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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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송도성 (宋道性)
'''속명'''
송도열 (宋道悅)
'''생'''
1907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출가'''
1922년
'''몰'''
1946년
'''법호'''
주산(主山)
'''부'''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
'''모'''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
'''형'''
정산 송규(鼎山 宋奎)

獻心靈父 許身世界

常隨法輪 永轉不休

마음은 스승님께 드리고 몸은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

16세에 지은 출가시

1. 개요
2. 일생
3. 여담


1. 개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사위이자 정산 송규 종사의 친동생. 원불교 창립의 핵심 역할을 한 청년 지도자이자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매진하다 순직한, 실천하는 종교인의 표상이다.

2. 일생


"내가 송 규 형제를 만난후로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번 시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다"
- 소태산 대종사, 대종경 신성품 18장
정산 송규 종사의 친동생으로, 1907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랐다. 13살 때 형을 따라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만나 법문을 듣고 제자가 되었으며, 16살에 출가를 단행하고 22살 때 대종사의 장녀인 청타원 박길선 종사와 결혼하였다.
형인 정산 종사 등과 더불어 영광, 변산, 익산 등을 오가며 대종사를 모시고 원불교 창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대종사의 법문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훗날 많은 자료를 남겼다.[1] 19세에 원불교 최고 의결기관인 수위단 단원이 되었고, 이후 원불교 최초의 월간지 발행, 교무부장 역임, 영광지부장 등을 거쳐 31세에 교정원장[2]을 맡았다. 여름과 겨울에 선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고, 좌선 시간에 철주부동의 자세로 진경에 드는 모습을 보이며 많은 수도인들을 키워냈다.
1945년 해방 이후 해외에 나가있던 동포들이 대거 귀국하였는데, 오갈곳 없는 귀환 동포들을 돕는 전재동포구호사업의 총 책임을 맡았다. 당시 구호사업을 시작한 수십개 단체 중 사업을 끝까지 이어간 곳은 원불교를 비롯하여 몇 군데에 지나지 않았고, 이에 감명한 백범 김구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업을 진행하던 중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었으나 그 사실을 모른채 업무에 매진하며 과로하다 1946년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954년에 출가위[3]로, 1991년에 대각여래위로 추존되었다.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인으로 지도자로 만인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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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종사가 진두지휘했던 전재동포 구호사업의 모습. 주산종사는 사진 속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3. 여담


  • 대각여래위로 추존된 6인 중 단연 최연소이며, 형제가 추존된 것은 유일한 사례이다.
  • 정산종사와 주산종사가 탄생한 성주군 초전면은 원불교의 5대 성지 중 하나이다.

[1] 대종사 법문집인 대종경의 간행에 있어서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 더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2] 원불교의 국무총리 격.[3] 원불교 6단계 법위 중 대각여래위 바로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