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러시아어: Заслуженный коллектив России Академический симфонический оркестр 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ой филармонии
영어: St Petersburg Philharmonic Orchestra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를 거점으로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 소련 붕괴 전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고 불렸고 이 명칭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공식 명칭은 '러시아의 영광스러운 집단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소속의 아카데미 교향악단(Honored Collective of Russian Academic Symphony Orchestra St. Petersburg Philharmonic)' 이다. 홈페이지
1. 연혁
1882년에 러시아 제국의 황실 직속 악단으로 창단되었으며, 제정 시대에는 주로 황족이나 여타 귀족, 해외 국빈 등 높으신 분들을 상대로 한 비공개 연주회 위주로 활동했다. 초대 상임 지휘자로는 독일 출신의 헤르만 플리게가 초빙되어 1907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고, 이어 후고 바를리흐가 직책을 이어받았다.
1900년 초반 부터는 일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개 연주회도 개최하기 시작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계속 터지면서 황실 직속 악단이라는 점이 오히려 중대한 결점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17년의 두 차례 혁명을 거쳐 악단은 황실 직함을 떼고 국립화 되었고, 도시 이름도 바뀜에 따라 '페트로그라드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 개칭했다.
동시에 새로운 음악의 소개에 적극적이었던 중견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를 제3대 상임 지휘자로 영입했는데, 쿠세비츠키는 1920년에 소련 문화 정책을 대차게 까버린 뒤 서방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쿠세비츠키의 망명 직후 알렉산드르 헤신이 예정되었던 남은 시즌 동안 임시로 공백을 메꾸었고, 이어 영국계 러시아 지휘자인 에밀 쿠페르가 자리를 넘겨받았다.
하지만 쿠페르 역시 1923년에 직책을 사임한 뒤 이듬해 서방으로 망명했고, 발레리 베르댜에프와 니콜라이 말코, 알렉산드르 가우크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특히 말코와 가우크는 혁명 후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본격적인 악단 재건에 들어갔고, 악단 명칭도 1924년에 페트로그라드가 레닌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자 '레닌그라드 국립 필하모닉 아카데미 교향악단(약칭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으로 다시 명칭 변경이 이루어졌다.
가우크가 1934년 사임한 뒤에는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해온 유대인 지휘자인 프리츠 슈티드리가 뒤를 이었지만, 슈티드리는 때마침 벌어지기 시작한 대숙청의 피바다와 유대인 박해를 목격하고는 깜놀해 1937년에 미국으로 재차 망명하고 말았다. 슈티드리의 후임으로는 당시 35세의 젊은 지휘자였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임명되었다.
므라빈스키는 부임 직후 노장 단원들에게 듣보잡 취급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내 특유의 엄청난 깐깐함과 성깔을 발휘해 악단을 휘어잡아 버렸다. 이후 므라빈스키는 이 악단과 함께 진정한 리즈시절을 50년 동안이나 영위했고,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에프 등의 따끈따끈한 신작들도 자주 무대에 올리는 등 레퍼토리 확장을 꾀했다.
독소전쟁 중에는 독일군에게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로 본거지를 옮겨 활동했고, 레닌그라드가 1944년 1월 완전히 해방되자 다시 복귀했다. 종전 후 이듬해에는 해외 순회 공연도 정기적으로 개최하기 시작해, 소련 음악계의 우수성을 알리는 홍보 대사 역할도 수행했다.1
하지만 반세기 동안 한결같은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므라빈스키도 1980년대 후반부터 점차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1987년 3월 공연을 마지막으로 투병하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후임으로는 므라빈스키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며 악단을 종종 지휘해 왔던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임명되었고, 테미르카노프도 2012년 현재까지 20년 넘게 직책을 유임하고 있다. 1991년에는 소련 붕괴와 함께 레닌그라드가 다시 혁명 이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환원됨에 따라 이름도 현재의 것으로 최종 개칭되었다.
