후 이스파한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정말로 이스마일 1세가 이맘의 후손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며 실제 여기에 의혹을 가진 사람들은 처형했다고 한다. 현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튀르크어를 쓰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밝혀졌다.
사파비 왕조 이전에 이란 고원을 지배하고 있던 백양 왕조, 중앙아시아의 무하마드 샤이바니의 우즈베크 왕조를 캐박살내고 위의 지도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부활시켜 전 중동을 시아파 제국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수니파가 아닌 시아파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바로 옆에 위치한 수니파 계통 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적대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국 내 순니파 신도들이 봉기하고 이들을 키질바시들이 마구 학살하면서 내치가 불안정했다.
결국, 사파비 왕조는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였던 맘루크 왕조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 셀림 1세의 오스만 제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북부에서 찰디란 전투(1514)을 벌인다.
하지만 사파비조는 화약 무기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과 달리 구식 무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특히 동맹인 맘루크 왕조도 오스만에게 멸망하여 병합되다보니 수세에 몰린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로 당시 이스마일 1세는 큰 충격을 받아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하며, 찰디란에서 승리한 오스만 황제 셀림 1세는 그에 대해 '언제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며 정사에는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다만 이스마일 1세는 금치산자가 된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사파비야 광신도 키질바시들과 페르시아인 순니파 신도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아랍 지역에서 시아파 12이맘파 학자들을 초빙하여 이란 내 12이맘파를 선교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마일 1세는 자신이 7번째 이맘이라 주장한 상태였고 12이맘파와는 교리가 어느정도 달랐으나, 사파비 제국 치세 안정을 위해 결단을 내린 셈이다. 이를 계기로 이란은 순니파 이슬람 인구가 대부분이던 지역에서 시아파 12이맘파가 주류인 지역으로 변한다.
이후 사파비 왕조는
그런 데다가 동쪽으로는 우즈베크족의 침입과 내분으로 인해 국가가 흔들렸지만 이후 사파비 왕조 최대의 명군인 아바스 1세(1587~1629)의 치세 이후 수도를 1555년 이후로 국가의 수도였던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천도(1597)하고 오스만 제국과 우즈베크족을 격퇴하였으며 다소 불안정하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아바스 1세는 키질바시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체르케스인 및 다게스탄의 여러 부족들을 납치하여 이스파한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시켜서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노예 군인으로 삼았다.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군사들 또한 이스파한 근교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쇠락했던 페르시아의 상공업을 다시 부흥시키며 안정적인 세수를 제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다시 벌어진 내분과 외부와의 전쟁으로 국력은 약화되었으며, 결국 1722년 사파비 왕조의 가혹한 통치에 폭발한 아프간족(현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다수 민족인 파슈툰족)의 봉기에 의해 수도가 일시 점령되었으며, 이후 1736년, 국가 내외의 혼란을 수습한 나디르 샤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원래 페르시아인들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즉 현재의 이란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 데에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
사파비 왕조는 기본적으로 시아파 국가였다. 사실 이란 북부의 타바리스탄 지역은 이슬람의 중심지로부터 상당히 멀었고 지형도 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통치에 대해 자유로웠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의 도래 이후로 소수파였던 시아파가 많이 활동하였으며 이후 이란에는 몇 차례 시아파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부와이 왕조도 시아파 왕조였다. 하지만 사파비 이전의 시아파 국가들은 오래 가지 못했으며, 사파비처럼 잔혹하게 시아파를 강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란 전 지역이 시아파가 되지는 않았다. 주로 타바리스탄 같은 일부 지역이나 지배층 등 일부만 시아파였던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런 시아파 왕조가 무너지고 다시 수니파 왕조가 들어서는 등으로 시아파가 이란에 뿌리깊게 자리잡지는 못했다.
반면 사파비는 잔혹하고 혹독한 강제 개종을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그 결과 이란 전체를 시아파로 개종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런 종교적 강압책으로 인해 많은 페르시아의 수니파 학자, 지식인, 예술가 등이 다른 나라로 도망치면서 부하라, 무굴 제국의 델리 같은 지역의 페르시아 문화적 영향력이 부쩍 커지기도 했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이런 종교적 열망에 기반한 강제 통합을 통해 사산조 이후 페르시아에 전례 없는 안정적이고 강력한 통일 왕조를 만들어내면서도 동시에 대외적으로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도 같이 커졌다. 파키스탄, 북인도,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에도 파르시어권 커뮤니티, 이란 문화의 영향이 짙은것도 이 시절 이룩한 지역 패권 덕분이고, 현대까지도 이란이 국가 자체의 객관적인 국력, 경제력에 비해 강력한 대외 영향력을 발휘하는것도 크게 보면 사파비 왕조 시절 시아파 급진주의+이란 문화적 영향권의 확대란 역사적 유산에 기반해 있다.
