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clearfix]
1. 개요
'''예수'''는 서력기원 무렵에 로마 제국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했던 유대인 성자이다.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그를 살아있는 야훼의 유일한 아들인 성자라 믿는다.
2. 위상
기독교를 비롯하여 '''전 세계 인류 역사와 사상과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전 세계에 미친 객관적인 영향도나 그 범위를 보았을 때 기준이다. 지역적, 문명적으로 그 정도에 차이는 크긴 하지만, 그걸 감안함에도 모든 현대의 문화권에서 예수가 미친 영향은 매우 깊다. 특히 서구 문명권에서 예수의 영향력은 빠질 수가 없다.
단순히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탄생 이후 2000년이 넘은 지금 전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인 25억 명 정도가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다(2015년 기준). 또한 종교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당대 강대국이었던 로마 제국이 4세기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 이래로 유럽은 기독교 국가로서 정체를 가졌기 때문에 문화, 언어, 미술, 음악, 문학 심지어는 이념, 사상, 정치 등에도 예수와 성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 유럽의 기독교 문명은 제국주의 시대 이래 말 그대로 지구 곳곳을 정복하여 전 세계 문명을 서양화시킴으로써 그 영향력을 퍼트렸다. 한국에도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는데 와 닿지 않는다면 지금 날짜부터 확인해보자.
이슬람교도 일반적으로는 기독교와 철천지원수로 생각되기 쉬우나 역시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무슬림들도 삼위일체는 인정하지 않으나 예수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다. 이슬람교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예수(이슬람) 문서 참조.
사회문화적 관점에서는 자신의 민족뿐만이 아니라 종교인을 대상으로 평등과 박애를 전파한 사회운동가로 평가받는다.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였던 유대교에 비해 기독교가 훨씬 널리 퍼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동정녀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5] 하느님을 아버지로, 목수 나자렛의 요셉을 양부로[6] 둔 인물. 한편 예수를 순수한 신화적 인물로 보고 실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있었으나[7] 현재에는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다만 예수의 실존 여부와 별도로 예수의 실제 행적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8]
현대 관점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구분되며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로 간주되지만, 예수 본인은 구약성경이 고백하는 신앙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종교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제자들과 복음사가들은 예수의 행적을 '율법을 완전케 하려 했다'고 해석했다.(마태오 복음서 5장 17절) 때문에 초기 신자들은 자신의 무리들을 혈통적 의미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으로 뭉친 '참 이스라엘'로 보았다. 즉, 초기 기독교 및 현대까지 이어진 오늘날 기독교의 해석에 의해서는, 예수의 가르침(기독교)은 서기 1세기의 신생 종교가 아니라 원래부터 있어왔던 '참 유대교'에 해당한다. 심지어 예수는 창조주의 위격으로서 유대교를 창시한 자로 해석된다. 당연하지만 이거 때문에 유대인들과 갈등을 벌인 것.
3. 이름
그의 이름은 본래 예슈아(יֵשׁוּעַ) 또는 예호슈아(יְהוֹשֻׁעַ)라는 흔한 유대인 이름이었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딱히 다른 사람 언급할 필요가 없어서 언급이 적을 뿐, 신약 성경을 자세히 보면 동명이인도 있을 정도다. 이것은 구약의 지도자(혹 지휘자) 중의 한명인 여호수아가 어원이다.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구원해주신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쓰였기 때문에 이에수스(Ἰησοῦς)라는 그리스 느낌의 이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스 문자에는 숫자가 할당되어있는데[9] , Ἰησοῦς는 각각 10, 8, 200, 70, 400, 200을 상징해 합치면 888이 된다.
한국어 이름인 예수는 대항해시대 선교활동을 펼친 가톨릭 사제들이 사용한 라틴어 성경의 Iesus에서 유래한 것이다. 라틴어 발음 듣기. Iesus가 라틴어 명사의 6개 격변화 중 4개에서 Iesu로 변해 이 형태를 한자로 옮기며 예수로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유럽 언어에서 Jesus로 적는 것은 본래 라틴어 발음상 I와 J가 차이가 적어 섞여 쓰이다 J형태로 다른 유럽어에 전파되어 이후 각 언어식으로 발음(영어는 지저스, 독일어는 예주스, 스페인어는 헤수스 등)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메시아(מָשִׁיחַ, mashíakh)라는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번역이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고대 이스라엘의 전승에서 기름 부음의 의식은 크게 3가지 경우로, 특정인을 지명하는 경우에 해당이 된다. 왕, 대제사장 - 하느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의 주관자, 그리고 선지자 - 혹은 선견자, 예언자 - 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예수는 이 3가지의 소임 각각에 대한 정체성을 동시에 띄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예수는 신약성경 내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왕, 대제사장, 예언자라는 이스라엘 민족 내부의 매우 중요한 소임을 통합적이고 최종적으로 부여받은 유일한 존재로 통용된다. 예를 들어 왕의 소임을 보면, 이는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붓는 대관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기름 부음을 받는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었다.[10] 이 전통은 사울에게서 시작하여 다윗 때 확립된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다윗처럼 이민족을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에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지도자를 의미했다.
나자렛 출신이라는 의미로 나자렛 또는 나사렛 예수라고도 불린다. 공동번역성서와 가톨릭 번역에서는 '나자렛'을, 대부분의 개신교 계열 번역에서는 '나사렛'을 사용한다. 예수가 살던 시절 라틴어로는 예수스 나자레누스(Iesus Nazarenus). 이에 대해 유대인에 풍습에 의거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유대인이 성(姓)을 구별하는 방법이 2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누구의 아들 누구 의 방식인데, 한 예로 예수의 12제자(혹 사도#s-2)중에 야고보라 칭하는(이름하는) 자가 둘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다. 둘째로, 지명을 이용한 성인데 예수와 관련된 시몬으로써 첫째는 예수의 수제자이며 베드로(혹 게바/케바)라고도 불리는 갈릴래아(게넷사렛) 베드로가 있고, 예수가 십자가를 드는 것을 도와 준 퀴레네 시몬이 있다. 다만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성모 마리아와 나자렛의 성 요셉이 예수를 낳은 후 헤로데 대왕의 마수를 피해 베들레헴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해 있다가 그가 죽은 뒤 돌아와 정착한 곳이 나자렛이라고 되어 있다. 이 이야기의 진위에 대해서는 후술되는 탄생 문단 참고.
그 밖에 '임마누엘'(עִמָּנוּאֵל)이라고도 지칭되었다. 뜻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처녀에게서 탄생한다는 것을 예언하는 말을 구약 이사야 7장 14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은 당대 유다 왕국 왕인 아하즈(기원전 736~716 재위)에게 메시아 강림을 전한 것이다. 성경 해석 과정의 예언 성취에는 부분 성취와 반복 성취가 있는데, 이는 아하즈 왕 시대에 실제로 임마누엘이라는 아이가 태어나 예표가 되었고, 예수의 탄생으로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십자가형을 받아 죽을 때의 예수의 죄명은 바로 로마 제국에 반역하는 민족 지도자라는 의미인 '유대인의 왕'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 총독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있었고, 사형을 내릴 수 있는 기관도 총독부여서, 사형 제도가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형에 처해질 만큼의 죄는 무자비한 살인이나, 쿠데타 정도가 되지 않고서는 사형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는 당연히 살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쿠데타를 한 정치범으로 몰아서 처형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명패를 십자가 머리에 붙이고 형을 받았다. 때문에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성물로 여기는 예수의 십자고상 등에는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나자렛 사람 예수, 유다인의 왕)'의 머릿글자인 'INRI'를 흔히 볼 수있다.
4. 각 종교에서 보는 예수
- 기독교에 의하면 온 인류의 구세주(메시아)이자 성부(聖父), 성령(聖靈)과 다른 위격(페르소나)이되 본질(essence) 및 본성(nature)은 같은 자로, 그의 실체(substance)는 신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선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책의 진(眞) 주인공이며 책의 전반부 자체가 이 사람의 등장에 대한 복선이다.[11]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100% 거짓 없는 신이면서 또한 100% 거짓 없는 인간이며, 창조되지 않은 자,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한 자이다. 그는 창조주임에도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론. 물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초기 기독교 종파도 있었지만 일찍이 사라졌다.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기독교 종파들은, 서방의 가톨릭이든, 동방의 정교회이든, 이집트의 콥트교회이든, 에티오피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 간에 구체적인 해석은 갈릴지언정,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즉 세 페르소나가 한 실체를 이룬다는 교리는 공유한다. 또한 이 기본 개념에 대한 정의도 콘스탄티누스 1세때 나온 것이라 늦은 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엄밀한 정의가 늦게 나왔다는 뜻이지, 삼위일체 개념 자체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성부와 동질성을 가진다고 해석될 구절이 많았고, 반대로 구분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도 많았다. 여기서 양극단[12] 을 우선 쳐내고, 그리스 철학을 통해 복음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한 결과물이 지금의 삼위일체 정의이다.
- 이슬람에서는, 24번째(마지막 예언자 이전 최후)의 신성을 가지지 않은, 신도 신의 아들도 아닌 인간인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된다. 쿠란에 따르면 예수는 다만 특별히 죄가 없는 인간이며, '하늘로 승천하였다'라고 하지만 이슬람교에선 이를 신이 영광스럽게 했다고 해석한다. 이슬람에서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급의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 받지만 결정적으로 기독교와 다른 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다는 점. 이슬람에 의하면 신에게는 부모도 아들도 없고 딸도 없다.[13]
-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거짓된 예언자로 간주한다. 타나크(히브리 성서) 신명기에 '거짓 예언자'에 대한 묘사가 있다. 세속적 의미에서 세상을 평정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할 구세주로서 메시아를 기대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선 이단 중의 이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과거의 경우 유대인들에게서의 예수는 그저 사기꾼 정도로 여겨졌으나, 현대에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개혁에 실패한 젊은 사상가 혹은 랍비로 보는 경향이 생겼고, 심지어 예수를 본받는 랍비 및 메시아주의 유대교 분파도 있다. 실제로 예수를 유대교에 도전한 혁명가로 볼 수 있지만, 살인, 간음, 이혼, 맹세, '귀에는 귀, 눈에는 눈'을 가리키는 유대교의 모세율법에 대해서 예수가 새로운 해석과 명령을 제시하므로[14] 타나크(히브리 성서)의 율법을 철폐하지 않으면서도(율법의 연속성) 율법을 완성한다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현지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하고, 예수에 대해 그나마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유대인들도 예수를 메시아로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 메시아주의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교리 하나 때문에 메시아주의 유대인들은 스스로 유대인을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서나 기독교에서나 둘 다 기독교에 더 가까운 존재들로 생각하고 있다.
- 바하이 신앙에서는 예수를 인정하나, 하느님의 아들로는 인정하지 않고 예언자이자 현시자로 정의한다. 이는 이슬람의 관점과 동일하다. 그가 신약을 전한 것도 인정하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부활, 그가 행한 기적들도 인정한다.
- 다신교인 힌두교에서 예수는 에아사(Easa)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칼리 유가가 3000살이 되던 해 후나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며, 유대 민족의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다. 힌두교 내에서 예수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며, 어떤 이들은 예수를 수 많은 신 중 하나로 숭배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그저 인간으로서 신의 아들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4.1.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예수의 정체
기독교는 탄생 시점에는 일단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로 보았다. 하지만 이조차 기존 유대교의 메시아 관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유대교의 메시아는 세속적인 군주, 정확하게는 '유대민족을 이끌 정치적인 지도자 혹은, 압제받는[15] 유대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영웅' 이었는데, 기독교에서는 세상의 종말 때 이 세상을 심판할 구세주의 개념으로 바라본 것. 이 때문에 초기부터 정통 유대교 신학과 마찰이 있었고, 사도 바오로에 의해 헬레니즘 세계에 기독교가 퍼질 때는 신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기존 그리스 신화에서 흔히 나오는 반인반신과 혼동이 되어 또 마찰이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반기독교에서 언급되는 떡밥인 "예수는 마리아와 로마 병사 사이에서 난 사생아다." 따위의 패드립 역시 그 때에 생긴 주장이다. 어쨌건 그에 따라 기독교는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다구리(?)를 맞았고, 예수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 받았다. 이를 희랍 철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한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16]
기독교에 의하면 온 인류의 구세주이자 성부, 성령과 다른 위격(persona)이되 본질(essence) 및 본성(nature)은 같은 자로, 그의 실체(substance)는 하느님이다. 기독교에서 묘사하는 예수는 100% 거짓 없는 하느님이면서 또한 거짓 없는 인간이며, 창조되지 않은 자,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한 자이다. 그는 창조주임에도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론'''. 물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초기 기독교 종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일찍이 사라졌다.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기독교 종파들은, 서방의 가톨릭이든, 동방의 정교회이든, 이집트의 콥트교회이든, 에티오피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 간에 구체적인 해석은 갈릴지언정,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즉 세 위격이 한 실체를 이룬다는 교리는 공유한다. 또한 이 기본 개념에 대한 정의도 콘스탄티누스 1세때 나온 것이라 늦은 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엄밀한 정의가 늦게 나왔다는 뜻이지, 삼위일체 개념 자체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성부와 동질성을 가진다고 해석될 구절이 많았고, 반대로 구분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도 많았다. 여기서 양극단[17] 을 우선 쳐내고, 그리스 철학을 통해 복음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한 결과물이 지금의 삼위일체 정의이다.
