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역사
1. 라디오 드라마와 성우의 탄생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극'이 전파를 타고 방송된것은 시험방송용으로 1926년 11월 4일 단막극 <새벽종>이였다.무려 일제강점기 때부터 성우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는 소리 그리고 이때의 출연진은 변기종, 복혜숙, 이경환 등이다. 이어서 1927년 2월 16일 본 방송으로 정식으로 개시한 이후 같은 해 5월 23일에 우리나라 라디오 첫 방송극인 인형의 집이 방송되었다.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성우로서는 첫 방송을 한 복혜숙은 그의 회고에서 당시의 방송 상황과 성우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이렇게 라디오방송 초기의 방송극에서 성우(방송연기자)들이 하는 역할은 연기보다 주로 작품속의 상황을 해설하여주는 해설자의 역할이나 소설 등의 입체낭독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때만 해도 방송극이라는 명칭이 뚜렷하지 않았고..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무대의 상황을 설명해야 했는데, 남비는 어디에 있고,쓰레기통은 대문 옆 어느 곳에... 이런 식으로 장소를 알려주는 해설자가 있었으며, 그 당시 방송 낭독은 각본 낭독이라고 해서 안종화씨가 담당한 적도 있고...나중에는 최승일씨 제안으로 소설 입체낭독을 하기도 하였는데 30분짜리 프로그램이라 혼자 하기는 힘들었다.
1931년 1월에 발족된 극예술 연구회가 방송극을 방송한 것은 1933년 2월로써 유치진 연출로 이웅, 모윤숙, 최창헌, 윤정섭 등이 출연하였다. 당시에는 극장무대에서 공연한 것을 그대로 방송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연극인들이 나 연출가들은 어떻게 하면 방송극이 무대극의 연장에서 벗어나 순수 방송극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소망 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단체가 <라디오 플레이 미팅>이다. 1933년 8월 29일 <라디오 플레이미팅>은 방송극의 첫 작품으로 김회창 박진 연출의 <老車夫>를 방송하였다. 방송극 <노차부>는 늙은 인력거꾼의 애환을 그리면서 점차로 스며드는 기계문명에 대한 바판을 담은 내용으로, 당시의 유명한 극작가였던 김회창 특유의 해학과 간결, 힘과 함축미가 흐르는 대서처리는 듣는 이의 심금을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한 9월 26일에는 박진 연출의 <양귀비의 죽음> 12월에는 '빅톨위고' 원작 <레미제라블>을 연 3회에 걸쳐 방송하였으며 주인공 장발잔 역에는 윤성구가 열연하였다. 이 무렵의 방송극 주연급은 <토월희> 맴버들 외에도 김영옥, 이웅 등이 있었고, 김복진, 방춘산, 김창기, 정린, 유옥엽, 이삼청, 이애라 등 <서울라디오 동우회> 들이 참여하였다 당시에는 동경 유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가 방송극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제 2방송(우리말 방송)의 요청으로 <동경유학 예술좌> 맴버들이 1934년 9월 4일 '유진오닐' 원작, 주영섭 각색의< 絶海에서>를 방송하였다. 출연진은 김동원, 김영수, 김진순, 김정호 등이었다. 또한 9월 9일에는 골드월드 우너작 <태양>을 김영수 연출로 방송하였다. 1934년에 결성된 방송극 신인회는 10월 30일 <며느리>를 방송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그 여자의 밀실>, <어느 가정풍경>, <황혼의 나그네>, <눈 뜬 장님>, <최신 수술법 공개> 등 많은 작품을 방송하였다.
당시의 방송은 대체로 베스트 샐러의 소설을 각색하여 방송하였는데, 각 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방송극을 연속 방송하는 <연속방송극> 스타일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1934년 12월 14일과 15일에 걸체 <방송극협회>는 연극방송으로 최독견 원작 <숭방비곡>을 방송 하였다. 출연진은 이익, '''이순재''', 백진희, 차홍녀, 정영철 등이었으며, 이들은 이후에도 <월급장이와 일요일>, <그 여자의 지옥>, <생활전선> 등을 연이어 방송하였다. 이 시절에도 이미 방송망을 통한 선전효과가 있어서 방송망을 탄 연극무대에 올려지게 되면 항상 만원사례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말 방송이 민족 색 짙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활발하게 방송되자 조선총독부는 산하에 '방송 감독계'를 신설하여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2월 26일에 이르러 일제는 '조선 육군 지원병 령'을 공포하고 여기에 맞는 방송만을 강요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급기야 방송극은 식민정책 구현의 목적으로 전락되었다.
