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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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Joseph Vissarionovich Stalin
'''
<colbgcolor=#cd0000> '''본명'''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е Jughashvili
'''출생'''
1878년 12월 18일
[image] 러시아 제국 티플리스[1][2] 고리
'''사망'''
1953년 3월 5일 (향년 74세)
[image] 소련 [image]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주 쿤체보[3]
'''국적'''
[image] 러시아 제국 (1878~1917) [image] 러시아 공화국 (1917) [image] 소련 (1922~)
'''학력'''
트빌리시 신학교 중퇴
'''신체'''
168cm, A형
'''직업'''
정치인, 작가, 군인, 시인
'''정당'''

'''종교'''
조지아 정교회무종교 (무신론)
'''배우자'''
에카테리나 스바니제 (1906–07)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1919–32)
'''자녀'''
야코프 주가시빌리
바실리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서명'''
[image]
1. 개요
5. 가족사
5.1. 아내들
5.4. 고명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5.5. 사생아 설
6. 이름
7. 여담
7.1. 비합리적인 의심과 불안
8. 스탈린을 다룬 저서
8.1. 국내 정발된 저서
8.2. 국내 비정발 저서
11.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
12.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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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정치인, 군인, 혁명가이자 최고 권력자로 1920년대 중반부터 1953년 죽을 때까지 집권한 독재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소련 장관회의 주석, 소련군 대원수를 지냈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루지야에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기에 정교회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청년기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신학교를 자퇴하고 공산주의 혁명가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 휘하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참해 러시아 제국을 전복시키고 소련 건국에 일조했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해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정적 제거와 절대 권력 장악을 위해 대숙청을 벌여 수백만 명을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처형하거나 굴라크로 보냈다. 동시에 낙후된 농업국이라는 러시아 제국의 현실을 물려받은 소련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중화학공업 위주의 공업 국가로 전환시켰다.
1939년 세계에 전운이 감돌자 나치 독일불가침조약을 맺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대조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연합국에 가입,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대숙청으로 말미암은 소련 내부의 혼란을 비롯한 여러 문제로 초기엔 큰 피해를 입었지만, 2000만을 훌쩍 넘기는 인명 손실을 견뎌내며 끝끝내 승전하였고, 인민을 희생해 이룩한 공업화는 냉전시기 소련을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의 자리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숙청으로 70만 명 이상을 처형하고 공포 정치를 한 악행 때문에 사후에는 격하되어 '''소련의 공식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서방 세력이 아닌 스탈린의 후임인 니키타 흐루쇼프소련 공산당이 직접 내린 평가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세계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양면을 지닌 지도자'''로 손꼽힌다. 그는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초고속 공업화로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최대 위기이자, 유사 이래 최대의 침략을 격퇴하고 항복을 받아내어 소련인들을 역사상 비견할 예가 없는 승리로 이끌었고 2류 강대국이었던 소련초강대국으로 도약시킨 위업을 남겼지만 이 과정에서 무수한 인명 피해를 만든 책임이 있는 동시에 NKVD와 같은 권력 기구를 통하여 전 인민을 공포로 통치했고 대숙청을 자행하여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한 전제 권력자이기도 했다. 세계사의 수많은 국가원수들을 통틀어서도 이 정도로 극단적인 공과가 병존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4]

2. 생애




3. 평가




4. 당대 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5. 가족사


[image]
생애 문단이나 아내들, 자녀들 문단을 보면 알다시피 가정사가 불우했다.

5.1. 아내들


  • 첫번째 아내 에카테리나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სვიმონის ასული სვანიძე)
1885년 4월 2일 ~ 1907년 12월 5일 (22세)
스탈린이 조지아인이었던 시절에 혼인한 약혼자이다. 원래 몸이 허약했고 잦은 도피생활로 인한 영양실조로 결혼한지 2년 만에 티푸스에 걸려 병사했다. 이때 죽은 아내를 직접 묻었는데 같이 묻히겠다며 소동을 벌이자 친구들이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말렸다. 후일 이때를 회상하며 "나는 첫 아내를 묻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 또한 묻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스바니제와는 사이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 두번째 아내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1901년 9월 22일 ~ 1932년 11월 9일 (31세)
레닌의 비서로 레닌의 유언장을 대필했다. 스탈린의 숙청에 의한 우울증으로 자살한 건 아니고(대숙청은 1935년부터) 사람들 앞에서 스탈린이 알릴루예바를 비난해서 우발적으로 자살한 것이다. 이 때문에 스베틀라나가 나중에 아버지와 틀어지게 된다. 이때는 서기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소동을 벌였다고 하는데, 알릴루예바와도 그런대로 사이가 무난한 편이었던 것 같다.

5.2.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




5.3. 차남 바실리 스탈린




5.4. 고명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1926년 2월 28일 ~ 2011년 11월 22일)는 스탈린의 후처인 나데즈나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스탈린 생전에는 바실리 스탈린과 같이 스베틀라나 스탈리나(Светлана Сталина)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스탈린 사후에는 어머니의 본래 성씨를 따와서 알릴루예바(Аллилуева)로 바꿨다.
어린 시절에는 고명딸이라는 이유로 스탈린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랐고, 성장한 후 당연하게도 당시 소련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했다. 언어에 재능을 보여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가 매우 유창했고, 이를 통해 번역가 겸 교수로 일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좋았지만 첫사랑이었던 알렉세이 카플레르와 관련된 사건으로 틀어졌다. 알렉세이 카플레르는 스베틀라나보다 나이가 두 배 많은 유대인 작가로 서방 문물을 즐겨 보는 불온분자였고, 평소 유대인을 차별하던 스탈린에게 카플레르는 불순분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스탈린은 경호대장 블라시크를 통해 딸에게서 꺼지라 경고했지만 카플레르는 욕설을 퍼부으며 거절했다.
이에 스탈린은 카플레르를 스탈린그라드 전투 한복판으로 종군기자라는 직함을 붙여 보내버렸지만 살아돌아와서 다시 스베틀라나와 연애를 했다. 결국 스탈린은 카플레르를 굴라그로 보내버리고, 스베틀라나를 불러 카플레르가 영국 스파이라고 말하며 그동안의 도청기록을 보여주었다. 스베틀라나는 자신은 카플레르를 사랑한다며 울었고, 스탈린은 스베틀라나의 뺨을 후려갈기고 '지금은 전시인데 넌 너무 약해빠졌다'고 비난했다. 스베틀라나는 자서전에서 이때부터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후 스베틀라나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와 연애를 해서 스탈린의 눈밖에 났고 스탈린의 불만을 알아챈 베리야가 세르고에게 "스베틀라나는 너에게 감정이 없으니 접어라."라고 말해 관계가 끝났다. 그 뒤로도 스탈린이 탐탁찮아하던 야코프의 친구 그리고리 모로조프와 만나 결혼했다. 스탈린은 결혼에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사위를 자신의 별장에 초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얼마 안 가 스베틀라나는 모로조프와 이혼했고, 스탈린이 사후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자신의 성인 스탈리나(Сталина)를 어머니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의 성에서 따온 알릴루예바로 바꾸었다. 이후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 유리 즈다노프와 두번째로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고 얼마 안가 이혼했다.
이후 인도공산주의자와 동거하다가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5]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라는 글을 써 큰 돈을 벌고, 세번째 남편 윌리엄 피터스를 만나 '라나 피터스(Lana Peter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다.
1984년 두 명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다시 귀국해 소련 국적을 회복한 후,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 라고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그러나 2년도 못 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잠시 살다가, 말년에는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소도시 리치랜드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해 고립된 생활을 하다 2011년 11월,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1년 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내 인생을 망쳤다. 어딜 가든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언제까지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을 남겼다.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는 명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친오빠인 바실리 스탈린과는 사이가 나빴지만 나이 차가 큰 이복오빠인 야코프 주가시빌리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5.5. 사생아 설