[18]교부(敎父)들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일치 안에서 한 분이시며 같은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데, 그는 신성(神性)에 완전하시며, 동시에 인성(人性)도 완전한 분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시며, 또한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의 신성은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며, 그의 인격은 우리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는데, 죄로부터는 떨어져 있으나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같으시고, 그의 신성에 관해서는 역사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고, 그러나 그의 인간적 출생에 관해서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한 분이시고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는 2가지 본성으로 인식되는 바,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계신 분이며, 본성들의 차이는 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각 본성의 특징들은 보존되고, 한 위격과 생존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오며, 두 위격으로 분리되거나 나눠짐 없이 한 분 같은 성자요 독생자이시며, 말씀,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와 같은 사실은 심지어 가장 최초의 예언자도 그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로도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케돈 신조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聖父)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14절.
기독교적 관점에서 예수의 정체를 유추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은 요한 복음서이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는 한처음에[19] 하느님과 같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예수는 하느님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20]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말로, 예수가 인간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8절.
요한 복음서의 이 구절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100% 인간이면서[21] 또한 100% 하느님이라고 본다. 또한 예수가 하느님이면, 기독교가 어째서 유일신교가 되냐는 의문이 나오자 삼위일체론으로 이것을 설명했다. 즉 성부는 하느님이고, 예수도 하느님이며, 성령도 하느님이지만, 성부 = 예수 = 성령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음 구절들을 보면 이 뜻은 더 명확해진다.[22]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God replied to Moses: I am who '''I am'''. Then he added: This is what you will tell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출애굽기(탈출기) 3장 14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He said to them, “You belong to what is below, I belong to what is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but I do not belong to this world. That is why I told you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you will die in your sins.”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Jesus said to them, “What I told you from the beginning. I have much to say about you in condemnation. But the one who sent me is true, and what I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They did not realize that he was speaking to them of the Father. So Jesus said (to them), “When you lift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realize that I AM,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I say only what the Father taught me.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Because he spoke this way,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요한의 복음서 8장 23-30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고백하는 초월자를 뜻하는 말인 야훼는, '나는 있다', '나는 나다' 등의 뜻이며 영어로 하면 'I AM'이 된다. 그런데 인용한 구절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I AM으로 소개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자신을 야훼라고 드러냈다.[2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Jesus said to them, “Amen, amen, I say to you,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23]
요한 복음서 8장 58절
문제는 이 교리는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점이며, 초기 기독교의 분열은 대부분 이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이거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아리우스파,[25] 네스토리우스파,[26] 오리엔트 정교회[27] 등이 떨어져 나갔으며, 급기야 초대교회 자체가 가톨릭과[28] 정교회로[29] 찢어져 버렸다.
성경의 텍스트에서도 예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30] 성경 텍스트의 그리스도론은 '한 줄 요약' 식으로 과격하게 요약되지 않고, 여러 설명들이 마치 칼케돈 신경에서처럼 긴장 관계를 이루며 예수를 논한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예언자이지만 예언자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메시아이지만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며,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아들이며, 모세의 역할과 하느님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31]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나 종의 모습을 취한,[32] 하느님과 함께 있는 하느님,[33] 한 분이신 주님이다.[34]
한편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인 유대교와 이슬람에서는 바로 이 삼위일체론 때문에, 기독교를 다신교라고 디스한다.[35]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삼위일체론 문서를 참고해 보자.
4.1.1. 혈통
성경에 따르면, 즉 마태오 복음서 1장에서 기록된 예수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나온다.[36] 루카 복음서 마찬가지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계보를 서술했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족보의 차이는 신학계에서 자주 다뤄진 떡밥.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해당 서술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관념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메시아 탄생 때에는 특별한 하느님의 표징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서술로 추측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며 나자렛의 요셉에게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데, 해당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동정녀가 아닌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젊은 여인'이다. 그런데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역 성경에서는 그것을 동정녀로 옮긴다.[37]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특별한 표징' 중에는 처녀 잉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현대 신학계에서는 족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두 복음서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서술되었지만 서로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거슬러가고, 루카 복음서는 아담과 하느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서술한 것이며, 루카 복음서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모든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4.1.2. 구약
흔히 예수가 구약의 율법을 폐지하였다고 표현되지만, 이 표현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예수 자신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가 보는 구약의 율법은, 예수가 폐지한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다. 또한 같은 원리로, 신약은 구약을 폐지하지 않는다.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의 복음서 5장 17절
오히려 율법을 포함한 구약 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지, 폐기되고 사라져야 할 무언가로 여겨지지 않았다.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루가 24장 25-27절, 44-46절(공동번역)
물론 구약 율법 전체를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자구적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구약을 어떻게 수용하여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율법을 '시효가 지난' 텍스트로 보는 것은 신약성경 본문의 자기 이해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약이 구약을 부정한다고 오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독법이다.[39] 그렇기에 기독교는 상술했다시피 구약에서는 예수와 관련하여 예형론적으로 읽는다. 이를테면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을 보자.그리스도교가 자신의 바탕으로서 이스라엘의 성경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고 그분을 통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역사役事에 관한 소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거듭 책―이스라엘의 성경―을 자구대로 인용하거나 관련 제재題材들을 들여온다. '율법과 예언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 증언을 해석하고 정당화해 주는 지평이다. …… 교회가 이스라엘 성경을 자기 성경의 첫째 부분으로 삼은 것은 강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성경의 문서들은 이론의 여 지 없는 계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은 자신들의 예수 선포에 범주적 전달 가능성, 설득력,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 문서들을 되잡았다. 신약성경 문서들이 이스라엘 성경에 터하여 쓰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성경 독해의 해석학적 단초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 성경'''(또는 그냥 구약성경)'''의 빛 안에서 읽혀야 한다.''' 자주 인용되는 고대 교회의 성서학자요 번역자인 히에로니무스의 말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를, '구약성경을 알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살짝 바꿔 말할 수 있겠다.
-Erich Zenger 씀, 이종한 옮김, 《구약성경 개론》 22-23쪽[38]
이 구절은 이른바 '야훼의 종'으로 불리는 이에 대한 구절로, 타인의 악행과 죄악을 짊어지고는 재판을 통하여 죽는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초월자에게 벌 받은 자로 여겨지며,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예수는 바로 이 '야훼의 종'의 행적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하였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있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주장하였다.[42] 또한 예수는 나자렛에서는
라며 이사야 61장 1-2절을 칠십인역에 따라 자유롭게 인용하여,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강조했다.[43] 그 밖에도 자신이 요나의 기적을[44]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빵으로 장정 5천명 이상을 먹인 기적에서는 출애굽기의 만나 및 예언자 엘리사의 기적을 자신에게 연관시킨다. 또한 신명기에는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 있다."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루가의 복음서 4장 18-19절
그런데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수명을 마치고 난 후, 후일담 격으로 나오는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 신명기 18장 15절
즉 모세는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보내줄 것이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였는데, 정작 신명기의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시대까지 모세 급 예언자는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는 이 떡밥이 회수되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과 (부자(父子) 관계로 표현되는) 매우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를 이루며, 자신을 보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며, 자신이 아버지와 어떤 동일함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이라는 모세 급 예언자의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동시에 그 조건을 뛰어넘는 예언자임을 표현한다. 그 밖에도, 예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고, 복선이 뿌려져 있는 자라는 점을 계속 강조한다. 그렇기에 구약을 예수에 대한 복선과 떡밥을 찾으며 읽는 것은, 기독교에서 매우 권장하는 독서법이다.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 신명기 34장 10절
주의를 주자면, 그렇다고 해서 구약 본문의 1차적인 의미를 등한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 씀.[45]
4.2. 이슬람의 관점에서 본 예수의 정체
이슬람에서의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 구세주 예수(المسيح عيسى بن مريم, 알마시흐 이사 이븐 마르얌)'로 불리며, 24번째(마지막 예언자 이전 최후)의 신성을 가지지 않은, 하느님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도 아닌 인간인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된다. 이슬람에서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급의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받는다.
4.2.1. 기독교와의 차이점
이슬람에서 예수는 모세, 무함마드와 같이 하나님이 인류에 내린 예언자 중 하나이다. 이슬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이슬람이 기독교의 적이니 예수를 싫어할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슬람과 기독교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 뿌리가 같다. 기본적인 연대기와 행적, 기적 등은 기독교와 같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기독교와의 시각차가 있다. 결정적으로 기독교와 다른 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다는 점. 이슬람에 의하면 하나님에게는 "부모도 아들도 없고 딸도 없다."고 한다.[46]
우선 이슬람에서는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중 하나로, 무한히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는 이슬람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신성을 가지지 못한다. 무함마드나 예수가 인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예언자인 건 맞지만 그들은 모두와 같이 생로병사가 있는 인간이며,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것은 엄연히 금지되며 무함마드 본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버지도 아들도 없이 홀로 계신 분이다. 즉, 예언자건 누구건 간에 아들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자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령은 하느님 자체가 아니라 단순히 하느님이 부리는 능력이자 힘, 혹은 천사인 것으로 인식한다. 즉 삼위일체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image]
만화 코란(박정환, 2005)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자세한 사정은 나오지 않지만, 쿠란에서 하나님은 예수가 불신자에게 고통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수난은 그저 인간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며,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예수가 아니라 배신자 이스카리옷 유다라고 나온다. 애초에 죽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가 죽은 것처럼 사람들을 속인 뒤 예수를 하늘로 끌어올려주었기 때문에 인정된다. 예수는 현재 하나님의 곁에 있으며 심판의 날에 다시 내려올 것이다. 즉 예수도 인간인 만큼 일단 죽으면 다시 부활할 수 없는 건 여느 인간과 같지만, 애초에 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쿠란에서는 총 25명의 예언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는 그 중 무함마드 직전 마지막 예언자이고 무함마드가 최종적인 예언자이다.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각 민족마다 수도 없이 많이 세상에 내보냈는데 그 중 중요한 예언자가 모세, 예수, 무함마드 이렇게 셋이라고 가르친다.[47] 실제로 무함마드가 꿈에서 모세를 만나, 하루에 몇 번 기도하는 것이 좋을지 상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슬림들 중에 종종 '이사(عيسى, ʿĪsā)'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이슬람권에서 예수를 일컫는 이름이다.
중세 한발리파 신학자였던 이븐 타이미야는 사실 그리스도교인들보다 무슬림들이 예수를 더 존경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예언자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가르침(이슬람)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경전을 왜곡하여 이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세 이슬람 역사가였던 이븐 카시르는 모세가 살던 시절에는 마술이,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의학이, 무함마드가 살던 아랍 사회에서는 시가 중시되던 사회였으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는 파라오의 모든 마술사들을 능가할 수 있는 마술 실력을 예수에게는 다른 의사들을 능가하는 치유력을 무함마드에게는 다른 시인들을 능가할 수 있는 글인 꾸란을 내려주었다는 서술을 남겼다.
4.2.2. 기독교의 영향
몇몇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슬람의 탄생의 배후에 네스토리우스교의 예수 이해가 내포되어있을 수 있다고 한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예수 안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엄격히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제도교회의 핍박으로 동쪽으로 쭉 도피한 네스토리우스 교회들은 파르티아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북상할 무렵 중요 도시에 발판을 마련하고 아랍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학교와 수도원이 결합된 제도로서 흩어져 있던 네스토리우스 신자들에게 어려운 환경에도 생존할 수 있는 지식과 신앙심을 부여하고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가지게 해 주었다.
만약 정말로 이슬람에 네스토리우스교의 예수 이해가 반영된 것이라면, 무함마드가 어린 시절 삼촌과 같이 시리아에 무역을 하러 가던 중 어느 늙은 수도자에게서 환영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일화에서의 수도자가 네스토리우스교의 수도자일 수도 있게 된다. 또한 무함마드가 히라 산 동굴에서 첫 번째 계시를 받은 이후 찾아간 사람 중 한 명이 “와라끄 빈 나우팔”[48] 은 기독교인이었다. 와라끄(아랍어로 ‘종이’)라는 이름을 보면 기독교 교리에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춰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와 신을 분리해서 본 아리우스파 및 유니테리언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반면 단성론과는 상극이다. 이집트는 이슬람주의의 박해가 극심한 지금까지도 비칼케돈 합성론 기독교의 중심지이다. 반면 카르타고는 단성론이 번성하던 이집트와 시리아보다 무슬림에게 늦게 정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49] 바로 카르타고가 위치한 이프리키야가 도나투스파[50] 의 집산지였던데다 반달 왕국의 영향으로 아리우스파의 영향력 및 아타나시우스 파 사이의 긴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 VS 정통 칼케돈 교리와 아리우스파가 난립하던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거 동로마 제국 영토 중에서 가장 빠른 개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51]
5. 생애
5.1. 일러두기
역사적 예수, 곧 역사 비평적 방법론의 관점에서 본 예수의 생애에 대해 작성하였다.