사파비 왕조는 또한 기존의 이란을 지배했던 이민족들과는 달리 이슬람적 가치보다는 고대 이란의 황제의 칭호였던 샤를 자칭하는 등 페르시아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란 역사에서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샤'가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칭호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페르시아 계열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슬람 국가에서도 샤라는 칭호가 두루두루 쓰였기 때문. 대표적으로 오스만 황제의 칭호 가운데 하나가 '파디샤', 즉 '왕들의 주인'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허나, 이건 완전히 틀린 소리다. 애초에 오스만 투르크의 주도 세력은 투르크인들이었다는 점을 좀 생각해보자. 본래 스텝 지역의 유목민이었던 튀르크족이 트란속시아나를 거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써 최초의 튀르크-이슬람 제국인 셀주크 제국이 탄생했고, 튀르크-이슬람 제국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징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페르시아화''' 이다. 군사력의 중심은 기마유목민족인 튀르크인들이 차지했지만 행정이나 문화의 중추는 페르시아인 학자와 관료들이 담당하면서 튀르크 제국 자체가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여 궁정의 상용어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할 정도로 페르시아화 되었다는 것.
오스만 제국의 시조인 오스만 1세 역시 룸 셀주크의 신하였던 튀르크계 호족 출신이었으니 오스만 1세의 선조가 튀르크족의 원정에 참여하여 페르시아를 정복, 페르시아화를 거치고 이후 계속된 서방으로의 원정에 참여하여 아나톨리아까지 진출, 현지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것은 역알못이 아닌 한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샤 라는 칭호가 페르시아 계열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슬람 국가에서 두루두루 쓰였다'고 주장할 거라면, 먼저 '페르시아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슬람 세력에서 샤라는 칭호를 사용한 전례가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샤'라는 단어 자체가 그냥 '''페르시아어로''' '왕'이라는 단어다. 이걸 두고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던 칭호인지 의문을 가진다는 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고, 이슬람 문화의 성립과 발전 과정에서 페르시아가 끼친 영향이 어떠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가질 법한 의문일 수밖에는 없다.
실제로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란이나 시아파를 칭할 때 사파비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편이다. 사파비 이전에도 시아파 왕조로 파티마 왕조등이 존재했으나 시아파는 1~5% 남짓한 극소수였고 그 당시엔 다 같은 무슬림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종파간 대립이 격화되어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성립되었고, 이는 10% 가량에 달하는 시아파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그 시아파 절반이 이란이다.
그 결과 사파비 왕조의 등장은 '''언제나 소수파로 존재할 줄 알았던 시아파가 수니파의 위협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해질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수니파 세계에 큰 충격과 공포를 선사해주었다.
물론 사피비 왕조 등장 이전의 주요 시아파 왕조였던 파티마 왕조 같은 경우,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에서도 가장 중요한 영토 중 하나이던 이집트를 장악하고 칼리파를 자처하며 이슬람권의 중심부인 중근동에서도 두드러지는 영향력을 떨친 바 있기는 하다. 하지만 파티마 왕조 같은 경우 지배층이 스스로를 시아파로 정체화했을 뿐, 피지배층들의 대다수는 수니파... 라기보다도 그냥 '무슬림' 으로 자신들을 정체화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수니파/시아파 갈등이란 기본적으로 지배층-귀족층들의 명분 갈등이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들에게는 그냥 "저번 칼리프님도 무슬림이고 이번 칼리프님도 무슬림이지. 근데 예배시간에 설교하는 내용중에 좀 다른게 있긴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정도의 문제였다는 것.
하지만 사파비 왕조의 경우 안 그래도 이전부터 '아랍인'과 분명히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페르시아인'을 규합하여 '시아파'라는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시아-수니 갈등을 단순히 일부 지배층, 신학자들간의 신학적, 명분적 대립에서 '민족 집단간의 갈등'에 가까운 형태로 전환시킨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수니-시아 갈등을 같은 나라 내에서 정당간의 갈등(보통 수니파가 집권하지만 가끔은 시아파가 집권)에 비유한다면, 사파비 왕조의 경우 이란(페르시아) 지역과 그 주민들을 시아파로 정체화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다른 중심부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서쪽의 대제국과 힘에는 부치지만 나름 호적수로 활약하면서 흡사 예전의 로마 VS 사산조 페르시아를 방불하게 하는 형세를 유지했다.
