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송시열
宋時烈/Song Si-yeol'''

<colbgcolor=#1B0E64> '''출생'''
1607년 2월 27일
충청도 옥천군 이내면 구룡촌
(現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사망'''
1689년 7월 19일 (향년 83세)
전라도 태인현
(現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본관'''
은진 송씨(恩津 宋氏)
'''별칭'''
아명(兒名)은 성뢰
자(字)는 영보
호(號)는 우암
송자(宋子)
'''부모'''
송갑조(부), 곽씨 부인(모)
'''친인척'''
윤선거(사돈), 권시(사돈)
윤증(사돈), 윤휴(사돈)
'''종교'''
유교
'''붕당'''

1. 개요
2. 생애
2.1. 출생 및 초기
2.2. 북벌
2.4. 유배 생활
2.5. 은퇴와 이윤의 책봉 문제
2.6. 최후
3. 사상
3.1. 자세한 설명
4. 평가
4.1. 교조적이었는가?
4.2. 인간성 문제
4.2.1. 수이강 사건
4.2.2. 술이부작 사건
4.3. 허목 윤휴와 의견 대립
4.4. 정몽주
4.5. 숙종과의 관계
4.6. 정명공주를 평가하다
4.7. 단종의 복위를 주장하다
4.8. 야사
5. 붕당
6. 그 외 후일담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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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시열의 이조판서 임명장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1]

본관은 은진(恩津).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출생.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서 자랐다.[2] 조선 후기의 정치가, 유학자, 저술가, 권신이었으며 그의 후학들에게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라 불렸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던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종사로서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이다. 살아 생전 태종 이후 조선 역대급 강경파 군주 숙종을 가장 힘들게 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숙종은 송시열 때문에 남인과 손을 잡을 정도였다.
사후에도 노론이 세도 정치 직전까지 계속 집권하면서[3] 해동 성인(聖人)[4], 송자(宋子)라고 높여졌다.[5] 율곡 이이, 김장생도 듣지 못한 칭호였다. 특히 훗날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양현전심록이라 하여 주자의 일생과 송시열의 일생을 비교한 글을 쓰기도 했고 즉위 이후에는 내탕금과 국비를 지원하면서까지 <송자대전> 등의 문집과 저서들을 간행했다.
송시열을 빼놓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는 물론 이후의 조선 정치와 사상에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되었으며(실록에 언급된 인물들과 비교해봐도 이 정도의 언급량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는 인물인데 대표적으로 예송 논쟁이 근래에 와서 당쟁으로만 비춰져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송시열은 왕실 예법의 자문에 응해서 사상적 소신을 밝힌 것으로 오히려 그로 인해 가장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학문적 위상 때문에 비중이 커보일뿐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의 역할은 나라의 근본을 세우려는 성리학적 관점에서의 궁중예법 자문 역할에 불과하고 오히려 상대 붕당에게 인신공격적 심한 모욕과 심각한 정죄를 먼저 당하면 당했지 송시열이 예법을 통해 당쟁을 의도한건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스승 김집대동법 도입을 두고 찬성파들과 언쟁할 때 송시열은 스승의 입장을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고 유보하는듯한 입장을 보였는데 당시 통념상 직계 스승을 대놓고 반대할 수 없는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이후에 대동법 시행의 효과를 호평하며 긍정하면서 대동법의 다른 대안도 적극 제시했던 것으로 보아 논의 과정을 경청하며 여러 관점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절대적 방안이란 있을 수 없으며 대동법도 수많은 정치 행정 사안에서 1가지 아이디어일뿐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관리는 어디까지나 나라 살림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새걸 도입할 때에는 여러 관점을 두루 모색할 필요가 있다.[6][7] 또한 싸우지도 못할 거면서 청나라에 대해 북벌론만 고집했다는 억측이 있으나 정작 강경한 북벌 주전론을 펼친건 윤휴였고 송시열은 국가의 내실을 다지면서 정통 성리학 사상과 정신 수양을 통해 춘추대의를 지키자는 현실론에 가까웠다.

2. 생애



2.1. 출생 및 초기


1607년 외가가 있는 충청도 옥천군에서 사옹원 봉사[8]를 지낸 송갑조(宋甲祚)와 부인 선산 곽씨(善山 郭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6세가 되는 1632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1625년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韓山 李氏)와 혼인하였으며 이 무렵 김장생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1633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 참봉(경릉의 관리인)이 되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직했다. 1634년 다시 봉림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는데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있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한 후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게 되는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사헌부 집의가 되었지만 인조 대의 간신 김자점영의정에 오르자 거기에 항의해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듬해 다시 효종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왔지만 금방 사직하였다. 효종은 송시열을 조정에 잡아두고자 사직 인사를 올리려는 송시열을 일부러 만나지 않았고 송시열은 사모관대를 벗어 정청 위에 얹어놓고 낙향했다. 막나가는 행동이었다고 스스로도 인식했는지 돌아가서 사과했다. 이후 효종은 10년 가까이 송시열에게 조정에 나올 것을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응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는 송준길이 조정에 자주 있었지만 송준길도 걸핏하면 낙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송시열은 효종 7년 스승인 김집 사후 장문의 상소를 통해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오랑캐들에게 침략당해 국력이 약해졌지만 춘추대의를 지키자는 입장이었다. 옛날 고려송나라와 통했듯이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南明)과 통해야 민심(정확히는 사대부 민심)이 효종을 따를 것이라는 의리론이였다. 지금 보기에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의리만 강조하는 이상론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남명은 남송보다 더하게 망해버렸다.
이는 다분히 식자의 명분론이었다. 상식적으로 남명 정권이 겨우 버티던 현실을 생각해보면 남명과 통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조선과 연락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남명 정권은 주유량 대에 끝났다. 한때는 운남에서 광둥까지 유지했으나 1656년을 끝으로 동중국해 지역을 상실하는데 효종 7년의 일이었다. 최소 효종 7년 이후에는 남명과의 통교가 불가능한데 이를 송시열이 모를리는 없어 보인다. 조선의 유림들은 남명 정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지 주유량이 죽자 사적으로 통곡하고 난리가 나서 청나라와 외교 분쟁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일반 유림조차 주유량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정도인데 송시열이야 오죽하랴.
여기에 설령 남명이 광둥까지 점거한 시절이라 할지라도 어려웠다. 만일 청나라에 발각되면 또다시 침략당해서 어떤 상황을 맞이할지 뻔하며 병자호란보다 위험도도 높다. 남명과의 통교는 누가 봐도 미친 짓이고 그걸 모를리 없는 송시열은 당연히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았다. 사상적으로 소신이 있기에 차마 청나라에 조아리며 굽히지 않았을뿐 송시열을 비롯 유학자들의 대의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게 학자이면서 각종 정치와 행정 현안을 겸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행정 실무 각종 현안에서 현실론자였다.