그러나 본 문서의 서술이 예수의 역사적 행적을 완전히 재구성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 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자의 생각과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예수에게 투영하는 것이므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구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슈바이처는 자신도 역사적 예수에게 자신의 생각을 투영한다. 슈바이처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죽여서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인물로 표현된다. 슈바이처는 그리스도가 아닌 역사적 예수만을 믿었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신학자의 삶을 버리고 의학을 공부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물론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연구자들 내에서도 합의를 볼 수 있는 지점은 있기에 불완전하게나마 역사적 예수를 논할 수는 있다. 또한 역사적 예수라는 개념이 서방 그리스도교의 역사 비평적 성서주석학과 상당히 많은 개념이 겹치기에,[52] 교계에서 가르치는 예수와 역사적 예수의 차이도 21세기 기준으로는 상당히 흐릿해져있다,[53] 따라서 역사 비평적 관점의 연구 성과가 잘 반영되어 있다면 굳이 '역사적 예수'라는 키워드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훌륭한 '역사적 예수' 자료로 쓸 수 있다. 이 문서를 읽을 때는 이를 감안해야 하며, 기여자들도 이 점들을 고려해서 작성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 문서도 참고.
5.2. 탄생 배경
예수의 조상이나 가계는 역사적으로는 불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에 귀족이나 제사장 출신도 아닌 서민의 집안에서 가계를 기록하는 경우는 없었고 대체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까운 조상 정도의 계보나 자신이 어느 지파 소속인지만을 기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경 기록에서 기적이나 신비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본다면, 로마 제국의 사실 상 식민지인 이스라엘 왕국[54] 의, 북부 지역인 갈릴래아 지방의, 촌락 나자렛에서 목수 요셉과 성모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파에 대해서는 바오로의 서간에서 "유다 지파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서술되어 있다. 바오로가 유대인이기에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써 메시아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라는 것만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증거로는 상당히 빈약하다. 대다수의 역사적 예수론에서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는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하는 유대인들의 사상을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인 결과 "신학적 진술의 역사화"로서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55]
"신학적 진술의 역사화"이론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우선, 다윗의 자손이라는 조건이 메시아로 인정받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제시한다. 가령 2세기 초 바 코흐바(Bar Kochba, Simon ben Kosibah)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었음에도 랍비 아키바 등에 의해 메시아적 인물로 추앙 받았다. 아울러 주의 형제 야고보 등 초기 교회에서 알려진 예수의 친족들이 다윗 자손이라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 묵인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유대인들이 혈통에 대해 사생아라는 비난은 가했을지언정 다윗 자손이라는 주장에 대해 논쟁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다윗 혈통이 전적으로 꾸며진 것이라고 본다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신약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바오로의 서신에서도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56] 하며, 제일 이른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당당하게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주장한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57]
다만 다윗의 혈통과의 관계를 긍정하는 측에서도, 다윗 자체가 다소 신화적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나자렛의 요셉은 왕족의 직계보다는 방계 인물이었거나 그저 '요셉 당대에 다윗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윗의 실존성 자체가 애매하니, 예수의 조상 세대 중 하나가 유다 지파라는 점으로 갑자기 다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이 요셉 세대까지 이어진 것일 수도 있고, 설령 다윗이 실존했다해도 다윗과 예수의 세대 사이에 얼마나 많은 유다 지파 후손들이 있었겠는가. 한국으로 치면 박씨나 김해 김씨가 박혁거세나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 정도 밖에 안된다.
어쨌건 성경에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1장에서 기록된 예수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나온다.[58] 루가의 복음서 마찬가지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계보를 서술했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족보의 차이는 신학계에서 자주 다뤄진 떡밥.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해당 서술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관념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메시아 탄생 때에는 특별한 신의 표징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서술로 추측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며 나자렛의 요셉에게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데, 해당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동정녀가 아닌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젊은 여인'이다. 그런데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역 성경에서는 그것을 동정녀로 옮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의 특별한 표징' 중에는 처녀 잉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구세주의 동정녀 출생 신화 부분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주장된다.[59]
현대 신학계에서는 족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두 복음서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서술되었지만 서로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거슬러가고, 루카 복음서는 아담과 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서술한 것이며, 루카 복음서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모든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두 복음서 모두 다윗의 후손인 나자렛의 요셉과 성모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야했으며, 예수는 그때 출산하여 나자렛에서 자랐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관념을 적용한 서술. 마태오 복음서에는 나자렛에서 살던 마리아-요셉 부부가 왜 뜬금없이 베들레헴에 있었나 이유를 말해주지 않지만 루카 복음서는 호적 조사 때문에 잠시 간 것이라고 한다. 단 역사적으로는 어느 시점의 호구 조사인지 불분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도 메시아가 태어날 수 있는 지역임을 강조하기 위해 2장 6절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라는 미가서 5장 1절, 사무엘하 5장 2절을 섞은 인용을 하고 있다.
설명하자면, 당시 유대 땅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 왕족, 귀족의 후예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남유다 지역에 몰려서 살았는데,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귀족, 왕족 출신들도 내려와서 같이 살게 되면서 하나의 타운을 형성한다. 그 타운은 크게 도시들의 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크게 예루살렘, 여리고, 베들레헴 등 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서 필자는 위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베들레헴도 과거에 왕족들이 타운을 형성했던 고을이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덧붙이려는 의도로 헤로데 대왕과 제사장들의 대화를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역사적 예수론에서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예수 탄생 서술은, 실제로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로 해석된다. 예수가 나자렛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팩트이기 때문에,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구약 성경 해석에 끼워맞추기 위해 어떻게든 구약 성경 상의 근거를 붙이다보니 실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 서술되었다는 것.
5.3. 탄생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헤로데 대왕 통치 시절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고,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호구 조사를 할 때 태어났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4년에 죽었고,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이 된 건 기원후 6년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기원후 1년은 물론 기원전 4년에도 호적조사는 없었다.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첫 호구조사라는 기록을 따라도, 기원후 6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 로마 기록을 대입하면 좀 더 아스트랄해진다. 로마 제국의 경우는 인구조사관이 따로 있어서 각지의 인구를 조사한 통계를 남기는 경우인데, 기록에 의거하면 내전 등의 요인으로 해서 켄소르(Censor), 즉 조사관이 인구조사를 한 것이 기원전 8년과 기원후 14년으로 기록된다. 달리 말해서, 기원후 6년의 조사 역시 불분명하며, 적어도 경전 기록대로 하여 황제가 지시한 호구조사나 공식 조사는 아니거나 혹은 애초에 그조차 틀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즉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탄생기를 몰랐다는 것이 확실하며, 예수의 탄생기는 복음서 저자들이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반영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상깊게 기억하는 동방박사 이야기는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만 나오는 이야기. 마태 복음만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지만, 루카의 복음서를 신뢰하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처음 온 사람들은 당대에는 그지없이 가난한 이들인 목자들이었다.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이 바친 세 보물인 황금, 유향, 몰약은 현대 신학에서는 세속의 왕권, 종교적 권력,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금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부의 상징이며, 유향은 당시 종교적 의례를 위한 필수품이었으며, 몰약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장례 때 죽은 이의 유해를 수습할 때 바르는 것이었다. 특히 몰약은 장례식 용품을 갓난아기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론 꽤나 황당하지만, 신학적 의미를 고려하면 밑에 서술하듯 기독교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예수의 부활임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루카 복음서에서 목자들이 예수 탄생을 처음 경배한 것은 루카 복음서의 "예수는 세상에서 제일 미천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목자는 당시부터 이미 극히 가난하고 별 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재산을 지키는 막노동으로써 매우 낮은 직업으로 취급되었기 때문. 루카의 기록에서 목자를 예수 탄생을 처음 경배하는 이들로 설정된 것은 신학적 의미가 크다.
흔히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로 알려져 있지만,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실제 생일이 아니라는 것은 기독교 내에서도 정론이다. 가톨릭 대사전의 '예수 성탄' 문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전통적인 기념일, 예수의 실질적인 탄생일에 관하여 구약전승과 신약성서에는 기록된 바가 없고,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의 날짜나 교회에서 성탄의 의식(儀式)을 실제로 시작한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 날은 어디까지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지, 탄생한 날은 아니다.
일단 목동들이 밖에서 양을 치다가 노숙할 정도였으면 겨울은 아니며, 오히려 초여름으로 추정된다. 12월 25일이란 날짜는 3세기경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인기 있던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무적의 태양신)의 생일이었다.[60] 쉽게 말하면 이러하다. 로마인들은 12월 25일에 솔 인벡투스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축제를 벌였다. 당연히 기독교 처지에선 솔 인벡투스의 탄생을 축하하는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축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솔 인벡투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합시다"라고 말한 것. 율리우스력에서는 12월 25일이 동지, 즉 해가 뜨는 시간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었기 때문. 이 시절에는 동짓점 절입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게 아니라, 달력에서 대충 며칠쯤에 오면 그 날이 무슨 날이라고 정하자는 식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로마 제국 시대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포용(정복)하기 위해 임의로 정한 날이라는 것. 때문에 일부 소수 신자들 중에선 세속화된 크리스마스를 안 지키고 진짜 탄생일로 추정되는 날을 계산해서 기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쪽 또한 부정확한 것은 마찬가지. 애초에 참고할 유일한 기록인 성경 자체가 저자들이 예수의 탄생 시기를 전혀 몰랐으니 정확한 날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게 맞다.
그 외에 예수가 3월 25일, 즉 춘분 무렵에 수태되었다는 신비적 이유로 9개월을 더하니 자동적으로 12월 25일이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꽤 정밀한 전례학 자료 고증을 통한 설도 새로 제시되었으나, 대부분 책들이 전례학과는 거리가 먼 데서 자료를 찾다 보니… 이에 따라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공인되기 이전인 2세기 중엽 무렵부터 예수의 탄생에 대한 논란이 나타났으며, 3세기부터 많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기념했다는 설도 강조되고 있다. 12월 25일이라는 날짜에 여러 의미들이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립적일 듯하다. [61] 또한 출생 당시 양치기들이 양을 치고 있다는 기록이 루카 복음서 2장 8~20절에 나오는데, 당시의 양치기들은 겨울에 바깥일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9월이라는 기록이 신빙성이 더 있을 수 있다. 이전 판본에서는 1월 4일이라고 했는데, 이건 정교회에서 아직도 율리우스력을 쓰기 때문에 동짓날이 달라진 것이다. 태양력 문서에 보다시피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은 그레고리력 제정 당시 10일 차이가 났다.
어쨌든 자신의 생일이라 간주하는 날에 상당수의 인류에게 빼먹지 않고 꼬박고박 매년 축하를 받는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불문하고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지만, 성경에는 마구간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저 말구유에 뉘였다는 서술이 있을 뿐. 사실 마굿간으로 간주하는 것도 서방 기독교권의 이야기고, 그리스를 비롯한 동방 교회권은 예수가 마을 인근의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정교회 전승에 따르면 요셉은 방이 없자 마을 인근의 동굴로 피신해서 짚을 깔고 낳았다고.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기념 성당도 그 동굴 위에 지어졌다. 따지고 보면 여관에 방이 없다는 이유로 마구간에서 출산한다는 것 자체가 뜬금없지 않은가? 당시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부유한 가정 아니면 가축이 사는 공간과 사람이 사는 공간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유럽, 아니 전세계적으로도 중세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집은 가축 사는 곳과 사람 사는 곳이 나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인들은 해당 성경 구절을 듣고서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62] "라는 구절을 "여관에 자리가 없어서, 아기가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말구유에 눕혔다."고 해석하는 것 자체는 현대인들 기준으로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 구유에서 포에 싸진 상태로 구유에 뉘어졌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신의 가호를 받은 존재라는 증표였다는 견해도 있다. 유대교에서 포와 구유는 신의 보호를 상징한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헤로데 대왕이 자신의 자녀가 아닌 엉뚱한 자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태어났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에 두려움을 느끼고 베들레헴의 갓난 아기들을 학살했다고 서술했으나, 역사적 사실로 보이진 않는다. 애초에 위에서 서술하였듯 동방박사의 방문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기 때문. 굳이 따지자면, 인구 조사 자료를 토대로 추산하면 약 20명의 아이를 죽였을거라 추산할 수 있긴 하다. 현대 신학에서, 헤로데 대왕의 유아 학살 부분은 구약 성경에서 출애굽기의 모세 신화를 모티프로 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해석하는 메타포로써 서술한 부분이라는 것.
