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카스 전투
[image]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9월 11일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 영국 원정군이 생 카스 상륙 작전 도중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받아 대패한 전투. 프랑스를 후방에서 교란시켜 동맹국인 프로이센이 받는 압박을 덜어주기 위한 상륙작전이었으나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2. 배경
1758년 8월 초, 영국 정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협공당하고 있는 프로이센의 압박감을 덜어주고 프랑스의 후방을 공략해 오랜 숙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 위해 대규모 상륙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토마스 블라이 중장 휘하의 영국 육군과 대규모 함대가 출진해 노르망디와 브리타뉴 해안을 급습했다. 이후 영국군은 셰르부르를 공략하고 프랑스 항구들을 파괴하고 선박들을 불태운 뒤 9월 초에 생말로를 향해 나아가 9월 4일에서 9월 5일까지 생말로 해안에 상륙했다. 영국군은 곧 생말로 요새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날씨가 심하게 악화되자 할 수 없이 생말로에서 철수해야 했다. 해군 제2함대 사령관 하우 백작은 블라이 중장에게 생말로에서 서쪽으로 몇 km 떨어진 생 카스에서 제1함대와 합류할 것을 지시했고, 블라이 중장은 이에 따라 9월 7일 생 카스로 출발했다.
그러던 9월 10일, 블라이 중장은 500명의 프랑스 척후병들과 맞붙어 손쉽게 격퇴했다. 그런 후 그는 마티뇽에 진을 치고 정찰병들에게 생 카스 해변을 정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콜드스트림 근위 보병대대가 생 카스 마을 우편의 풍차 인근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프랑스군은 생 카스 근처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고, 영국군은 공구가 부족하여 적의 예상되는 역습에 대항할 만한 방어 시설을 충분히 만들 수 없었다. 일부 장교들은 생 카스와 생 길도 사이에 위치한 다른 해변에서 함대와 합류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리고 9월 11일, 리슐리외 공작 에마뉘엘-아르망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생 카스 해변에 주둔한 영국군을 급습하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육군 사령관: 토머스 블라이 중장
- 해군 제1함대 사령관: 베어 남작 조지 앤슨
- 해군 제2함대 사령관: 하우 백작 리처드 하우
- 병력
- 육군: 4개 보병 여단, 대포 60문, 경기병 수백명, 보병 10,000명
- 제1함대: 전열함 22척, 프리깃 9척, 15,500명
- 제2함대: 전열함 4척, 프리깃 10척, 슬루프 5척, 포함 2척, 투폭함 2척, 수송선 100척, 보급선 10척, 전투 선원 6,000명, 해병대 6,000명, 상선 선원 5,000명
- 제1함대: 전열함 22척, 프리깃 9척, 15,500명
- 제2함대: 전열함 4척, 프리깃 10척, 슬루프 5척, 포함 2척, 투폭함 2척, 수송선 100척, 보급선 10척, 전투 선원 6,000명, 해병대 6,000명, 상선 선원 5,000명
3.2. 프랑스군
- 사령관: 리슐리외 공작 에마뉘엘-아르망
- 병력: 약 7,000명
4. 전투 경과
9월 11일 새벽 2시경, 영국군 군악대들이 평소와 다름 없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 주변에 있던 프랑스군에게 적이 출발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후 영국군은 생 카스까지 5km를 단일 행렬로 진군했으나 워낙 어두웠던 데다 지리를 잘 몰랐던 터라 진군 속도가 매우 느렸다. 새벽 4시, 프랑스군은 생 카스의 고지에 모였다. 리슐리외 공작은 그의 군대를 4개 부대로 편성한 뒤 이 중 세 부대에게 생 카스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새벽 6시, 프랑스군은 해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전 9시경 영국군이 생 카스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자 근처 덤불에 몸을 숨겼다.
오전 9시경, 영국군은 마침내 생 카스 해변에 도착했다. 이에 영국 해군 소속 프리깃 5척과 박격포함 3척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이 배들은 너무 오랫동안 항해를 해 귀중한 시간을 소모했다. 이후 배들은 말과 소를 나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프랑스군은 풍차를 따라 좌측에서 나타나 대포 10문과 박격포 8문을 배치한 뒤 해안의 적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영국 함대가 그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으나, 프랑스군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적을 향해 몰려들었다. 오전 11시, 영국군의 3분의 2가 선적되었을 때 드 쿠시 후작과 콩테 드 몽테구 휘하의 척탄병 300명이 먼저 적을 공격했고 곧이어 불롱 보병대의 선두부대가 가세했다. 브리와 폰테나이 연대도 뒤이어 적과 맞붙었다.
이때 해변에는 아직 3천여 명의 영국군이 있었다. 1400명의 보병대와 모든 척탄병 부대로 구성된 영국 후위대를 지휘한 드루이 장군은 해변을 가로지르는 모래 둑 뒤에서 병사들을 편성하여 출항을 엄호해야 했다. 그는 두 번이나 프랑스군을 격퇴했지만 적이 대포로 격렬하게 포격을 가하자 영국군은 곧 붕괴되었다. 전투는 얼마 안가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전개되었다. 존 아미티지 경은 전투 초기에 머리가 총탄에 관통당해 즉사했고 많은 장교들과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몇몇은 바다로 뛰어들어 보트들을 향해 수영하다가 익사했다. 프랑스군은 해변으로 다가오는 보트들을 향해 총탄과 포탄을 퍼부었고, 많은 영국 보트들이 파괴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수병들은 감히 해안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고, 단지 하우 백작 휘하 일부 함대만이 적의 포격을 무릅쓰고 보트를 보내 영국군 장병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 동안 여러 프리깃 함들이 프랑스군을 향해 계속 발포했다. 그러나 그들의 포격은 적에게 닿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군 병사들이 아군의 포격에 맞아 죽어나갔다. 이에 영국 함대는 더이상의 포격을 중단하고 철수했고, 프랑스군은 많은 영국군 장교 및 병사들을 생포했다. 이때 프랑스군은 그들에게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고 잘 대해줬다. 영국군이 1758년 8월부터 9월까지 프랑스 해안에 대대적인 약탈과 방화를 자행한 것과 비추어 볼때 그들의 행동은 매우 신사적이었다. 이리하여 생 카스 전투는 프랑스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생 카스 전투에서 1,160명의 영국군 장교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후위대를 맡았던 드루이 장군은 전사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장교 30명과 병사 702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영국 해군은 8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445명이었다. 이 전투는 프랑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대신에 북미 대륙의 패권 장악에 힘을 기울여야 하며 유럽 대륙 쪽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영국 수상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국군은 7년 전쟁 기간 동안 두 번 다시 프랑스 해안에 대한 상륙작전을 실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