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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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국의 흑인노예 해방론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노예 12년이라는 회고록으로 유명해졌다.
2. 자유로운 흑인, 노예가 되다
솔로몬 노섭은 1807년 (혹 08년) 7월 10일, 미국 뉴욕 주 에식스 군의 미네르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노예였고 어머니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에 솔로몬은 처음부터 노예와는 전혀 무관한 태생이었다. 아버지 민투스는 해방된 이후에 농장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는데 투표권을 얻는 자격인 재산기준에 부합했을 정도였다. 민투스에겐 솔로몬을 비롯한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들에게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1828년 (혹은 29년) 솔로몬은 앤 햄프턴이라는 유색인종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에겐 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솔로몬은 앤과의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마거릿, 알론소의 2녀 1남의 자녀를 두었으며 히브런에 농장을 소유하고 여러 직업을 가지기도 했었다.
솔로몬은 피들러[1] 로, 아내 앤은 요리사로서 고정적이고 안정된 수입과 삶을 유지해나갔다. 호텔이 손님으로 북적일 때는 부부는 호텔에서 일하고 호텔 일이 뜸해지면 솔로몬은 숙련공 목수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솔로몬이 참여한 건설 현장 중에는 챔플레인 운하 공사 현장도 있었다.
1841년, 솔로몬의 나이 32세 때 솔로몬은 메릴 브라운과 에이브럼 해밀턴이라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제안받았다. 한 서커스단이 뉴욕시에서 공연을 하는데 피들러로 일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당시 샌디 힐의 호텔에서 요리사 일을 하고 있던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근처인 뉴욕에서 몇 차례 공연에 참가하고 돌아오면 되는 간단한 일인지라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이게 솔로몬에게는 치명적인 실수가 되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공연을 마친 후 서커스단은 솔로몬에게 "워싱턴 D.C.에 가서도 공연할 텐데 함께해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솔로몬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워싱턴 D.C.에는 미국 최대의 노예시장이 있었고 공공연히 흑인들을 납치해 노예시장에서 팔아넘기는 일들이 횡행했기 때문에 솔로몬은 신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러나 서커스단이 높은 보수와 왕복 교통비까지 주겠다고 한지라 결국 솔로몬은 이들을 따라 워싱턴 D.C.까지 가기에 이른다.
이곳에서 브라운과 해밀턴은 마수를 드러냈는데 솔로몬에게 약을 먹여 솔로몬을 무력하게 만든 다음 워싱턴 D.C.의 노예상인인 제임스 버치에게 650달러를 받고 팔아넘긴 것이다. 정신을 차린 솔로몬은 자신은 자유민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버치와 노예를 감시하는 이들은 솔로몬을 구타하여 자유민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12년간 노예 생활을 해야 했는데 이때 겪은 일들을 책으로 낸 것이 노예 12년이다.
1853년 노예에서 벗어난 뒤로 백인들에 대하여 증오를 품고 자신을 납치한 백인, 그리고 농장주였던 백인들을 모두 고소하였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흑인이 백인에 대한 고소는 효력이 없다는 당시 연방법에 의해 모두 패소하였다. 패소한 뒤 흑인 인권운동가가 되어 농장에서 탈출한 흑인들을 돕는 <지하연맹>을 조직했으며 많은 흑인 노예들을 숨겨주고 도와주며 살았다. 허나 이런 활동은 백인 우월주의자 레드넥들의 딱 좋은 먹잇감이어서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살았다.
그래서 늘 숨어 살았기 때문에 언제 죽었는지 자세한 기록도 없어서 그저 당시 몇몇 기록으로 보고 1862년~1863년경에 55살 정도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대부분 역사가들은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납치되어 죽어서 어딘가에 버려졌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1] 호텔이나 여러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