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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貰冊家.
세책집, 세책점, 세책방이라고도 한다.[1]
조선시대 등장한 도서대여점.
조선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고 건국한 나라로 학식을 갖춘 신진사대부 계층이 통치했으며, 일반 백성들까지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갖춘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말기 이전까지는 서점이 없었다'''. 국가에서 책을 만들어서 관청이나 교육기관 등을 거쳐 배포하거나 책쾌라고 불려지는 책장수가 그때 그때 필요한 책들을 수급해서 판매하는 방식이었는데 중앙정부에서 배포한 책의 경우에는 무료인 경우가 많았지만 문제는 세율이 낮았던데다가 종이제조비용과 인쇄비가 많이 틀었던 특성탓에[2] 중앙정부에서 책을 수십만~수백만부 단위로 대량생산되지 못하여 책을 누구나 읽을 정도로 발행량이 충분치 않아 어느정도 이름있는 가문들이나 지방 관청등에까지 배포된 수준에 그쳤고, 그렇다고 아래에 나와있는 책장수를 통해 책을 살려면 비용이 무척이나 많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중종때 지방유생들이 책이 너무 비싸서 공부하기에 애로사항이 있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는데 이때 대학과 중용의 경우에는 쌀 몇섬값이었다. 그러다보니 정 책을 가지고 싶으면 책이 있는 집에 부탁해서 책을 베껴써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서점을 만들자는 주장은 몇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높으신 분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는 책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것에 기인하는데 자연히 그 대안으로 도서대여점이 등장하게 되었다.
1910년 최남선이 한 세책집을 조사했을 때 120종 3,221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다. 리즈 시절엔 엄청난 수량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출처
역사나 서지학 관계자가 아닌 이상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이 용어는 2015년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에 '''세책방'''이 나온 덕분에 갑자기 대중 사이에서 알려졌다.
조선시대 아직 소설을 내놓고 읽을 수도, 쉽게 구할 수도 없었던 시기였던 만큼 소설책을 수중에 갖고 있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암암리에 번역 또는 창작한 한글작품을 다시 베껴 보급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필사한 책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책을 팔던 책쾌(서적 중개상)나 가세가 기울어 빈한한 삶을 영위하던 문인들, 또는 여성 필사자가 있었다.
사대부 집안의 여성 또는 궁녀가 대부분인 여성 필사자는 영리보다는 소일거리 또는 보관을 목적으로 필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빈한한 문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세책점에서 요구하는 대로 필사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책쾌라 불리던 서적중개상은 오늘날로 말하면 서적 외판원에 해당하는 전문 서적상으로 개인적으로 책을 팔러 돌아다니던 일종의 책 거간꾼이었다. 책쾌의 집에서 수천 종의 책을 깨끗이 베껴 쓰고 빌려주는 일을 했다고 기록한 채제공의 글을 참고한다면, 책쾌는 단순한 서적 거간꾼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적 유통에 관한 영업 노하우를 바탕으로 직접 책을 필사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필사하게 하면서 세책업에 뛰어들었던 선구자였다. 여하간 소설 독서를 위한 일련의 국문 번역과 국문소설에 대한 관심은 여성 독자사이에서 지속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시장경제가 활기를 띠는 가운데 소설 역시 상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미 18세기 중반에는 전문적으로 필사한 책을 돈을 받고 대여해 주는 세책업이 성행했다([조선의 베스트셀러], 이민희 지음, 프로네시스, 2007)
貰冊家.
세책집, 세책점, 세책방이라고도 한다.[1]
조선시대 등장한 도서대여점.
조선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고 건국한 나라로 학식을 갖춘 신진사대부 계층이 통치했으며, 일반 백성들까지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갖춘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말기 이전까지는 서점이 없었다'''. 국가에서 책을 만들어서 관청이나 교육기관 등을 거쳐 배포하거나 책쾌라고 불려지는 책장수가 그때 그때 필요한 책들을 수급해서 판매하는 방식이었는데 중앙정부에서 배포한 책의 경우에는 무료인 경우가 많았지만 문제는 세율이 낮았던데다가 종이제조비용과 인쇄비가 많이 틀었던 특성탓에[2] 중앙정부에서 책을 수십만~수백만부 단위로 대량생산되지 못하여 책을 누구나 읽을 정도로 발행량이 충분치 않아 어느정도 이름있는 가문들이나 지방 관청등에까지 배포된 수준에 그쳤고, 그렇다고 아래에 나와있는 책장수를 통해 책을 살려면 비용이 무척이나 많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중종때 지방유생들이 책이 너무 비싸서 공부하기에 애로사항이 있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는데 이때 대학과 중용의 경우에는 쌀 몇섬값이었다. 그러다보니 정 책을 가지고 싶으면 책이 있는 집에 부탁해서 책을 베껴써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서점을 만들자는 주장은 몇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높으신 분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는 책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것에 기인하는데 자연히 그 대안으로 도서대여점이 등장하게 되었다.
1910년 최남선이 한 세책집을 조사했을 때 120종 3,221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다. 리즈 시절엔 엄청난 수량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출처
역사나 서지학 관계자가 아닌 이상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이 용어는 2015년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에 '''세책방'''이 나온 덕분에 갑자기 대중 사이에서 알려졌다.
조선시대 아직 소설을 내놓고 읽을 수도, 쉽게 구할 수도 없었던 시기였던 만큼 소설책을 수중에 갖고 있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암암리에 번역 또는 창작한 한글작품을 다시 베껴 보급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필사한 책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책을 팔던 책쾌(서적 중개상)나 가세가 기울어 빈한한 삶을 영위하던 문인들, 또는 여성 필사자가 있었다.
사대부 집안의 여성 또는 궁녀가 대부분인 여성 필사자는 영리보다는 소일거리 또는 보관을 목적으로 필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빈한한 문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세책점에서 요구하는 대로 필사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책쾌라 불리던 서적중개상은 오늘날로 말하면 서적 외판원에 해당하는 전문 서적상으로 개인적으로 책을 팔러 돌아다니던 일종의 책 거간꾼이었다. 책쾌의 집에서 수천 종의 책을 깨끗이 베껴 쓰고 빌려주는 일을 했다고 기록한 채제공의 글을 참고한다면, 책쾌는 단순한 서적 거간꾼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적 유통에 관한 영업 노하우를 바탕으로 직접 책을 필사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필사하게 하면서 세책업에 뛰어들었던 선구자였다. 여하간 소설 독서를 위한 일련의 국문 번역과 국문소설에 대한 관심은 여성 독자사이에서 지속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시장경제가 활기를 띠는 가운데 소설 역시 상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미 18세기 중반에는 전문적으로 필사한 책을 돈을 받고 대여해 주는 세책업이 성행했다([조선의 베스트셀러], 이민희 지음, 프로네시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