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트푸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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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4월 28일 캐나다 퀘벡의 생트푸아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이 전투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프랑스가 거둔 최후의 승리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고, 북미 프랑스 식민지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얼마 후 본국에서 대규모로 파견온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2. 배경
1759년 9월 13일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몬트리올로 퇴각했다. 하지만 영국군 또한 그들을 추격하기에는 피해가 큰 데다 혹한이 곧 닥쳐왔기 때문에 퀘벡을 점거하는 선에서 만족하고 이듬해에 몬티리올을 향한 공세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캐나다 총독 보드레이유는 적이 오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퀘벡을 되찾기 위한 공세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영국의 대규모 함대가 북미 식민지에 도착하기 전에 퀘벡을 탈환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으며 퀘벡을 수비하는 영국군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여겼다. 실제로 퀘벡의 영국군 수비대는 혹한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였다.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절반 이하로 줄었고, 대부분이 괴혈병에 시달렸다.
1760년 4월 20일, 프랑스군은 몬트리올에서 출발하여 퀘벡으로 향했다. 4월 26일, 그들은 생 오귀스틴에 상륙하여 부교를 건설해 카프 루즈 강을 건너 앙시앙-로레트의 영국군 전초기지로 향했다. 영국군 초병들은 적이 접근해오자 생트푸아로 퇴각했다. 적이 퀘벡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제임스 머레이 대령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과 야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4월 27일, 그는 10개의 대포와 절반 가량의 수비대를 이끌고 궤벡을 떠나 생트푸아에 주둔했다. 그리고 다음날, 프랑스군이 생트푸아에 도착하면서 양측은 퀘벡을 둘러싼 격전을 벌인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사령관: 제임스 머레이 대령
- 병력: 정규병 3,170명, 포병 116명, 레인저 78명, 곡사포 3문, 야전 대포 20문
3.2. 프랑스군
- 사령관: 프랑수아 가스통 드 레비
- 병력: 정규병 4,140명, 민병대 2,750명, 인디언 270명, 야전 대포 3문
- 200명의 민병 기병대도 있었지만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4. 전투 경과
4월 28일 새벽, 프랑스군 선봉대는 고원의 남쪽 끝에 있는 안세-아우-풀론 고지에 있는 블록하우스 요새를 공략했다.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 레비는 적이 퀘벡에서 농성할 거라고 판단해 그곳에 주둔한 채 가능한 빨리 식량 보급을 받으려 했다. 그러던 중 영국군이 몰려오는 걸 목격한 그는 전군에 진군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머레이는 괴혈병으로 고통받는 3천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퀘벡에서 1km 떨어진 지점까지 전진하다가 적을 목격하자 즉시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그의 부대는 아브라함 평원 전투 때 프랑스군이 점유했던 곳과 같은 지대에서 더 먼 비탈을 따라 고원에 길게 나열되었다. 그들은 고원 전체를 커버하기 위해 각 부대 사이에 3피트 간격을 둔 채 각각 두개의 대열로 늘어섰으며, 대대 간에는 40야드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적지를 살펴본 머레이는 적이 아직 대열 편성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파악했다. 프랑스군은 당시 블록하우스와 여러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었고 두몽의 요새화된 풍차를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군 주력은 여전히 행군 중이었고 선두에 선 2개 여단 만이 블록하우스에 도착했다. 이 호기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머레이는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레비는 아직 군대가 집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영국군이 쳐들어오자 우익의 3열에 배치된 여단을 실러리 숲으로 후퇴시켰다. 머레이는 그걸 보고 프랑스군 전체가 후퇴한다고 잘못 판단해 전군에 적을 추격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양측은 두몽의 풍차를 둘러싸고 격렬한 격투를 벌였고, 영국군은 이 격투에서 승리해 상대를 몰아내고 풍차를 장악했다. 그러나 실러리 숲에 후퇴한 프랑스군 여단이 거센 반격을 개시, 다시 풍차를 프랑스군의 수중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영국 왼쪽 부대가 몇 개의 보루를 점령했지만, 레비는 우익의 군단과 함께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머레이는 마지막 예비대인 제60연대 3대대를 보내 이 반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적의 공세가 워낙 거센데다 괴혈병에 시달린 병사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영국군은 곧 철수하기 시작했다. 레비는 그들이 퀘벡에 돌아가지 못하게 훼방 놓으려 했지만 적이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것을 보고 괜히 추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추격을 중단했다. 이리하여 생트푸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이 전투에서 영국은 전사자 292명, 부상자 837명, 포로 53명을 잃었는데, 이는 전체 인원의 3분의 1이 넘는다. 반면 프랑스군은 193명의 사망자와 640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후 레비는 퀘벡을 포위해 공격을 가했으나 영국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대규모 병력을 실은 영국 함대가 해안에 접근해오자 전의를 상실한 채 5월 말에 몬트리올로 퇴각했다. 그 후 영국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해 몬트리올을 포위했고, 결국 프랑스 북미 식민지 총독 보드레이유는 몬트리올에서 항복했다. 이렇게 해서 프랜치-인디언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