오스만의 전성기 인구는 3000만인데 사파비는 1000만은 커녕, 500만도 안되는 464만에 불과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인구가 320만에 불과했다. 본래 고대 문명의 요람 중 하나인 이란 지방이었지만, 몽골의 침략과 호라즘의 멸망을 거치며 250만의 인구를 보유했던 현대 이란 지방이 피난과 기근 등으로 인구가 일시적으로 '''25만'''이 되어 버릴 정도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2]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로마에게 8배나 열세였기 때문에[3] 사파비보다 사정은 더 좋지 못했다. 특히 로마군의 공격에 수도가 2번이나 파괴되었을 정도. 물론 '게르만족에게 서쪽 지역이 함락된 이후의 로마'로 비교 대상을 바꾸면 사파비와 달리 사산조는 호각 이상의 전적을 유지했다. 애초에 건국 과정도 오스만은 오스만 베이의 건국 이후 4차 십자군이 남긴 옛 동로마 세계의 거대한 공백을 차지하며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제국으로 등극까지 순탄하게 일사천리로 정복과 팽창을 거듭했지만,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기원 자체도 사파비야 종교 집단이였고, 오랜 기간 일한국, 티무르 제국, 백양 왕조 같은 더 강력한 이웃 유목 정복 제국에게 의존하고 치이면서 아제르바이잔 산구석에서 겨우 겨우 세력을 키우면서 건국을 했더니 또 바로 서로는 오스만, 동으론 우즈벡이란 강력한 이웃 열강 상대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지정학적 여건이나 세력 기반이란 측면에서 여러모로 사파비조 페르시아가 원래 더 불리했던 셈이다.
물론 예전의 대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하곤 아예 비교가 불가능하고[4] 사산 왕조와 비교하면 서쪽 전선은 영 딸리지만, 동쪽 전선은 의외로 유목 세력에 대해서 상당한 우위를 자랑했다.
오스만 쪽 전선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긴 했지만, 이 부분은 군사적 역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지중해-페르시아의 역량은 로마 제국-파르티아,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사파비 페르시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력에서 열세다보니 이란권이 힘에 부쳤던 데다가 사파비 왕조는 창건자 이스마일 1세 사후 내전에 휩싸여 있었는데, 내전이 가까스로 수습되자마자 적국이 국경을 쳐들어온 꼴이었기 때문.
사산조와 비교해보면 전적이나 영역이 묘하게 동쪽으로 치우친 상황. 그러나 밀리긴 했어도 밀리는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군 또한 크게 고전해야만 했을 정도로 여전히 지중해 제국의 무시 못할 강적의 위치는 유지했다. 사산조와 직접비교하기엔 8백년이라는 엄청나게 큰 시간적 차이가 있고, 지정학적 구도만 비슷하지 내부적 여건 같은건 완전히 달랐기에 부적절하다. 오스만 제국에 비해 여러 악조건에서 시작했다. 애초에 기반이 된 페르시아 내륙 자체가 오스만 제국의 풍요로운 루멜리아,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해안지방 같은 지중해의 곡창지대에 비해 생산력도 낮고 사막도 넒으며, 적어도 핵심 영토인 루멜리아-아나톨리아 해안-시리아-이집트는 확실하게 원활한 교통, 무역망이 개발 되었던 오스만과는 대조적으로 페르시아의 핵심 영토들은 자그로스 산맥, 알보르즈 산맥, 카라쿰 사막 같은 거대한 자연장벽으로 뚝뚝 떨어져있었다. 이런 지정학적 조건은 오스만제국에게 침공 당했을때 주된 대응인 청야전술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국가 발전의 관점에선 영 불리한 입지였다. 거의 천년전 마지막 페르시아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내세운 사산조도 사실 이런 여건 때문에 인구와 세수의 핵심은 사실 현대 이란보다 이라크의 메소포파미아 일대에 있는 크테시폰 같은 지역이었고, 이런 그나마 인접한 대규모 영농과 인구 부양이 가능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안정적으로 영유하기 힘들었던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물리적 체급 자체에서 오스만에 비해 많이 딸렸다. 이런 악조건에서 그나마 어느정도는 호각지세를 유지하며, 국체를 보존하고 후대 이란의 정체성에 큰 구심점을 마련할만큼 독자적인 문화와 정치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현대까지 이어지는 수니-시아파의 지정학적 대립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사파비조가 페르시아 문명과 이슬람권 전체에서 남긴 역사적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또한 오스만 제국 초창기의 술탄들이 튀르크계 개국공신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쪽에는 튀르크 계통의 키질바시[5] 에 의해 제국의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면이 강했으며 인도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등 꽤나 강세를 보였다.
다만 이들이 제국 후기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이 개국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데브시르메 제도를 도입하고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했듯이, 2대 황제인 타흐마스프 1세 때부터 키질바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카프카스계 맘루크를 등용하기 시작하였으며, 5대 샤인 아바스 1세 때에 결정적으로 세력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키질바시와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규모로 강제 이주와 회유책을 번갈아가며 이란 내부로 이주시킨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은 튀르크계 키질바시 귀족, 페르시아계 관료 사이 제3세력을 형성하며 16세기 초중반의 길고 험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도 아바스 대제 시절쯤 와선 안정적인 중앙 집권을 마련할 기반이 되었다. 카프카스인 납치와 강제 이주로 사파비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인구 부족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문화, 사회적으로도 이 시절 사파비조의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대규모 강제 이주가 이루어지며 조지아, 아르메니아 같은 카프카스 소왕국들 본토는 작살난 반면 타브리즈, 이스파한 같은 이란 내륙지방의 도시에 번영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커뮤니티가 생기기도 했다.[6] 사실 이렇게 급진적인 종교적 열망에 기반한 투르코만(오우즈) 전사 부족집단의 힘을 입으면서 성장하고 나서 이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계 피정복민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건 오스만이나 사파비조나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7] 그리고 적어도 오스만은 몰라도 중앙아시아의 우즈벡에겐 전반적으로 대단한 강세였다. 헤라트, 칸다하르 같은 중요한 호라산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훗날 아프가니스탄에 이란의 영향이 짙게 남은 것도 사파비 시절 확장의 영향이 크다.