2.2. 북벌


효종 9년이 되어서야 송준길이 조정에 자리를 잡았다. 동년 겨울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에 응답하여 상경했고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제수하여 북벌을 맡긴다. 송시열이 북벌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명분론에 입각한 북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기유독대를 보면 효종이 구체적으로 북벌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물으면 송시열은 "전하께서 덕을 잘 쌓으시고 학문을 익히시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게 성리학적인 명분론이랑 현실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기유독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악대설화」 후반부의 내용에는 송시열이 '양병과 양민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방법'을 묻는 효종의 질문에 '재력을 사치 등에 낭비하지 말고 군수로 돌리며 보오법(保伍法)을 시행하여 누락되는 민정을 없애고 3명 중 1명은 병사로 만들되 나머지 2명은 포(布)를 통해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도록 한다면 농민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뒤이어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기강을 세워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왕이 스스로 사심(私心)을 없애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실제 현실에서는 내수사 혁파 주장과 이어진다. 현실적으로 북벌 실행하기가 어려우니 양민(養民)을 통해 국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는 쪽으로 해석하는게 보다 가깝다.
박시백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위의 해석에서 나아가서 오히려 효종도 북벌을 진심으로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왕권과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북벌을 이용했을 뿐이며 송시열은 여기에 말려서 이용당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송시열로서는 일단 북벌이라는 명분 자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위에 언급한 신중론을 펼치는 수준에서 효종과 협력해야 했으며 이것이 바로 효종이 노린 결과라는 것이다. 효종 생전에는 효종이 북벌이라는 명분을 이용해서 송시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효종이 사망한 뒤에는 송시열이 효종의 위명과 명분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는 것이다.

2.3. 예송논쟁


송시열은 서인의 중심적 인물로서 남인의 중심적 인물인 윤선도와 기나긴 논쟁을 벌인다. 그 발단은 "예송논쟁"에서 비롯되었다.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장렬왕후)가 몇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나로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서인은 기년설, 즉 "1년만 입으면 된다"라고 주장했고 남인은 3년설, "3년동안 입어야 된다"라고 한 것이다. 송시열은 기년설이 명분에 맞다고 주장했다. 예송논쟁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이는 왕의 정통성의 문제와 엮인 복잡한 문제였다.
좌찬성에 올랐으나 남인은 송시열이 효종의 장지를 잘못 골랐다고 규탄했고 송시열은 낙향했다. 정계 복귀해서 우의정에 제수되었지만 남인측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좌의정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이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자의대비가 몇년 상복을 입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 처음에 예조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보고를 올려 현종의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송시열의 논리를 따르자면 기년복이 아니라 9개월, 즉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지적되자 예조는 허겁지겁 현종에게 알고보니 '기년복이 아니라 대공복이 맞습니다' 라고 다시 보고서를 올렸는데 현종이 격노하여 예조 관료들을 파직시킨다.
이에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서인 대신과 대간들은 그럼 예법에 안맞는다고 반대를 했지만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을 귀양보내는 등 초강경적인 대응을 보이며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3일만에 2차 예송논쟁, 즉 갑인예송을 자신의 뜻대로 관철시켰다. 하지만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에 삼는 등 서인들에 대한 피바람을 일으키진 않았으니 아들 숙종과의 결정적 차이다. 이후 현종은 두 달만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뒤를 이은 숙종이 왕의 행장에 송시열이 행패부려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문장을 넣을 것을 지시했다. 송시열의 제자들이 차마 그럴 순 없다고 울고불며 반대했다.
분노한 숙종은 서인을 모조리 내쫓고 송시열도 논의를 잘못 이끈 죄를 물어 거제로 귀양 보내 버리니[9] 이것을 갑인환국 이라고도 부른다. 귀양 생활 중에 송시열은 청남 계통의 꾸준한 고묘 안율 요청 때문에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위험한 처지에 이르지만 김석주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를 밝혀냄[10]에 따라 허적, 윤휴, 유혁연, 오시수를 비롯한 청남과 탁남을 막라한 남인의 거물들이 대거 목숨을 잃고 서인이 귀환한 경신대출척,[11]경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자 귀양 생활이 풀리고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어 조정에서 원로 대신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숙종명성왕후는 민망하다 싶을 정도의 온갖 찬양의 문구를 다 담은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며 송시열을 구슬렸고 김수항은 나라의 대소사를 '''법규에 연연하지 말고''' 송시열에게 물어 처리하자는 의견을 올려 윤허를 받기도 했다. 이후 송시열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김석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2.4. 유배 생활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이번에는 친구 윤선거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였던 윤증과 논쟁을[12] 벌인 끝에 결국 서인 대분열 사태를 맞게 된다. 그런데 김석주가 훈련대장이자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훈과 손잡고 남인 허새의 역모를 밝혀내어 남인의 잔여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하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터진다.
허새는 남인 중에서도 불만이 대단하던 자였다. 남인이었지만 연좌제 문제로 고생하다가 김익훈에게 포섭된 김환이 그에게 자신이 역모를 일으켜 복평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 그는 권대운, 오정위, 민암을 비롯한 남인의 거두들이 자신과 한패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역모를 꾸미려 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남인의 거물들이 그와 한패였다는 것은 무리를 크게 만들기 위한 거짓이었다. 이에 실망한 김석주와 김익훈은 전익대란 남인이 민암, 유명견을 비롯한 남인 거물들과 역모를 꾸몄다고 사건을 조작하기로 했는데 포섭된 김환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무리수를 두어 전익대 명의의 고변서를 자기네들이 직접 만들어서 승정원에 올린다. 하지만 전익대가 무고를 실토하면서 일을 그르치고 만다. 그러자 젊은 서인들이 권신인 김석주는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대신 김익훈을 증거 조작, 체통 손상, 밀계 혐의로 탄핵했다. 그런데 김석주는 당시에 서슬퍼런 숙종도 눈치를 볼정도의 실세거물이었고 송시열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으며 학통적으로도 스승의 친손이었다. 사실상 숙종이 당시 정치적으로나 학통적으로 핵심격인 박 송 윤 3인을 불러 모은건 왕인 자신에게도 난처한 실세인 김석주를 떠념기려는 의도라고 봐야한다, 숙종은 권모술수에 능했고 당파를 쪼개 서로 대립시키면서 신권을 약화시키는등 절대 왕권을 휘두르길 즐겼는데 당시의 김석주는 그런 숙종에게 유일한 걸림돌이었는데다가 그와 관계된 당파도 심히 벼르고 있던중이었다. 그와중에 생겨난 일련의 사태는 그걸 떠념겨 그들을 분열시키기 안성맞춤인 상황이었다.
숙종은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며 왕권을 휘둘렀는데 그와중에 권모술수를 통해 번갈아 당파를 내치거나 분열시켰다. 송시열과 김석주의 관계를 모를리 없는 숙종은 결국 자기가 처리하면 되는 단순한 사건을 가지고 박세채 송시열을 이용하려 구태여 불러들여서 묻게되었고 숙종이 원하는 대답중 처벌에 대한 의견은 박세채를 통해 끌어내게 되는데 결국 숙종의 의도대로 그로인해 귀양을 가는등 실세에게 괘씸죄로 보복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송시열은 숙종의 성격과 자신에게 이 사안을 물어온 의도를 잘알기에 '김익훈은 내 스승의 아비의 친손으로 형제와 같은 자인데 도움이 못되어 부끄럽습니다.'라고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며 회피해 물러나게 된다.[13]이때 먼저 온 박세채는 문제있다고 하면서 정확하게 결론을 내지 않고는 다른 사람들이 올 때 이야기 하자면서 끌었고, 이후 송시열이 왔을 때에 젊은 관료들이 찾아가서 이 사건을 질문하니, 송시열이 관련자를 듣지 못 한 상태에서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후 고위급 대신들이 관련자들을 전하게 되자 숙종의 계략임을 눈치챈 송시열은 아차 싶어서 답변을 회피하고 자리를 급히 물러나 다시 낙향한다.
이후 윤증이 와서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고, 박세채가 이에 동조하는등 숙종이 떠넘긴 처리문제로 이후 처분이 갈리게 되었다. 김익훈은 스승 김장생과 김집(송시열은 김장생과 김집 부자에게 수학하였다.)의 친손이였고, 김석주는 자신을 효종의 역신이라고 지칭하며 몰아세우고 조선제일의 예학자라는 명성에도 금이 가게한 남인을 몰아내준 생명의 은인이였다. 또한 당시 숙종은 김석주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에 서인정권 유지를 위하여서는 굽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더욱 맹렬하게 김익훈의 처벌을 주청했고 이에 재야의 박세채가 크게 호응한다. 거기에 윤증, 남구만, 조지겸, 유득일, 유집일, 오도일, 한태동 등의 신료들이 지지하면서 소론이란 새로운 무리가 결성된다.[14] 그리고 이에 대립하여 송시열을 추종하는 김만기, 김만중 형제, 김수항, 김수흥 형제, 민유중, 민정중 형제, 이단하, 이민서, 이사명 등은 노론이라 불리게 된다. 이때는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이 대거 소론에 합세하면서 소론이 압도적인 세를 자랑하게 된다. 김석주는 격노했고 오도일을 비롯한 소론의 젊은 수뇌부들을 숙종을 위협하여 강원도 영동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한편[15] 박세채는 글만 읽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양반이 쇠를 금이라 부르고 도적을 아들이라 일컫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이에 김수항 등 노론이 합세하여 거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석주가 51세를 일기로 급사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인은 노론, 소론이 분당되긴 했어도 범 서인이라 칭할 만했는데 이후 회니시비 사건이 송시열의 제자 최신에 의해 조정 문제로까지 번지면서 노론, 소론 분쟁은 격화된다.[16]

