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티리오스 트람바스
1. 개요
소티리오스 트람바스(Σωτήριος Τράμπας, 1929년 7윌 17일 ~ )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산하 한국 정교회 대교구의 초대 교구장(Μητροπολίτης)이다.
2. 생애
6.25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에 납북당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의 아들[1] 이 1973년 그리스로 허름한 사진을 보낸다. 구한말 러시아 정교회의 포교로 설립된 한국의 정교회는 교세가 부족한 신앙 공동체였고, 사제관이나 부속 건물도 없이 서울에 딱 성당 하나만 있는 상황이었을 정도로 처참했다. 이런 한국 정교회의 딱한 사정을 담은 사진을 찍어, 이를 그리스에 보내 알린 뒤 "제발 그리스인 사제 한 분만이라도 한국에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 것.
이를 들은 트람바스 대사제는 한국행을 자원하여 1975년 12월 김포공항[2] 에 당도한다. 사진만 보고 무작정 달려온 트람바스 대사제는 생각보다 처참한 상황에 놀랐다. 사진으로 본 서울 성당엔 사제관조차 없이 '진짜로 성당 건물 딱 1개 뿐'인 상황이라 인근 전·월세방을 전전하다가 1979년이 되어서야 사제관을 마련했을 수준. 아울러 출판된 전례서나 성가책조차 없어 이를 손으로 일일이 쓰는 필사 작업을 통해 책을 내는 고생도 했다. 이 때 대대적인 전례서 재번역과 성가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3] 이런 고난 속에 옆에서 도와주던 한국인 사제가 불의의 사고로 1977년 세상을 떠나 트람바스 대사제는 철저히 혼자가 되는 일도 생겼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천과 부산, 전주, 춘천, 울산, 양구 등 6곳에 성당을 세웠고, 가평에 구세주 변모 수도원도 세웠다.
2004년 한국 정교회가 자치 교구로 뉴질랜드 정교회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교구장 주교로 착좌하였으며, 2008년 고령으로 주교직에서 은퇴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계총대주교청 시노드의 결정으로 후임 교구장으로 당시 보좌주교로 봉직하던 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 주교가 후임 교구장으로 착좌한다. 한편, 시노드는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전 교구장에게 주교 지위에 걸맞도록 '피시디아의 관구장[4] '으로 명의주교로 임명하는데, 명의관구로만 남아 있던 이곳에 러시아인들을 비롯한 정교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명의 관구가 활동 관구로 격상되고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터키 한복판에서 정교회 성당들을 건립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는 데에 열정을 다했다. 한국 대교구장으로 봉직한 인연으로 성당의 성물들 일부는 한국에서 제작해서 보낸 것도 있을 정도였다. 고령으로 인해 가평에 위치한 주 변모 수도원에서 수도원장 자격으로 체류하는 시간이 많지만, 피시디아 관구의 선교활동을 위해 터키와 한국을 자주 오가기도 했다.
3. 약력
- 1929년 7월 17일 그리스 제2공화국 아르타(Άρτα) 출생
- 1951년 아테네 신학대학 입학
- 1956년 수사 입회, 3일 후 보제로 서품
- 1960년 사제 서품, 같은 해 대수도사제 승품
- 1975년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주임 사제 부임
- 1991년 뉴질랜드 대교구 보좌주교 및 한국대리구장 임명(질론의 명의주교)
- 2004년 한국 정교회 대교구 초대 대교구장 착좌
- 2008년 한국 정교회 대교구장 이임, 피시디아의 관구장 착좌
4. 저서
- 위대한 선교사 성 사도 바울로(2011년)
- 영적 아버지에게서 듣다(2013년)
- 정교회 교리서(2015년)
[1] 정교회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독신자뿐 아니라 기혼자도 사제가 될 수 있다. 참고로 사제가 주교가 되려면 독신 사제여야 함.[2] 당시에는 김포공항이 국제공항이었다.[3] 약 6~7년 동안 이뤄진 작업 끝에 1980년대에 그리스어 '성찬예배서'와 '사제/주교 예식서'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시작으로 일곱 성사와 주요 절기별 핵심 전례서가 편찬되었다. 이 때를 시작으로 한국 정교회에서는 완벽한 현대 한국어 입말에 중심을 둔 전례 용어와 기도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교회의 필수적인 전례들에 필요한 핵심 전례서들 대부분이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큰 변화 없이 사용 중에 있다.[4] 지금의 터키 안탈리아와 알라냐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