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사대부

 


1. 개요
2. 등장
3. 집권과 분열
4. 조선 건국 이후
5. 과연 실체적인 존재인가?
6. 주요 인물들


1. 개요



'''신진사대부'''()란, 고려 말기(1388년~1392년)의 집권세력이자 조선의 건국세력이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면서 새롭게 등장했다. 공민왕 16년 성균관이 중영되고 이색을 중심으로 하여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른다.
사대부란 士(교양인)와 大夫(관료)의 합성어로써, 학문적 교양과 정치적 실무 능력을 갖춘 학자적 관료를 일컫는다. 이 용어 자체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특별히 새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춘추전국시대의 용어를 가져와서 사용한 것이다.
그렇기에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라는 의미로 신진사대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향리,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나 자작농 등 중간 계층에 해당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실질적으로 신진사대부가 고려의 정계를 장악한 게 위화도 회군 이후임을 감안한다면 겨우 4년 남짓이나, 그 사람들이 그대로 조선을 건국하다보니 고려의 집권세력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2. 등장


사대부 계층의 기원으로 흔히 말하는 것이 능문능리(能文能吏) 관인층이다. 무신정권시기 무신만으로는 국가를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최우가 만든 서방을 통해 관인층이 등용되었다. 이렇게 등용된 관인층은 무신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대접받았고 무신들보다 더 대접받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관인층은 원간섭기 오히려 권문세족으로 발전하였으며 성리학과도 전혀 무관한 계층이었다. 그렇기에 실질적인 뿌리로 보기는 어렵다.
원 간섭기 충선왕에 의해 대도만권당이 세워지며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중국에서 주류 유학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이때 고려의 많은 선비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입하고 나서도 크게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안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고려 왕실이 추진하는 여러 개혁정치에 참가하며 힘을 키우기도 했으나 그 개혁은 대부분 전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권문세족 내부의 권력다툼인 경우가 많았다.
신진사대부라는 계층이 정치 세력으로써 만들어진 시기는 공민왕 시기가 되겠다. 공민왕은 권문세족을 숙청하면서 그 반대급부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특히 노국대장공주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공민왕은 신돈에게 전권을 맡기게 되면서 신돈은 개혁의 일환으로 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 덕분에 이색을 비롯한 성리학에 밝은 관리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라는 뜻에서 신진사대부라 불리게 되었다.

3. 집권과 분열


최영이성계가 이인임을 몰아낸 무진피화 이후 제2차 요동정벌을 두고 대립했고 이성계가 1388년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는 것을 계기로 고려의 정계를 장악했다. 하지만 곧바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내에서 개혁을 단행하자는 온건 개혁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제도를 부정하고 새롭게 나라를 개창하자는 급진 개혁파로 나뉘었다.
두 세력은 공양왕 옹립까지는 대체적으로 뜻을 같이 했으나, 세력 다툼 끝에 결국 과전법이 시행되고 정몽주를 이방원이 살해하면서 온건 개혁파는 몰락했고 고려 역시 1392년에 멸망했다. 그러나 온건 개혁파는 고려 멸망 이후 국왕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이들로 조선시대에도 그 이름이 칭송받았으나 정도전은 태종에게 찍혀 이름도 남기 어려웠으니...

4. 조선 건국 이후


급진 개혁파는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조선의 지배층이 되었다. 이후 이들이 관학파를 형성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조선 왕조의 주요 지배 계층으로 자리잡아 가고 세종 집권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단종 집권기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세조가 집권했고, 이에 성삼문집현전 계통의 사대부들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된 여파로 집현전경연사대부들의 정치적 기반이 폐지되면서[1] 그 기세가 위축됐다. 이쯤부터 관학파의 일부 갈래이자 계유정난에 가담하거나 찬성한 사대부들이자 중앙에 권력기반을 가진 사대부인 훈구파와 온건 개혁파의 일부 갈래이자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성장하는 사대부들인 사림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사림파가 성종의 중용과 조광조의 개혁 등을 계기로 중앙정계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하며 훈구파와 반정공신과 외척 등의 반대세력들의 견제로 인한 온갖 사화를 겪으면서도 끝내는 선조 때 정계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여 결국 조선의 지배층 자리를 확고히 한다. 이후 선조 때 사림파붕당#s-1정치가 시작된다.

5. 과연 실체적인 존재인가?