2.5. 은퇴와 이윤의 책봉 문제


숙종의 권모술수와 환국정치에 환멸을 느끼곤 이후 정계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으로 내려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던 중, 숙종이 28세의 나이로 장희빈에게서 아들(훗날의 경종)을 얻는 사건이 벌어진다. 경종의 탄생은 그간 아들이 없던 왕실 입장에서는 대단한 경사였으나, 숙종이 백일도 안된 후궁의 아들을 이례적으로 갑자기 무리하게 원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이미 서인 일각에서는 장희빈과 남인 세력, 그리고 숭선군, 동평군 등이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지적한 박세채, 남구만, 김만중 등을 유배시키거나 호되게 질책하면서, 장희빈을 위해선 대신을 벌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조정은, 유상운 등을 중심으로 '전하 나이도 젊은데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숙종을 만류하려 했지만 숙종은 막무가내였고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가 내려지며 장희빈이 이때 희빈에 봉해진다. 그런데 송시열이 송나라 신종이 철종을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두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해 태자로 삼은 예를 들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숙종은 격노했고 이를 계획적으로 공론화한다.[17] 조정은 "다 정해진 마당에 부당하긴 해도 속셈이 있었겠습니까?"라는 태도를 보였으나[18] 숙종은 "이 자식이 군주를 무시해서 그런거다. 놔두면 군주를 무시하는 무리가 잇달아 생길거다."라면서 계획대로 걸려든 송시열을 삭탈 관직하여 문외출송한다. 그리고 승정원과 대신들을 갈아치우면서 남인으로 정권을 바꾼다. 당시 숙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이미 종묘에 다 고한 상황이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숙종이 바라던 바였다.[20] 남인 대간은 숙종에게 적극 협조하며 상대방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송시열의 목숨을 요구했고, 우선 송시열의 애제자이자 전 영상 김수항이 사사된다.

2.6. 최후


하지만 숙종은 '송시열은 죽여 마땅하긴 해도 절도에 안치했으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잠시 물러서더니 인현왕후 폐위를 문제삼아서 반대하는 소론 신하 박태보, 오두인 등을 사실상 장살하고[21] 남인들의 반대까지 잠재워버린 다음에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침내 송시열이 목표로 지정된다.
중전 폐비 문제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명을 받고 상경 중이던 송시열은 국문을 받는 대신 금부도사를 내려보내 사사[22]하라는 처분을 받게 되었다. 결국 송시열은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을 정치가로 살면서 학자로 살았던 것을 반영하듯 그가 사약을 들이키면서[23] 죽기 전 제자들에게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 이래 전해 온 것이다"와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24]유언을 남겼다. 또한 죽기 전 손자에게 자기가 쓴 상소를 나중에 올리라고도 했다. 그의 관은 널빤지로 덧대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효종의 관에 널빤지를 대게 만든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3. 사상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또한 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에서 한분만 안 계셔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에 오르는 급박하고 질서 없는 시대에 처했으니'''

'''어찌 분주히 노력하여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어제시(御製詩) 宋夫子[25]

학문적으로는 당대부터 큰 인정을 받은 대학자였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따라서,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먼저 철학사상을 살펴보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直]의 실천 문제였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송시열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으나, 실상은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이기·심성론에는 주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이의 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즉, 여러 상이한 이론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정립하였다.이(理)·기(氣)의 선후 문제나 혼합성[不相離]·분리성[不相雜] 등과 같은 문제는 항상 이율배반적인 쟁점을 가진 것이었으나, 송시열은 이러한 문제들을 입론처(立論處)주 05)에 따라 범주화(範疇化)하여 각기 타당성을 논증, 형식 논리의 모순을 극복하였다.
예를 들면 이·기의 관계를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즉, 이는 이·기의 상호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고 논리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먼저 이·기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이이의 대명제를 받아들여, 이것을 이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도 동(動)과 정(靜)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이가 기를 주재하기 때문이며, 기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는 동과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기가 이를 운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그리고 원두(源頭)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논리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말하는 것이며, 유행(流行)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변화의 세계에서는 이·기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이렇게 입론처에 따라 타당성을 인정하고 범주화하여 통합하는 방법은 상이한 특수 이론들을 수용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이 밖에 형(形)과 기(器)의 혼동을 분별하여 형·기·도(道)의 관계에 삼단설(三段說)을 세운 것도 송시열의 독창적인 면이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마음을 기[心卽氣]로 보는 정통적 입장에 있었으나, 입론처에 따라서는 '마음도 태극이 되는 것(心爲太極)'이라 하여 마음 본체의 무궁함을 말하기도 하였다.또 송시열은 마음이 발하기 전의 상태를 성품[性]으로, 마음이 이미 발한 상태를 정(情)으로 보았다. 마음이 발한다는 것은 곧 기가 발하여 이가 실리는 현상인데 이것이 칠정(七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주리파(主理派)에서는 칠정과 사단(四端)을 엄격하게 분별했으나, 송시열은 사단도 칠정에 속하는 것이며 불선(不善)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것이 성품에서 발할 때 절도에 맞으면 도심(道心)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인심(人心)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여기에서 송시열의 수양론(修養論)이 전개되는데 그 핵심은 ‘정의를 모아[集義] 기상을 기르는 일[養氣]’이었다. ‘정의를 모으는 일’은 곧 『대학(大學)』의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서 송시열은 이것을 ‘정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수양론도 곧 ‘정직으로서 기상을 기르는 일(以直養氣)’로 압축되었다.송시열의 지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 활동의 저력은 기상이고 그것은 정직으로서만 길러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직은 수양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송시열은 정직의 실천을 일생의 지표로 삼았고, 제자와 후손들에게도 강조하여 마지않았다.그런데 정직에 의한 기상의 도야는 불굴의 의지를 함양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독선과 흑백 논리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었고 화합과 타협에 장애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3.1. 자세한 설명


