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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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중빈(朴重彬)
'''생'''
1891년 5월 5일
'''대각[1]'''
1916년 '''4월 28일'''
'''몰'''
1943년 6월 1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마을
'''법호'''
소태산(少太山)
'''본관'''
밀양 박씨
'''아명'''
진섭
'''자'''
처화(處化)
[image] [image]
1. 개요
2. 일생
2.1. 어린 시절
2.2. 구도 과정
2.3. 석가모니 연원
2.4. 원불교 창시
2.5. 열반
3. 가르침
3.1. 핵심 교리
3.1.1. 법신불 일원상(法身佛 一圓相)
3.1.2. 교리도
3.1.3. 삼학 팔조 사은 사요
3.2. 표어
3.3. 법문
4. 제자
5. 여담


1. 개요


원불교의 창시자. 교과서에서는 '박중빈'이란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원불교 자체적으로는 '소태산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대종사님' 등 호칭을 사용한다.

2. 일생


나는 시루가 아니라 솥이오. 솥에서 산 사람이란 말이오. [2]

- 소태산 평전

공자님도 태어나실 때 가 나 있었다고 하여 다시 공자님 같은 분 못 태어나시게 하였고, 부처님도 옆구리로 태어나셨다 하여 길을 막았다. 위대한 분들이 모두 기적으로 옆구리로 낳고 동정녀가 낳았다 하여 다음 성자가 못 나오도록 길을 막으셨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어린이)이 어머니께 "나 낳을 때 꿈 어떻던가요?" 물을 때 '아니, 너는 별 꿈 없이 낳았다'고 하면 '나는 공자님과 같이도 못 되고, 부처님과 같이도 못 되겠네'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과거 성자들이 한 것은 말할 것이 없고, 내 역사를 쓸 때에는 평범하게 쓰라.

오랜 수도를 해온 만큼 대종사 살아 생전에 신비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구전되나 [3] 신통을 바람은 새 시대의 종교에 맞지 않다고 하여, 그 기록을 후대에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없는 신통력도 만들어내어 홍보하는 일부 신흥종교단체들과 크게 다른 점. 과거 종교의 성인들과 비교할 때, 대종사의 일생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근대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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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에서는 대종사의 일생을 열 가지 장면(십상)으로 나누어 정리하는데, 그 내용 대략은 아래와 같다.

2.1. 어린 시절


1891년 전라남도 영광군 바닷가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특별한 탄생설화는 전하지 않는다. 가난한 마을의 흔한 흙수저.
어린 시절에 조금 특이한 쪽으로 비범하기는 했다. 10살 때 서당 훈장이 "나는 담력이 강해서 하늘이 무너져도 안 놀란다."라고 허세를 부리자 "내가 놀라게 해드리겠다."라고 장담하더니 훈장 아들에게 불장난을 가르쳐서 마당 솔잎더미에 불을 붙였다. 훈장이 옷을 오줌통에 적셔가며 투혼을 발휘한 끝에 별 피해 없이 불길을 잡았지만, 그 때문에 대종사의 최종학력은 10살 서당 중퇴 로 마무리. 실제로 한문을 공부한 기간이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아서, 어른이 되어 경전을 집필할 때에도 제자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 4살 때 "동학군이 쳐들어온다."하고 거짓으로 소리 질러서 집안 어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2.2. 구도 과정


7살 때 '하늘은 얼마나 높을까', '바람과 구름은 어디서 왔을까' 등 자연현상에 의문을 품었다. 원불교에서는 이를 대종사 구도생활의 시초로 본다. 9살, 10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른 의문들이 이어지고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확장되었다고 한다.[4] 인터넷이 되는 시대였다면 원불교는 세상에 없었을지도.
그 시절 그 시골에서 꼬마아이가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11살부터 15살까지 산신령을 만나서 물어보겠다며 매일 뒷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렸다.
산신령을 못 만나자 타겟을 도사로 바꿨다. 도사를 만나겠다며 동네 거지나 각종 이상한 떠돌이들을 찾아가서 혹시 도사가 아닌지 물어보고 다녔다. 6년간.
22살부터는 도사도 포기하고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25세부터는 그조차 잊어버리고 말해도 말하는 줄 모르고 먹어도 먹는 줄 몰랐다. 폐인 같은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컸다고 한다.
결국 1916년 4월 28일 새벽에 큰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구도생활을 마무리한다. 원불교에서 '원불교 열린날'이자 '우리 모두의 공동생일'로 경축하는 '''대각개교절이 바로 이 날'''이다.