스탈린은 유배지에서 사생아 여럿을 두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조선에서 태어난 손자 유리 다비도프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현재 노보쿠즈네츠 지역의 건설기술업자로 살고 있으며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베리아 쿠레이카 마을에서 혼외 정사로 자신의 아버지 알렉산드르가 태어났다. 이후 스탈린은 금방 떠났고, 증조모는 마을에 살던 '다비도프'란 성을 가진 남성에게 시집가 알렉산드르도 다비도프란 성으로 자랐다. 시간이 흘러 스탈린은 아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려 했으나 증조모가 반대했다."
그리고 1941년 자신의 아버지가 모스크바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후 일본군의 침공을 대비해 극동지방으로 부대가 이동하면서 "한반도 해방전투(만주 작전)"에 참가했고, 1948년 4월 22일에 조선에서 아들인 자신을 보았다는 것, 이후 1955년 노보쿠즈네츠크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프다 러시아신문의 보도.
또한 러시아 대중역사가 에드바르트 라진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두번째 아내 알릴루예바가 사망한 한 뒤로는 가정부였던 발렌티나 이스토미나와 사실혼 관계였고, 슬하에 두명의 사생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진스키는 학계에서 스탈린을 무근거 비판해 역풍을 맞은 볼코고노프조차 스탈린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회색분자라고 욕하는 극단적 반 스탈린주의자로 평가되며, 대중의 관심을 끌기위해 자신의 뇌피셜을 가미하는 행동으로 유명하니 일부 걸러 들어야 한다.

6. 이름


  • 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 영어: Iosif Vissarionovich Stalin
조지아어 초명은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이다.[6] 조지아어로 '제(ძე)'는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베사리오니스(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는 부칭(父稱)인 베사리온(ბესარიონი)에 관형격 조사가 붙은 형태이다.
조지아어 표기를 러시아어로 바꾸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가 된다. 이오시프의 두 아들인 야코프 주가시빌리바실리 스탈린의 본명 바실리 주가시빌리의 성이 주가시빌리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영미권에서는 '이오시프'의 영어 표기인 조지프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부르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 참고하자. 주로 영미권 제작 2차대전 관련 다큐멘터리 등지에서 이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가명으로 코바(კობა)가 있는데, 조지아 스테판츠민다 출신의 작가인 알레크산드레 카즈베기(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ყაზბეგი, 1848년 1월 23일 ~ 1893년 12월 22일)가 쓴 소설 <아버지 살인(მამის მკვლელი, 마미스 므크블렐리)>의 주인공 코바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일종의 로빈 후드 같은 인물이다. 스탈린의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은 숙청으로 처형 직전에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고 한다.[7][8] 이를 보아 주변인들은 그에게 애칭으로 자주 쓴 모양이다. 레닌이 다른 사람들에게 스탈린의 성을 물을 때 레닌은 그를 코바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랴보이'(Рябой, 마맛자국)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마맛자국이 있었기 때문. '가이오즈 니자라제(გაიოზ ნიჟარაძე, Gaioz Nizharadze)'라는 별칭도 조금 쓰였다.
또 여러 번 쓰인 가명인 베소와 베소시빌리라는 이름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동네 친구나 가족들은 그를 소소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여러 가명과 작가로서의 필명을 사용했다. 문필가로서 작품을 발표할 땐 소셀로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페트로프, 이바노비치, 갈리아시빌리, 세묜 즈벨라야, K. 카토, 곰보 오스카, 오시프 코바, 괴짜 오시프, 캅카스인, 우유장수, 곰보, 게자(절름발이), 쿤쿨라(비틀거리는 사람), 코바 신부 등 이것저것 많이 쓴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엔 그의 캅카스적 정체성을 대표해주는 코바의 사용 빈도가 늘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별명은 문서명과 같은 '''스탈린'''으로 스탈(Сталь)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하며 '스탈'린"은 '강철 사나이'(Man of Steel)라는 의미이다. 그 때문에 스탈린은 '''강철의 대원수'''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된다.
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스탈린 본인은 "동지들이 나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고 말했지만 바쿠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류드밀라 스탈이 지어준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스탈린의 평생 심복이었던 몰로토프는 "그건 그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수없이 많은 가명 중에서 본격적으로 '스탈린'의 사용빈도가 늘어나는 것은 스탈린을 당내에서 유명하게 만들어준 저작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에 필명으로 이 이름을 쓴 이후부터다.

