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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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송규(宋奎)

1900년 8월 4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1962년 1월 24일
종법사 재임
1943년 - 1962년
법호
정산(鼎山)
본관
야성 송씨
속명
도군(道君)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
동생
주산 송도성(主山 宋道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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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정산종사 게송

1. 개요
2. 일생
3. 삼동윤리
4. 여담


1. 개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수제자.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초기 및 6.25 전쟁 시기 원불교를 이끌며 초석을 다진 원불교의 두 번째 종법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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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생


"송 규는 보통 사람의 지량(知量)으로 능히 측량할 인물이 아니다. 내가 송 규 형제를 만난 후로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 번 시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다"
- 소태산 대종사, 대종경 신성품 18장
" 내가 이 세상에서 본 한국인의 얼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익산 원불교 총부에서 본 송정산 선생의 얼굴이었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닦고 닦았으면 지혜와 자비로움이 넘치는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에 감동했다"
- 숭실대 안병욱 교수 (동아일보 기고)
1900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서 태어나 8세부터 한문을 공부했다. 인류를 구제하는 인물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마땅한 인연을 찾지 못하고 전라도까지 건너오게 되었다.[2]
1917년에 정읍 화해리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으로 만났고, 이듬해 대종사가 있는 영광으로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었다. 당시 제자들 중 나이는 가장 어렸으나 수제자로 인정받았으며 대종사는 송규를 "우리 회상의 법모(法母)"라고 칭찬했다.
이후 대종사를 보필하여 원불교의 교리를 제정하고 기반을 닦는 데 공헌을 하였으며, 1943년 대종사 열반 후 뒤를 이어 2대 종법사가 되었다.
일제 말기 어려운 시국에서 원불교를 지켜내었으며[3], 해방 후 '원불교' 교명을 확정하였다.[4]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에서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펼쳤고, 6.25 전쟁 등 험난한 시기를 이끌었다. 1961년 4월에 삼동윤리를 발표한 뒤 이듬해 열반했다.
정산종사의 법문을 수록한 정산종사 법어는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집인 대종경과 더불어 원불교 교서로 쓰인다.
그 외 <원각가>, <불법연구회 창건사>, <건국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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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종사 종법사 추대식

3. 삼동윤리


- 동원도리: 세계 모든 종교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근본적 진리는 모두 같다는 의미
- 동기연계: 모든 인류와 생령들이 이름은 다르지만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라는 의미.
- 동척사업: 각종 사업과 주장이 서로 다르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더 좋은 세상의 개척으로 동일하다는 의미.
정산종사의 대표 사상으로, 이렇게 모두가 하나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4. 여담


  •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이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원불교 정전 편찬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산종사가 초안을 준비하면 대종사가 감수하는 식. [5]
  • 대종사 사후 원불교 교명을 확정하고 대종사의 언행을 모은 '대종경'을 발행함을 비롯하여, 원불교 기도식에 쓰이는 '영주'를 짓는 등, 현재 원불교의 기본 틀은 정산종사 시기에 대부분 갖추었다.
  • 정산 종사의 아버지인 구산 송벽조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천황을 꾸짖는 투서를 조선총독부에 익명으로 보냈다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일제에서 그 지역에 백일장을 주최하고 필체를 대조해서 적발했다고 한다.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 역시 경찰서에 가서 고초를 겪었으나, '다시는 제자들이 이런 짓을 못하게 하라'는 일제의 압박에는 끝까지 모르쇠로 대응했다고 한다.
  • 동생인 주산 송도성 종사[6]와 더불어 원불교 최고법위인 대각여래위로 추존되었다. 역대 대각여래위는 소태산 대종사를 포함해서 총 6명으로, 형제로서는 유일한 사례.
  • 상기 이유로, 성주군 초전면 정산종사 탄생가는 '여래 2명을 배출한' 원불교 성지다. 원불교 5대 성지 중 소태산 대종사와 관련되지 않은 유일한 성지. 2016년 THAAD 배치 장소가 원불교 성주성지 바로 옆으로 선정되어 논란을 빚었는데 당연히 원불교에서는 반발하였다. 원불교 입장에서는 소수종교의 서러움이라고 볼 수 있다.

[1]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창시자 사후에 분열되거나 멸망했음을 생각하면, 역사적으로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2] 이 과정에서 증산계통 종교 중 하나인 보천교의 교조 차경석을 만나기도 했으나, 올바른 도인이 아니라 판단하고 떠났다. 또한 강일순의 외동딸 강순임을 만나 정심요결(正心要訣)이라는 도교의 내단수련서를 전해 받았다고도 한다. 강순임은 훗날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창시하였다.[3] 대종사 열반 당시 일제에서는 "불법연구회(원불교)는 이제 끝" 이라 생각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창시자 사망 후 망하거나 제자들의 갈등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생각하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정산 종사 취임 후 대종사 열반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운영되는 불법연구회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4] 대종사 당시의 공식 명칭은 '불법연구회'였다.[5] 유학자 집안 출신인 정산 종사와 달리, 대종사는 어릴 때 서당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글에 밝지 못했다.[6] 소태산 대종사의 사위이자 정산종사의 동생으로, 대종사의 법문을 기록하여 남기는 등 원불교 초창기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을 많이 하였다. 전재동포 구호사업의 총책임자였는데 이때 과로로 병을 얻어 40세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