2.3. 석가모니 연원


세계의 모든 종교도 그 근본되는 원리는 본래 하나이나, 교문을 별립하여 오랫동안 제도와 방편을 달리하여 온 만큼 교파들 사이에 서로 융통을 보지 못한 일이 없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다 모든 종교와 종파의 근본 원리를 알지 못하는 소치라 이 어찌 제불제성의 본의시리요.

과거의 불교는 그 제도가 출세간(出世間) 생활하는 승려를 본위하여 조직이 되었는지라, 세간 생활하는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으므로, 누구나 불교의 참다운 신자가 되기로 하면 세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며 직업 까지라도 불고하게 되었나니, 이와 같이 되고 보면 아무리 불법이 좋다 할지라도 너른 세상의 많은 생령이 다 불은(佛恩)을 입기 어려울지라, 이 어찌 원만한 대도라 하리요.

- 원불교 정전 교법의 총설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기가 얻은 깨달음과 과거 성인들의 말씀을 대조해보겠다며 유교, 불교, 동학, 기독교 등 여러 종교의 경전을 구해다 읽었다. 결론은 "내가 안 것은 옛 성인들이 먼저 알았다"는 것과 "성인들의 가르침은 모두 하나"라는 것이었다.
여러 경전들이 대체로 잘 쓰여졌지만 그 중에서도 금강경이 근본진리를 가장 잘 드러냈고, 대종사 스스로의 구도과정이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가 많다 하며 스스로 연원을 부처님에게 대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불법을 바탕으로 새 종교를 건설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원불교는 그래서 불교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5]
원불교의 '원'은 진리를, '불'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불교와 같은 '불'자를 쓰지만, 진리를 깨닫는 종교라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연원을 대고도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은 당시의 불교가 불법이라는 훌륭한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불법을 공부하려면 세상 일을 모두 그만 두고 산에 들어가야만 했고, 승려가 아닌 불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돈을 시주하고 불상 앞에 기도함이 거의 전부였다. 기존에 어렵고 세상과 동떨어진 듯 보이는 불법을 생활 속에서 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원불교라고 보면 된다.

2.4. 원불교 창시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 위주로 40명 정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6] 그 중에서 신심이 독실한 사람 8명을 선발하여 첫 제자로 삼았다.
원불교라는 이름은 대종사 사후에 정한 것으로, 처음에는 불법연구회라고 불렀다.
불법의 생활화를 표방하는 종교답게, 대종사와 제자들이 맨 처음 모여서 한 일은 경제의 자립기반을 갖추는 것이었다. 처음에 대종사의 집을 담보로 숯을 사서 팔아 큰 이문을 남겼다. 그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큰 공사를 벌이는데, 바닷물을 둑으로 막아 물을 퍼내고 논을 만들었다. 지금 하려고 생각해도 보통 스케일이 아닌 일인데, 시골 촌사람 9명이서 일을 벌렸으니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미쳤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사의 결과는 정관평
공사가 끝날 때쯤 경북 성주에서 구도생활을 하던 송도군(정산 송규 종사)이 9번째 제자로 합류한다. 이렇게 9명을 원불교에서는 구인제자라 부르며, 기독교로 치면 12사도에 해당한다.
구인제자는 각자 하나씩 산봉우리를 맡아 10일 간격으로 기도를 올렸는데, 어느날 대종사가 이들을 불러 "너희가 정성이 부족하다. 너희가 죽어야 쓰겠다."라고 말하며 자결하라고 지시했다. 제자들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종이에 손도장을 찍고 산봉우리로 올라가 자결할 준비를 했는데 대종사가 다시 이들을 불렀다. "그대들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쳤으니[7] 오늘부터 죽은 셈 치고 세상을 위해 일하라". 이 때 제자들에게 새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것이 원불교에서 쓰는 법명의 시작이다.
이후 대종사는 변산으로 거처를 옮겨 새 종교의 교리를 짜기 시작한다.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라미 일원상을 처음으로 그림도 이 때.[8]
1924년에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열고 지금의 전북 익산시 지역에 원불교 중앙총부를 건설하여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원불교 총부는 지금도 익산에 있다. 다만 2016년 현재, 원불교 행정부인 교정원은 서울로 이전을 준비 중이다.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온데,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