7. 여담


  • 러시아 출신이 아니고 조지아 출신인데도 그는 평생 러시아의 내셔널리스트였다. 그가 젊은 시절에는 당 내에서 수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조지아 민족주의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의 반대 선상인 극우에 서있던 아돌프 히틀러 역시 독일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역사 속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9] 1913년에는 캅카스 민족들은 우월한 러시아 문화에 머리 숙이고 들어와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 후퇴하는 비겁자에게 자비는 없다는 최고 사령부 명령 제270호(1941년 8월.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와 악명높은 형벌 부대를 만든 국방 인민 위원회 명령 227호(1942년 7월 형벌 부대 창설명령) 등이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그의 피비린내나는 예술적(?) 사상이 돋보이는 대표적 작품이다. 붉은 군대 내 방첩부의 이름을 지을 적의 일화를 보면 그의 예술적 똘기가 잘 나타나는데, 그가 직접 제안하여, "스파이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 스메르찌 쉬피오남!)의 앞글자들을 따서 스메르쉬(СМЕРШ)로 지었다. 이것이 그냥 별명이 아니라 공식명칭이었다. 작명 방식 자체야 그다지 특이할 것은 없지만[10] 보통 저런 공식명칭에 저렇게 과격한 표현을 쓰는 일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의 똘끼(...)를 엿볼 수 있다. 한국어로 치면 기무사 공식명칭을 살첩사령부 내지 살간사령부(...)라고 지은 셈이다.
  • 혁명가 시절에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했지만 정작 집권 후에는 조용히 지냈다. 이는 스탈린의 성격상 본인의 권력이나 정통성에 흠이 갈만한 행동 모두 철저하게 스스로 통제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스탈린의 부하들, 특히나 정보기관 NKVD, KGB의 국장이였던 겐리흐 야고다,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 등은 하나같이 다 변태로 유명했다.
  • 사생활 면에서도 초강대국 소련의 독재자치고는 매우 담백하게 살았다. 물론, 애초에 대부분의 물건을 말 안해도 알아서 진상되며 일반 인민들에 비해서는 배 이상으로 풍족한 삶이였지만 유명한 반(反)스탈린 역사학자인 올레크 흘레브뉴크그 같은 이도 스탈린이 물질적 풍요와 사치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동의할 정도이다. 실제 소련 최고 권력자로서 막대한 양의 월급이 지급되었지만 대부분은 봉투도 안 뜯고, 그대로 서랍 같은 곳에 적당히 넣어뒀다.
  • 사소한 일까지 다 기억해 복수하기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은혜도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기억해가며 갚아주었다. 유배 시절 편의를 봐준 경찰관이나 탈출할 때 마차에 태워준 마부, 신학교 시절 불온 서적을 들켰을 때 자신의 것이라며 보호해준 친구 등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좋은 직장을 알선해주거나 금일봉을 내려 보답했다.
[image]