이 시기에 방송된 연속극의 제목을 보면, <전운 속의 충성>, <빛나는 용사들> 등으로 그 때의 상황을 점쳐볼 수가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으로 방송극은 그 맹맥마저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1942년 12월 방송사상 최초로 <경성방송극단>이 출범하였지만 더 이상의 남아 있는 기록들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방송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지식층들이 방송에 참여하였으며, 방송극에 출연한 연극인들 역시 방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이렇게 연극인들로 부터 시작한 방송극이 바로 라디오드라마의 시발점이었으며 동시에 라디오드라마 방송극은 우리나라에 성우라는 새로운 영역을 탄생시켰다.
2. 라디오 드라마 성우의 전성기
우리나라의 방송은 1945년 해방을 맞으며 급속도로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어 방송과 한국말 방송으로 이중 방송하던 것을 완전히 우리말 방송으로 전환하였으며, 라디오의 드라마가 점차 활기를 띄게 되면서 성우들은 라디오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성우들은 라디오드라마에서 각자 자신의 연기를 연마하기 위해 혼시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시대적 방송이 라디오만이 존재하던 시절에 대중들의 오락매체는 오로지 라디오밖에 없었다. 따라서 라디오 드라마는 곧 라디오의 꽃이었다. 그리고 성우들은 라디오 드라마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1946년 10월 18일 부터 어린이 주간연속극 <똘똘이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똘똘이의 모험>에는 똘똘이역의 아역성우들 말고도 '''구민''', 김순원, 이낙훈, 이혜경, 서계영 등의 '''대한민국 최고참 원로급성우분들이 여기에 최초로 출연 하였으며''', 이 프로그램은 나중에 영화화하기도 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성우들이 많지 않았고 아이들의 역할을 다양하게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방송극에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똘똘이의 모험>에 출연한 성우 A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낙훈, 구민, 서계영, 오승룡 등은 당시에 모두 중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당시에는 여러 단체의 극단맴버들이 주로 방송극에 참여하였으나 KBS에서 드디어 성우의 모체인 '방송극단 연구원'을 모집하면서 1948년 3월에 <서울 중앙방송 극회>가 창립되었다. 1기생으로는 장민호, 민욱, 조난사, 최진록, 황태수, 윤진 등이었으며 2기생에 추무룡, 윤일봉, 이춘사, 이혜경, 구민 등이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면서 전국 10개 방송국 중 8개가 파괴되는 난리등이 났다.
1954년 5월 휴전 이후 조남사 연출계장이 새로이 제 1기 성우를 모집하고 자신이 속해있던 6.25 전의 1기생과 2기생들을 특기로 모집하고 자신이 속해있던 6.25전의 1기생과 2기생들을 특기로 분류하였다. 이 때에 모집된 KBS 제 1기 성우 (극 연구원)들로는 신원균, 이창환, 심영식, 김수일, 오승룡, 박용기, 고은정, 김소원, 윤미림 등이었다. 같은 해 12월엔 CVS기독교 방송이 개국하였고,1955년 3월에 뽑은 CBS 제 1기 성우로는 이우영, 주상현, 임옥영, 정은숙, 천선녀 등이다. KBS 1기생이자 성우 역사의 산 증인이신 분은 당시의 성우들의 의식과 열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실 당시에는 '성우'라는 호칭이 정식으로 없었으며 방송극에 출연하는 사람들을 '방송극 연구원' 혹은 '방송요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이것은 당시 연극을 하던 사람들이 주로 방송극에 출연하던 잔재가 남아 있었고 라디오 드라마에서 목소리로만 연기를 하던 사람들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정식으로 성우라는 호칭으로 성우를 모집하기 시작한 것은 민영방송극이 개국하면서부터이다. 또한 당시의 성우들은 연구회를 따로 만들어 발표회를 갖고 자기의 역할에 대한 비평이나 토론을 통하여 연기 연마를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였음을 위의 증언을 통하여 알 수 있다.그때는 스타가 되려는 의식도 없고 재미있는 드라마로 구성을 해서 듣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듣느냐 이게 우리 목표였고 지금 세대같이 누가 이효리가 돼 가지고 붕 뜨느냐 이런 생각은 없었지. 그때는 다같이 하기 위해서 어떤 면에선 아주 순수했고..