- 도산 안창호[9]

, 대종사를 만나서. #

이후 1943년 열반에 이르기까지 총부를 중심으로 서울, 부산, 금강산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새로운 제자들을 만나고 포교활동에 힘썼다.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조선의 민중계몽 활동은 일제가 보기에는 큰 부담이 되었으므로 견제와 탄압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안창호의 방문 이후로 더 심해졌다고 한다. 실제로 도산 안창호가 박중빈을 방문하고 간 이후에 익산 관내 3번째 주재소인 북일주재소가 원불교 중앙총부 구내에 설치되었다고. #

2.5.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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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빈은 식사 후 복통을 호소하며 투병하였고 이윽고 1943년 6월 1일에 5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067
죽음을 미리 직감하고 말년에 원불교 정전 편수를 서두르며 제자들에게 "먼 길 떠날 것이다." 하며 여러 번 언질을 주었지만 다들 진짜 멀리 수양하러 간다고만 생각했지 이 세상을 떠난다고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
박중빈의 열반은 스스로 선택한 신의 한 수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일제강점기 끝으로 갈수록 일제의 압박이 심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종교단체 대부분이 '황국신민을 계몽하는 친일종교'가 되든지 아니면 탄압속에서 사멸 되든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원불교라고 별 수가 없던 상황에서,[10] 소태산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순식간에 일제의 관심이 원불교에서 떠나게 되었고, [11] 일제 강점기에 친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명맥을 지켜낸 몇 안되는 사례로 남을 수 있었다. 살기 위해 친일을 택할 수 밖에 없던 대부분의 현존 종교들이 이 시기의 행적을 쉬쉬하는 것과는 대조적.
박중빈 사후, 수제자인 정산 송규 종사가 법통을 계승하고 해방 이후 교명을 '원불교'로 정하여 지금에 이른다.

3. 가르침



3.1. 핵심 교리



3.1.1. 법신불 일원상(法身佛 一圓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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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를 상징하는 동그라미는 법신불 일원상이라 부른다. 절에 있는 불상이 부처님의 형상을 모신 것이라면 원불교 교당에 모셔진 법신불 일원상은 부처님뿐 아니라 예수님 공자님 등 모든 성인들이 밝혀주신 공통된 진리를 상징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에게 신심을 북돋우기 위해 각 종교 창시자들의 형상을 모시곤 했지만 그러다보니 (분명 같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끼리 네가 옳니 내가 옳니 다투게 되었다는 것. 이 역시 대종사의 미래형 종교 설계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원불교의 '원'이 바로 이 '원'이다.

3.1.2. 교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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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정전에 수록된 원불교 교리도. 원불교의 교리를 축약한 것으로 대종사 생전에 그렸다. 창시자가 생전에 교리를 직접 정리하여 후대에 남겼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교리해석에 논란이 없음이 특징이다.