  • 1952년 전당대회 연설. 얄타 회담의 사진처럼 서방기자들이 찍은 일부를 제외하면, 스탈린의 사진이나 영상은 보정된 것이 대다수다. 위의 동영상은 가공 처리 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영상. 위 영상에서 턱을 괴는 등의 행동이 보이는데 이는 지루해서라기보다 동시통역 등으로 인해서 그냥 머리를 앞으로 내민 행동으로 추측된다. 뛰어난 연설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레프 트로츠키아돌프 히틀러[11] 등과는 반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은 원래 그루지야 출신으로 러시아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억양이 없고, 그냥 기계처럼 원고를 읽는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하는 것보다 내용을 중요시해서 실제 청중들의 관심을 많이 끈 편이었다고 한다.
  •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보내준 코카콜라를 마시고는 그 맛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후, 식품화학자 미트로판에게 를 원료로 해서 콜라를 능가하는 음료를 만들라고 명령했다.[12]이 때문에 콜라에 푹 빠진 게오르기 주코프는 직접 콜라를 밀수입해 들여와 마셔야 했다.
  • 말년에 러시아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해 인류의 모든 위대한 유산은 소련과 러시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 왜곡을 하려 들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점>이라는 책을 직접 저술해 '러시아 민족 언어'의 기원이 쿠르스크와 오룔 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 2차 대전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독소 불가침 조약, 독재 정치 등으로 인해 미국내에서 스탈린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여 소련이 미국과 함께 독일과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이 되자 미국은 스탈린에게 '조 아저씨(Uncle Joe)'라는 애칭을 붙여 대대적인 긍정적 선전을 했다 #.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스탈린에게 '미국에서는 당신을 이렇게 부른다'라고 알려주자 스탈린은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 스스로를 '강철의 사나이'라 자칭했지만 실제로는 고소공포증 환자여서 1943년 테헤란 회담 참석을 위해 비행기를 탄 것이 스탈린 인생 최초의 비행이었다고 한다. 얄타 회담도 얄타에서 하게 된 이유가 비행기를 타기 싫어서 그랬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으로, 실제로는 스탈린의 주치의가 '이 상태로는 멀리 못 간다'고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 워커홀릭으로 아주 세세한 일까지 본인이 다 처리해야 만족했다고 한다.[13] 그런데 주로 밤까지 일하고 새벽에 잠을 자고는 다음날 오전중에 늦게 일어나는 스탈린의 업무 스타일에 맞추느라고 장관부터 하급 공무원들까지 새벽에도 일을 해야했다. 문제는 다음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던 스탈린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평일 근무시간대에 일어나서 업무는 또 해야됐기에 잠도 못자고 근무를 계속 해야했고, 그 와중에 스탈린이 술 권하면 술도 마셔가며 일을 해야했기에 말년에는 다들 건강을 심하게 망쳣다. 게다가 스탈린은 조금이라도 아랫 사람들의 일 처리에 실수가 발견되면 바로 숙청해 버리고 새 인물을 들여서 말 그대로 부하들이 죽어나갔다.
  •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처럼 '유대인은 다 죽어야 한다' 정도는 아니었고, 당대 일반인 수준의 편견이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이 국가나 당이 아닌 유대 민족과 종교 그리고 이스라엘에 충성한다고 믿었다. 치매증상을 보이던 말년에는 유대인들이 자길 해치려 한다고 믿어 '유대인 의사 음모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소련이 세계최초로 유대인차별금지법을 만든 나라니 만큼 공개적으로 드러내진 않는 편이었다.
  • 총기를 다루는데에 서툴렀는지 실수로 사람을 죽일 뻔 한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참새를 쫓겠다며 총을 들고 설쳐대다 경호원 한 명이 맞았다는 얘기가(...) 게다가 또 한 번은 실수로 오발시켜 미코얀을 죽일 뻔 했으나, 간발의 차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런 처참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주변에 자신을 사격의 명수라고 자랑했다.
  •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라코시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한 번은 스탈린이 캅카스로 쉬러갔는데 라코시가 찾아와 스탈린의 측근들과 술을 마셨다. 이때 스탈린의 측근들은 스탈린과 술을 마시듯 라코시와도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과음을 했는데 이걸 본 라코시가 '이게 무슨 꼴이냐'며 그들을 비난한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베리야는 그대로 스탈린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고, 그 대가로 라코시는 그날 저녁 열린 스탈린과의 만찬에서 만취할 때까지 강제로 술을 마시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도망쳤다고(...)
  • 한 번은 페클라 코르슈노바라는 70세 노인이 스탈린에게 암소를 선물해 보내자 직접 답장을 써줬다.
>"어머님, 다정한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없어 소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완전히 국가에 고용된 사람이라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하지만, 고용된 사람은 농장이 없답니다. 어머님, 제 생각에는 제게 소를 선물하지 말고 계속 기르면서 저를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14]
  • 베를린 함락에선 취미가 나무 심는걸로 나오는데 사실이다. 그의 별장에는 24만㎡의 녹지가 있었고, 조경과 농사를 직접 감독했다. 감귤나무를 위한 온실을 설계하고 포도밭 설치를 감독했으며 직접 수박재배를 했고 연못에 물고기를 키웠다. 가끔 모스크바 상점에 직접 수박을 출하했다. 그 외에도 말, 염소, 병아리, 오리, 작은 양봉장도 키웠다. 물론 전부 다 직접한건 아니고 별장 관리인들에게 시키기도 했는데 관리책임자 P. V. 로즈가초프 중령에게 내린 수백가지 지시사항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 1950년 4월 7일: a) 5월 10일부터 모판에 수박과 멜론을 심을 것. b) 7월 중순에 수박과 멜론덩굴을 잘라줄 것.
> 4월 20일 :...주방에서 연못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전나무를 심을 것...주 건물 옆, 그리고 연못 옆 정자 쪽의 사과나무들 사이에 0.5미터 간격으로 옥수수를 심을 것. 이 곳에 콩도 심을 것...텃밭 가장자리에 가지, 옥수수, 토마토를 심을 것.[15]
  • 민족인민위원회 위원 시절 알고 지내던 캅카스 민족주의자를 숙청 대상자 명단에서 빼내 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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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후에 레닌과 마찬가지로 엠버밍 처리되어 훗날의 김정일 마냥 붉은 광장레닌 영묘에 합장되었으나,[16]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후에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 어떤 사람이 크레믈린에서 "꿈에 레닌이 찾아왔는데 스탈린 보고 방 빼랍니다."라고 연설을 하자 스탈린을 빼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결국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영묘 바로 뒤에 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다. 모욕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부 처리를 중단한 후, 바로 화장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바람에 스탈린의 시체가 많이 부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크렘린 벽 묘지도 국가에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상당한 영예인데,[17] 스탈린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그 악명 높은 20차 전당대회 연설에서조차 시도되지 않은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두고 '공적이라곤 없는 악랄한 차르'로 격하했다고 알려졌지만 해당 연설문을 보면 스탈린의 공적 역시 언급은 한다. 아직도 붉은 광장 한 켠에는 이 벽 묘지와 스탈린의 흉상이 남아 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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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의 동상은 러시아와 구 소련 지역 여기저기에 많이 남아 있다. 위 사진과 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벽 묘지에는 스탈린의 석상이 하나 남아있으며, 그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 시청 앞의 거대 동상은 철거되었으나 스탈린 박물관[19] 내에도 또 다른 스탈린의 동상이 있고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에도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도 스탈린의 벽 묘지 앞에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참배객들이 매일 찾아와서 꽃을 놓고 간다고 한다.
  • 6.25 전쟁은 스탈린이 지시한 것이라고 추정되어 왔지만, 흐루쇼프의 회고록이나 소련 붕괴 후에 열람할 수 있게 된 문서 등을 통하여 밝혀진 바로는 스탈린은 의외로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해 6.25 전쟁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고, 김일성이 무려 49번이나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에 대한 지원은 사실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스탈린이 승낙한건 옹진 반도에 대한 국지전이었지, 전면 남침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북한이 패망 직전의 상황에까지 몰렸는데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공군력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마지못해 소련 공군의 참전은 허락했다고 한다. 대신, 이 사실이 들통나지 않도록 '미그앨리'라고 부르는 북한의 북부 상공에서만 비행하도록 했고, 교신에 러시아어를 쓰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고 한다.[20]
  • 말년에는 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신병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개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레코드를 틀어놓고서는 정치국(폴리트뷰로)의 일원들을 춤추게 하였는데, 흐루쇼프, 말렌코프, 불가닌, 몰로토프, 주코프 같은 자들이 구두를 벗고 개 울음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흐루쇼프는 춤을 아주 못 추어서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몰로토프는 상당한 춤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춤판에 딸 스베틀라나를 데려와 실신할 때까지 춤을 추게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냉전시대의 선전이 아니라 드미트리 볼코고노프[21]의 책에 실린 내용이다. 높으신 어른들이 이런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남녀노소 술퍼먹고 미친듯이 춤추는 건 러시아의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다. [22] 서비스의 서술에는, 죽기 전날의 파티에서 스베틀라나에게 춤을 추자고 했지만 스베틀라나가 싫다고 하자 스베틀라나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 다음에 머릿채를 잡고 파티장에서 마구 끌고다녔다고 한다.(...) 주변에선 스베틀라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면서도 감히 스탈린을 말리진 못했다고. 그런데 해당 일화의 원전인 흐루쇼프 회고록에는 이것도 나름대로 스탈린의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 볼코고노프의 책에 실린 또다른 회고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친지, 심복들과 같이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서는 웃으면서 같이 보면서 웃던 사람들의 유배문서에(...) 서명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국 회의 도중에 갑자기 한 명을 지목하여 '당신은 스탈린 동무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나?' 등의 얼토당토 않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23]
하지만 저 내용이 신뢰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실제로 볼코고노프의 책은 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 익히 알려졌다시피 독소전쟁 당시 이 사람은 전술적인 면에서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공적을 인정 받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사실 군사적으로는 실책이 많았지만 전시 지도자로써는 제법 뛰어난 면모가 있었고, 이 사람의 공업화 정책 덕분에 기갑웨이브를 선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24] 아주 근거없는 서훈은 아니긴 하다. 후임자가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승리한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이 유명하긴 하지만 저건 너무 지나친 평가절하라는 것이 현재의 주류 의견이다.
  • 그가 죽은 후 그의 블리즈냐야 별장의 서랍에서 신문지로 싸여져 있는 3장의 편지가 나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
>스탈린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낸다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것입니다. 나는 두번째는 보낼 필요가 없을 겁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2.
>
>코바, 왜 당신한테 내 죽음이 필요하지?
>-니콜라이 부하린
>3.
>
>스탈린 동지에게
>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당신은 내 아내에게 전화하여 욕설을 하는 무례를 범했소. 비록 아내가 그 일을 잊자는 당신의 말에 동의했을지라도, 이 사실은 그녀에 의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 알려졌소. 나는 내게 적대적인 행위를 그렇게 쉽게 잊을 생각이 없는데, 아내에게 적대적인 행위는 내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러므로 동지에게 청하건대, 동지가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를 끝내는 것을 선택하든가를 저울질해보기 바라오.
>
>경의를 표하며, 블라디미르 레닌.
각각에 대해 로버트 서비스는 티토의 편지에 대해 깡패가 다른 깡패에게 편지를 보냈고 스탈린에게 대든 유일한 깡패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간직했을 것이라 했으며, 부하린의 편지에 대해서는 부하린을 죽이면서 떨리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평하면서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 표현이라는 설을 거부했다. 마지막 레닌의 편지에 대해서는 그의 마음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키고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보관했을 것이라 평했다.
이에 대해 보통 티토와 레닌의 편지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비스의 평에 동의하지만, 부하린의 경우에는 스탈린이 부하린의 유언만 보관한 것이 아니라 굳이 보관할 이유가 없었던 회고록도 같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서비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25]. 부하린을 숙청했을 당시의 만족감을 되새기는 용도로는 유언장 하나로 충분하며,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자기에게 자기 손에 숙청 당한 정적의 회고록을 멀쩡하게 보관해주지는 않는다. 아무튼 이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 스탈린의 아내와 성관계에 대한 여러 소문이 있다. 아내에게 비서랑 같이 3P를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든가[26], 두번째 아내인 나데즈다가 사실은 스탈린의 친딸이라든가[27], 사실 나데즈다는 스탈린을 비판하다 분노한 스탈린에게 살해당했다든가 사실 스탈린은 페도필리아라든가 등 여러 소문이 있으나 신빙성은 낮다.[3P][친딸][살해][페도필리아]
  • 정치인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시인으로 유명했고, 교과서에 시가 실린 적도 있었다. 집권 후에도 여러 시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시적인 능력은 강철의 대원수인 것과 상관없이 매우 뛰어났다고 하며 시인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이라는 평도 있을 정도. 보통 시라는 것이 풍부한 감성을 요구하는 예술 분야라는 걸 생각한다면 묘한 부분.
  • 첫번째 아내 예카테리나의 장례식 때 몰래 잠입한 정보부 요원을 눈치채고 도주한 적이 있다.
  • 제임스 메이더 그랜드 투어 촬영 때 실수로 스탈린 생가의 캐비닛을 부순 적이 있다.[28]