그가 장원급제한 논설인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爲道)는 사물과 진리를 바라보는 것을 주체적인 인식과 부차적인 인식으로 나누어 봐야한다는 것이다. 일음일양지위도란 하나가 둘로, 둘이 넷으로, 넷이 여덟로, 여덟이 열여섯으로, 열여섯이 서른둘로, 서른둘이 예순넷으로 되는 것이니, 음과 양 두 획이 교역하고 변역하면서 끝없이 낳고 낳는 것이다. 역의 도란 이와 같다. 이것은 성리학을 비롯한 유교 경전과 동양 철학을 상당히 공부하고 경지에 이르면 결국 여기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음양의 구별이 나타나고 리기의 결합으로 해석을 나타내며 그것을 성리학의 전형적인 표현인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이 점진적인 사유의 발전 양상이 보여주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기론이란 기초 위에 결합되어 있던 개념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또 다른 종류의 실체를 주장하게 된 것이 더욱 중요한 전환이었다. 이렇게 해서 실체로서의 본질과 독립적인 형상으로서의 본질이 성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형상 자체가 또 하나의 실체라고 주장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리학은 분명하게 형이상의 실체는 형상으로서의 리라는 개념으로 정립시켰고, 형이하의실체는 전통적인 실체로서의 기로 수렴시켰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역학적 관점에서 성리학적 사유는 기라는 단일한 실체 개념에 근거한 형상으로서 사유 양식을 각각 형상과 실체로 나누고 다른 방식으로 종합을 구축하려 시도했던 철학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변화 패턴으로서 본질은 개체 속에서 실체화된 형이상의 형상과 형이하의에 의한 변화를 설명하는 일음일양속에서 유지되었다. 이기론적 해석 속에서 일음일양은 음양의 주기적인 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도는 일음일양의 과정 속에 포함된 리와 기의 존재로 말미암아 변화의 패턴을 단일한 개념이되었다.
기론적 해석이 세계의 음양을 본질로서의 실체란 단일한 이론 속에서 관계를 이루는데 역학적 사유의 이기론적 해석은 형이상의 리가 형이하의 실체로서의 기를 자신의 일음일양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볼때 일음일양지위도의 기론적 해석은 개체 내에서 상호 관계를 사유하는 서구적 전통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이기론적 해석은 리 개념이 갖는 형상성과 성격으로 개념적 관점에서 보자면 양자의 공통성은 실체로서의 본질과 형상으로서의 본질이라는 두 가지 원형적 사유의 축이라는 점이고 차이는 실체와 형상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것이다. 한쪽에는 단일한 형상이라는게 지배적인 반면 다른 쪽에서는 존재론적 성격을 달리하는 형상과 실체의 상호 결합이라는게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우주의 운동은 한번 음(陰)하고 한번은 양(陽)하는 것인데 이렇게 음양(陰陽)으로 순환하도록 하는 근원으로 존재하는것이 도(道)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본체가 도 라고 하면, 그 도 가 작용할 때는 음과 양이라는 이질적인 기운이 서로 작용을 하면서 우주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주 만물이 무궁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음과 양이라는 두 기운이 지닌 바의 작용으로 인하여 대립이 나타남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니 일음일양지위도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송시열은 이것에 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자신의 성리철학 사상의 핵심인 직(直)사상과 이기론(理氣論)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도기형삼건물사설을 주창하였다. 그의 직사상에서 직의 길은 의에 상응하게되고 도와 함께하는 주체적 사람의 도 즉 인성과 심성이 되며 그 직의 근원은 리의 직에 두고 있기 때문에 송시열 사상의 직과 일치하는 것이다. 우주 만물는 리에 의해 존재하고 또 생성하다가 변화하게 되는데 이 리의 작용은 직으로 마침내 드러나기 때문에 직의 도와 일치되고 또 리의 직이 주체화된 것이 인간의 참된 길을 의미하다는 것이다. 또 송시열은 태극은 본래의 오묘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러한 개념은 근본적인 도를 지극하고 세밀하게 탐구하려는 것이다. 송시열은 주자와 율곡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태극을 강론하면서도 그는 또한 송대 성리학이 설명한 태극의 도를 충실히 완성시키려했다. 이기론을 논증하기 위해 역과 태극을 여러 곳에서 제시하고 적용하며 설명하고 있다. 특히 송시열은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를 새롭게 해석하여 도기형삼건물사설을 주창하였다. 도기형삼건물사설에서 도와 기는 형상을 나타낸 현상적인 존재의 내용이 되는 것이고 형은 리기를 내용으로 한 형상 자체로서 이론을 전개한 것이다. 즉, 도기형삼건물사설은 현상적 존재로의 사람과 물건을 총망라한 모든 존재의 보편적 구조원리를 말한 것으로,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얻어진 송시열의 철학이다.
그에 따르면 우주가 이와 같은 변화 작용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그와 같이 추진하는 동력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가리켜서 변화 작용의 본체라고 한다.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상은 한 번 양이 되고 한 번 음이 되는 과정의 순환이다. 대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상호작용을 한다. 하늘의 기운은 땅에 영향을 주고, 땅은 하늘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하늘에 영향을 준다. 순환의 연속이다. 그 가운데 사람이 하늘과 땅의 교감을 받아 다시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상호 교감 작용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자연의 도이며 음양론의 변화 이치를 설명하는 일음일양지위도는 낮이 가면 밤이 오는 것 번성기가 가면 쇠퇴기가 오는 것과 같다. 음양의 논리는 교감의 논리다. 즉 음과 양의 전환에 대해서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음과 양이 분명히 반대의 관계에 있지만 서로 모순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 즉 서로 상대가 존재함으로써 자기가 존재 할 수 있는 관계이다.
송시열은 성리적 원리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한편 음양의 조화 차원에서도 여성의 사회참여나 교육과 같은 혁신적인 정책과 대동법이나 호포제를 실시하고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과 서얼제를 폐지하는 등 민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제 정책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는 양난을 겪은 혼란기라 최대한 빨리 국가 운영의 바탕 사상과 제도를 정립하고 어떻게 하면 정립된 정통 국가윤리를 바탕으로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논하는 국가 재건을 위한 작업의 초중기였다. 동양에서는 우주의 기본을 기(氣)로 본다. 기는 실체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영향을 주고받는 기능적인 매체이기도 하다. 기 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모든 사물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의 작용과 변화 원리를 나타낸 구체적인 개념과 이론이 바로 음양론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으며 그 안에 존재하는 나도 변화한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외적인 변화에 대한 관찰보다 내면에 대한 성찰이다.
송시열이 강조한 것은 바로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재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송시열은 이것을 통해 왕과 제자 그리고 신하 및 백성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잘 살피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라는 입명을 함께 하자고 요청하고 있다. 또 하나의 논리는 극즉반이다 하나의 상황이 극한에 이르면 반전이 일어난다는 상황 전환의 논리다. 즉 흥한 것은 다시 망하고 위태로운 것은 다시 안정을 찾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이다. 길흉이란 고정불변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따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시열이 당면한 당시의 국난을 극복하려는 논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송시열은 여기서 한 번 더 선(善)을 강조한다. 선행과 덕을 쌓아야 비로소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즉 오랑캐의 침략과 삼전도의 치욕 같은 처절한 국운을 맞아도 당당하게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이기론은 이원론적 성격을 갖는다. 다만 서양의 이원론이 상호 대립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이기이원론은 두 요소를 상대적인 동시에 상호적인 것으로 본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理 는 존재 하는 소이연의 원리며 동시에 변화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본질이다. 이에 비해 기는 소이연의 이가 존재화하는 데 갖추어야 할 터전이며, 동시에 현실 존재의 구성 요소다. 그러나 理 처럼 서로 달리 규정되는 이 와 기 는 현실 에서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기의 관계를 하나이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고 표현하며, 그 하나임을 불리라 하고 그 둘임을 부잡이라 한다.
그런데 성리학의 이기론은 단순히 세계에 대한 해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해명을 위해서도 제기되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가치를 위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많은 예법과 윤리 이념등의 논리적인 문제가 파생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이기관계에 있어서 생성론적 선후의 문제와 가치론적 경중의 문제가 대표적이라 할수있다. 순수하게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기의 관계는 현실속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불상리다. 한편, 이선기후와 이중기경을 내세워 이기의 불상잡을 강조하는데 강한 가치론적인 시각이 표출된다. 이렇게 보면 주자에 의해 확립된 이기이원론은 사실상 理 우위를 전제한 이기이원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주자학의 강한 이념성의 근거가 있고 동시에 후기 성리학이 관념적으로 흘러 반론을 받게 되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송시열은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 되었던 조선 유교적 이념 사회에서 여성들에게도 인간답게 살게 해야 되고, 인간답게 살려면 자기의 몫을 다해야 되며, 예의와 염치와 도리를 알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송시열은 여성들에게도 문자를 가르치고 효와 충과 신의를 강조하였으며 천자문을 떼게하고 소학과 더나아가 사서 육경을 가르쳤다. 배움이 짧아서 혹은 오래 한학을 교육받지 못하여 한문의 어려운 뜻을 해석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배려 사서 육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을 만들어 여성들에게 가르치기까지도 했다. 이렇듯 인권을 생각하며 현실적 방법론을 통해 실현하고 존중했던 인물이 송시열이다.