은근슬쩍 '이란 종족주의'와 '사산조'를 동경했어도, 아바스조 칼리프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한 심정을 표출하지 못했던, 혹은 아예 몽골계에게 지배당했던 사산조 이후 이전 페르시아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그러한 열망을 현실화하며 등장한 이슬람 이후 최초이자 마침내 부활한 '''페르시아 통일 제국'''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파비 왕조에 관한 자료영상에서 아제리인, 터키인, 페르시아인, 쿠르드족 등[8] 이 "사파비 왕조는 우리 민족의 국가다!"라며 진창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는 건국자 이스마일 1세의 혈통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이다. 이스마일 1세의 외할머니는 그리스계 공주였어서 그리스인의 피도 있고 아버지쪽에선 쿠르드족과 투르크족 피도 있다. 더욱이나 샤 이스마일 1세 본인은 투르크어를 구사하였는데, 왕조 창단 이전 사파비 집안의 주요 근거지는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사파비 제국의 원형이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분파, 수피즘의 하나인 사파비 교단(Safaviyya)에서 시작된, 종교적으로 똘똘 뭉쳐진 국가다. 그에 비해 민족적으로는 쿠르드인, 아제리인, 그리스인, 조지아인 등등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있다.
마치 몽골을 근거지로 해 중국어 계열을 사용하지만 몽골인 중국인 한국인을 모아 새 종교분파를 만들고 한국에 세웠다는 것과 비슷하다.
현대에 와서 거의 중동판 한일관계에 필적하는 오스만투르크의 터키와 페르시아의 이란간의 악감정 때문에 여기저기서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바스 1세 시대의 강역
정식 명칭: ملک وسیعالفضای ایران(Mulk-i Vasi' al-Fazā-yi Īrān, 광활한 이란 왕국)
일반적인 명칭 : دودمان صفوی(Dudmâne Safavi, 사파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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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세 이란을 지배한 시아파 왕조. 정식 명칭부터 사파비가 아니라 이란인데서 알 수 있듯, 튀르크계인 아제르바이잔인들에 의해 건국되었으나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위 지도에 나온 영토는 전성기 때의 최대 영토인데 저 영토에 가까운 시기는 기껏 2년 정도에 불과하며, 오히려 이란 고원의 상당부분을 오스만과 우즈벡 칸국들에 빼앗겼던 쭈그리 시절이 훨씬 길다. 사실 사파비 왕조가 저 영토를 진짜로 동시에 점유했던 적은 없다... 사실 저 영토는 사파비 왕조가 서쪽으로 최대였던 시기(1510년경)과 동쪽으로 영토가 최대였던 시기(1570년경)의 영토를 짜집기 한 것이며, 특히 서쪽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 동부까지 점유했던 위 지도상의 시기는 2년여에 불과했다.
사파비 왕조는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동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 계열 투르크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했으며, 상당 기간 오스만에 열세에 놓여 있었고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고전하고 있었다. 지도상에 사파비의 영토로 표시된 아나톨리아 동부은 2년 정도 일시적으로 점유한 것에 불과하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사파비의 영토였던 시기보다 오스만이 점유했던 시기가 더 길었기 때문에 사파비보다는 오스만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뿐만 아니라 사파비의 첫 수도였던 타브리즈를 비롯한 북부 아제리 지역도 주기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했고, 서쪽 이란 고원을 오스만이 상당기간 점유하는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우즈벡과 계속 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쪽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부침을 겪었는데 아프가니스탄의 상당부분을 우즈베키스탄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 시절을 제외한 평균적 영토는 역대 이란 왕조 중에서 넓은 편은 못된다.
2. 역사
2.1. 건국 이전
- 건국 이전의 세부 내용은 사파비야 문서 참조.
초기에는 수니파에 가까웠으나, 시아파의 입단을 허용했고 시아파 교단원의 비중이 늘어 결국 완전히 시아파로 개종했다.
시아파로 개종한 후 페르시아 지역에서 핍박받는 시아파들을 자극하여 당시 이란을 지배하던 백양 왕조에 도전했으나 토벌당하였다.
사파비의 지도자도 살해당했으나 그 아들인 이스마일이 살아남았다. 사파비의 잔존세력은 비밀 지하단체로 몸을 숨긴 채 어린 이스마일을 실질적인 지도자로 추앙했다.