7.1. 비합리적인 의심과 불안


굉장히 심약해서 잔걱정과 겁이 많은 성격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에도 불안을 버리지 못해 대숙청을 감행하였다. 특히 군을 믿지 못해 장교를 왕창 죽였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같은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군을 믿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형성된 붉은 군대, 소련군은 매우 정치화되어있던 군대였고 국가대사에 사사건건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군을 정치의 수단으로써 생각했던 스탈린 입장에서는 미리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맞았던 것.[29]
한편으론 매우 사무적이고 꼼꼼하여 수많은 서류를 자신이 직접 보고 결재하고 계산해 가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런 과도한 업무에다가 자신이 신경 안써도 될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독소전쟁 시절에는 직업군인들이 짠 작전의 세부적인 면에까지 간섭하다가 몇 번 크게 말아먹었고, 그 다음부터 작전에 그다지 간섭을 안 했었던만큼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못한 히틀러는 결국... 참고로 동양에도 이런 특성을 가진 독재자가 존재하니 바로 진시황. 절대 권력을 가진 일벌레였다는 점과 의심이 많았다는 점, 의외로 겁쟁이였다는 점조차 유사하다.
한편, 정작 자신은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11시쯤 늦게 일어났는데 주위 당 간부들과 군 장교들은 스탈린이 그러고 나서도 아침 일찍 업무시간을 엄수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도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술까지 폭음을 했기에, 주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로에 수면부족에 숙취까지(…) 3중고로 시달려 결국 병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 통제 하의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의 생활리듬에 맞춰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생활리듬을 모두 바꿔야 했고, 언제 스탈린이 전화를 때릴지 몰라 늘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머리는 상당히 명석한 편으로 판단력이나 이해력은 서방의 관찰자들, 심지어 윈스턴 처칠도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는데, 문제는 '''잊어버려야 할 사소한 원한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기억했다가''', 후에 모조리 배로 갚는다는 점. 아주 기억하기도 힘든 작은 노여움 때문에 후에 숙청당한 이도 많았다. 반대로 작은 은혜도 기억해뒀다 갚았는데 스탈린이 유배 생활 도중에 즐겁게 지내고 동지들과 연락하는 걸 방조해주었다는 이유로 부농으로 몰린 유형지 간수 하나를 그냥 풀어준 경우도 있었고, 또 어릴 적 신학교에 다니다 불온서적을 걸렸을 때 자기꺼라고 하면서 감싸줬던 급우나 시베리아에서 탈출할 때 잠깐 태워준 마부도 기억해뒀다 보답했다고 한다. 막심 리트비노프는 런던에서 스탈린이 항구 노동자들에게 두들겨맞던 걸 구해준 것 때문인지 말년까지 험한 꼴을 안 당했는데 리트비노프는 아무래도 자신이 스탈린을 구해줬던 것 때문같다고 농담하곤 했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도 무명 시절의 스탈린과 친해졌다가 덕 본 케이스.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연해주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 일본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끌려가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물론 그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고통은 엄청났다고 전해진다. 그 예시 중 하나로, 고려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항상 그 당시를 이야기 하는데 영하 -10도인 상황에 몸만 던지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고 한다.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가서 극장 간수로 취업하여 그곳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고 한다.
또한 1941년 독소전 발발을 틈타 캅카스의 무슬림 체첸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자 1944년 봄, 체첸인들을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인근의 잉구시인과 함께 '''몽땅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당시 체첸인의 10%가 강제이주 당시 사망했다. 이들은 흐루쇼프 시기가 되어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캅카스인이나 고려인만이 타깃은 아니었고,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도 스탈린에게 밉보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실제로 독소전쟁 시기에 소련 치하의 동유럽 국가들, 캅카스나 아시아 출신 러시아 포로들을 이용해서 독일군은 후방 관리를 맡겼고 파르티잔들을 때려잡거나 포로 감시소 경비로 쓰기도 했다. 다만 이는 스탈린의 소수민족 정책에 의한 것으로, 이전부터 소수민족에 대해서 강력한 탄압을 일삼고 러시아 중심주의로 동화정책을 강요했으며 중공업화로 지방, 특히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농촌지역이 큰 피해를 보았기 떄문이다. 사실상 본인이 소수민족들의 반발을 만들어놓고, 반발이 터지니깐 그걸 빌미로 해서 강제이주까지 시킨 셈.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숙청을 단행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자기 주치의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주치의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관계로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90년대에 구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자료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그 베리야도 흐루쇼프에 의해 축출, 이 외에도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가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한다.
말년에는 의심이 너무 심해져서 심지어는 자신의 충복이었던 베리야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 게다가 필생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의 망령이 씌웠는지, 갑자기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953년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 사건이 계속 벌어났고,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는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소련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 이는 대숙청 당시와 비슷한 패턴이라 소련 인민들은 모두 긴장했으나, 본격적인 숙청이 이뤄지기 전에 스탈린이 사망하므로서 흐지부지되었다. 스탈린 사후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조작이라며 혐의자를 모두 KGB에서 풀어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숙청 실무진인 베리야였다.