3.1.3. 삼학 팔조 사은 사요


교리도의 핵심은 삼학 팔조 사은 사요로 축약할 수 있다.
삼학(三學): 원불교의 수행방법. 정신수양(精神修養), 사리연구(事理硏究), 작업취사(作業取捨)로 구성되어있다. 여러 종교들이나 불교 내 종단들끼리도 각자 선수행이나 경전공부 등 어느 한쪽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원만한 인격을 이루려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팔조(八條): 삼학수행의 원동력이 되는 진행사조(進行四條)인 신(信), 분(忿), 의(疑), 성(誠)과 방해가 되는 사연사조(捨捐四條)인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
사은(四恩):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네 가지 은혜.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 천지은(天地恩), 부모은(父母恩), 동포은(同胞恩), 법률은(法律恩)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요(四要): 인류사회 발전을 위해 함께 실천해가야 할 네 가지 덕목. 자력양성(自力養成), 지자본위(智者本位), 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 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로 구성되며 대체로 평등의 윤리를 담았다.

3.2. 표어


개교 표어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교리 표어
- 처처불상 사사불공 (곳곳이 부처 일마다 불공)
- 무시선 무처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할 때나 선수행)
- 동정일여 영육쌍전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같은 마음으로. 정신과 육신을 조화있게 발전시키자)
-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 (불법으로 현실 생활을 발전시키고, 현실 생활에서 진리를 깨쳐가자)

3.3. 법문


대종사가 직접 작성한 교리는 95쪽 분량이며 원불교 정전이란 이름으로 편찬되어 있다. 대종사의 평상시 법문들은 대종사 사후에 제자들이 엮어 대종경으로 출간했으며, 총 15품 547장이다. 정전과 대종경을 모두 엮어 원불교 교전이라고 출판하였는데, 이후 이 교전은 불조요경과 정산종사 법어 등이 추가로 수록되면서 현재는 <원불교 전서>로 확장되어 출판되고 있다.
교전은 원불교 교당에서 구할 수도 있고 앱스토어에서 누구나 무료어플로 다운받을 수도 있다.
아래는 대종경 법문들 중 일부. 선택기준은 개인 취향.

그대들은 하늘 사람을 보았는가. 하늘 사람이 하늘 나라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저 어린이들이 바로 하늘 사람이니 저들은 마음 가운데 일호의 사심이 없으므로 어머니를 통하여 천록(天祿)이 나오나니라. 그러나, 차차 사심이 생기면 천록도 따라서 그치게 되나니, 수도인들도 사심만 없고 보면 한량 없는 천록이 따르지마는 사심이 일어나면 천록 길이 따라서 막히게 되나니라.

- 대종경 수행품 35장

부모 자녀와 같이 무간한 사이라도 자기가 실행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지도하면 그 지도를 잘 받지 아니하고, 부부와 같이 친절한 사이라도 내가 실행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권면하면 그 권면을 잘 받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남을 가르치는 방법은 먼저 내가 실행하는 데 있나니라.

- 대종경 인도품 22장

한 제자 어떤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네가 갚을 차례에 참아 버리라. 그러하면, 그 업이 쉬어지려니와 네가 지금 갚고 보면 저 사람이 다시 갚을 것이요, 이와 같이 서로 갚기를 쉬지 아니하면 그 상극의 업이 끊일 날이 없으리라."

- 대종경 인과품 10장

작은 재주로 작은 권리를 남용하는 자들이여! 대중을 어리석다고 속이고 해하지 말라. 대중의 마음을 모으면 하늘 마음이 되며, 대중의 눈을 모으면 하늘 눈이 되며, 대중의 귀를 모으면 하늘 귀가 되며, 대중의 입을 모으면 하늘 입이 되나니, 대중을 어찌 어리석다고 속이고 해하리요.

- 대종경 인과품 23장

(부처님을 어디에 봉안해두었냐는 질문에) 산업부원 일동이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거늘 대종사 그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니라." 그 사람들이 더욱 그 뜻을 알지 못하니라.