2. 역대 상임 지휘자
- 헤르만 플리게 (Hermann Fliege, 재임 기간 1882–1907)
- 후고 바를리흐 (Гуго Варлих, Hugo Varlikh, 재임 기간 1907–1917)
-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Сергей Кусевицки, Sergei Koussevitzky, 재임 기간 1917–1920)
- 에밀 쿠페르 (Эмиль Купер, Emil Cooper, 재임 기간 1920–1923)
- 발레리 베르댜에프 (Валериан Бердяев, Valery Berdyaev, 재임 기간 1924–1926)
- 니콜라이 말코 (Николай Малько, Nikolai Malko, 재임 기간 1926–1930)
- 알렉산드르 가우크 (Александр Гаук, Aleksandr Gauk, 재임 기간 1930–1934)
- 프리츠 슈티드리 (Fritz Stiedry, 재임 기간 1934–1937)
-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 Евгений Мравинский, Evgeny Mravinsky, 재임 기간 1938–1988)
- 유리 테미르카노프 (Юрий Темирканов, Yuri Temirkanov, 재임 기간 1988–)
3. 특징
이 악단의 전성기는 구 소련 시절이었으며, 소련 붕괴 이후 주요 단원들이 대거 서방으로 떠나면서 악단의 기량이 크게 떨어졌다. 특히 이 악단 특유의 컬러의 핵심인 관악기 단원들 대다수가 이적했기 때문에 소위 '''레닌그라드 필'''과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은 사실상 다른 악단이라 봐야한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소련 붕괴 전후로 악단의 사운드가 놀랄 정도로 크게 변했다.
러시아 관현악단 답게 직선적인 힘과 강렬한 음향으로도 유명했지만, 오랜동안 상임지휘자로 재임했던 므라빈스키의 영향으로 러시아 악단 치고는 상당한 세련됨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레닌그라드 필을 다른 소련 악단들과 차별화하고 당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대접받게 했던 것은 정교한 합주력이었다. 50년 동안 장기 재임한 므라빈스키 시대에는 굉장히 정제된 합주력과 통제력을 갖추고 있었고, 소련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 뿐 아니라 도이체 그라모폰 등 서방 음반사에서도 녹음을 해갔을 정도로 다크 호스 취급을 받았다.
물론 제정의 붕괴와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조지아의 인간백정이 단행한 대숙청 풍파 속에서 악단도 무사하지는 못했고, 이런 풍파가 닥칠 때마다 단원 몇 명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하는 일도 많았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공공연한 유대인 탄압 속에서 유대인 혈통의 단원들이 강제로 해임당하는 일도 있었다.
므라빈스키 재임기 동안 악단의 명성과 권위가 확고해지기는 했지만, 그의 죽음과 뒤이이은 소련 붕괴의 충격으로 인해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소련 붕괴 후에는 국립 관현악단 지위도 유명무실해져, 단원들의 봉급이 몇 달치씩 밀리는 등 망했어요 상태를 겪은 것은 정도가 좀 다를 뿐 다른 러시아 악단들과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우수한 단원들이 서유럽 오케스트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발생했고, 오케스트라의 실력도 구 소련 시절보다 저하되었다.
그나마 1990년대 후반 들어서 소련 붕괴로 인한 후유증이 어느 정도 진정되기 시작하자 여러 민간 기업이나 단체를 스폰서 삼아 재정난을 타개하면서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하는 중이다. 다만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극장 직속 악단인 키로프 관현악단의 위세가 꽤 높아진 상태라, 정상 탈환에는 좀 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모양이다.
상주 공연장은 창단 이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르모니야의 대강당을 사용하고 있다. 자매 악단 격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교향악단(Academic Symphony Orchestra of the St Petersburg Philharmonia)도 같은 공연장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식 명칭을 써 보면 두 악단이 좀 비슷비슷한 관계로 아카데미 교향악단의 공연이나 음반에 상트페테르부르크 필 연주라고 혼동해 써넣은 사례를 종종 볼 수 있으니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