조선 성리학 흐름에서 이율곡과 송시열을 통해 주자의 理 우위적 이기이원론이 주류를 이루게되는데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 기의 불리를 강조하는 송시열의 이기론은 존재와 가치를 함께 아우르는 주자학 연구를 통해 계승한 것이다. 이때문에 그의 이기론은 이기일원론이기도 하다. 그의 이기론은 기호학파로 계승된다. 자연운행과 변화뿐만 아니라 사람 마음 역시 기발리승으로 관철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세계를 포괄하는 운동과 작위의 원리가 바로 율곡의 기발리승일도였던 것이다. 율곡도 리가 기의 주재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기발리승의 명제에서 기의 자발적인 운동의 역량에 놓여 있으며 이것이 바로 퇴계의 호발설과 대비되는 지점이었다.
자연에 기와 리 작용이 따로 없듯이 사람의 마음에도 리와 기가 호발하는 리발과 기발이 함께 있을 수는 없다고 본 것이 퇴계학파와의 차이점이다 송시열은 도덕성의 자발적인 실현 가능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리발의 관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율곡은 리가 본말도 없고 선후도없는 보편적 이념이자 원칙이므로 구분되는 현상적인 기와 다르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발생하는 운동의 주체는 기가되지 리가될수는 없게 보일수도 있다. 송시열 역시 기에만 운동의 역량을 인정하는 율곡의 해석에 공감하며 율곡에대한 반대파의 반론을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율곡은 리와 기가 하나이면서 둘이 되는 실상을 보고 리와 기가 오묘하게 결합하여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원칙은 리와 기가 하나가 되는 근거가 되고 리는 스스로 리요 기는 스스로 기라서 서로 섞이지 않는 원칙은 리와 기가 둘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는것이다. 다시 말해 송시열은 리와 기의 양면적 상호 관계를 포착한 것이다. 송시열이 보기에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한 율곡의 통찰은 리기가 각기 고유한 영역을 가져서 둘인점을 보지 못하고 하나로 여긴 오해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리기가 하나로 섞여 따로 각기 발동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고 호발을 주장한 퇴계학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송시열은 율곡의 관점이 리기의 양면적 관계성 곧 불상잡과 불상리의 원칙을 균형있계 파악한 반면 퇴계학파는 모순과 불균형에 빠져 있다고 분석했다. 주자는 음양을 리가 올라타는 것이라 해석했는데 율곡은 스스로 그러한 것일뿐 리가 그렇게 하도록 시키거나 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봤으며 송시열은 여기에 동의한다.
이것은 음과양이 움직임의 주체가 되고 그러한 상태에 리가 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송시열에게 음양의 작용은 태극이나 리가 의존하는 기의 운동이다. 리는 기의 운동이 발생하는 이유이자 원칙이며 발생론적 힘을 가진 운동의 주체로 여기진 않는다. 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주장은 당연히 리발을 긍정하는 퇴계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리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면 당연히 사단이란 감정에서도 리발의 가능성은 부정된다. 송시열은 리의 동을 부정하는 점에서 율곡을 긍정하지만 리가 기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면서 고요하게도 한다는 학설에서는 독자적인 해석을 전개한다. 분명히 기발적인 역량에 귀속되어 외부의 어떤 존재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송시열은 리가 음양 동의 기로 하여금 그렇게 동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송시열은 태극이 본연의 오묘함이고 동은 태극 곧 리가 승하는 틀이라고 본다. 기가 아니면 리가 의지할바없고리가 아니면 기가 근거할바 없다는 것이다. 주자와 율곡을 계승하면서도 송시열은 자신의 새로운 주장을 계속 전개하는데 그에 따르면 음앙과 동은 기가 격동하는 양태에 해당하며 그러한 작동을 시키는 존재가 바로 리다. 앞서 보았듯 율곡은 리가 타는 기틀 곧 기발적 힘으로 정이 발생하지 외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그런데 송시열은 리가 아니면 기가 근거할 바가 없다는 주재설을 심화해서 리가 기의 동과 음양이 그렇게 되도록 한다고 풀이했다. 기가 자발적인 발동의 역량을 가지며 그러한 발동의 존재이유로 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발리승일도의 원칙에 따라,칠정이 마음의 모든 움직임을 포괄하는 총칭이 되고 사단은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 골라서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맹자가 제시한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감정을 내어 본성이 선함을 보여주는 단서로 여겨서 사단이라고한 것이지 칠정 밖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뽑야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칠정은 리와 기를 합한 감정인데 비해 사단은 오직 리의 측면이기 때문에 사단이 칠정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단은 순수한 본연지성에 칠정은 본연지성이 기질에 놓인 기질지성에 대응되며 두가지 본성이 있거나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리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사단과 칠정이 모두 상이한 존재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 있고 다만 인식하는 범위만 다툴 뿐이라고 본 것이다. 송시열은 사단과 칠정이 실제로는 하나라고 말한다. 송시열은 현상적인 마음으로 발현되는 본성을 기질의 제약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본연지성이 기질에 떨어져 있는 것을 기질지성이라고 한 논리에 따르면 감정의 형태로 발현되는 본연지성 곧 인의예지의 본성은 기질의 조건에 의하여 달라진다.
따라서 송시열은 수양론적인 공부의 필요성과 연결지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한다. 송시열은 맹자가 말한 성선설이 비록 이념적으로 선하더라도 그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은 기질의 조건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본성을 드러내는 기가 맑으냐 탁하냐 하는 청탁의 조건에 따라 그 발현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송시열은 비록 본연지성의 측면에서 성인과 범인이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 기질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지성적 역량과 윤리적 가치는 천차만별이라고 진단한다. 본연지성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이념적 동일성을 보여주지만 실제 현실에서 작용하는 것은 기질적 조건에 제약된다는 것이다. 이념적인 성선의 논리만 믿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부와 자기 수양을 하지 않는다면 성현의 지위에 도달할 수 없다면서 지극히 선한 본성이 마음 속에 내재해 있어도 기질적인 조건이 항상 외부에서 구속하게 되고 따라서 치우친 기질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공부와 수양을통해 본연이 회복된다고 보았다.
당연히 이러한 관점을 기질적 조건에 구속되어 실현되는 감정의 양태가 순수하게 선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모든 선한 본성은 기질에 의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기의 존재 근원이 되는 리의 주재성을 더욱 강조해서 조선의 역량을 긍정하고 리선기후의 논리를 음양의 상호적 생성관계로 통합해서 당면한 국가 정치 이념으로 삼기를 희망했다. 특히 존경하는 주자와 율곡의 관점을 더욱 심화해서 음양의 순환과 생성을 적용하는 특색을 보여준다. 송시열은 사단칠정이 본성에서 나온 감정의 양태는 다르지만 존재론적 근원은 동일하다고 보았다.
동일한 존재의 근원이 되는 본성은 기질의 조건에 구속된 기질지성으로 구분되는데 그는 실존적 현실을 구성하는 기질지성에 주목해서 사단칠정의 문제에 접근한다. 따라서 율곡 퇴계가 사단을 선한 감정으로 봤지만 그는 기질의 실존을 중시하여 사단에도 부중절이 있다고 주장한다. 경전적 근거로서 미발의 중과 이발의 중절을 구분하는 경험적인 감정의 중절이 순수한 내연의 영역으로 환원될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기본적인 샤유체계의 측면에서 그는 우선 기발리승의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해서 기의 맑음에 따라 사단도 중절과 부중절의 양면이 있음을 규명했다. 송시열은 본성 또는 리 인심 인욕 또는 악으로 이어지는 구도속에서 감정의 악이 궁극적으로 본성과 리에 근원한다는 원칙을 규명한다. 이와 같은 근거로 사단부중절을 주장한 송시열은 사단칠정론을 당시 혼란한 조선의 사회적인 규범에 맞느냐 하는 중절의 연구와 논리전개를 통해 인심도심설로 전환하게 된다. 도덕성의 실현과 관련해서 보면 사단부중절이 있다는 송시열의 시각은 인간의 선한본성이나 감정에 대한 신뢰보다 실존적 제약의 현실에 대한 염려가 더크다고 할수있다. 이러한 시각은 사단에 대해 순수한 맑은기와 자기실현의 심화적 의미로 주자를 비롯 퇴계와 율곡을 아울러 계승 발전하려는 의지라고 할수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전에 대한 독자적이고 참신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있는데. 현대에 정약용이 각광받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기존의 주자 중심의 학문 체계를 어느 정도 탈피하고 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을 내놔서 이와 비교해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비판에 대해 반론도 있는데, 참신하지 않다고 해서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공자가 한 것도 어찌보면 주나라 시기의 그나마 남아있는 문물들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는데... 주자도 그냥 그 때까지 전해오던 학문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조리 끌어모아 집대성한 다음 본인의 참신한 견해를 바탕으로 정리했을 뿐이지. 마찬가지로 공자도 그 때까지 전해오던 학문을 집대성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새롭게 정리했을 뿐이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친 정약용이 근대에 주목받은 건 식민 사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학을 의도적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지 다른 게 아니다. 물론 참신한 이론을 펼치는 학자가 현대에 존경받기는 하지만, 인문학 분야에서 기존 학자들의 이론을 최대한 정확하게 분석하고 강해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21세기에도 존경받는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상당한 성리학 원리주의자로서 철저하게 주자를 존숭하는 주자 중심의 학문을 추구하고 주자의 학문을 더 심화하는 것이 그와 그의 학파의 연구 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주희와 제자들의 문답을 모아 놓은 방대한 분량의 "주자어류"라는 어록집이 있는데 이를 강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좀더 정리된 내용으로 전하기 위해 순서와 배열을 바꾸고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이라는 책도 만들었다. 송시열 말년에 작업에 착수해서 후손들과 제자들까지 대대로 작업에 참여하여 결국 완성했다.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은 송시열이 주자어류를 교감하고 항목을 재분류하여 편집한 책이다. 주자어류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설, 역사, 정치, 문학 등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담고 있다.