8. 스탈린을 다룬 저서



8.1. 국내 정발된 저서


  • 스탈린 선집
    • 현재 절판.
  •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가 내놓은 <나의 아버지 스탈린>
    • 1993년 들어와 2018년 기준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
  • 트로츠키 평전을 저술한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 평전.
    • 과거 한국에 들어왔으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러시아 반공 역사학자이자 소련 장성 출신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의 스탈린 평전과 <크렘린의 수령들>
    • 그러나 스탈린 평전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2차 대전 이전 얘기가 죄다 잘려버렸고, 또 볼코고노프 장군 자체가 친 옐친, 반 소련 사관을 중심으로 매우 편향적인 내용으로 저술했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2017년 기준으로 스탈린 평전과 크렘린의 수령 모두 절판 상태.[30]
  • 영국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
    • 맨 처음에는 강철 권력이란 부제를 달았고, 이후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이란 새 부제를 달고 새로 나왔다. 볼코고노프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서술이 대부분이지만, 올레크 흘레브뉴크가 쓴 스탈린 평전에 비하면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현재는 절판되었다.
  •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 - 히틀러 vs 스탈린, 권력작동의 비밀>
    • 절판되었다.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르의 젊은 스탈린
    • 말 그대로 스탈린이 젊은 혁명가 시절을 다룬 전기.
  • 2017년 러시아 연방 국립문서보관소 선임연구원겸 러시아 국립고등경제대학 소속 올레크 흘레브뉴크가 집필한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 삼인 출판사에서 정발했다. 90년대 이후 해금된 기밀문서들을 중심으로 스탈린 시절을 다루는 권위자로 손꼬버는 러시아의 "올레그 흘레브뉴크"가 집필한 저서. 한국의 소련사 권위자이자 "리처드 오버리"의 저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번역으로 유명한 류한수 교수가 감수했다. 하지만 노경덕 박사의 지적대로 학계에 누적된 스탈린의 통치에 대한 다각도 분석을 무시하고, 과거의 전체주의 프레임을 가져와 러시아에 불고있는 스탈린 신화를 부수기 위해서만 노력하였기에[31] 자료의 누락이나 억측이 많이 섞였단 비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까지 가장 읽어볼만한 스탈린 평전이라는 호평이 있다.

8.2. 국내 비정발 저서


  • 로이 메드베데프는 여러 저작물.
  • 에드바르트 라진스키의 스탈린 정신병자설에 관한 저작물.
    • 대중 역사관을 모아다 만든 것으로 학술적 가치는 없다고 평가 받는다.
  • 2014년 프린스턴 대학의 스티븐 코트킨 교수가 내놓은 총 3부작으로 예정된 스탈린 평전.
    • 그러나 출간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 제임스 해리스 교수의 거대한 우랄 산맥, 스탈린의 철도 시리즈 등
    • 스탈린 시대의 철도와 중공업에 대해 다뤘다.
  • 아치 게티의 대숙청과 대기근에 대한 2세대 수정주의적 연구를 담은 저서들.
    • 현 나무위키의 대숙청 문서는 아치와 로베르타 매닝이 공저한 저술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9. 매체에서




10. 스탈린주의




11.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


대부분은 스탈린이 격하되고서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개명된다.

12. 어록


이중에는 실제 스탈린이 했는지 의심스러운 말들이 몇몇 있으니 유념하고 보길 바람.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당의 결정을 따르는 일꾼일 뿐이죠."

ㅡ 1931년 영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군은 공격부대다. 붉은 군대는 현대군이다!"


"히틀러라는 친구 굉장해! '''정적은 그렇게 다뤄야 해!!'''"

ㅡ 1934년 장검의 밤 소식을 듣고[출처1]


"지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인민들은 남습니다. '''오직 인민만이 영원합니다.'''"

ㅡ 1937년 대숙청 중 연설


"현명한 자는 보는 걸 믿고 겁쟁이는 믿는 걸 본다."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정직한 외교관은 나무로 만든 철이나 마른 물과 같다."[출처2]


"어떤 나라의 외무장관이 평화 협정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그 시간에 본국에서는 최신 군함과 전투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출처3]


"감사하는 마음나 앓는 질병이다."[출처4]

또는 "예의배려나 앓는 질병이다." 라고도 전해진다. 정작 스탈린은 사소한 악감정부터 시작해 별에별 시시콜콜한 호의도 잊지 않고 모두 갚아주고,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의 적들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해버리면 된다."[출처5]


"가장 큰 기쁨은 적을 골라 세심하게 한 방 먹일 준비를 하고 무자비한 복수의 갈증을 충족시킨 뒤 집에 가서 자는 거야."[출처6]

트로츠키는 이 말을 카메네프가 스탈린, 펠릭스 제르진스키와의 대화 내용을 말해준 것을 회상한 것이라고 했다.

"교황이라! 그런데 교황은 몇 개 사단이나 갖고 있답니까?"

1935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라발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회담하다 "소련에서 종교 탄압이 줄면 저희가 교황과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스탈린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출처들] 이 말의 출처는 윈스턴 처칠인데, 처칠은 라발이 뭐라 답했는진 모르지만 열병식에 보이지 않는 종류의 군단(legion)이 있다고 답했을 것이라 추측해 적었다. 이는 극단적인 관념론적 존재인 교황과 반대하는 극단적 유물론자인 공산주의적 반종교주의자의 관점을 한 마디로 보여준다.

"내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결국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낼 것이다."[출처7]

몰로토프와 대화를 나누다 나온 말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스탈린 사후 그의 평가는 진짜 저 말대로 되었다(...)[32][33].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출처8]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지방장관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 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 1931년 2월 5일 산업 관리와 경영자 협의회에서 한 연설[출처]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1941년 7월 3일, 라디오 연설에서.


"붉은 군대에서는 전진할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 당시 미국 대사 Averell Harriman과의 대화 중.[출처9]

독소전 초기 탈영병들의 가족을 연좌제로 처벌할 것을 결정한 뒤에 나눈 말.

"교육은 누구의 손아귀에 쥐어졌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결정되는 무기다."

- 1937년 9월, 허버트 조지 웰스인터뷰에서.


"신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며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다."

-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에게.[34]


"양은 양만의 질이 있다."


"열린 마음은 문지기 없는 요새와 같다."


"인간에겐 막역한 사이란 없다. '''막연한 사이'''만 있을 뿐이다."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된다."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처칠이 스탈린에게 부하 통솔 방법을 묻자 한 대답.

"결국 죽음이란 나쁜 것을 잃는 거다."


"공포 앞에 논쟁이란 없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은 단지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혁명은 적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흘린 피에 익사하는 길을 택하겠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인민은 낙엽과 같다. 하나씩 밟을 때는 바스락거리지만 한데 긁어모아 불을 붙이면 매우 잘 탄다."

