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디
Ghanaian Cedi (영어)
1. 개요
가나에서 사용하는 통화. ISO 4217코드는 현행 3기 세디가 GHS (2기 세디는 GHC, 1기 세디는 ISO제정 이전이다.), 기호는 C에 정확히 세로줄 하나가 그어진 "'''₵'''"이다. 기원은 전혀 무관하지만 센트기호(¢)까지는 그려려니 여겨준다. 다만 센트기호로 사용할 때는 구분이 필요하므로 GH¢라 쓰는 경우도 더러있다. 그래도 콜론기호(₡)나 유로기호(€)와 헷갈리면 꽤나 골룸. 참고로 단어 "세디"는 토착어인 아칸어로 소라조개를 뜻했다. 옛날 가나 지방에서는 패화(貝貨)를 화폐로 썼기 때문.
2기 세디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의 흔한 단위를 가진 통화였으나 2007년 1/10000 통화개혁을 거친 3기 세디는 아프리카에선 무시무시한 환율을 자랑하는 통화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래봤자 560원/₵밖에 안하지만(...). 1990년 이전에는 고정환율제를 써왔고, 이후에 변동환율제를 도입하였다. 인플레이션은 10%대(2012년 추정)로 언젠가 랜드에게 다시 역전당할 순간이 올 지도 모를 불안정한 통화이다. 보조단위로 페세와(Pesewa)를 사용한다.
2. 1기
전신인 가나 파운드(Ghanaian Pound)에서 독립한 통화로, 1965년 7월 19일부터 67년 2월 22일까지 쓰였다. 교환비는 2.4세디/파운드. 12진법을 쓰던 파운드에서 10진법으로 교체를 꾀했기에 이루어진 비율이었다.
- ₵1,000짜리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건 수표다.
3. 2기 (GHC)
3.1. 1차
1967년 2월 23일에 등장. 어째서인지 12진법에서 10진법으로 가는 교체작업을 한 번 더 행한 기이한 교환비를 시행하였는데(1.2세디 = 신 1세디), 이는 1966년 일으킨 군부정권(2공화국 정권)이 단결 사회주의 아프리카를 주장하며 은근히 독재를 지향하던 콰메 은크루마의 정책을 정면 부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때 환율은 ₵0.98/USD(67년), ₵0.55/USD(71년), ₵0.78/USD(72년), ₵0.87/USD(73년)
3.2. 2차
1975년부터 78년 사이에 등장한 시리즈이다. 결론적으로 1979년에 개혁된 이 시리즈는 구권과의 교환비가 "구 10세디 = 신 7세디"라는 누가봐도 "돈 좀 내놓으시죠"라는 직설적인 방침으로 '''몰수'''가 진행되었다. 대외교환비는 그대로 두고 통화만 30% 강제로 회수한 셈이다. 게다가 동전과 계좌 속 재산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장물현금 회수라는 것에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때 환율은 크게 수정되어서 ₵2.80/USD.
3.3. 3차
1980년에 대체된 10세디화와 고액권인 50세디가 새로 출범하고, 이후 82년에 물갈이를 마친 시리즈이다. 다만 1982년에 새로 출범시킨 최고액권 50세디를 다시 폐지시키는 기이한 방침이 나왔다. 주로 외부 장물업자들이 최고액권으로 재산을 쌓아두는 것이 아무래도 관리하기 편하니까 정부가 되려 그걸 노리고 몰수계획을 진행한 것.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이미 간파하고 제 2 고액권인 20세디짜리로 보관하는 등, 이미 대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피해본 외국자본가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현실로 반영되어 실제로 20세디보다는 50세디짜리의 시세가 훨씬 싸게 거래되고 있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 고액권들이 차례로 계속 강제 몰수당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또 없다보니 외화가뭄으로 진행되는 속도에 가속도를 부여한 계기를 준 셈이었다.
정부도 당연하지만 통화평형을 위해서 물가도 이에 맞춰 배급하는 등의 강력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보여주기에 힘썼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환율에 군부가 맘대로 정한 국정가격일 뿐이지, 현실은 시궁창이어서 암시장이 성행을 이루었고, 그 수준은 ₵60~120/USD(80년)까지 이미 대폭락했다.
3.4. 4차
1981 ~ 1984년부터 등장한 시리즈로, 3차와 거의 비슷할 무렵에 동시 출범되었다. 원인은 통화몰수를 위한 물갈이. 그래서 정부를 믿지 못하고 암시장이 본격 활성화되어 정부조차 손을 놓기 시작한 시기라 직전 시리즈와는 달리 가파르게 액면이 올라갔다. 거의 최대 40배에 달하는 시장-국정 가격차이는 결국 외화가뭄이라는 파탄수준까지 이르다보니 1990년에는 끝내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만다. 이 조치가 이루어지고 단번에 환율은 시장환율과 일치화되었다(₵300/USD). 그리고 환율폭락폭은 굉장히 커져, 2년 단위로 평균 ₵400(92년), ₵900(94년), ₵1,500(96년), ₵2,300(98년), ₵4,500(00년), ₵8,000(02년), ₵8,900(04년), ₵9,600/USD(06년) 수순을 밟았다.
- 군부때문에 2기 초반부터 콰메 은크루마의 모습이 지폐에서 누락되었지만 1990년 거의 민주화가 성립된 후인 1만 세디(2002년)에 가나 6대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대되면서 재등장하게 되었다.
- 여기까지 통화는 2008년 1월부터 사용할 수 없다. (07년 7월부터 6개월간 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