- 대종경 성리품 29장


4.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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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를 초기에 모셨던 일산 이재철, 이산 이순순, 삼산 김기천,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육산 박동국, 칠산 유건, 팔산 김광선, 정산 송규, 이렇게 9명을 구인제자라 부른다. 정산 송규를 제외하면 모두 인근 동네 사람들이며 대체로 대종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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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남자인 구인제자와 별도로 여성 구인제자가 있다. 남성 구인제자처럼 극초창기 제자들은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원불교가 자리잡아 가는 데 있어서 남성들을 능가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일타원(一陀圓) 박사시화[13], 이타원 장적조[14], 삼타원 최도화[15], 사타원 이원화[16], 오타원 이청춘[17], 육타원 이동진화[18], 칠타원 정세월[19], 팔타원 황정신행[20], 구타원 이공주[21]가 이에 해당한다.[22][23] 시골 촌부들이었던 남성 구인제자들과 달리 여성 구인제자들은 당시 부잣집 부인이거나 잘나가는 신여성들이 많았다.
대종사 사후 법통은 수제자인 정산 송규 종사로 이어졌으며, 이후 3대 대산 김대거 종사, 4대 좌산 이광정 종사, 5대 경산 장응철 종사 등으로 이어졌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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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종사는 당시 조선인으로써는 이대호급 피지컬이었다. 키는 175-180 cm, 몸무게는 90-110 kg 정도라고 전하는데 조선 말기 남성 평균 키가 161 cm 였다.
  • 대종사가 이끌던 불법연구회(원불교)는 회계처리나 사생활 등이 깔끔하기로 유명했다. 일제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여러 번 불시에 털었는데 금전출납이나 남녀관계 등 문제 삼을 구석을 하나도 찾지 못해 혀를 내둘렀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원불교는 종교계에서 나름 가장 깨끗하고 신뢰가는 교단으로 인정받는 편이다.
  • 일제에서 불법연구회를 감시하라고 투입한 조선인 악질순사 황가봉이 대종사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고 경찰 내부정보를 알려주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 슬하에 2남1녀가 있었는데, 장남이 원광대학교 박길진(광전) 초대총장이다. 차남 박광령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장녀 박길선은 송규의 동생인 송도성과 혼인하였다.

내가 진묵이라면 어쩌겠소?


