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조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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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朝貴'''
병음: Xiao Chaogui
(1820년 경~1852.9)
1. 개요
2. 유년기
3. 아내 홍선교
4. 배상제회
5. 태평천국 운동에서의 역할
6. 죽음
7. 평가


1. 개요


태평천국의 인물이다. 정식 칭호는 우필우정군사서왕(右弼又正軍師西王). 흔히 서왕(西王)으로 알려져 있다.

2. 유년기


소조귀는 우쉬안(지금의 광시성 지징산 안의 구이핑시) 출신의 가난한 농민 겸 숯구이 출신이다. 객가인으로 추정되지만, 야오족이라고도 하고 양수청의 친척이라고도 한다.[1]

3. 아내 홍선교


그는 독실한 신도인 양운교와 결혼한다. 그녀는 1837년 중병을 앓던 중 천국을 방문했고 훗날 홍수전으로 명명되는 종교적 선지자의 출현을 안내받았다고 주장했다.
몇몇 자료들은 양운교의 죽음에 따라, 소조귀는 홍수전의 여동생인 홍선교와 결혼했다고 밝힌다. 홍선교는 중화 문화에 용맹한 여전사로 족적을 남긴다. 그러나, 홍수전은 여동생이 없었다. 대신, 소조귀와 같은 태평천국의 왕들의 아내를 홍수전의 여동생으로 삼았다. 가장 신뢰성 있는 설명은 양운교와 홍선교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다. 양운교는 이름을 운교에서 발음이 비슷한 선교로 바꾸었고, 홍수전의 어용 역사가들이 그녀에게 홍수전과 같은 성씨인 홍씨 성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홍선교는 태평천국의 여성 해방 정책에 힘입어 여성 조직을 이끌며 활약하다 1856년 사망한다.

4. 배상제회


1848년 가을, 풍운산과 홍수전이 이웃 고을에 있을 때, 소조귀는 배상제회에서 지도자를 맡는다. 이 시점에서, 소조귀는 예수가 지상에 상륙했고 그를 통해 말한다고 주장했다.(천형하범天兄下犯) 이 주장은 이듬해 여름 홍수전과 풍운산이 지징산으로 돌아올 때 그들에게 인정받았다.[2]
예수가 빙의된 소조귀는 배상제회에 규범과 조언과 지도력을 주었다. 양수청이 그랬듯이 소조귀가 예수에 빙의되었을 때는 홍수전의 권력도 뛰어넘을 수 있었다.[3] 1848년 여름, 소조귀는 홍수전, 풍운산, 양수청, 위창휘, 석달개, 그리고 예수와 의형제가 되었다.

5. 태평천국 운동에서의 역할


소조귀는 태평천국 초기의 최고 군사 지휘관 중 하나였고 1851년 1월 11일에 태평군 전방부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태평천국이 융안을 점령한 직후에 홍수전은 소조귀를 우필우정군사에 임명했다. 12월 4일 홍수전은 소조귀의 공을 치하하며 그를 서왕(西王)으로 임명하고 팔천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6일 후, 청의 융안을 향한 반격 중 소조귀는 부상을 입는다. 그 후로 갑자기 천형하범은 멈추어 버린다[4]
태평군이 다오저우에 진을 치고 있던 1852년 여름 소조귀와 양수청이 지역민들의 동정을 얻어 새로 증원을 시행하자는 청원을 올린다.[5] 이 청원은 태평천국의 종교적-민족적-정치적 삼위일체 환경을 민중의 기독교화, 소수민족인 만주족에 의한 지배체제의 청산, 태평천국의 관점에서 부패한 정부의 파괴의 요구를 통해 제공했다. 청원은 지방 신사와 세력가들의 반발을 고착화했지만 2만 명의 지역민들을 증원하는 것을 도왔다.

6. 죽음


1852년 8월 말, 소조귀는 태평천국의 기지인 천저우에서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창사를 점령하려 했다. 그들은 9월에 창사에 도착했고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포위가 약간 진행되는 상황에서 소조귀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전방에 나서서 자신의 머리 위로 거대한 깃발을 게양했다. 이건 지휘관의 위치를 알려준 셈이나 다름없었고, 창사의 성벽에서 발사된 대포알에 왼쪽 어깨를 맞는다. 소조귀는 부상으로 인해 9월 말 사망하고, 창사 공략은 11월에 완전히 좌절된다. 소조귀의 죽음을 불러온 행동은 중국의 역사가들에게 "영웅주의도 아닌 '멍청한 충성심과 용기'의 또다른 예시"라며 까이게 된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홍수전은 그의 이름을 높이기를 계속했다. 홍수전은 또한 그에게 "우대사(雨大師)"를 추서한다. 그의 두 아들 중 하나가 이 작위를 이어받고 난징 함락 후 죽기까지 예서왕(裔西王)으로 칭해진다. 두 아들 모두 예수의 조카이자 하느님의 손자로 취급되었다.

7. 평가


창사 전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양수청을 견제할 유일한 왕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예수도 하느님보다는 아래인데다 소조귀가 자신의 멍청한 행동으로 인해 최후를 맞았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양수청에게 농락당했을 수도 있다. 단 군대는 어느정도 움직일 줄 아는 수준이었는지 자잘한 군사적 공적은 어느 정도 있다. 명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범장(凡將, 평범한 장수) 정도는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남왕 풍운산처럼 크게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죽어서 평가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1] 양수청의 천부하범과 소조귀의 천형하범이 유사한 데다 양수청과 소조귀가 각각 야훼와 예수에 빙의되었을 때 매우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었기 때문에 친척관계로 안면이 있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신내림을 시전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그다지 근거는 없다.[2] 이때가 배상제회의 최대 위기상황인 것을 고려해야한다. 풍운산은 군중선동 혐의로 광서에 구금된 처지였고 홍수전은 그를 석방시키고자 양광총독에게 탄원하러가서 주 근거지인 광동을 떠난 처지였다. 즉 잘못하면 와해될 수 있는 집단을 퍼포먼스로 극복한 것이다.[3] 단 홍수전도 바보는 아니였기에 스스로를 예수의 형제라고 선언했다. 즉 홍수전은 예수의 형제이기에 하느님과 예수의 대변인(...)인 양수청소조귀 보다 높다고 위치를 다질 수 있는 것.[4]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가 빙의된 몸이 다쳤다고 예수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5] 융안에서 탈출하며 태평천국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