한편, 유대교의 경전인 '(예루살렘) 탈무드'에는 예수 탄생시기에 '판델라'라는 로마의 군인의 간통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해당 사건에서 태어난 아기를 예수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63][64][65] . 다만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탈무드의 속보성이 오히려 복음서보다도 늦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탈무드 자체가 복음서의 처녀 수태 설화의 영향으로 예수의 사생아설을 주장한다는 반박도 존재한다.
5.4. 공생애 이전의 삶
예수의 직업은 성경에서 '목수의 아들 또는 목수'[66] 로 등장한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그렇게 묘사된 것으로 보아 서구에서도 그런 인식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를 들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가구 제작 장인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은 부적절한데, 원어인 그리스어로는 텍톤(tekton)은 목재를 사용하는 것이든 석재를 사용하는 것이든 '건물을 짓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 한국어 성경에서는 '목수'로 번역되었고 영어 성경에서는 'carpenter'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옛날에는 나무로 집을 지었고, 한국도 영국도 옛날엔 가구를 만드는 목수와 집을 짓는 목수가 따로 구분이 엄격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번역이다. 어쨌건 사람들이 목공소에서 일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게 되어 버렸으니 오역이라 할 만한 번역이다.
예수가 살던 나자렛 근처는 나무가 적고, 그리스 풍 신도시가 건설되던 시기였으므로 목재보단 석재를 써서 일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통해 석공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어의 중의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아예 건설업자라고 옮기는 게 제일 정확할 수도 있겠다. 다음과 같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언급이 간접적, 정황적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 마르코의 복음서 14장 58절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 마태오의 복음서 7장 24-27절
즉 건설에 관한 비유를 여럿 하고 있다. 그에 반해 목재나 석재를 써서 일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비유는 찾기 힘들다. 결국 한국어 단어의 목수나 석공이라는 단어는 나무·돌을 이용해 건물뿐만 아니라 소도구나 가구를 만드는 사람도 포함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번역이 미묘하게 엇나가게 된다.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10-11절
또 예수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거나 규모가 큰 사업을 하는 부유층이라는 증거는 전무하고 오히려 반대일 정황이 많기 때문에, 예수의 직업은 소위 말하는 노가다꾼, 즉 건설 인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근대에는 도시와 상공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해서 농사 지을 땅이 없이 건설 인부 노릇만 했다면 예수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을 것이다. 역사적 예수론이 잘 반영된 최근 소설, 영상 등 창작물에선 공구함 하나만 가지고 건설현장으로 출퇴근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
기존 4대 복음서는 인간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보여주기 위해 쓰인 것이라 역사적 예수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 그나마 예수를 가장 인간적으로 조명한 복음서는 루가의 복음서이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친척 관계로 묘사하며, 세례자 요한 잉태 여섯째 달에 예수가 잉태되었다고 말한다. 또 예수가 12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담을 나눴으며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경인 베드로 복음 등에서는 어린 시절의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으나, 위경으로 지정되어서 가십거리 이상은 되지 못하는 듯.
마르코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린 시절을 생략하지만 공통적으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복음서에서는 이것을 '세례자 요한은 자기 다음에 나타날 구세주를 예견하기 위한 존재였기 때문이고, 예수가 그 구원자였기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얼버무리지만, 복음서 본문에서도 세례자 요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등의 내용을 보면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거나 동료였을 가능성이 높다.
5.5. 공생애
예수는 모종의 이유로 세례자 요한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30살 즘에 공생애를 시작했다고 기록한다.예수께서는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는데
예수의 신학 핵심은 신의 정의(正義) 실현과 죄의 용서였다. 이 신학은 당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던 이사야 예언자의 신학과 다니엘서의 종말론, 에세네파의 메시아론이 혼합된 복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 기존의 예언들과 구분되는 점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신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67] 였다. 그저 신이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세상을 바꿔주기를 바라는 종말론적인 신학이 아닌, 신의 나라가 이미 사람들 안에 있으며[68] 사람들의 행동으로 서서히 신의 나라가 싹터 세상을 바꿔갈 것[69] 이라는 주장이었다. 예수는 당대에 널리 퍼져있던 형식적 율법주의가 사회의 최하위층에게는 억압으로 작용한다고 보아 형식적 율법주의를 깨는데에 주력했다.
당대 유대교 율법에서는 병에 걸리거나 갑작스런 재앙이 닥친 이는 전부 무언가 신에게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았고, 죄가 용서 받았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려면 성전에서 제의를 올려야 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는 지나치게 막중한 성전세를 부가했으며, 가난한 자들은 현실적으로 안식일마다 쉬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는데도 무언가 물건의 형태를 바꾸는 것조차 죄라고 봤으며, 율법을 어긴 자를 조리돌림하다가 돌로 때려죽이는 등 실제로 약자들에게는 억압이나 다름없게 작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의 인물들은 "신 이외의 이스라엘의 왕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로마의 황제에게는 꼬박꼬박 세금을 바치는 등, 위선으로 일관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유일한 왕은 신이라는 것은, 구약의 사무엘서에서부터 나오는 오래된 관념이다. 물론 로마 제국 당대에도 이미 수천 년 전 옛날 이야기였지만 당시 헤로데 왕가가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개종한 외국인이다 보니 제대로 된 왕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퍼져서 수천 년 전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하지만 헤로데 왕가가 로마 제국을 등에 업고 집권한 가문이다 보니, 결국 이스라엘과 로마가 동맹국이어서 '친구'인 로마 황제에게 선물을 준다는 형식으로 로마에 세금을 바쳤다.
이런 시대에 당대의 일반적인 지식인이나 중산층에 해당했던 '바리사이'들은 "그 율법을 철저하게 계속 지키면, 신이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서 구해 주실 거야"라는 관념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민중에게 요구했다. 유대교 문서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유대교의 관념에서 율법은 신이 직접 내려주신 법이라서, 율법서 두루마리 자체가 사람 한 명으로 셈해질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로마 병사가 율법 두루마리를 찢은 것에 대해 “살인죄에 해당하는 벌로 처벌해 달라”고 청한 유대인들의 탄원도 전해진다. 바리사이들은 당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이들이었지만, 예수가 보기엔 기득권층의 협력자인 위선자일 뿐이었다.
오히려 예수는 갑작스런 재앙을 맞은 이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신의 정의를 우리가 실현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고, "죄를 용서받으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면 하늘의 아버지도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했고, "어떤 제물보다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신의 마음에 든다"고 말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며, 율법을 어긴 자를 돌로 치려하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쳐라"고 말하는 등 기존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사회에서 소외받은 최하위층들을 끌어 모았다.
단, 이러한 예수의 행적이 유대교와 완전히 구분되거나, 유대교를 완전히 뒤집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구약 성서에서도 이미 이사야서나 요나서 같은 일신론의 개방성에 주목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의 성전 정화에서도 언급되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같은 식으로. 예수는 완전히 독창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단 유대교 일신론의 개방성에 주목하는 신학의 계승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또 예수가 말한 죽은 자의 부활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기원 전 3세기~1세기 유대교 특유의 신학이다. 사두가이들이 예수에게 부활 교리에 관해서 시비를 거는 장면[70] 이 있는데,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유대교에서는 영혼 불멸 교리를 믿지 않고 죽은자가 묻힌 곳에 영혼도 잠든다던가, 죽을 때 영혼도 사라진다던가 하는 식의 믿음을 가졌다. 예수의 주장은 우연이건 필연이건 유대교 특유의, 일신교가 가질 수 있었던 개방성과 보편성을 계승해 갖춘 결정체였다.
이러한 예수의 행적에 대해 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를 '갈릴래아의 견유'[71] 라고 설명한다. 다만, 크로산은 자기 저서에서 각지의 여러 권위자들이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했지만 서로 모두 달랐다는 이야기 역시 함께 언급한다. 역사적 예수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말했듯 역사적 예수론이 해석하는 예수는 전부 각기 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을 투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산의 이론도 결국 크로산의 개인 의견.
복음서들 중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카 복음서 셋과 요한의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행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셋이 다소 비슷한 서술을 보이기 때문에 이 셋은 '공관 복음서'라고 부른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초반부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파하고 후반부에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루살렘과 시골 마을을 3번에 걸쳐 왔다 갔다 한다. 이 부분을 역사성을 반영해서 해석하면 공관 복음의 서술을 따르면 예수의 활동 시기는 불과 1년 이내인데 요한 복음서를 따르면 3년이 된다. 어디가 더 믿을 만한 서술인지는 진실은 저 너머에.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 중 어디가 어느 부분에서 더 역사성을 담고 있는가는 근대 이후 신학에서는 오랜 논쟁거리다. 일단 예수의 발언만 두고 보면 공관 복음서의 예수의 말씀들이 더 역사성이 높은 게 거의 확실하지만, 일화나 행적으로 보자면 공관 복음서 역시 저자들이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편집한 글인데다가, 일단 상식적으로도 예수가 1년 이하로 활동했다고 가정하기는 너무 짧다. 하지만 전통적인 신학이나 신학에 아예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은 이런 부분을 대충 결합해서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 게 현실. 전통적인 신학은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가 30살 즘에 공생애를 시작했단 구절과 요한 복음서의 서술을 짬뽕해서 예수가 33살을 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
예수가 죄인으로 몰려 붙잡힌 이유도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가 서로 다르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치자 제사장들의 미움을 사서 죄인으로 몰려 죽게 된다. 반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베타니아에서 라자로를 부활시키자 제사장들이 그걸 보고 두려워하여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 부분이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의 신학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관 복음서가 쓰이던 시기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고, 부패한 유대교의 종교 권력에 대한 비판과 배타적인 유대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신학의 주요 관심사였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부패한 종교 권력을 비판하려는 이유로 삽입된 일화인 것이다. 반면 요한 복음서가 쓰인 시기는 유대 독립 전쟁이 패배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로마 제국에 의해 개발살 났고, 성전 중심 유대교는 쫄딱 망해서 부패한 유대교 권력층 같은 건 없었다. 요한 복음서는 대신 기독교 특유의 신학인 세상의 종말과 부활, 삼위일체론 등에 관심을 많이 보인다.
1세기 유대-기독교 신학에서는,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메시아가 도래하여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을 때 나타나는 일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며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신학을 강조하기 위해 라자로의 부활을 제사장들이 두려워하는 대사건으로 묘사한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가 부활한 이후 제자들을 만난 이야기가 공관 복음서에 비해 길다. 반면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죽은 이들을 부활시키는 것이 초반부에 그냥 여러 기적 중 하나 정도로만 나온다.
5.6. 죽음과 부활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 신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음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은 부활절을 중요한 축일이자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17절
성경에서는 유월절(=과월절=파스카 축일)을 맞아 예루살렘에 내려가 있을 때 목요일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고 금요일 새벽에 잡혀서 금요일 낮 3시쯤에 죽었다고 기록한다. 예수의 구체적인 역사적 행적은 수많은 논란이 있지만, 최후의 만찬은 오히려 수 많은 신학자와 역사가들에게 실제 있었던 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후술할 부활 사건도 여러 해석이 존재하는데 최후의 만찬에 대해선 해석이 거의 갈리지 않는다! 예수가 분위기를 읽은 것이건 누군가에게 귀띔을 받은 것이던 예수는 자신이 잡혀 죽을 것이며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직감했고,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며 식사 때마다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의 뜻을 이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
만찬 이후 예수는 반대자들에게 잡혀 유대장관 본티오 빌라도에게 재판 회부되고[72] , 반란군에게 내려지는 극형인 십자가형의 판결이 내려져 죽게된다.
성경에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판결을 망설이거나 심지어 사형을 막으려 했으나 군중의 여론이 두려워 죽이게 된 듯 묘사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잔혹하고 무자비한 통치를 가했고 심지어 과잉진압으로 유대인들의 불만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해임 된 사람이다.''' 당시 유대는 시리아 속주에 포함된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속주의 총독과는 다르게 사법권이 제한되는 자리다. 빌라도는 어디까지나 법적인 총독인 시리아 속주의 총독을 대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시리아속주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해서 사실 집행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즉 원래대로라면 십자가형 같은 형벌은 형식적이라도 시리아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는 일관적으로 빌라도는 예수를 체포 바로 다음 날에 죽였다고 묘사하는데, 이것은 총독 허가 없이 빌라도 선에서 끝내버렸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망설이긴 커녕 규정도 무시하고 빠르게 처리한 셈. 복음서의 묘사와 반대로,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을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했을 가능성은 낮다. 차라리 '위험분자에 해당되긴 하지만 비교적 위험성이 낮은 잡범(...)' 으로 간주하고 속전속결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망설였다는 구절은 '예수는 죄가 없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에 대립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썼을 가능성이 높다. 복음서가 쓰이던 당시는 기독교도들이 숭배한 예수가 반란 혐의로 잡혀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잠재적 반란분자로 간주되어 잡혀죽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해당 서술을 예수가 죄를 대속함 교리와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기독교에서 죄의 대속 교리가 중요해지는건 복음서 집필 시기보다 다소 후의 일이다.