따라서 주자학을 제대로 알려면 주자어류를 정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자어류는 주자 사후 70년이 지나서 1270년 여정덕(黎靖德)이 편집하여 140권으로 출판한 것이다. 주자의 제자 97인이 기록한 것을 종합한 것이기에 내용의 방대함도 방대함이지만 이것을 전부 해석하는것도 보통일이 아니거니와 그 가운데는 번잡한 것과 잘못된 것이 적지 않았으며 일부 재료는 산실(散失)되기도 하고 주자의 초기 이론이 말년에 수정된 것도 있었기에 송시열같은 성리학의 대가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낼 해석과 편집 과정이었다. 또한 주자어류는 본래 주자가 그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자유롭고 진지한 태도가 엿보이는 반면에 역시 난해하고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이 요구되긴해도 문어체로 잘 정리돼서 분석이 용이한 주자대전(朱子大全) 보다 그 오늘날 말하는 참신한 해석이 나오기도 전에 본래 의미 마저도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방대한 고전 텍스트의 본래 뜻을 제대로 밝히는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은 험난한 길이다 공자도 그러했듯 송시열의 피땀어린 과정이 있었기에 학문적 근간을 이루는 컨텐츠가 후학들에게 주어져 인류의 지성사가 이어지는 것이다. 모든게 그러하듯 이렇게 선배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그 바탕이 이루어져야 어느 때 누구 라도 오늘날 혹자의 주장 처럼 참신한(?) 해석도 주장할수 있는것이다. 송시열은 이러한 주자어류를 교감하고 정리할 학문적 필요성을 느끼고 그의 나이 73세때인 거제도 유배시절에 그의 손자 송주석과 함께 주자어류를 집중적으로 교감하여 그 가운데 주자 문인들의 뒤섞인 기록을 정돈하고 번거롭고 중복되는 내용을 산삭(刪削)하며 류(類)에 맞게 문목(問目)을 재분류하여 편집하였다.
이는 그 본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주자어류가 송시열에 의해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유학자로서 새로운 체계와 해석을 주체적으로 진행할 만큼 주자학 연구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드러낸 학문적 결실로서, 주자대전을 연구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더불어 주자학의 표준을 정립하는 주자학 연구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송시열은 자신의 작업을 권상하와 이희조등의 제자들에게 계승하도록 당부했고, 그 유지에 따라 구시경 이기홍등의 제자들이 참여하여 생전에 30책으로 정리한 주자어류소분 정본(淨本)을 교정하면서 부첨지(附籤紙)를 붙였으나, 산실되어 18세기부터는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최근 현존하는 유일한 필사본이 송시열의 9대손인 독립운동가 송병선(宋秉璿) 선생의 문충사(文忠祠)에서 발견되었다. [26]
사단칠정을 이(理)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사단이 이에서 나왔긴 한데 이도 선악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석에 따라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쪽도 있고 이이를 주자학의 정통에 세우려 하였다는 쪽도 있다.
원리주의적 성향의 학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과적으로는 정적이 많은 편 이었는데 송시열은 주로 당하다가 참다 못해 반격을 하는 패턴 이었지 먼저 누구에게 시비를 건 적은 없다. 원칙의 대립 이었지 당쟁을 폄하 하듯이 단순한 감정 싸움이었다고 볼수는없다. 허목 윤선도 같은 경우는 그쪽에서 먼저 송시열에게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에 정적이 아니라 가해자 라고 보는게 적절하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것들에 본인이 일일이 대응할수없는 송시열에게도 억울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 할수 있겠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남인 집안과 통혼을 할 정도로 남인에 대해서 원만하게 잘지냈으며 악감정이 전혀 없었으나 예송논쟁 당시 난데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선빵 극딜을 당한 이후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른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물론 송시열의 예송 논쟁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당시 유교적 관점으로서나 공격 당할 요소가 많았다는 점은 고려해야할 것이다. 반면에 김육같은 경우는 자신의 사후에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송시열과 송준길이라고 할 정도로 먼저 공격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당연히 무난하게 잘지냈다. 왕한테 까지 정도와 원칙에 어긋나면 서슴없이 직언을 하는 선비였는데 상대방이 공격해와서 대응한걸 정적이라고만 치부할건 아닌게 당시 유생들은 자기 소신대로 논쟁하는게 본업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상대 당파에게 엄청난 공세를 당했으니 온갖 피해를 보면서도 아무 대응을 안하거나 대응하거나 선택지가 둘중 하나였을뿐이다 하여간 최후엔 송시열이 결국 승리하게된다. 송시열의 문하가 이후 조선 후기 권력을 확실히 장악한 탓에 송시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혹자의 주장은 비난을 위한 비난 빌드업을 위한 과장일뿐이다.
대표적인게 사문난적 괴담인데 원리 원칙에 충실했던 송시열의 제자들이 판을 치는 바람에 성리학의 교조화가 이루어져, 이후 성리학에 대한 다른 시각의 해석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박세당같은 인물을 제거했다고 명백한 거짓으로 악의적이게 알려져 있는것이다. 물론 이 것 또한 전혀 사실이 아니며 박세당은 귀양갔다 돌아오는 과정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윤휴 또한 사문난적으로 죽은게 아닌데도 비난을 위한 루머처럼 거짓으로 알려졌다. 윤휴는 경신환국으로 숙종에 의해 남인들이 갈려나갈때 사망했다. 그리고 사문난적은 둘뿐이다.[27]
송시열을 보수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송시열이 보수적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시대가 어려우면 보수적인 성향이 드러나는건 자주 있는 일이다. 거기에 남송으로 쫓겨내려갔지만 도통만은 지켰다는 주자의 상징성에 당시 오랑캐 한테 얻어터졌던 조선을 은근히 동질화 하는 정신승리. 성리학의 교조화 문제는 원래 유교가 그렇듯 정치학이자 실천학이라 더 현실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면 더욱 좋다.
첨언하자면, 사문난적이란 건 학문적 경직성보다는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 탄생한 말이었다. 사문난적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서원의 사석에서였다. 그러던 것이 정치적 투쟁 과정에서 점차 상대방을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되어간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은 윤휴는 서인 쪽에서도 학문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윤선거[28] 등 다수가 추천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윤휴는 학문적 만큼이나 정치적으로도 이해할수 없는 경향을 보였다. 학문적 측면에서 윤휴가 주장한 내용은 일부 이전의 남인측의 주장과 대동소이했고 이미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 논파당하고 이후 논의가 흐지부지되는등 수많은 성리논쟁중에 별게 아니었다. 그러나 윤휴는 학통적으로는 처음엔 송시열계 문인이라고 볼수있었는데 율곡과 더 나아가 주자가 틀렸다며 소위 막나간 것이다. 물론 누구나 오류가 있을순 있다. 하지만 당시 윤휴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가설일뿐이었는데 참신하다기 보다는 파격을 넘어 과격함이 적지않았고 그 대상이 퇴계 율곡 주자 등 좌충우돌 중구난방식 이었다. 윤휴에게 백번 양보를 해줘서 퇴계 율곡 주자 등이 전부 틀렸고 윤휴가 맞는데 아무도 몰라주는 것이라고 하려해도 윤휴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탄탄하다고 할만한게 없었고 그에 반해서 몇백년동안 대학자들에 의해 쌓아 올려진 검증된 대상은 윤휴에 의해 쉽게 무너질 정도로 어설픈 밀도와 체계가 아니었다 또한 윤휴의 정치적 행보는 학문적 주장만큼이나 난처했는데 연로한 말년인 남인의 영수 시절에 이미 논의가 끝나서 사실상 널리 시행중인 대동법을 반대한것이나 극히 이례적인 사실상 거의 쓰이지 않는 죽은 예법의소 한줄을 찾아내서 왕실예법에 적용하려는 등 현실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난처한점이 적지 않았다 윤휴가 극히 마이너한걸 찾아내서 왕을 기쁘게 하고 출세하려는 권력욕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정치적 학문적 소신이 원래 마이너 한것인지 알쏭달쏭한 행보는 북벌 강경론에서도 드러나는데 대안도 없이 과거제 폐지를 거론하거나 독륜거같은 고대 전쟁용 수레를 제작하려 하는등 현실성 없는 주장들은 당색과 학파를 넘어서 공통적으로 까였다. 윤휴와 같은 남인의 유혁연은 윤휴의 주장이 너무도 황당한 것이 많다며 윤휴의 주장들을 대부분 비웃으면서 반대했다. 그가 윤휴에 대해 일침을 했으니 "윤휴는 실제 군정과 병권을 맡아본 적이 없어 이리저리 자기 생각대로 말만 늘어놓길 잘한다."였다. 결국 권대운, 유혁연 등의 탁남계 대신들은 윤휴랑 거의 원수처럼 지냈다. 심지어 허적마저 윤휴에게 일갈 하길 "당신 혼자만 잘났고 잘안다고 맨날 나대는 게 당신의 큰 문제다"라고 꾸짖기도 했다. 허적은 당시 조정 실세들 중에서 윤휴의 말을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같은 당색이라 윤휴를 그래도 좋게 평하던 인사였는데도 참다 못해 이런 발언을 공공연히 한 것.

