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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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송병순(宋秉珣)

동옥(東玉)

심석(心石)
생몰
1839년 4월 10일 ~ 1912년 3월 22일
출생지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
(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44-27)#
본관
은진 송씨[1]
매장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학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병순은 1839년 4월 10일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에서 부친 송면수(宋勉洙)와 모친 완산 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송시열의 9대손으로, 형은 충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송병선이다. 그는 7살 때부터 참의를 역임한 백숙 송달수(宋達洙)와 좌의정을 역임한 당숙 송근수(宋近洙)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했다. 그는 1883년 영동군 학산면 활산으로 으로 이사한 뒤 후학 양성에 전념했으며, 1888년과 1903년에 각각 의금부도사, 홍문관의 서연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했다.그는 제자들을 위해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송자대전(宋子大全)'을 주로 가르쳤으며, 교육 방법으로는 강학과 토론을 중시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강탈당하자, 그는 조약의 체결을 주도한 을사오적의 처단과 유림의 궐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토역문>을 지어 각 도에 보냈다. 그 후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송병순은 그해 9월 7일 서암(西巖)에서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했다. 이때 그의 문인이었던 문용호(金容鎬)가 뒤에서 송병순을 껴안아 가까스로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지만, 이후 송병순은 두문불출하며 탄식의 나날을 보냈다.
이후 일제는 여러 차례 송병순에게 사람을 보내 은사금을 수령할 것을 강요했지만, 송병순은 끝까지 거부하고 자택에 은거했다. 1911년 7월 성균관 교수인 권영우가 찾아와서 현재의 성균관 직제를 장차 경학원으로 바꿀 것인데 그때 송병순을 천거하겠다고 말했다. 송병순은 이번에도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1912년 3월 14일, 일제는 대제학 박제순의 명의로 경학원 강사의 직첩을 송병순에게 보냈다. 이에 분노한 그는 1912년 3월 22일 스스로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해는 충남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송병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23세손 석(錫) '''병(秉)'''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