예수의 일대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부활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무덤에 매장된지 사흗날에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여 40일동안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준 뒤 승천했다고 한다.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아니라 매장된지 사흗 날임에 유의. 금요일에 죽어 매장된지 첫날,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튿 날, 부활한 일요일이 사흗 날 째다. 날수로 따지면 토요일이 하룻날, 일요일이 이틀날로 48시간도 안돼서 부활한거다. 신자들도 많이 헛갈리는 점이다.[73]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에 따르면, 예수는 이미 전부터 십자가에 매달릴 것을 예견했고, 본티오 빌라도 앞에 스스로 선 것이라 한다. 사도 파울로스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이것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그의 행보이며, 형벌 자체는 인간의 죄를 대신 받음을 의미하고, 부활은 죄를 사한 후의 인류 구원을 의미한다. 물론 이 구원은 예수를 믿는 자에 대한 구원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다음의 사건들에 동의하고 있다.
특히 예수가 잡힌 즉시 순식간에 와해되었던 제자들과 신자들이 갑자기 열렬하게 그리스도가 부활했음을 외치며 순교했다는 점에서 실제로 예수가 부활 했느냐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들이 모종의 경험을 했고 그 경험으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짧은 결말이 제일 역사적 사실과 가까운 증언을 하고 있다고 본다. 마리아 막달레나를 중심으로 한 여제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찾아가자 무덤이 열려있고 예수의 시체는 이미 사라져 있었는데, 그녀들은 그것을 부활로 여겨 신앙고백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퍼졌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빈 무덤만으로는 '부활' 이라는 명제하에 다시 추종자들의 신앙심이 공고해졌다 하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부랴부랴 도망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듣고 어떤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잘 맞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예수 사후 유대인들이 무덤의 도난 가능성을 제기하며 봉인을 요구했던 부분이 있고, 제자들도 빈 무덤만으로 부활을 믿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탄압이 두려워서 도망가는 판국에 빈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는 다시 결집하기에는 부족했을 것이다. 결국 다양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게되는 훨씬 더 강력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절망에 빠져서 제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추종자들이 갑자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입을 모아 '''예수의 부활'''을 외칠 수 있을 정도의 초월적 경험이 말이다.[76]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확실시하는 것은, 이 '제자들의 예수 부활 체험[77] '이야말로 기독교의 확립에 제일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해, '''예수의 부활 사건이 없었으면 기독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예수는 당시에 있었던 예언자 중 하나로써 말로만 기억되다가 잊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한편에서는 다양한 이견과 해석이 나온다. 육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을 제자들이 나름 해석한 것이라던가,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합리화를 시킨 것이라던가. 예를 들면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78] 은 부정하며 부활이 육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의미의 부활이라고 본다.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시체는 매장되지 않고 버려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 셀수 없이 많은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음에도 십자가 처형자의 유골은 1967년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단 한구가 전부다. 이는 처형 후 얕은 땅에 대충 묻히거나 십자가에 방치된 채로 들짐승들에 의해 뜯어 먹혀서 찾을 잔해조차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경에도 인정하듯이 제자들은 예수가 잡힐 때 죄다 도망가서 예수의 죽음이나 매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전통을 중시하는 기독교파에서는 요한 복음서의 전승에 따라 사도 요한이 예수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잘 보면 알겠지만 '예수가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부활로 설명되는 무언가를 마냥 부정하기도 어렵다. 핵심 제자인 사도들이야 예수의 처형 당시 도망쳤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예수 처형 당시의 정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사도들 외의 제자들 중에는 누군가 처형을 목격하고 증언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키레네 출신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들었다는 서술[79] , 안식일로 접어들 무렵 무덤에 묻혔다는 서술과, 무덤을 내준 사람 의 이름 또한 4 복음서에 일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또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예수 당시를 직접 본 제자라고 인정하는 편집 흔적이 자주 있어서 실제 사도 요한은 아니더라도 사실적인 증언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예수의 시신이 그냥 버려졌다는 설을 밀어붙이는데는 한계가 있다.[80] 제자들의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해서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는 견해 또한, 예수 사후의 사도들의 선교 이야기인 사도 행전 때문에 부정된다. 예루살렘에서 선교 때 사도들이 '당신들도 다 알다시피' 라는 말을 꺼낼 정도로 많은 수의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한 전제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아니더라도 예수 사후 기독교에 입교한 이들이 예수 처형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남겼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원原수난사화, 곧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체 예수 텍스트이며,[81] "빈 무덤 발견 이야기는 원수난사화에 속해 있었"다.[82]
한편으로 성경에서 인정하듯 제자들은 예수가 잡히자마자 튈 정도로[83] 미묘하게 약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는데다가 예수의 부활에 회의적이었던 제자들도 더러 있었는데, 위에 서술했듯 그들이 갑자기 결집한 것에는 무언가 사건이 있었다는 설명이 더 합치되기 때문에 적어도 '빈 무덤'설은 거의 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형태이던 간에 그의 제자들이 다시 모이고, 그걸 부활로 해석할 강한 무언가는 있었다는것.
이와 관련하여 BBC 다큐멘터리[84] 를 비롯한 일부 해석에서는 예수가 물리적으로 유사 부활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약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점은 사실이나 6시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매달렸던 점[85] 을 근거로 하여 예수는 단기적으로 의식을 잃었고 십자가에서 내려져 사망판정을 받은뒤 무덤에서 기적으로 의식을 회복하는 현대의학 관점에서 '소생'을 한 것으로 보고있다[86][87][88] . 이러한 해석에서는, 이후 예수가 망명하였으며 망명한 예수를 후대에서 신격화하기 위해 예수가 하늘로 승천한 것으로 성경을 가미한 것으로 보고있다. 더욱 소수 견해[92] 와 전승에서는, 제자들을 찾아가 부활을 보인 후 로마의 정치적 영향이 미치치 않는 인도로 망명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러한 주장과 전승은 예수의 무덤이 인도의 카슈미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직 인도의 시로말라바르 가톨릭-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의 전승과 그 전승을 확대해석한 측 뿐으로, 그들의 전승을 기록한 토마스 행전[93] 의 속보성은 비교적 늦은 관계로 신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되지는 않고 있다[94] .
한편, 예수가 십자가에서 찔린 창으로 인해 현대의학적으로 소생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95] , 소생했더라도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신체로 인해 제자들을 찾아가 신적인 이미지를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시각[96] 도 존재한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 항목에서도 해설하듯 오히려 초기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네러티브에서 증언이 종료되는데, 이러한 부분은 예수의 물리적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견해에 무게를 실어준다.
예수의 사망일에 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 예수가 안식일 직전 금요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월절은 항상 매월 15일 즉 만월에 시작되니까, 빌라도 재위기간 중 유월절이 금요일 저녁에 시작된 해는 30년과 33년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죽을 때 사방이 어두웠다고 전하는데, 천문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33년 4월 3일 금요일 저녁, 예루살렘에서 부분월식이 일어났다는 점을 지목해서 33년을 사망년도로 간주한다. 지질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 33년 4월 3일 금요일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가 죽자 땅이 흔들렸다는 기록과 일치한다며 같은 날짜를 예수의 사망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 연구 모두, 복음서가 실제 사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비유로써 서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예수의 빈무덤이라 추정되는 곳엔 후대에 성묘 교회가 세워졌다.
5.7. 나무위키에 별개 문서가 있는 복음서의 일화·비유
- 광야의 유혹
- 가나의 혼인잔치
- 예수의 산상수훈
- 군대 귀신을 쫒아내다
-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다
- 오병이어의 기적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간음하다 잡힌 여인
- 돌아온 탕아
- 라자로를 되살리다
- 가난한 과부의 헌금
- 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내리다
- 예수의 성전 정화
- 최후의 만찬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6. 예수의 사상과 기독교
근대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늘어나면서, 오늘날에는 예수의 사상을 역사 비평적 방법론으로 해석하려는 많은 시도가 나오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은, "예수의 사상은 그리스도교와 일치하는가?"라는 것이다. 이 문서에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지만, 몇가지 예시는 다루어볼 수 있을 것이다.
1.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로 인식하였을까?'''
상당히 논쟁적인 주제인데, 브레데William Wrede는 여기에서 '메시아 비밀'이라는 가설로 설명한다. 예수는 원래 스스로를 그리스도(메시아)라고 규정하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가 죽은 뒤 그리스도로 규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원래 당시 유대교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세속적 왕이지, 종교적 지도자나 인류의 구세주 같은 의미는 없었다. 예수 사후 제자들이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의미를 새로 갱신한 것. 특히 마르코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는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자 예수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숨겼다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특히 마태오의 복음서의 문장들은 공관복음서와 내용을 교차대조하면 그 수정의 흔적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여기에 대해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는 견해를 달리한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메시아 고백 뿐만이 아니라 치유 사화에서도 '비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는 "예수의 금지 명령이 어떻게 무시되는지 묘사"한다.[97]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마르 7,36) 그렇다면 최소한 치유 사회에 있어서는 마르코 복음서에서의 '메시아 비밀' 이야기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메시아 비밀의 초점은 함구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함구령으로 드러나는 은밀한 발현에 있다"는[98] 것이다. 슈낙켄부르크의 이 예시는 메시아 칭호에 관한 직접적인 비밀 요청이 아니라 치유 사화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 이야기를 접근할 때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가령 마르 14,61에서는 대사제가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라고 묻는데, 마르코의 스토리 텔링을 따라간다면 1. 예수가 메시아라는 세간의 평을 적대자가 들었거나 2. 예수의 행적으로부터 "자칭 메시아"라는 의혹을 적대자가 도출했거나이지, 소위 상상도 못한 정체라는게 아니다. 또한 치유 사화가 아니라 베드로의 직접적인 메시아 고백에 대해서는 슈낙켄부르크는 다음을 지적한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 마르코의 예수를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못했다. 이 메시아 칭호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이 메시아를 현세의 정치적 통치자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해방자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코는 이 개념을 분명하게 밝혀 두어야 했다. ……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를 군중의 생각과는 달리 구원을 베푸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이렇게 그의 고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이 고백으로 마르코 복음서 전반부가 끝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예수께서는 그 고백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백성들에게 퍼뜨리는 것을 '''금하셨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 후반부부터) 제자들에게 당신이 참된 메시아임을 드러내 보여 주기 시작하신다.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난하고 죽어야 하는 '사람의 아들'의 비밀을 알려 주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이 함구령 배후에는 예수의 비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밝혀 줄 사람의 아들에 관한 사고가 배태되어 있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134쪽.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의 경우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본다.예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비록) 은폐된 방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분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분명하기 이 주장을 내세웠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라는 것도 밝혀 주었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Règne et Royaume de Dieu''》(R. Marlè 번역), Paris 1965, p.100[99]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는 예수가 친히 메시아라고 말한 바는 없지만, 예수의 사명의식이 메시아라는 주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즉 직접적인 발설은 없었으나, 예수는 메시아 사명의식을 지녔다는 것이다.[102]예수는 단 한 번도 "메시아"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이 호칭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불릴 뿐이다. 단 한 번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호칭을 수용한 적은 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그밖에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이 호칭을 인정하지만,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한 베드로의 고백(마르 8,27-33 병행)은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100]
예수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29) 예수는 이 호칭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해방가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 메시아는 고통을 당해야만 하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마르 8,31)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백성들이 기다리던 그런 의미로의 메시아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의 수난예고 직후 고난 받는 메시아를 반박함: 마르 8,32), 하느님의 뜻에 따른 메시아였다.두 번째는 대사제가 예수에게 신원을 물을 때다. "'다인은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마르 14,61.62) 이 일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소송과정 중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선언할 적절한 시간에 잘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학이 가미된 것도 아니요, 마르코 복음사가의 편집도 아니라는 것이다. "찬양받으셔야 할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묘사하는 표현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사제의 질문형식은 목격증언을 동반한, 대사제가 직접 발설한 말(ipsissima vox)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101]
여기서 예수가 왜 정치적 함축성이 들어있는 "메시아"라는 호칭을 받아들였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렇게 알아들을 수도 있다. 예수는 당시 무력한 상황에서 소송에 계류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인정한 메시아의 의미는 정치적 승리자인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 받는 종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2014), 318-319쪽
2. '''그리스도교 교의는 사실은 바오로가 주된 발명자인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교는 사실 바오로의 사상이지 예수의 사상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바오로가 예수를 '신격화'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생각이다. '신격화'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실상은 정반대이다. 후대의 세계공의회들이 희랍 철학적인 용어를 동원해가며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과 유일신론을 조화롭게 말하려고 애썼듯이, AD 1세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유일신론은 민감한 문제였고,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다신론으로 오해 받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 바오로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동기를 발명해내려는 축이 아니라 유일신론을 자극하는 일탈을 피해가려는 쪽이었다.