송시열도 윤휴를 처음엔 좋게 봤고 나름 교분까지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투쟁이 격화되면서 점점 남인 일반에게 적개심이 커지게 되고 그에 따라 남인의 이념적 지주였던 윤휴에 대한 적대감 역시 커져가는 것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볼 수 있다. 일례로 임진왜란때 왜와 강화할 것을 주장한 사실인 소위 윤증을 비롯한 소론의 임란 강화론에 대해 이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그러한 정치적 의도 자체를 평가 절하했고 우암은 강화론을 절의도 의기도 뭣도 없는 헛소리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윤증은 당시 전란 시기에 부득이하게 임시방편으로써 임시방책을 제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사조차 이렇게 의견이 갈렸으니 소론으로 분당하기 이전에도 그렇게 견고하게 서인이 뭉쳤던것은 아니었다. 강화라는건 전쟁중에 하는 정전 협정이다. 침략국이 먼저한다는건 침략국에게 문제가 생겼다는것이고 발빼고싶은데 뒷문을 열어달라는 태세전환인 것이다. 현대인 지금도 임란때의 강화협정은 말도안되는 일이고 충무공 이순신과 무관들은 백이면 백 전부 반대했던 사실상 논의가 불필요한 사안인데도 윤증은 강화론을 옹호하며 자기 주장을 펼치듯이 말하자면 정치와 학문적 견해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시대에 학문이 정치적 투쟁에 이용된 경우라고 해야 할까.
김육이 죽을 때 마지막 올린 상소에서 대동법의 집행을 맡겨야 한다고 한 사람이 송시열 송준길 이엇던 반면에 소장파들이 송시열 계통의 서인에게서 이탈한 윤증의 소론이라는 새로운 정파를 만든걸 보면 당대에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치가 그렇듯 무조건 호의적인 시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송시열을 보수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송시열이 보수적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시대가 어려우면 보수적인 성향이 드러나는건 자주 있는 일이다. 거기에 남송으로 쫓겨내려갔지만 도통만은 지켰다는 주자의 상징성에 당시 오랑캐 한테 얻어터졌던 조선을 은근히 동질화 하는 정신승리. 성리학의 교조화 문제는 원래 유교가 그렇듯 정치학이자 실천학이라 더 현실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면 더욱 좋다.