세력을 재건한 사파비 일파는 자신들을 핍박했던 백양 왕조를 비롯한 수니파 세력들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스마일은 이스마일 1세가 되어 사파비 왕조를 세웠다.
2.2. 건국
시아파 7대 이맘의 후손으로 일컬어진 이스마일 1세(재위: 1501~1524)에 의해 타브리즈를 수도로 하여 건국되었다. 이후 이스파한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정말로 이스마일 1세가 이맘의 후손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며 실제 여기에 의혹을 가진 사람들은 처형했다고 한다. 현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튀르크어를 쓰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밝혀졌다.
2.3. 대 오스만 전쟁 및 전성기
사파비 왕조 이전에 이란 고원을 지배하고 있던 백양 왕조, 중앙아시아의 무하마드 샤이바니의 우즈베크 왕조를 캐박살내고 위의 지도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부활시켜 전 중동을 시아파 제국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수니파가 아닌 시아파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바로 옆에 위치한 수니파 계통 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적대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국 내 순니파 신도들이 봉기하고 이들을 키질바시들이 마구 학살하면서 내치가 불안정했다.
2.3.1. 1514, 찰디란 전투: 패배
결국, 사파비 왕조는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였던 맘루크 왕조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 셀림 1세의 오스만 제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북부에서 찰디란 전투(1514)을 벌인다.
하지만 사파비조는 화약 무기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과 달리 구식 무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특히 동맹인 맘루크 왕조도 오스만에게 멸망하여 병합되다보니 수세에 몰린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로 당시 이스마일 1세는 큰 충격을 받아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하며, 찰디란에서 승리한 오스만 황제 셀림 1세는 그에 대해 '언제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며 정사에는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다만 이스마일 1세는 금치산자가 된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사파비야 광신도 키질바시들과 페르시아인 순니파 신도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아랍 지역에서 시아파 12이맘파 학자들을 초빙하여 이란 내 12이맘파를 선교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마일 1세는 자신이 7번째 이맘이라 주장한 상태였고 12이맘파와는 교리가 어느정도 달랐으나, 사파비 제국 치세 안정을 위해 결단을 내린 셈이다. 이를 계기로 이란은 순니파 이슬람 인구가 대부분이던 지역에서 시아파 12이맘파가 주류인 지역으로 변한다.
이후 사파비 왕조는
- 동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확장 전쟁을 포기하고, 방어전 모드에만 돌입해야만 했고
- 국가의 중심도 아제르바이잔(타브리즈, 술타니야)에서 이란 내륙으로 옮겼으며 오스만 제국은 먼치킨의 시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쉽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2.3.2. 전성기: 아바스 1세
그런 데다가 동쪽으로는 우즈베크족의 침입과 내분으로 인해 국가가 흔들렸지만 이후 사파비 왕조 최대의 명군인 아바스 1세(1587~1629)의 치세 이후 수도를 1555년 이후로 국가의 수도였던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천도(1597)하고 오스만 제국과 우즈베크족을 격퇴하였으며 다소 불안정하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아바스 1세는 키질바시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체르케스인 및 다게스탄의 여러 부족들을 납치하여 이스파한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시켜서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노예 군인으로 삼았다.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군사들 또한 이스파한 근교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쇠락했던 페르시아의 상공업을 다시 부흥시키며 안정적인 세수를 제공하게 되었다.
2.4. 멸망
하지만 이후 다시 벌어진 내분과 외부와의 전쟁으로 국력은 약화되었으며, 결국 1722년 사파비 왕조의 가혹한 통치에 폭발한 아프간족(현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다수 민족인 파슈툰족)의 봉기에 의해 수도가 일시 점령되었으며, 이후 1736년, 국가 내외의 혼란을 수습한 나디르 샤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3. 역대 황제
4. 의의
4.1. 시아파 왕조
원래 페르시아인들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즉 현재의 이란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 데에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
사파비 왕조는 기본적으로 시아파 국가였다. 사실 이란 북부의 타바리스탄 지역은 이슬람의 중심지로부터 상당히 멀었고 지형도 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통치에 대해 자유로웠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의 도래 이후로 소수파였던 시아파가 많이 활동하였으며 이후 이란에는 몇 차례 시아파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부와이 왕조도 시아파 왕조였다. 하지만 사파비 이전의 시아파 국가들은 오래 가지 못했으며, 사파비처럼 잔혹하게 시아파를 강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란 전 지역이 시아파가 되지는 않았다. 주로 타바리스탄 같은 일부 지역이나 지배층 등 일부만 시아파였던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런 시아파 왕조가 무너지고 다시 수니파 왕조가 들어서는 등으로 시아파가 이란에 뿌리깊게 자리잡지는 못했다.