오히려 복음서는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위치를 예수에게 적용하여, 유다인에게 매우 도발적인 말을 한다.변모 이야기(마르 9,1-9)가 보여 주듯 시나이 동기는 유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의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수집된 일련의 표상들이 바오로 서간(1테살 4,13~17; 2코린 3장; 로마 10,6~7)에도 나타난다. 물론 이 소재들은 유다계 그리스도교적 표상의 언어로 표출된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의 언어가 아니라 현실과 함께 현실 너머의 것을 번역하기 위해 히브리적인 방식의 상징과 이미지들로 반죽된 언어인 것이다. 바오로는 이 단편적인 소재들을 수용하여 재편성하고 어느정도 순화시킴으로써 유일신 신앙을 자극할 수 있는 일탈을 피해갔다. 사도는 흔히 말하듯 예수를 신격화하는 동기를 발명해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우상화의 우를 버하지 않으면서 희랍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기 위하여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교리 교수 내용을 유다·희랍계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52쪽
마태 9,14~15과 그 병행구 그리고 마태 22,11~14; 25,6; 요한 3,29에서 신랑은 예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이사 54,5~6에 등장한다.[103]
-샤를르 페로,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4-335
또한 연대기적으로 복음서보다 더 오래된[106] 필리피서의 찬가(2,6 이하)의 경우, "바오로 이전의 전승으로 보이는 여러 요소를 가진 이 찬가는 아마도 분명히 전례에서 기원했을 것이다."[107] 물론 그리스도교의 교의라는게 한 둘이야 아니지만, 바오로의 위치를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104]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105]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7-29)
3. '''예수는 교회를 원했나?'''
Q: 예수께서는 교회를 원하셨습니까?
A: 많이들 다룬 문제로군요.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다"라는 알프렛 롸시의 유명한 말도 있지만, 그리 간단히 처리해 버려서는 물론 안되겠지요. 이미 말한 대로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냄받았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바같을 생각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개인만을 상대하신 것도 아닙니다. 백성 속의 개인을 상대할 떄도 이 선민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상대하신 것이지요. 말하자면 예수 시대의 교회란 이스라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활약 당시에도 또 나중에 사도들의 활동중에도 이스라엘이 배반한다는 것,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자, 사도들은 이제 유다인 아닌 사람들,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들과 그 다음 부활후대 상황에서 교회를 세운 사람들, 공동체들을 세운 사람들이 사실 같은 사람들이었고 보면, 특별히 이 점에서도 예수 시대와 교회 시대 사이의 연속성은 주어져 있다고 봅니다.
-요아힘 그닐카, 방송 대담[108]
예수가 관계하는 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다. 예수는 자기네 역사를 지닌 이 백성 앞에 나타난다. 이 백성을 상대로 활동한다. 이 사정이 예수의 활동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예수 자신이 이 백성의 일원인 이스라엘 사람이요, 모국어를 말하며, 성서의 언어에서 취한 청중에게 익숙한 표상과 동기 들을 자기 선포에 사용한다. 개인을 향해 결단을 호소할 때도 그를 이 백성의 일원으로 바라본다. 예수의 구원 제시를 개인 치유로 이해한다면 몹시 오해가 될 것이다. 예수는 이 백성을 앞에 두고 이 백성에게 자기가 보냄받았다고 의식했으며 이 백성을 자기 제자들의 협력으로 임박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준비시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런 집단적 현상을 처음으로 만들어낼 까닭이란 없었다. 아니,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 소임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사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 활동의 이 정향을 삭감 없이 인정할 때라야 예수의 활동을 이해하게 된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갈릴래아의 예수 청중 가운데 이방인도 있었다는 사실이 종종 적시되어 있다 해서 이 정향이 원칙적으로 달라지는 바는 조금도 없다. 물론 예수의 청중 속에 그런 이방인들이 있음을 우리는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예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을 향해 있다. 이스라엘이 ― 꼬집어 표현하자면 ― 예수의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교회)였으며, 새로이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불려 들어와야 할 백성이었다. 여기서 "엑클레시아"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다름없이 하느님 백성의 모임을 뜻한다.[109]
예수의 활동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공간적으로 이스라엘 땅과 계속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 알려진다. 요르단 동쪽의 헬레니즘화한 열 도시 지역인 데카폴리스가 언급되기는 하지만(마르 4,20; 7,31; 마태 4,25),[110]
그리고 마르코 7,24 이하 // 마태오 14.21 이하에 따르면 예수는 띠로와 시돈 지역으로 넘어가고(루가는 삭제한다) 마르코 8,27 // 마태오 16,13에 따르면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부근으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루가 9,18은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일이 없이 예수의 혼자 계심을 말한다), 아무튼 이방인 가운데서 일어난 전도 활동을 말하는 바는 없다. 띠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는 여행의 상황이 어떠했다고 할 수 있든간에, 그 지리적 소여는 정작 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 여행은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을 들어준(마르 7,26//), 더욱이 예외로 특징지어진(마르 7,27-30//) 여행에서 추론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상 회상으로서 북부 여행에서 선교사업이 성립될 수는 없었다면, 여기서는 분봉영주 헤로데 안티파스 쪽의 일시적 추적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겠다(참조: 루가 13,31-32)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256-257쪽
우리는 예언자들이 고지한 만민순례Völkerwallfahrt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겠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텍스트는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섬기고 조공을 바치러 시온으로 모여온다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들이 아스라엘의 구원에 편입하여 행동한다는 그런 텍스트들을 보자. 예컨대: "그 날에, 많은 이방 민족이 주님께 와서 그의 백성이 될 것이며, 주께서 너희와 함께 사실 것이다"(즈카 2,15). 혹은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민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그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이사 2,2-3). 이렇게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구원 또는 율법 안에 들어오리라고 알린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신도 자기 하느님께 몸바쳐 섬기리라는 혹은 그렇지 않을 경우 그런 상태로 되돌려 놓이리라는 전제가 없다면 상상할 수 없다. 예수 말씀을 위해서는 만민순례의 전환해석과 맞먹는 또 다른 출발점이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이 도발적 재해석에서야말로 우리는 ― 띠로와 시돈에 관한 판단의 경우와 비슷하게 ― 예수 말씀의 증빙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연결지어 볼 수 있는 경우는 여러 가지로 생겨난다. 어떤 경우든, 민족들이 마지막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러 올 것이다. 예수는 옛 예언자 사상을 적극적 형태로 다시 취한다. 그것이 중간시대에는 특히 묵시문학을 통해 퇴화하여, 마지막에 하느님 나라가 나타날 때 "이방인의 때지은 무리"가 말살되리라고,[111]
적어도 일부라도 역사상 각 민족의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에 따라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되고 있었다.[112] 이스라엘이 또는 이 겨례의 다수가 예수의 메시지를 배척하더라도 민족들은 올 것이다. 만민순례 사상의 재해석은 그러므로 현재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가 드러난 이스엘의 상태와 대비해서도 민족들의 도래가 기대된다는 데에 있다.
-같은 책, 263-265쪽
7. 예수 이후
- 네로 시대에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정당인 열심당(젤롯, 혁명당)에서 일으킨 유대 전쟁은 1세기 경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유대 전쟁 총사령관으로 새로이 취임한 티투스는 서기 70년,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끝끝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결사항쟁하던 열심당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벽 부분만 남기고 부숴버렸다.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유대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 같이 이 곳에서 예배를 보았지만,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둘 사이를 묶어 줄 가시적 공통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성전이 허물어질 것이라는 예수의 생전 예언이 실현 된 셈이었다. 로마 군대는 조롱하듯이 성전의 서쪽 담장 하나만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통곡의 벽이다. 이후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안식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70년부터 1948년까지 나라 없는 백성이 된다. 이것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몇번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는데,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일으킨 유대인 반란(바르 코크바의 난)을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만 추방했다[113] .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하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제우스)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다.
- 현대 이스라엘이 건국한 이후, 예수에 대한 재판이 불법적이며 무효라고 인정해달라는 청원장이 이스라엘 법원에 접수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법원은 이 골 때리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는 로마 제국 법에 따라 처벌받았으므로 로마 제국의 후계인 이탈리아 법정에 가서 소송하라'는 답변을 보냈다. 하지만 현대 법치제도에서 고소자(유대인)가 아니라 판결자(로마 제국 법원)만이 피고(예수)의 명예회복을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상식이다. 당연히 바티칸이 있는 이탈리아에선 진즉에 무고함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시대 로마 제국 속주들의 모습을 보면, 산헤드린에서의 판결이 사실상 확정적인 판결이라 볼 수 있다. 속주 유력자들이 내린 의견이기 때문에 보통 로마 제국 총독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게 보통인데, 잘 받아들이지 않아서 속주에서 분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책임은 총독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다 받아들여 주었다. 로마 제국은 분명 속주에 대해 우위에 있지만, 속주 총독은 현지 유력자들을 무시할 수 없단 이야기. 복음서에도 바라바 대신 예수를 처형하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민란이 날까봐 무서워서 들어주었다는 말이 있다.
-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로마 전역에서는 제자들 및 사도 바오로의 행보에 의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114] , 수백 년 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유럽 전역에 걸쳐서 공통된 서양 문화권을 형성하는데 한 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칙령 이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양의 철학이나 문화, 역사에 기독교가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예시1][예시2] (왜 지금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기독교가 세계에 널리 전파된 이유가 단지 서구세력의 발전과 개척의 역사 때문일 뿐이라면서 기독교 교리 자체는 다른 종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가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열고, 서양의 근대가 나오는데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서양의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것도 맞지만, 기독교가 서양의 발전에 힘을 보탠 것도 사실이다. 당장에 유럽에서는 교회의 어마어한 기록을 통해 900년 전 고딕 성당의 설계도를 찾거나, 프랑스 남부의 한 농노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에선 기록, 건축물 모두 자료가 매우 빈약하다.
- 대항해시대에 기독교가 영향을 준 부분은 선교에 있다. 미지의 땅의 발견은 서양의 교회와 권력기관으로 하여금 산업자원의 확보와 더불어 원주민에 대한 적극적인 기독교 전파라는 명분을 주었고, 이 선교사들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군대파견 및 현지 산업시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15] 그 결과가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남아프리카에 걸친 기독교화.
- 현대문명의 철학적인 기반이 되는 '천부인권'의 근본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한 조물주'가 어느 종교의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서구의 천부인권적 개념이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배경에서 나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근대에 등장한 천부인권(자연권)의 개념은 자연법 사상에서 제시한 인권을 뜻하는데, 서구의 자연법 사상의 근저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敎父)들과 중세후기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있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이 유일신의 모양과 형상을 좇아, 영을 공급받은 유일한 피조물로서 모든 창조의 마지막에 창조된 것을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116]
-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여기에 맞선 가톨릭 쇄신은 둘 다 '예수로부터 배운 원래의 신앙'을 기준으로 하였다. '개혁(reform)'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에는 '진보'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루터이든 칼뱅이든 트리엔트 공의회이든간에 논쟁의 대상은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이지 예수가 가르친 적이 없는 무언가로의 이탈이 아니었고, 바라본 것은 과거이지 미래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갈등이 루터도 칼뱅도 의도하지 않은 '근대'라는 사생아를 낳았으나, 계몽주의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들은 그 시대 유럽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키르케고르 같은 당대 유명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유신론자들이었으며, 버클리는 아예 성공회 주교였다. 20세기 들어서도 한참 동안이나 유럽인 대다수에게 예수는 규준이었다.
8. 역사적 예수
9. 역사에 기록된 예수
10. 한국에서의 인식
크게 광신도, 참 그리스도인, 일반 신자, 예수를 인간으로서만 존경하는 사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예수를 증오하는 사람 정도로 나눌 수 있겠다.
- 광신도의 경우는 예수의 말이나 행동을 자기 멋대로 왜곡해석, 지 입맛대로 해석, 지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실천 등등 신도들은 물론이고 비신자들이 보기에도 영 좋지 못한 짓을 하면서 깽판을 부리는 자들이다. 보통 선민사상에 찌들어 다른 사람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는 갱생시켜야 할 죄인으로 낮추어 볼 때가 많으며,[117] 이런 사고관이 공격적이거나 민폐스러운 전도행위 등으로 드러나게 된다. 광신도들 때문에 한국 기독교의 평판이 매우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런 광신도들은 성경을 제대로 안 읽는 경향이 많고, 사이비나 이단일 가능성이 많다.
- 참 그리스도인은 순수하게 예수의 사랑, 이념과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행하려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즉 본래 예수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였던 '하느님의 나라'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도와 선교를 충실히 하는[118]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광신도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며,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본인이 기독교도라는 티가 나고 또한 예수를 전하며 진실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봉사와 헌신으로 선교에 참여한다.
- 일반 신자는 크리스천 중에서 위 두 종류의 사람들을 제외한 신자들을 모두 일컫는 말에 가깝다. 딱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비신자들에게 표출[119] 하지는 않지만, 성당이나 교회는 다닌다고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물론 이 사람들도 엄연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며 기독교의 본래의 목적에 따르는 사람들이긴 한데, 온유도 광신도 없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다 일컫는 말로 보면 된다. 기독교도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 역사적 인물 예수의 인격은 높이 평가하지만 기독교는 믿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수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후세에 신으로 왜곡당한 인물로 보거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신의 아들인 척 했다고 생각하는 식.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중에서도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의 주인공이 이런 경우이다. 논쟁 중에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자 상대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이냐고 묻고, 그녀는 '요즘같이 핵전쟁의 위협이 큰 세상에 그런 분이 평화사상을 퍼트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가 신의 아들이라고는 믿지 않는다.'라고 답한다.