발표회를 하고 상을 받고 그렇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거 아냐? 누가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독학이야. 그러니까 우리 연기자들도 독학으로 그렇게 발표하고 그랬어.
당시에 성우들은 서울 중앙방송국이나 기독교 방송국사 사이에 소속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라디오드라마 녹음을 하였는데 기독교 방송국의 가장 기록적인 작품으로는 <루터란아워>로써 이 작품은 종교적 색채를 넘어 재미와 예술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던 기독교 방송극의 간판이었다.
이 외에도 기독교방송 개국초기의 라디오 드라마인 <이 생명 다하도록>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이 작품은 대한민국 방송사상 최초로 공개 오디션 형식으로 주인공 선발을 하였다. 그 때에 '''50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남자주인공 이승길과 여자주인공 유병희가 발탁되었다. 유병희는 합격 당시 아이를 셋이나 둔 유부녀여서 더욱 화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방송국 녹음 시설이 열악하여 대부분이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스튜디오에 마이크도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사람이 말을 하고 나면 다른 한 사람이 소리 가 나지 않도록 재빨리 잘 비켜서서 방송을 해야만 하였으며,연출자도 스튜디오 안에 들어와서 성우들과 나란히 서서 연출을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는 남북이 대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2004년 6월 15일 0시부터 남북이 서로가 선전이나 비방 방송을 하지 않기로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실무 대표회담'에서 합의하고 비무장지대에 있는 확성기를 모두 철거하여 전까지 53년간 성우들은 대북방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북방송에 참여 하였던 이혜경씨는 대북방송이 있는 날이면 '''밤 12시 30분 경에 집에 돌아 갈 수 있었다'''며 글을 실은 적이 있다. 당시 대북방송에서 성우란 직업군이 매우 바쁘고도 중요한 역할이였음을 알 수 있다.
라디오 방송이 본격적으로 전파를 타면서 1956년 12월 2일 부터는 조남사 작 이경제 연출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주간연속 <청실홍실>이 방송되었다. <청실홍실>은 6.25전쟁 이후의 경제적으로 어두운 시기가 조금은 벗어나고 국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안정이 되어 라디오 청취자들이 방송에서 오락을 찾게 될 즈음에 방송을 시작하였다 매주 일요일 저녁 9시 15분부터 9시 45분까지 방송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삼각관계가 포함된 연애이야기는 드라마에 단골로 나올법한 흔한 클리셰지만,그 당시엔 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이야기 였기에 <청실홍실>은 말그대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방송에 참여한 정은숙, 김소원은 길을 가다가 자신들을 성대모사하는 여학생들을 종종 마주쳤다고 증언하며 다방에 들어가면 자신이 녹화한 라디오 드라마에 빠진 다방 주인에게 '''커피를 공짜로 얻어 마실 수 있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이런 연속극이 인기를 끌자 이어서 최초의 연속사극 <당쟁비화>가 나오고 그에 이어 나온 이성호 작 박동건 연출의 <장희빈>은 장안의 화제를 몰고 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내시역으로 캐스팅된 오승룡은 당시 직접 '''내시들이 사는 내시촌을 찾아가면서 까지 자신의 역할을 연구할 정도로 열연했다고 한다.'''
1946년부터 197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라디오 방송과 그를 녹화하는 성우들의 전성시대였으며. 특히 KBS에서 만든 <김삿갓 방랑기>라는 라디오 드라마는 1964년 4월 봄철부터 '''2001년(!!!)''' 본봄까지 36년간 우리나라 최장수 라디오 드라마 프로그램으로 청취자와 함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