반면 사파비는 잔혹하고 혹독한 강제 개종을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그 결과 이란 전체를 시아파로 개종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런 종교적 강압책으로 인해 많은 페르시아의 수니파 학자, 지식인, 예술가 등이 다른 나라로 도망치면서 부하라, 무굴 제국의 델리 같은 지역의 페르시아 문화적 영향력이 부쩍 커지기도 했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이런 종교적 열망에 기반한 강제 통합을 통해 사산조 이후 페르시아에 전례 없는 안정적이고 강력한 통일 왕조를 만들어내면서도 동시에 대외적으로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도 같이 커졌다. 파키스탄, 북인도,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에도 파르시어권 커뮤니티, 이란 문화의 영향이 짙은것도 이 시절 이룩한 지역 패권 덕분이고, 현대까지도 이란이 국가 자체의 객관적인 국력, 경제력에 비해 강력한 대외 영향력을 발휘하는것도 크게 보면 사파비 왕조 시절 시아파 급진주의+이란 문화적 영향권의 확대란 역사적 유산에 기반해 있다.
4.2. 페르시아의 전통 계승
사파비 왕조는 또한 기존의 이란을 지배했던 이민족들과는 달리 이슬람적 가치보다는 고대 이란의 황제의 칭호였던 샤를 자칭하는 등 페르시아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란 역사에서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4.2.1. 샤.라는 칭호에 관하여
하지만 '샤'가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칭호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페르시아 계열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슬람 국가에서도 샤라는 칭호가 두루두루 쓰였기 때문. 대표적으로 오스만 황제의 칭호 가운데 하나가 '파디샤', 즉 '왕들의 주인'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허나, 이건 완전히 틀린 소리다. 애초에 오스만 투르크의 주도 세력은 투르크인들이었다는 점을 좀 생각해보자. 본래 스텝 지역의 유목민이었던 튀르크족이 트란속시아나를 거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써 최초의 튀르크-이슬람 제국인 셀주크 제국이 탄생했고, 튀르크-이슬람 제국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징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페르시아화''' 이다. 군사력의 중심은 기마유목민족인 튀르크인들이 차지했지만 행정이나 문화의 중추는 페르시아인 학자와 관료들이 담당하면서 튀르크 제국 자체가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여 궁정의 상용어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할 정도로 페르시아화 되었다는 것.
오스만 제국의 시조인 오스만 1세 역시 룸 셀주크의 신하였던 튀르크계 호족 출신이었으니 오스만 1세의 선조가 튀르크족의 원정에 참여하여 페르시아를 정복, 페르시아화를 거치고 이후 계속된 서방으로의 원정에 참여하여 아나톨리아까지 진출, 현지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것은 역알못이 아닌 한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샤 라는 칭호가 페르시아 계열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슬람 국가에서 두루두루 쓰였다'고 주장할 거라면, 먼저 '페르시아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슬람 세력에서 샤라는 칭호를 사용한 전례가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샤'라는 단어 자체가 그냥 '''페르시아어로''' '왕'이라는 단어다. 이걸 두고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던 칭호인지 의문을 가진다는 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고, 이슬람 문화의 성립과 발전 과정에서 페르시아가 끼친 영향이 어떠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가질 법한 의문일 수밖에는 없다.
4.3. 결과: 시아파를 통한 민족적 대립
실제로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란이나 시아파를 칭할 때 사파비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편이다. 사파비 이전에도 시아파 왕조로 파티마 왕조등이 존재했으나 시아파는 1~5% 남짓한 극소수였고 그 당시엔 다 같은 무슬림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종파간 대립이 격화되어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성립되었고, 이는 10% 가량에 달하는 시아파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그 시아파 절반이 이란이다.
그 결과 사파비 왕조의 등장은 '''언제나 소수파로 존재할 줄 알았던 시아파가 수니파의 위협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해질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수니파 세계에 큰 충격과 공포를 선사해주었다.
물론 사피비 왕조 등장 이전의 주요 시아파 왕조였던 파티마 왕조 같은 경우,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에서도 가장 중요한 영토 중 하나이던 이집트를 장악하고 칼리파를 자처하며 이슬람권의 중심부인 중근동에서도 두드러지는 영향력을 떨친 바 있기는 하다. 하지만 파티마 왕조 같은 경우 지배층이 스스로를 시아파로 정체화했을 뿐, 피지배층들의 대다수는 수니파... 라기보다도 그냥 '무슬림' 으로 자신들을 정체화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수니파/시아파 갈등이란 기본적으로 지배층-귀족층들의 명분 갈등이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들에게는 그냥 "저번 칼리프님도 무슬림이고 이번 칼리프님도 무슬림이지. 근데 예배시간에 설교하는 내용중에 좀 다른게 있긴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정도의 문제였다는 것.
하지만 사파비 왕조의 경우 안 그래도 이전부터 '아랍인'과 분명히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페르시아인'을 규합하여 '시아파'라는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시아-수니 갈등을 단순히 일부 지배층, 신학자들간의 신학적, 명분적 대립에서 '민족 집단간의 갈등'에 가까운 형태로 전환시킨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수니-시아 갈등을 같은 나라 내에서 정당간의 갈등(보통 수니파가 집권하지만 가끔은 시아파가 집권)에 비유한다면, 사파비 왕조의 경우 이란(페르시아) 지역과 그 주민들을 시아파로 정체화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다른 중심부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4. 오스만 제국과의 경쟁구도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서쪽의 대제국과 힘에는 부치지만 나름 호적수로 활약하면서 흡사 예전의 로마 VS 사산조 페르시아를 방불하게 하는 형세를 유지했다.