-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타 종교인이거나 종교가 없거나 무신론자가 해당된다. 바로 위의 케이스와 구분하자면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도 고평가하지 않는 경우로, 아래의 케이스처럼 비난이나 비하를 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경우라고 보면 되겠다.
- 예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쌍욕을 하면서 비난하는 부류도 있다. 이 경우는 당연히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 예수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거나,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 예수는 허구의 인물이기에 이를 비판 혹은 비난하기에는 앞서서 논할 대상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종교학계에서는 예수가 역사상으로 실존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을 인정하고 말고는 개인의 몫이지만, 일부 극단적인 쪽에서는 까기 위해 까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맨 위의 광신도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11. 어록
기독교인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발언들을 그대로 예수의 발언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신학계에서 신약 성경은 성경 저자들의 신학적 성향이 상당히 반영된 것으로써 예수의 실제 발언 중 일부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되고 있다. 때문에 19세기 이래로 신학계는 실제 역사적 예수의 발언에 가까운 발언들을 복음서 내에서 추출하는 연구를 하기도 했다.
11.1. 예수의 화법
공관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화법은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공관 복음에 자주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요한 복음에서는 단 2번만 사용한다.(3, 3.5). 그 대신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 강조되며, 세상,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신의 영광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영광 등의 주제가 예수에게서 말해진다. 이러한 차이들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요한 복음서의 예수 증언이 가지는 역사성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곧, 요한 복음서의 예수에게서 강력하게 드러나는 신학적 성격이 역사와는 다른 관념에 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 연구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 곧 '역사 아니면 신학'이라는 과거의 양자택일에는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곧 요한 복음서의 예수가 가지는 역사성에 대한 해답은 전에 생각하던 것 보다 더 복합적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자는 유대 독립전쟁 때문에 서기 1세기 초의 팔레스티나와 단절된 것으로 보이지만, 지리와 연대에 관한 자료들, 유대 지방과 로마 제국의 제도에 관계되는 사항들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있으며 당시 생활상에 대해 해박하다. 또한 저자는 스스로를 예수에 대한 목격자 곧 증인으로 여기며,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다.(19, 35; 21, 24)[120] 이러한 면모들은 근대에 강력히 제기되었던, 요한 복음서 예수의 역사성 논쟁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한다. 아무튼 이 부분은 워낙 온갖 추측과 떡밥과 썰이 난무하는지라, "이런 이런 말투가 역사적 예수의 말"이라는 식의 단정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애초에 이런 면모 때문에 '역사적 예수'라는 게 현대에는 다 식어버려 유행이 지난 떡밥이 되어버린 감도 있고.
12. 예수에 대한 이모저모
12.1. 성격
정신분석학자인 앤서니 스토에 따르면[121] 예수는 의외로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신약성경에도 예수가 자신의 적들에게 "뱀들", "독사의 자식들"[122] 등의 표현을 쓰고, 남을 실족시키고 범죄하면서 회개하지 아니한 자들이 "화로, 영원한 불, 꺼지지 않는 불, 벌레가 죽지 않는 곳"에서 영원히 "울부짖으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걸 보면 예수가 마더 데레사 성녀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보다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 가까워 보일 수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사실 예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영적 지도자들도 다 그렇다고 한다. 원래 영적 지도자들이 불 같은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것이 반대파를 물리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을 고려하면, 이게 실증적 연구인지 더 파고들 필요가 있다. 성경에 따르면 정작 예수는 자신을 온유한 자라고 직접 밝혔다. 예수를 사랑과 겸손과 온유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일반적 이해이다.
또한 예수가 화를 낼 때 그냥 화를 낸 것이 아니고 작중에서 유일하게 화를 내었을 때는 다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들 맘대로 교묘하게 바꾸려고한 바리사이들이나 아니면 대놓고 하느님의 성전을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사용하던 자들에게 내었다. 다 하느님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진리를 왜곡한 사람들이다.
12.2. 결혼 여부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12절
예수는 총각으로 살았고 아내와 자녀가 없었으며, 적대자들에게 고자라는 욕설을 들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딱히 예수가 결혼을 했다 안 했다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가 유부남이라는 음모론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했다는 설, 또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요한의 복음서 중 카나의 혼인잔치가 예수 본인의 결혼식이라는 설, 프랑스의 시조라는 설 등이 있다. 세 번째의 경우 예수는 사위에게 나라 하나를 만들어주고 그 나라의 초대 황제를 시켰는데, 그 나라가 바로 메로빙거 왕조이며 오늘날의 프랑스의 근본이라는 주장. 특히 이 음모론들은 댄 브라운이 관련 음모론들을 이용해서 다빈치 코드 소설을 써서 대중에게 엄청 유명하게 알려지는 바람에 신학자들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골머리를 썩인 적이 있다. 심지어 고대의 파피루스를 누가 위조하여 예수가 아내가 있다는 식의 글을 만들어 학자들조차 속아 넘어간 적도 있다.# 본 문서에서 결혼 여부가 문단이 따로 생길 정도로 길어진 것도 그 영향이 있다고 할 것이다.예수는 미혼자로 살았다. 자기 가정 이루기를, 아내와 자녀 두기를 포기했다. 당대 유다교계에서는 이런 처신이 한심한 충격적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는 것이 거의 의무적인 계명으로 여겨졌다. 근거는 창세기 1,28이었다: "자식 낳고 번성하라." 랍비들의 유다교계에서는 독신자란 혈통을 망각하는 자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미혼자를 랍비로 서품하기를 피했다. 쿰란에만 독신으로 사는 수도승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마태오 19,12에 어느 모로 보나 예수의 독신과 관련되는 로기온이 전승되어 있다. 백성 앞의 혼인교시와 연결지어 예수는 독신의 가능성에 관해 제자들을 가르친다: "사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에 의해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분류법에 따라 구성된 이 말씀은 ― 고자가 되는 세 가지 경우를 꼽는데 ― 두 가지 점에서는 날카로움을 띤다. 우선 한 가지는 고자라는 멸시적 개념, 혼인할 수 없도록 거세됨을 가리키는 개념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거세는 신명 23,2 이하; 레위 22,24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는 흉측한 짓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말씀에 따르는 결론인즉 가치전환이라는 점이다. 처음 두 경우에는 외적인 불운으로 말미암아 신체적인 생산불능이라는 한스런 상태에 으리게 된 그런 일을 말하는데, 셋째 부분에서는 고자가 자의로 받아들인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은유다. 그런데 욕설 같은 인상을 주는 고자라는 개념이 그냥 남아 있고 보면, 이 대목이 예수를 향한 공격과 관계가 있다는 추정은 적확하다. 예수는 미혼자로 살기 때문에 적수들한테 고자라는 욕설을 들었으니, 세리와 창녀와 죄인 들하고 어울려 먹는 바람에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방을 덮어쓴 것과 한가지다(마태 11,19//).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234-235쪽
카나의 혼인잔치가 예수의 결혼식이라는 주장은 사실 성경을 잘 읽기만해도 쉽게 논박할 수 있는 상당히 허술한 주장.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나, "여인이시여,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와 같이 해당 혼인잔치가 본인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또 예수가 메로빙거 왕조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전형적인 음모론의 오류를 다 갖추고 있다. 예수의 후손이 메로빙거 왕조까지 이어졌다면 그 사이 시간이 400여 년이나 되어서, 30년 마다 한 세대라고 치면 최소 13세대가 넘으니 방계 후손이 엄청나게 많아야하는데, 다른 예수의 후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심지어 가난한 노가다꾼인 예수가 어떻게 사위에게 나라를 세우게 시킬 수 있고, 당시 이미 로마의 확고한 영토였던 프랑스에 어떻게 나라를 세우라 시킬 수 있었겠는가.
예수가 결혼했다는 주장에서 단골로 나오는 설명이 '당시 랍비는 결혼을 해야만 인정을 받았는데 예수도 랍비라고 불렸다'는 설명인데, 이는 랍비란 단어를 오독한 것이다. 랍비라는 단어 자체는 '나의 주인', 의역해서 '스승님', '나리', '어르신' 정도의 의미이며, 예수가 서품된 율사라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라삐라는 호칭이 '선생님' 혹은 '스승님'이라는 호칭 대신 모두 네 번 사용된다(마르 9,5; 10,51; 11,21; 14,45). 하지만 이런 사실만으로는 이 호칭이 예수의 가르침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다. ... 전체적으로 보이 예수를 '선생님'(스승님) 혹은 '라삐'라 부른 것을 근거로 그분께서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신 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당시 '별생각 없이 통용되던 관용어'[123]
였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55쪽.
또 혈연을 매우 중시했던 유대인들의 관념 상 예수에게 아내나 자녀가 있었으면 그들이 성경이나 서간 등에 언급되어야하고, 초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 하지만 초대 교회의 지도자는 베드로였고,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형제 혹은 사촌 형제인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맡았다. 이 야고보는 예수가 활동할 때는 미쳤다며 나자렛 회당에서 쫓아냈지만 예수 부활 이후 믿게 된 사람이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맡은 건 예수와 그나마 가까운 혈연 덕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비혼독신을 평생 유지했을 것이다.당시에는 아직 랍비라는 호칭이 서품된 율사에 대한 존칭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한정된 사용은 1세기 말경에 비로소 관행이 되었고, 따라서 랍비라는 호칭에서 예수가 한때 어느 랍비 문하에 입학한 일이 있었다는 결론마저 끌어내어서는 안된다.[124]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223쪽
이런 음모론에 대한 반박은 바트 어만의 저서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에서 매우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다빈치 코드 문서에서도 일부 다루고 있다.
여담으로 기독교에서 성에 대한 관념은 성을 터부시하는 것이 맞다. 바오로의 서간을 보면 간음은 당연히 죄고, 정 성욕을 못참겠으면 결혼을 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하되, 그것도 순결을 유지하는 것에 비해서는 차선책으로 여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임신은 창조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산모와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는 교리지만, 성행위 자체는 쾌락을 목적으로 하면 안된다며 매우 터부시한다. 또한 고대와 중세 기독교는 수음도 죄악으로 봤고, 20세기 중반 유럽에서 소위 '성혁명'이 일어날 때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억압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을 종교에 돌렸다. 21세기인 지금도 기독교는 서양,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를 막론하고 성에 대해 보수적인 포지션을 유지하는게 일반적이다. 주요 종교 중에 이 정도로 성을 부정적으로 보는건 불교 정도가 유일. 불교는 임신을 위한 성행위조차 세상의 고통을 늘이는 것이라며 부정한다. 이슬람은 순결을 중시하는 관념이 옅고, 힌두교는 대놓고 성애를 긍정하며, 유교는 사람은 가정을 꾸리고 자손을 낳는 것이 도리라고 본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 또 기독교 신앙 상으로는 매우 중요한 교리. 위에 서술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알겠지만 기독교 신앙과 신약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핵심적 코드 중 하나다. 또 당장에 사제와 수도자 모두 예수의 본을 받아 평생 독신을 지키는 것이다.[125] 심지어 수도자가 없고 목회자가 독신을 지키지 않는 개신교도,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중요한 믿음으로 생각한다. 예수의 결혼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람은 비기독교인이거나, 교리를 매우 잘못 아는 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의 아내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 표현되고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표현되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무엇보다도 복음서의 예수 스스로가 부부나 혼인과 연관된 가르침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위치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였다. 이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일부일처제,[126] 혼인 불가해성 교리와[127] 큰 연관을 가지고 있다.
마태 9,14~15과 그 병행구 그리고 마태 22,11~14; 25,6; 요한 3,29에서 신랑은 예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이사 54,5~6에 등장한다.[128]
-샤를르 페로,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4-3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129]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130]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7-29)
12.3. 외모
12.3.1. 회화의 묘사
미술에서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모습이자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예수의 외모. 상당히 구체적이고 일관적으로 묘사된다. 어깨까지 닿는 정도의 길이의 갈색 곱슬머리에, 앞머리를 옆과 뒤로 넘겨 늘어뜨렸다. 그리고 약간의 수염을 기른, 긴 얼굴형의 젊은 남성이다. 체격은 마른 편이다.
이 예수의 묘사는 이콘 양식의 하나인 '크리스토스 판토그라토(전능하신 그리스도)'에서 유래된 것이다. 판토그라토는 전능하다는 의미로, 예수가 의자에 앉아 왼손엔 성경을 들고 정면을 보며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의미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이콘 양식이다.