'신진 사대부 학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 20여 년이 지나 국내외에서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대두했다. 신진 사대부라고 분류된 세력의 대다수가 이르면 고려 초기부터, 늦어도 고려 중기 이후 중앙에 진출한 이른바 문벌귀족이라고 불리는 세력과 일치하며[2] 이는 무신 정변 이후 지방의 토착 세력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세력을 이루었다는 기존의 학설과 대치된다. 게다가 이들의 세력은 원 간섭기 이후 집권한 권문세족과 상당수가 일치하기도 한다.
또한 고려시대 전체를 통틀어 사용되었던 '사대부'라는 명칭을 신진 사대부에게 적용할수 있는냐는 주장이 나오며 신흥 사류, 신흥 유신등의 대체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미국의 한국사학자 존 던컨 등은 아예 조선 건국을 이성계를 필두로 한 무신 세력과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고려 중앙 세력과의 합작으로 본다. 실제로 조선은 지방 향리 세력을 지배층으로 인정했던 고려와 다르게 철저히 중앙 집권화를 꾀하면서, 지방 향리층을 지배층인 양반이 아닌 평민과 양반의 사이인 중인 계층으로 묶어놓았고, 그러한 시도는 조선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론에선 한가지 간과한게 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혁명가나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 데 오히려 구세력의 자제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양 최초의 헌법이라 일컬어 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헌법도 왕족과 세임의 소장파 귀족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도입했으며 프랑스 혁명당시 민중의 편에 선 미라보 백작같은 사람도 있었고 공산혁명을 이끈 호치민이나 마오쩌둥, 체 게바라도 어느정도 재력이 있는 집안 출신이다. 한국의 독립유공자중 아버지는 친일 부역자지만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도 많다. 즉 어느정도 공부가 가능한 기득권층의 자제들이 세상에 대해 고민하다가 세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건 그다지 드문 예가 아니다. 오히려 기득권층이기에 많은 것을 학습하고 사회의 문제를 더 정확히 봤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6. 주요 인물들


  • 권근: 뛰어난 성리학자로 입학도설을 지은 사람이다.
  • 길재: 정몽주의 제자이자 모든 조선 사대부들의 시조격인 인물.
  • 남은: 정도전과 함께 조선 초기 정국을 이끌었던 급진파 사대부의 일원.
  • 맹사성: 주로 조선 초기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고려말인 1386년에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바 있다.
  • 문익점: 목화씨 일화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람도 신진사대부이다.
  • 민제: 태종의 장인이자 스승이기도 하다. 이쪽도 권문세족 출신이지만 신진사대부의 길을 걸은 인물.
  • 박상충: 이인임에 반대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 염흥방: 조준처럼 권문세족 출신이긴 하나 조준과는 정반대로 신진사대부가 아닌 권문세족으로 타락한 인물. 젊은 시절에는 정도전, 정몽주 등과 고려개혁을 이끌 유망주로 꼽혔으나, 이인임에게 한 번 깨지고 난 후로는 이인임 일파가 되어 한때 동료들이었던 신진사대부를 탄압하는 동시에 토지를 불법적으로 강탈을 일삼는 등 완전히 타락하고 말았다. 결국 이인임 일파와 함께 최영이성계에 의해 제거된다.
  • 유숙: 이색과 사돈이자 정도전과 이숭인의 좌주이자 스승으로 공민왕 초기의 신진사대부이다.
  • 윤소종
  • 이방원: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급제 경력이 있는 인물. 워낙 철혈군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 사람도 따지고 보면 어엿한 신진사대부의 일원이다.
  • 이색: 성리학의 대가인 이제현의 제자. 사실상 신진사대부의 파조 격이 되는 인물. 조준같은 논외를 제외하고 대부분 그의 제자들에게서 굵직한 신진사대부들을 많이 배출했다.
  • 이숭인: 성주 이씨. 그러니까 권문세족 출신이다. 특히 친척인 이인임이 권신으로서 세도를 누리고 있었으나, 이숭인은 신진사대부의 길을 갔다.
  • 이인복: 성주 이씨이자 이인임의 형 하륜의 좌주이자 스승으로 권문세족 출신의 신진사대부이다.
  • 이제현: 공민왕의 개혁정책시기 재상으로서 주도. 여말 사대부의 원조격.
  • 이첨: 역성혁명에 반대했으나 후에 조선왕조에 참여했다.
  • 정도전: 사실상 조선을 세운 인물. 성리학자보다는 혁명가란 이미지가 강한 신진사대부이다. 그러나 이방원의 쿠데타로 몰락하여 역사의 패자로 남았기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으며, 근래에 와서야 그에 대한 조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정몽주: 신진사대부 중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서 숭상되어온 인물. 더불어 조선의 성리학파는 관학이니 사학이니 구별할 것 없이 모두 정몽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진사대부 중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기도 하다.
  • 조준: 권문세족 출신이나 사실상 정치적 행보는 신진사대부들과 같이 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 못지 않을 정도로 조선 초기의 각종 개혁과 제도 정비를 이끈 인물. 더불어 독학으로 성리학을 익혔다.
  • 하륜: 이인임의 조카사위였으나, 후에 이방원을 왕으로 만드는데 일조하면서, 조선왕조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영예와 부를 누리게 된다.
  • 서견: 두문동 72현.고려의 충신. 장령(종 3품)
  • 서중보: 두문동 72현. 고려의 충신. 직제학(정 3품)
  • 서보: 두문동 72현. 고려의 충신. 공조전서(정 3품)
  • 서광준: 고려의 충신. 사재감정(정 3품)

[1] 다만 집현전과 경연이 폐지된 것은 세조의 독선적인 성향과 함께, 세조가 이 제도들을 귀찮게 여긴 것 때문이기도 했다.[2]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 ,역사비평사, 2009, 217~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