오스만의 전성기 인구는 3000만인데 사파비는 1000만은 커녕, 500만도 안되는 464만에 불과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인구가 320만에 불과했다. 본래 고대 문명의 요람 중 하나인 이란 지방이었지만, 몽골의 침략과 호라즘의 멸망을 거치며 250만의 인구를 보유했던 현대 이란 지방이 피난과 기근 등으로 인구가 일시적으로 '''25만'''이 되어 버릴 정도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2]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로마에게 8배나 열세였기 때문에[3] 사파비보다 사정은 더 좋지 못했다. 특히 로마군의 공격에 수도가 2번이나 파괴되었을 정도. 물론 '게르만족에게 서쪽 지역이 함락된 이후의 로마'로 비교 대상을 바꾸면 사파비와 달리 사산조는 호각 이상의 전적을 유지했다. 애초에 건국 과정도 오스만은 오스만 베이의 건국 이후 4차 십자군이 남긴 옛 동로마 세계의 거대한 공백을 차지하며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제국으로 등극까지 순탄하게 일사천리로 정복과 팽창을 거듭했지만,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기원 자체도 사파비야 종교 집단이였고, 오랜 기간 일한국, 티무르 제국, 백양 왕조 같은 더 강력한 이웃 유목 정복 제국에게 의존하고 치이면서 아제르바이잔 산구석에서 겨우 겨우 세력을 키우면서 건국을 했더니 또 바로 서로는 오스만, 동으론 우즈벡이란 강력한 이웃 열강 상대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지정학적 여건이나 세력 기반이란 측면에서 여러모로 사파비조 페르시아가 원래 더 불리했던 셈이다.
물론 예전의 대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하곤 아예 비교가 불가능하고[4] 사산 왕조와 비교하면 서쪽 전선은 영 딸리지만, 동쪽 전선은 의외로 유목 세력에 대해서 상당한 우위를 자랑했다.
오스만 쪽 전선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긴 했지만, 이 부분은 군사적 역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지중해-페르시아의 역량은 로마 제국-파르티아,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사파비 페르시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력에서 열세다보니 이란권이 힘에 부쳤던 데다가 사파비 왕조는 창건자 이스마일 1세 사후 내전에 휩싸여 있었는데, 내전이 가까스로 수습되자마자 적국이 국경을 쳐들어온 꼴이었기 때문.
사산조와 비교해보면 전적이나 영역이 묘하게 동쪽으로 치우친 상황. 그러나 밀리긴 했어도 밀리는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군 또한 크게 고전해야만 했을 정도로 여전히 지중해 제국의 무시 못할 강적의 위치는 유지했다. 사산조와 직접비교하기엔 8백년이라는 엄청나게 큰 시간적 차이가 있고, 지정학적 구도만 비슷하지 내부적 여건 같은건 완전히 달랐기에 부적절하다. 오스만 제국에 비해 여러 악조건에서 시작했다. 애초에 기반이 된 페르시아 내륙 자체가 오스만 제국의 풍요로운 루멜리아,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해안지방 같은 지중해의 곡창지대에 비해 생산력도 낮고 사막도 넒으며, 적어도 핵심 영토인 루멜리아-아나톨리아 해안-시리아-이집트는 확실하게 원활한 교통, 무역망이 개발 되었던 오스만과는 대조적으로 페르시아의 핵심 영토들은 자그로스 산맥, 알보르즈 산맥, 카라쿰 사막 같은 거대한 자연장벽으로 뚝뚝 떨어져있었다. 이런 지정학적 조건은 오스만제국에게 침공 당했을때 주된 대응인 청야전술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국가 발전의 관점에선 영 불리한 입지였다. 거의 천년전 마지막 페르시아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내세운 사산조도 사실 이런 여건 때문에 인구와 세수의 핵심은 사실 현대 이란보다 이라크의 메소포파미아 일대에 있는 크테시폰 같은 지역이었고, 이런 그나마 인접한 대규모 영농과 인구 부양이 가능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안정적으로 영유하기 힘들었던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물리적 체급 자체에서 오스만에 비해 많이 딸렸다. 이런 악조건에서 그나마 어느정도는 호각지세를 유지하며, 국체를 보존하고 후대 이란의 정체성에 큰 구심점을 마련할만큼 독자적인 문화와 정치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현대까지 이어지는 수니-시아파의 지정학적 대립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사파비조가 페르시아 문명과 이슬람권 전체에서 남긴 역사적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또한 오스만 제국 초창기의 술탄들이 튀르크계 개국공신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쪽에는 튀르크 계통의 키질바시[5] 에 의해 제국의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면이 강했으며 인도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등 꽤나 강세를 보였다.