원래 초기 기독교에서는 짧은 머리 예수가 나오는 등 예수의 묘사는 통일되지 않았다. 현재 가장 오래된 기독교 미술은 주로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카타콤에서 발굴할 수 있다. 원래 기독교가 퍼진 중심지를 생각하면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등에서도 많이 발굴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성상 파괴 운동과 이슬람의 지배를 거치며 해당 지역들의 초기 기독교 미술은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다. 또 1세기까지만 해도 유대교적 관념이 많이 남아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일종의 우상 숭배처럼 여겨져서 예수를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물고기, 혹은 빵과 포도주 잔, 십자가 같은 상징적인 묘사가 많았다.
그러다가 대략 2~3세기 경 부터 긴 머리 예수를 묘사한 그림이 나오기 시작한다. 왜 예수의 머리카락을 길게 묘사하게 된 건지는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추측이 존재한다. 첫째로는 당시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그리스 철학자에 비견하는 시도를 자주 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중 머리를 길렀던 아르키메데스나 아폴로니우스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됐다는 설. 둘째로는 당시 조각상에서 높은 신, 특히 제우스나 포세이돈은 긴 머리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 셋째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 탄생 때에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천사가 말하는데, 이는 70인역 성경에서 나지르 사람을 오역한 문장으로 하느님에게 봉헌되어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사람을 의미한다. 삼손이 바로 그 나지르 사람이다. 즉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머리를 길렀다고 추정해서 그렇게 묘사했다는 설. 넷째로는 헤어스타일을 다르게 그리면 다른 사람들이랑 구분하기 쉬워서 (…) 그렇게 그렸다는 설이 있다. 다섯째로는 예수가 원래 머리카락이 좀 긴 편이었다는 극히 심플한 주장.
다만 이 시대의 긴 머리 예수는 여전히 '우리가 아는 모습'의 묘사가 아니었으며, 묘사들이 통일되지도 않았다. 긴 얼굴의 젊은 남성이 아니라, 기골이 큰 중년 남성에 곱슬거림이 풍성한 장발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묘사는 실제로 제우스나 포세이돈 회화의 영향일 수 있다.
그러다가 4세기에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공인되고서 기독교 미술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4~7세기까지 동안 예수의 묘사는 통일되지 않았고, 각 지역의 교회의 신학적 이해가 반영되어 서로 다른 모습의 예수를 묘사했다. 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 지역에서는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예수를 기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타나는 신과 비슷한 신적인 존재로 이해했고, 그에 따라 아폴론의 묘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한 수염이 없고 강건하며 전사적 면모가 느껴지는 예수가 주로 나타났다. 반면 예수가 직접 돌아다니며 활동한 장소인 레반트 지역의 교회는 예수를 역사적인 인물로써 이해했고, 이교도적 문화를 차단하고 싶어했다. '''그에 따라 시리아와 이집트 등 레반트 지역 교회에서 묘사한 예수가 바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수 모습의 직접적인 원조다.'''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 등 동방교회는 이에 대해 수염과 긴 머리는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모습이며 이교도적 영향으로부터 역사적 예수의 초상을 지켜내는데에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 등 동방 교회에서는 성상 파괴 운동을 거치면서 이콘이 양식을 정확하게 갖춰서 묘사되어야 한다는 교리가 정착되었고, 그에 따라 예수의 모습 역시 저 모습으로 완전히 정착한다. 정교회의 성화는 정말로 '공식'이 있어서 딱딱 정확히 양식을 맞춰 그려야 한다. 구도나 자세, 표정, 심지어 옷의 색도 함부로 바꿔 그리지 못한다!
반면 서방 교회, 즉 가톨릭은 성상 파괴 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12~13세기까지도 예수의 묘사가 통일되지 않았다. 중세 서방 교회에서 성경의 삽화로 많이 사용된 이콘 양식인 영광스러우신 주님(Maiestas Domini)을 보면 여전히 수염이 없다. 심지어 르네상스 시기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최후의 심판의 경우 고대 그리스의 정신으로 너무 돌아가는(?) 바람에 6세기 이탈리아의 성화들마냥 예수가 아폴론신과 닮게 그려졌다. 당시 성직자들이 “예수님이 예수님 같지 않게 그려졌다”면서 화를 냈다고. 서방 교회에서 예수의 표준적인 모습이 자리잡은 것은 종교개혁 무렵이다.
한편 이 예수의 묘사에 대한 역사적 맥락은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막론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가 아는 모습의 예수는 중세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그린 것'이라는 말이 서양과 한국 교회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을 정도. 인종차별을 극복하려는 취지는 좋지만 기독교 미술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낭설. 우리가 아는 예수 그림은 중동 교회에서 1500년 전에 그리기 시작한 거고 유럽인들은 그때는 수염 없는 예수를 그렸었다고 설명해주자.
프랑스의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가 체사레 보르자의 얼굴이 예수의 초상화의 모델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체사레 보르자의 출생년도(1475)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체사레 보르자는 본인의 진짜 얼굴 초상부터가 안 전해진다. 지금 있는 그림은 후대의 상상도.
[image]
한편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에게 발현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성화가 있는데, 굉장한 훈남이기는 하다. 다만 이 성화도 원본은 1934년도에 그려진 것이 따로 있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위 성화는 성녀 파우스티나가 선종하고 5년 뒤인 아돌프 힐라라는 화가가 성녀 파우스티나의 고해사제였던 안드레아스 신부의 감독 하에 그린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감사로 이 성화를 봉헌했다고 한다.
12.3.2. 역사적 예수
유럽권과 아메리카권은 인종에 관해 다소 민감한지라 예수의 인종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오간다.
예를 들어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나치스는 사실 예수는 아리아인이라는 어거지까지 썼다. 이스라엘에 주둔한 로마군 소속 게르만족 용병의 사생아라는 이상한 이론을 들고 나올 정도. 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주의에 심취해 있던 리하르트 바그너도 이렇게 믿은 사람 중 하나.
반대로 스파이크 리 감독,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맬컴 엑스에서도 "하느님은 백인이죠, 안 그런가요?"라는 목사에게 맬컴 엑스가 "성경을 바탕으로 볼 때 예수는 전형적인 아랍인 외모를 가졌을 텐데, 헛소리 하지 마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백인우월주의를 까는 장면.
이 재현도는 시리아 지방의 유대인 군락에서 발굴된 두개골 3개를 가지고 복원한 것이며, 예수의 신장 역시 당시 평균 신장인 155cm로 추측했다. 단, 이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정확히는 예수 본인의 재현도라기보단 그 시대 당시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평균 외모 재현도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심지어 평균이라고 치기에도 표본의 수가 상당히 작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2천년 뒤 미래인들이 서울에 살았던 특정인 얼굴을 복원한답시고 부산 사람의 두개골 세 개로 평균을 내고 그걸 이것이 당신의 얼굴입니다 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해보자. 이것을 복원도라고 부르기엔 매우 부적절하다. 같은 인종에 같은 민족이라도 외모는 개체별로 정말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니, 실제 정확한 예수의 모습(얼굴 및 체형)은 아무도 모를뿐더러 이 '복원도'와 같을 가능성도 적다.
일반인들에게는 수혈 거부로 문제를 일으킨 사이비 종교로 더 많이 알려진, 소수 종파인 여호와의 증인 역시 역사적 고증을 명분으로[131] 저 복원도와 유사한 모습의 예수 초상을 주로 사용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는 유럽출신 백인은 아니지만 인종적으로는 중동출신 백인은 맞다. 당시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은 셈족의 한 계통으로, 현대의 시리아인, 레바논인, 팔레스타인인과 함께 레반트계 코카서스인으로 분류된다.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우리가 아는 예수 초상의 직접적인 원조는 중동이다.''' 더군다나 예수가 탄생한 레반트 지역은 오래 전부터 지중해권이라는 특성상 역사적으로 남유럽권과 수많은 접점이 있었던 곳이며 고대부터 오랜 교역과 이주를 반복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권 사람들과 외견상 별 차이가 없다.[132] 유럽인은 피부가 희고 중동인들은 까무잡잡하다는 생각 자체가 편견에 가깝다. 실제로도, 아프리카 중에서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는 백인종의 비율이 높으며 아시아 중에서도 위구르지역 일대와 러시아 국경지대에는 '''인종이 백인인 중국인'''[133] 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는 예수의 모습을 재현하거나 추측할 증거는 딱히 없다. 성경을 비롯한 기록에 못생겼다는 말도 잘생겼다는 말도, 체격이 작다는 말도 크다는 말도 없으니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평범하다고 받아들여질 외모 아니었나, 추측할 뿐이다. 예수와 함께 세계적 성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인물들 중 소크라테스가 눈 뜨고 못 봐줄 추남이라는 말이, 붓다가 꽃미남이었다는 말이, 공자가 8척 거구였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나마 제일 유력한 건,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풍습으로 생각하면 미술에서 묘사처럼 어깨까지 닿는 긴 머리가 아닌 짧은 머리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정도이다. 그래도 현대 남성들의 머리보단 긴 편.
12.3.3. 신학적 예수의 모습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이사야서 53장 2절
기독교 신학에서는 바울로로부터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을 예수를 묘사한 걸로 해석했다. 즉 신학에서는 예수의 모습을 비참한 모습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7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객관적으로는 이 구절이 실제 예수의 외모를 묘사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이사야서의 해당 예언에서 말하는 미(美)는 군주나 장군으로서 가진 위엄을 말한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미'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은 '메시아께서는 위엄 쩌시는 정치적 지도자로 오실 것이다'라는 당대의 믿음을 부정하는 기록으로 봐야 한다. 또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을 예수로 해석하는 것 역시, 예수가 평소에 이목구비가 못생겼다는 의미보다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비참하게 고통 받으셨다'고 강조하기 위한 의도이다.그가 읽던 성서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굴욕만 당하였다. 지상에서 그의 생애가 끝났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내시는 필립보에게 "한 가지 묻겠는데 이 말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혹은 딴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필립보는 이 성서 말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말씀을 풀어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8장 32-35절
반면 요한묵시록에서는 부활하고 승천했지만 곧 재림할, 위엄찬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보다시피 초월적인 존재가 된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지 구체적인 이목구비를 말한 것이 아니라서, 실제 예수의 모습을 추측하는 데에는 별 도움은 안 된다.그 일곱 등경 한가운데에 사람같이 생긴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또는 눈같이 희었으며 눈은 불꽃 같았고
발은 풀무불에 단 놋쇠 같았으며 음성은 큰 물 소리 같았습니다.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고 얼굴은 대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 요한의 묵시록 1장 13-16절
양쪽 다 구체적으로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건 아니지만 신학적으로는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는 해석이다. 전자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수난 받는 예수, 후자는 부활하고 재림하여 인류를 심판할 전능한 예수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 때문에 초기 기독교 교부들도 '예수님은 처참하게 그리는 것이 좋다' vs '예수님은 위엄차고 멋지게 그리는 게 좋다'는 의견을 서로 대립하며 내놓기도 했다. 물론 현재 기독교 미술은 둘 다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중요한 논쟁은 아니다.
13. 가공 매체에 등장한 예수
14. 여담
서구권에서는 놀랐을 때 감탄사로 이 사람이나 이 사람의 아버지, 아니면 이 사람의 어머니 등을 자주 찾는다. 영어의 경우 Jesus Christ!, 혹은 Oh my God! 프랑스어의 경우 몽디외(Mon Dieu), 이탈리아어의 경우 맘마미아. 특히 맘마미아는 단어의 모양만 보면 그냥 '나의 엄마'인데, 진짜 엄마를 가르키는게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여간 예수가 서양에 문화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4대 성인 중 1명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지도 면에서는 그들 중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유럽인, 기독교 신자들은 4대 성인이라고 당연히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인과 한자 문화권의 성인(聖人)은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
워낙 파급효과가 거대한 분이다 보니 사이비 종교 쪽에서 이 분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왜곡해서 벤치마킹을 한다. 또한 사이비 종교의 과반수가 그리스도 계열의 사이비 종교인 이유 역시 이 분의 인지도가 세계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 홍수전은 자기가 여호와의 차남이자 예수의 친동생이라 주장했다.
- 옴진리교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는 예수의 외모를 벤치마킹해서 장발에 털보인 외모를 하고 다녔다.
- 찰스 맨슨은 아예 유언을 내가 예수다라고 외쳤다.
- 신천지교주 이만희 스스로를 재림예수라고 주장했다
예수는 또한 편견과는 달리 온순하기만 하지는 않았는데, 한번은 무화과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어서 달라고 하였으나, 열매를 주지 않자 온 제자들 앞에서, "이제부터 너에게서 나오는 열매는 그 누구도 먹지 않으리."라고 말하며 나무에 저주를 내렸다.
물론 그 이전에 '''예수의 아버지의 성전'''안에서 고리대금업자가 돈을 빌려주는 광경과 상인들이 가축과 비둘기를 판매하는 행태를 목격하여 제대로 빡돌아, 상인들을 쫓아내고 판매대들을 모조리 엎어버리기는 했다.
대표적 사례. 창조 101에 출전한 러이나는 인종이 백인인 중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