소수의 인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별 것 아니지만 다수의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막을 수 없다는 말이라는 해석도 있고, 인민들을 적당히 탄압하면 저항하지만 본보기로 다수를 모아 처리하면 겁 먹어 찍소리도 못한다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스탈린이 두 가지 을 모두 경험했던 인물인만큼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도 말이 되기 때문에 이래저래 애매하다.

"사단을 시장에서 판다면 사주겠지만 '''시장에서는 사단을 팔지 않는다.''' 증원은 불가능하다."

1942년 5월,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도중 포위섬멸 위기에 처한 티모셴코 원수의 증원 요청에 대한 답신. 여담으로 소련군이 섣부르게 시작한 공세는 독일군의 역습을 받아 대참사로 끝났다. 마침 코카서스를 향한 하계 공세를 계획하던 독일군은 전투 종료 1달 만에 청색 작전을 발동했다. 티모셴코는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된다 . 사실 스탈린의 책임이 워낙 컸던 패배다 보니 면피성 인사 조치이긴 하지만(...) 이를 계기로 스탈린이 군부의 구체적인 작전 수행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

이는 현대전에서 포병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문구로 그냥 한 말이 아니라 포병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도 가지고 있었다. 인력은 아껴도 포탄은 아끼지 말라거나, 공세에는 반드시 포를 동원하라거나 하는 발언을 전략회의에서 했다. (...)

"석유 없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장차 다가올 전쟁에서는, 석유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 1927년 12월 3일 연설에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 1935년 5월 4일 붉은 군대 사관학교 졸업식 연설.

간부가 제일 중요하다는게 아니라 간부 집단의 질적 향상이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 한다는 뜻.

"넌 스탈린도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냐!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출처11]

둘째 아들 바실리 스탈린이 자신의 성을 쓰자 이렇게 일갈했다.

"이제, 우리는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 그리고 누가 공산주의자인 척 말하고만 있는지 보게 될 것이오. (중략)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권력을 얻었으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권력을 행사하는 능력은 부족하오."

- 1928년 시베리아의 바르나울에서, 대대적인 농업 집단화를 시행하기 전에.


"동지 여러분, 삶이 좋아졌습니다. 삶이 더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즐거울 때 일도 좋습니다. 우리의 삶이 나쁘고, 보기 흉하고, 불행했다면 스타하노프 운동이 있었겠습니까?."

-1935년 스타하노프 노동자 회의에서.


"포화속에 수천킬로를 달린 병사들에게 그런 즐거움(강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까?"

-구 유고슬라비아를 탈환하며 주둔해 있던 소련군이 현지 여성들에 대해 강간범죄를 저지른 것에대해 항의 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 '밀로반 질라스'에게 한 말.[35]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는 언제나 존경받는다. 핀란드군의 강인함에 경의를 표한다."

-1951년에 했다고 전해지는말.[36]


"왜 전차에다 백화점을 차리려고 하나!"

-1938년 5월 4일 신형 다포탑 전차의 목업모델을 보고 포탑 한개를 부러뜨리며 한 말.[출처12]

백화점은 지금도 그렇듯, 그 당시에도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통했다. 스탈린이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만하다. 스탈린은 다포탑 전차인 T-28이나 T-35를 매우 싫어했다. 그리고 그러한 다포탑 전차들이 실전에서 완벽한 실패작으로 판명된 걸 보면 비록 스탈린이 전술, 전략적으로 문제가 많았지만 무기를 보는 눈 하나는 있던 모양이다. 한편 이 말 때문에 밀덕들은 어떤 무기에 뭔가를 덕지덕지 붙여놓는 걸 '''"백화점을 차린다"''' 고 표현하곤 한다.

제국주의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자본주의에서 시작되었다. 파시즘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역시 자본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란 한 줌의 자본가들을 물리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 당시 소련의 경제 체제는 일부 트로츠키 계열 좌파 학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국가 자본주의이며 스탈린주의는 제국주의, 전체주의의 성향을 어느정도 겸하고 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한 명이 죽으면 비극이지만, 백만명이 죽으면 통계일 뿐이다.

