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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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1. 개요


영국의 군인. 7년 전쟁 시기 북미 식민지에서 프랑스-인디언 연합군과 맞섰다.

2. 일생


머레이는 1721년 1월21일 스코틀랜드 동 로디언주 발렌크리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4대 엘뱅크 경 알렉산더 머리에와 엘리자베스 스털링의 아들이었다. 1736년, 머레이는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제3 스코틀랜드 연대에 입대했고 1740년 형 패트릭 머레이 밑에서 와이너드 해병대 중위로 복무했고 1741년 3월부터 5월까지 진행된 카르타헤나 전투에 참전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42년, 머레이는 보병 15연대의 척탄병부대 대위로 근무했고 1745년오스텐드 공방전에 참가했다가 중상을 입었다.
1748년 12월 헤이스팅스의 코델리아와 결혼한 머레이는 1749년 제15 보병 연대 소령 계급장을 구입했고 1751년에는 중령 계급장을 구입했다.1757년 9월 아일 오브 와이트에서 제15 보병 연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던 머레이는 로슈포르에 대한 상륙 작전에 참가했지만 원정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그 후 그는 군법 회의에서 로슈포르 상륙작전을 맡았던 존 모던 경을 변호해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1758년 6월과 7월, 머레이는 루이스버그 전투에 참전해 루이스버그 요새를 공략하는 데 일조했고, 이후에는 제임스 울프 장군과 함께 퀘벡 공략전에 참여했다. 울프가 가스페 반도를 따라 프랑스 정착촌을 파괴하는 동안, 머레이는 미러미시만을 따라 프랑스 정착촌을 파괴했다. 1759년 9월 13일, 머레이는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영국군의 좌익부대를 이끌어 루이 조제프 드 몽캄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퀘벡을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울프 장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는 퀘벡 주둔 영국군의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해 요새를 강화하고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애썼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60년 4월 28일, 머레이는 퀘벡을 탈환하려고 진군해온 프랑수아 가스통 드 레비 장군의 프랑스군에 맞서 생트푸아 전투를 치렀으나 패퇴했다. 이후 그는 퀘벡 시가지에 틀어박혀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고 5월에 영국 구원대가 도착하면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이후 머레이는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의 몬트리올 원정대에 합류해 몬트리올을 포위해 함락시켰고, 9월 5일엔 휴런 족과 평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퀘벡주의 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머레이는 1763년 캐나다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캐나다에 남아있기로 결정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보호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가 영국 정착민들에게 분노를 샀다. 결국 1766년 캐나다 총독 직을 사임한 그는 영국으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1774년, 머레이는 미노르카 주지사에 임명되었고 1780년 미노르카 총영사의 딸인 앤 위햄과 결혼했다.
1781년, 머레이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미노르카 섬에 쳐들어오자 세인트 필립 요새에 틀어박혀 7개월 동안 저항했다. 그러나 구원군이 오지 않자 전의가 꺾인 그는 항복했고 영국으로 돌아간 뒤 군법회의에 소환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1783년 킹스턴-어픈-헐의 장군 및 주지사로 복무한 그는 1789년 제21연대 대령에 임명되었지만 실제로 지휘하진 않았고 1794년 6월 18일에 서섹스주 배틀에서 사망했다. 향년 7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