다만 이들이 제국 후기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이 개국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데브시르메 제도를 도입하고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했듯이, 2대 황제인 타흐마스프 1세 때부터 키질바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카프카스계 맘루크를 등용하기 시작하였으며, 5대 샤인 아바스 1세 때에 결정적으로 세력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키질바시와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규모로 강제 이주와 회유책을 번갈아가며 이란 내부로 이주시킨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은 튀르크계 키질바시 귀족, 페르시아계 관료 사이 제3세력을 형성하며 16세기 초중반의 길고 험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도 아바스 대제 시절쯤 와선 안정적인 중앙 집권을 마련할 기반이 되었다. 카프카스인 납치와 강제 이주로 사파비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인구 부족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문화, 사회적으로도 이 시절 사파비조의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대규모 강제 이주가 이루어지며 조지아, 아르메니아 같은 카프카스 소왕국들 본토는 작살난 반면 타브리즈, 이스파한 같은 이란 내륙지방의 도시에 번영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커뮤니티가 생기기도 했다.[6] 사실 이렇게 급진적인 종교적 열망에 기반한 투르코만(오우즈) 전사 부족집단의 힘을 입으면서 성장하고 나서 이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계 피정복민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건 오스만이나 사파비조나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7] 그리고 적어도 오스만은 몰라도 중앙아시아의 우즈벡에겐 전반적으로 대단한 강세였다. 헤라트, 칸다하르 같은 중요한 호라산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훗날 아프가니스탄에 이란의 영향이 짙게 남은 것도 사파비 시절 확장의 영향이 크다.
은근슬쩍 '이란 종족주의'와 '사산조'를 동경했어도, 아바스조 칼리프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한 심정을 표출하지 못했던, 혹은 아예 몽골계에게 지배당했던 사산조 이후 이전 페르시아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그러한 열망을 현실화하며 등장한 이슬람 이후 최초이자 마침내 부활한 '''페르시아 통일 제국'''이었던 것이다.
5. 기타
많은 사파비 왕조에 관한 자료영상에서 아제리인, 터키인, 페르시아인, 쿠르드족 등[8] 이 "사파비 왕조는 우리 민족의 국가다!"라며 진창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는 건국자 이스마일 1세의 혈통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이다. 이스마일 1세의 외할머니는 그리스계 공주였어서 그리스인의 피도 있고 아버지쪽에선 쿠르드족과 투르크족 피도 있다. 더욱이나 샤 이스마일 1세 본인은 투르크어를 구사하였는데, 왕조 창단 이전 사파비 집안의 주요 근거지는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사파비 제국의 원형이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분파, 수피즘의 하나인 사파비 교단(Safaviyya)에서 시작된, 종교적으로 똘똘 뭉쳐진 국가다. 그에 비해 민족적으로는 쿠르드인, 아제리인, 그리스인, 조지아인 등등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있다.
마치 몽골을 근거지로 해 중국어 계열을 사용하지만 몽골인 중국인 한국인을 모아 새 종교분파를 만들고 한국에 세웠다는 것과 비슷하다.
현대에 와서 거의 중동판 한일관계에 필적하는 오스만투르크의 터키와 페르시아의 이란간의 악감정 때문에 여기저기서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6. 역사보기 틀
[1] 1722~1729년 호타키 왕조가 장악[2] 학계에서는 호라즘 제국의 전체 인구를 500만, 순 사망자만 170만명으로 추산한다. 본래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동부 지방과 우즈베키스탄의 이란 문화, 특히 이란계 언어는 몽골 제국이 투르크계 유목민을 놔두고 이란계 도시민들을 학살하면서 파미르 고원의 일부를 빼고는 완전히 사멸한다. 기원후 6세기의 사산조 페르시아도 인구가 800만이었다! 특히 이란이 과거의 성세에 가까운 인구를 회복한 것은 '''20세기'''에나 가능했다.[3] 로마 제국은 인구가 5천만에서 6천만에 달했다.[4] 실제로 사산 왕조와 사파비 왕조가 추구했던 것이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영토를 재건하는 것이었다.[5]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튀르크 부족들의 통칭. 'Qizilbash'라는 말을 직역하면 '붉은 머리'라는 뜻인데, 이는 그들이 즐겨 쓰던 붉은 모자에서 유래했다. 사파비 왕조 창건 이전까지는 소수파였던 시아파를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창건자 이스마일을 군주이자 교조로 받들었다.[6] 다만 조지아인의 경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신도들과 다르게 거의 무조건 시아파로 개종이 강요되었으며, 체르케스와 다게스탄 일대의 순니파 무슬림들도 강제로 시아파로 개종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7] 하지만 후반기에는 아프간족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고 일시 점령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본진으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복수해서 설욕한다.[8] 터키인과 쿠르드족 중에서는 특히 시아파 신자들이 더더욱 사파비 제국을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