-1947년 워싱턴 포스트 보도 내용.출처


[1]조지아 트빌리시[2] губе́рния. 러시아 제국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당국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하위 행정구역인 주(область), 구(о́круг), 군(райо́н) 등으로 대체되어 사라졌다. 엄밀히 따지면 최상위 행정구역인 губе́рния는 '주(州)'로 번역하는 것이 옳으나 보통은 область를 '주(州)'로 번역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현(縣)'으로 번역한다.[3] 1960년 모스크바 연방시에 편입되어 현재는 모스크바 연방시의 일부이다.[4] 다만 러시아 역사에서 부국강병에 큰 역할을 한 이반 4세표트르 대제도 뛰어난 업적을 세우기는 했지만 동시에 잔혹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스탈린과 비슷한 면이 있으니 러시아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것은 아니기는 하다.[5]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스베틀라나의 망명으로 스탈린과 가족의 명예와 영향력이 실추되길 바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스탈린 격하를 하던 흐루쇼프와 달리 당내 보수파인 브레즈네프는 어느 정도 스탈린을 대우해준 편이었다.[6] <크렘린의 수령들>에 따르면 레닌은 1915년 지노비에프에게 보낸 자신의 서한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코바의 성을 기억하시는지요?" 지노비에프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레닌은 그에 대해 재차 카르핀스키에게 묻고 있다. "부탁이 있습니다. 스티프코나 미하에게 코바의 성을 알아 봐 주십시오. 우리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시프 드주…뭐라고 했는데…"[7] 스탈린은 이 편지를 죽을 때까지 자기 책상 서랍 안에 보관하고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다.[8] 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메드베데프 알렉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 참고로 부하린은 러시아 혁명에 동참한 혁명 영웅 중 하나다. 레닌과 설전을 벌일 정도로 수준 높은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의 유언장에 언급되는 차기 국가원수 후보자이기도 했다. 대숙청 말기에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이후 1988년 복권됐다.[9] 단, 아예 계통이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 출신인 스탈린과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언어·민족이 같은 나라이므로 히틀러도 분명히 독일 민족이며 독일인 우월론을 펼치는 데 명분적인 문제는 없었다. 물론 금발벽안의 순혈 아리아인은 아니었지만 사실 독일인 중에서도 금발벽안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다. 그러나, 히틀러 바로 전 세대에 독일 제2제국이 오스트리아 제국을 전쟁을 통해 배제하면서 탄생했기 때문에 거리감이 있어서, 21세기 기준으로 한 민족이라고 퉁치기에는 어폐가 있다.[10] 한국도 이같은 방법으로 부서이름을 작성한다. 기무사의 전 이름이었던 방첩부의 이름도 방어할 방 과 첩자 첩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11] 엄밀히 말해서 히틀러의 경우, 연설 자체의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제스처, 말의 톤과 투, 특히나 무대설정이라는 연설 내용 외적인 요소를 이용해 청중들의 감정적 자극을 이끄는데 능숙했다. 요즘 언어로 청중들이 원하는 "사이다"적 발언과 메세지 내용을 전달하는 능력 및 개인의 카리스마로 청중들을 선동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따라서 히틀러의 연설들은 이러한 연설 내용 외의 요소들을 배제한 상태로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고 오히려 말이 산만한 경우가 많다. 파시즘 진영에서 순수한 의미로 연설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들을 꼽으라면 히틀러보다는 베니토 무솔리니괴벨스를 들 수 있다.[12] 바이칼이라는 음료수이다, 다만 1960년대에 진짜배기 콜라(물론 코카콜라는 아니고 펩시콜라지만)가 소련에도 들어오면서 콜라에 밀려서 현재는 그냥 토종 탄산음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13] 심지어 별장의 농작물 관리하는 것까지 수첩에 다 적어놨다.[14] 실제 스탈린은 농장이 있었다. 정확히는 다차에 달린 조그마한 텃밭이었고, 실제로 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15]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32쪽, 올렉 V. 흘레브뉴크, 유나영 역, 삼인, 2017[16] 이 때 묘의 이름도 레닌 스탈린 영묘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다시 레닌 영묘라는 이름을 되찾았다.[17] 스탈린 외에도 막심 고리키, 유리 가가린, 게오르기 주코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 소련의 쟁쟁한 위인들이 다수 묻혀 있다.[18] 흉상은 브레즈네프 정권에서 1970년에 세웠다.[19] 스탈린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20] 문제는 전투중 급박한 상황에서 이들이 무전기 너머로 내뱉는 러시아어가 UN군 측에도 감지 되었고, 공중전중에 전투기 콕핏안의 탑승자가 보일 정도로 접근했던 몇몇 미군 조종사들이 러시아인인것 같다고 증언하여 미국 역시 소련 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알게 된다. 그러나 미국 역시 소련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원하지 않았기에 비밀로 처리하고 일부러 모른척했다.[21] 1928-1995. 정치장교이자 구소련 심리전부서의 책임자였으며 장성까지 승진했던 인물로, 후일에는 역사가로서 맹활약하였다. 만나본 사람의 평가에 의하면 꽤나 공산주의 사회의 고위층답지 않게 자유롭고 유연한 사상을 가졌다고 하며 나중엔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근데 이사람은 아버지가 대숙청 때 숙청되었기 때문에 원래 공산주의를 좋게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원래 공산권은 북한을 빼고 연좌제가 없고 아주 중요한 고위직의 경우에나 예외적으로 이용되었다.[22]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왕이 이러기도 했다(...). 차이점이라면 꽐라가 되는게 목표라서 왕과 주변 인물들은 춤은 커녕 몸겨누기도 힘들어 했다랄까.[23] 레드얼럿 1편의 소비에트 미션9 오프닝 컷신에서 이게 패러디되었다. 그라덴코 장군과 함께 보드카를 들이키며 화기애애하게 유배문서에 서명했지만 다음미션에서 쿠코프와 정부인 나디아에게 독살당했다.[24] 독소전쟁 초반의 행적 때문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일반적으로 그때만을 제외하면 스탈린의 전쟁수행 지도는 모범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는 서구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리처드 오버리著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군사적인 면은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인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민간부분에서 독재권력을 이용하여 모든 국력을 전쟁에 효율적으로 투사하도록 지도했는데, 군사작전에 개입하여 말아먹거나 혹은 행정을 팽개친 채 괴링이나 힘러 등의 중간보스들의 전횡을 방치하여 국력을 낭비한 히틀러와 비교하면 스탈린의 성과는 분명하다.[25] 로버트 서비스가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 때문이라는 평가를 거부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스탈린이 이 편지를 굳이 간직한 이유는 부하린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26] 퇴짜를 맞자 비서를 하나 더 불러서 했다는 말도 있다.[27] 나데즈다의 친모가 사실 스탈린의 연인이었고, 후에 이 사실을 안 나데즈다는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다는 것.[3P] 관련된 기록 자체가 없다.[친딸] 스탈린과 나데즈다 친부모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나데즈다는 3살이었다.[살해] 나데즈다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에 스탈린과 성격차도 심해 스트레스가 쌓이다 우발적으로 그랬다는게 정설이다.[페도필리아] 실제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가 죽기 얼마 전부터 소년 소녀의 사진을 모았다는 증언을 해서 일부 신빙성이 있다.[28] 부순 다음에 제임스는 자신이 굴라그에 갈 거라고 한탄했다.[29] 이 생각 자체는 독재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이긴 하다. 당장 군부가 폭주할대로 폭주해버린 일본 제국의 말로를 생각해보면... 사실 군부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문민통제가 철저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용납되진 않는다. 문제는 스탈린의 일 처리 방식이 애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큰 피해를 줬다는 점.[30] 스탈린 평전은 riss에서 서비스하고 있어서 정 읽고 싶다면 볼 수는 있다.[31] 스탈린의 공업화 과정의 폐해를 비판하며 2차대전 당시의 스탈린의 행보에 대해서도 비판한다.[출처1]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출처2]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출처3]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출처4] The Memoirs of former Stalin's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출처5] The Political Report of the Central Committee, The Fifteenth Congress of the C.P.S.U.(B.) (7 December 1927)[출처6] 1923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잡담 중. Trotsky's Diary in Exile, 1935, p. 64.[출처들] 1차 출처, 2차 출처 Churchill, Sir Winston. The Gathering Storm : The Second World War Vol.1. Houghton Mifflin, 1948(Houghton Mifflin Harcourt, 1986). p.121.[출처7] 출처: Felix Chuev's 140 Conversations with Molotov Moscow, 1991.[32] 후임자가 주도적으로 격하해서 소련 붕괴까지 소련흑역사로 남아있었으나, 세월이 흐른 현재의 러시아 연방에서는 그가 이끌었던 국가적 승리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해졌다.[33] 하지만 러시아 밖에서의 평가는 매우 나빠 히틀러와 모택동 급이다.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엄청난 범죄로 인해 대부분의 쓰레기를 치우지 못했다.[출처8] Said in 1923, as quoted in The Memoirs of Stalin's Former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출처] 스탈린 강철권력 p.478~79[출처9] Truth about the Great Patriotic war by B. Sokolov (in Russian)[34] 출처10 Fallen Eagle: The Last Days of the Third Reich (1995) by Robin Cross, p. 21[출처11] 젊은 스탈린, 496p[35] 당시 소련군에 의한 강간 사건은 동부 유럽 140만건, 베를린 60만건이나 된다. # 심지어 여성 소련군이 젊은남성 독일군을 강간한 일도 많았다. #[36] 출처: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출처12] Zaloga 2015: 94 Zaloga, Steven(2015),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