[1] 큰 깨달음. 원불교에서는 창시자의 생일 대신 이 날을 대각개교절로 경축한다.[2] 가끔씩 떡을 찌는 데 쓰는 시루가 아니라 민초들이 매일 밥을 하는 데 쓰는 솥이라는 의미. 2016년 소태산 평전의 출간과 더불어 회자된 이야기.[3] 대종사의 열반이 1943년으로 비교적 최근이었기 때문에, 2016년 현재에도 대종사를 직접 받들었던 제자들이 원불교의 원로로 상당수 남아있다.[4] 꼭 대종사가 아니더라도 어릴 때는 어른들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에도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아몰랑 하고 집어치우느냐 끝까지 파고드느냐의 차이.[5] 원불교는 <새 불교>를 표방하므로, 교단으로서는 서로 다르나 내적인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공식 입장. 천주교와 개신교 차이 정도로 생각해도 80%쯤은 맞다. 애당초 원불교는 불교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가 형식은 다르지만 근본진리는 다르지 않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다 같이 힘을 합치자." 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굳이 불교냐 아니냐 하는 구분이 소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6] 이 중에는 증산 강일순 계열인 보천교를 신앙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보천교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종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도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면 보천교를 거쳐가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 이를 빌미로 증산도 등에서는 원불교가 증산 계열 종교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7] 하늘이 감응한 증거로, 손도장을 찍은 자리에 붉은 혈인 9개가 나타났다고 한다. 대종사 생존 당시 일어난 신령한 일들은 모두 기록을 남기지 못하도록 했는데, 유일하게 전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이 날이 8월 21일인데 원불교에서는 이 날짜를 법인절(法認節)이라 하여 경축일로 기린다.[8] 대종사가 벽지에 처음으로 그린 일원상 원본은 6.25 전쟁 당시 유실되었다고 한다.[9] 안창호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인해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935년 2월 위장병으로 가출옥, 그 뒤로 2년 동안 전국 각지를 순회하였는데, 호남에 온 것은 1936년 2월의 일이었다.[10] 일제에서 소태산을 조선의 간디로 지목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11] 창시자가 죽었으니 당연히 망할 줄 알았다고 한다.[12] 심지어 박동국은 친동생, 유건은 외삼촌이다. 과거의 성인들이 대부분 고향을 떠나서 포교활동을 했음과 대비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새로운 땅에 구세주처럼 짠 나타나지 않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왔던 고향 어른들에게 스승으로 인정받았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13] (1867~1946) 전북 남원에서 출생. 일찍이 부군을 사별한후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으며 1924년에 서울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동생 박공명선 (朴孔明善)과 함께 귀의하였다. 이후로 전국 각처로 돌아다니며 방물장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고 교단 창립에 헌신하였다.[14] (1878∼1960) 경남 통영에서 출생. 일찍이 강증산교의 신자가 되었다가 1921년에 소태산 대종사에 귀의하였다. 나중에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으며 교단 초기에 박사시화, 최도화와 함께 교직없는 교역자로서 교화에 큰 활동을 하였다.[15] (1883~1954) 전북 진안에서 출생.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동학사·화엄사 등에서 화주 노릇을 하였다가 1922년에 진안 만덕산에서 송규를 만나 입교했다.[16] (1884~1964) 전남 영광에서 출생. 소태산 대종사가 22세경부터 26세에 대각을 이루기까지 정성을 다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으며 소태산의 대각 후에는 영산에 주재하면서 영산교당 창설과 발전에 노력하였다. 나중에는 영광지방의 교세 발전과 교도 관리에도 힘썼다.[17] (1886~1955) 본명은 화춘(化春)이며 전북 전주에서 출생. 1924년에 최도화의 인도로 입교하여 교단 창립에 전 재산을 바쳤으며 나중에 전주교당의 창립주로 수행하였다. 1934년부터 20여년간 봉직하였다[18] (1893~1968) 본명은 경수(慶洙)이며 경남 함양에서 출생. 1924년 3월에 박사시화의 인도로 서울에서 입교한후에 같은 해 5월에는 만덕산 초선회에 참석하여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만났다. 신앙심이 투철하여 서울 창신동에 가옥을 매입하여 가옥·가산·대지를 모두 서울교당 창설에 희사하였다. 그후 1933년에 본격적으로 출가하여 전라북도 익산 총부 금강원에서 거주하면서 교단의 어머니 역할을 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19] (1896∼1977).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23년에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 뵙고 귀의하였다. 1932년부터 출가하여 대종사에 대해서 지극한 심성을 가졌으며 익산 총부건설과 교단 창립 발전에 헌신하였다.[20] (1900~2004) 전쟁고아 907명을 피난시킨 '고아들의 어머니'이자 한국보육원의 설립자로, 속명인 황온순으로 더 유명하다.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5년에 원불교에 귀의하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전문교육을 받은 신지식여성으로 사회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한 때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도 전개한바 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대호법 제1호가 되었고 교육사업에 까지 투신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전개하여서 8·15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21] (1896~1991) 본명은 경자(慶子)이며 서울 출생. 1924년에 박공명선의 인도로 입교하고 1930년에 출가하였다. 교단 초창기에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가장 많이 기록하여 법낭(法囊)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림에도 정통하여 초창기 교단의 그의 손길이 미쳐 만화보살 (萬化菩薩)이라고도 불리었다. 초기 원불교의 교서의 대부분이 그의 물질적 후원으로 출판되었고 나중에는 원광대학교의 설립에 크기 기여하기도 하였다. 공부면에 있어서도 교단 최초의 특신급 6인 중의 한사람이며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을 잘 계승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22] 대종사의 아내인 양하운은 십타원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때문에 십타원 양하운을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23] 십타원 양하운 (1890~1973)은 전남 영광에서 출생하여 소태산 대종사와 결혼하여 교단에서 대사모 (大師母)라 존칭하고 있으며 교단 초창기의 어려움 속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내조하고 교단 창립에 공헌하여 정토원훈 (淨土元勳)으로 존경을 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