4. 평가



4.1. 교조적이었는가?


현대에 사대와 성리학을 들어 교조적이었다는 일각의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결과만 보아 생겨난 오류다. 사대와 성리학은 역사를 통해 같이 봐야하는 연유가 있다. 한국은 중국과 인접하여 예로부터 문화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였다. 중국에서 각종 문물이 들어와 국가와 민생에 녹아들었고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우리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문화를 수용하였고 또한 독자적인 문화와 공존하였다. 이후 고 려때는 중국 연호를 사용했으며 사대부는 문사철을 근본으로 삼았고 승려들도 중국으로 유학하는등 교류가 활발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여 이에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고 40년간 완강히 항전하였는데 결국 고려는 원나라의와 억지로 부마국이 되었다. 원·명(明) 교체기인 고려말에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서로 대립하였으며 이는 조선왕조를 개국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를 위해 조공을 보냈다.
조선 개국당시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배불숭유를 통치이념으로 하였기에 중국에 대한 사대 경향은 학문적으로 굳혀져 갔다. 그러다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의 황제가 적극적으로 나서 구호물품과 구원군을 보내와 일본 격멸에 도움을 주었는데[29]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만력제는 조선 구원에 대단히 적극적이어서 별명이 조선의 황제였다. 그래서 만동묘가 철폐되기 전까지 전란에 도와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제삿상을 조선에서 받았다. 즉 조선 입장에서는 임란 이후 구국의 황제이며 혈맹으로도 맺어져 사대관계가 역대 최고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문에 명나라는 재정이 파탄날 지경이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한 무리한 병력 차출과 구휼미 백만석은 절대 대국인 명입장에서도 만만한 규모의 지원이 아니었기에 명나라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나라를 파탄낸 조선의 황제라며 암군 취급을 받는지라 만동묘같은 제사도 전혀 받지 못했고 현대에 와서도 대우가 안습하기만 하다. 청나라와 명나라의 대립 당시 명나라를 편드는 세력의 주요 명분도 임진왜란 당시 은혜 만력제의 원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대와 소중화는 당시 포악한 불의에 대한 의로운 저항이자 미개한 오랑캐와 구분되기 위한 사상적 정통성을 의미하는 중대한 것이었다. 국가 이념의 기초로 세운 성리학은 명말청초에 이르러서는 오랑캐에 대한 원한과 혈맹으로 맺어진 명나라와의 관계등이 융합되어 단순히 그 이전의 사상적 학문적 성격만의 성리학으로만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본래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일갈했던 당시 송시열이 문제시했던 것은 윤휴의 중용장구에 대한 해석 그 자체였다기 보다는 주자라는 인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공자의 도통을 이은 것으로 여기고 칭송해 마지않는 존재였다. 반면 윤휴는 주자를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이라기 보다는 학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고, 이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남송의 그것에 겹쳐보고 있던 송시열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오활(迂闊)한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30] #관련글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고 인정하고 비판받아야 한다고 치더라도 과연 송시열만 교조적이지는 않다. 조선의 사상계 자체가 이미 순수성, 도통을 중시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불교를 이단으로 취급하여 배척하였고,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훈구를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근본을 통해 왕도 정치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광조이다.
또한 조선 전기에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성리학 영향이 강해서 육상산의 학설까지 받아들이는 혼합된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주륙화회론에 입각한 이기일물론이다. 그런데 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나온 인물이 바로 이황과 이이다. 이 둘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여 이기일물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이는 《율곡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서경덕의 이기일물론을 비판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였다. 또한 이 둘은 남인과 서인의 사상적인 뿌리가 되는 조선 후기 사상계를 지배하는 거두였다.
또한 이단과 관련된 논쟁은 붕당의 대립 과정에서 명확하게 나타났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이이와 성혼 문묘 종사 운동이 숙종 때 마무리 될 때까지 남인은 이황의 적통이자 성리학의 주류로 자부하면서 이이의 학통을 이단으로 치부하였다. 특히《효종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영님남인이 서인의 문묘 종사 운동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이이의 주장이 육상산과 같고 폐해가 불교와 같다고 강하게 비판하여 서인의 학통을 사실상 부정하였다. 게다가 숙종 초기 영남남인의 산림인 이현일이 이이를 공세적으로 비판한 것은 기존 영남남인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형태였다.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조선의 사상계가 교조화되고 상대의 학설과 학통을 이단으로 부정하는 흐름이었음을 봐야한다. 이는 송시열 이전부터 있었고, 송시열과 대립하던 남인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를 온전히 송시열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면 과연 송시열만 그랬는지, 당대의 흐름이 어땠는지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송자대전》을 보다보면 송시열이 성리학을 절대화한 수구 꼴통, 반개혁적 인물이라는 대중의 생각과는 다른 멘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아내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으며 출근, 외출과 집에 왔을 때는 아내에게 서로 맞절로 큰절을 했다 한다.
여성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여 여자도 사람답게 살려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야 된다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자학을 가르치고자 했는데 송시열이 남자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말을 따르라고 했으니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고 오히려 남자들에게 가르치는 주자학을 여자들에게도 가르친, 꽤나 선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권에서 '여자는 무학이 상덕'이라는 것이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고, 이는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화되었을망정 약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참작해 볼 때 당대 송시열의 사상은 상당히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도 있다.[31] 그는 시집간 딸들과 손녀딸들, 며느리, 손자 며느리, 조카 며느리 등에게도 이러한 책을. 그것도 읽기 쉬우라고 한글로 손수 써서 보냈다.[32]
심지어 "서북 지방의 여자들은 매우 건강하고 민첩하니, 이들에게 포를 쏘는 연습을 시켜... 성을 지키게 한다면 남자 병사만 못지 않을 것이다"[33]라며 여군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단순히 주장 수준이 아니었고 현종 대에는 실제로 여포수 제도가 실제로 존재했다.[34][35]
송자대전을 보면 송시열은 서북 지방의 백성들이 다른 지방의 백성들보다 군사적으로 뛰어났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당시 서북 지방은 징병을 폐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군사적으로 다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다시한번 말하지만 송시열은 여인들이 '''문 밖으로 나와서''' 그것도 '''전투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물론 이를 현대적인 남녀 평등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시열이 남녀 유별로 인해 일어난 당시 조선의 사회적인 통념, 즉 이러한 당시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서얼들에게도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과부의 재혼을 법으로 막아놓는 건 너무 잔인한 처사이므로 부녀자들의 재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36]#
또한 송시열은 동시에 이이, 김육으로 내려오는 제도 개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수사[37]를 혁파하기를 주장하고, 노비 제도를 노비 종모법으로 완화(적어도 당시엔 완화다.)를 주장했다. 송시열의 이미지로 흔히 알려진 "대동법 반대"도 초기엔 스승(김집)의 영향으로 반대하던 입장이었지만[38] 실질적 효과를 보고는 적극 찬성하게 되었다. 더구나 김집이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론도 지주층의 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기 상조론이나 징세액이 오히려 늘 수가 있다거나, 쌀이 잘 나지 않는 지역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39] 그리고 송시열은 대동법보다는 내수사 폐지와 공납의 양을 축소하는 등을 통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일 것을 권고했다. 쉽게 말해서 송시열은 작은 정부, 세금을 줄이고, 정부의 규모를 축소를 주장했다.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되고 효과가 좋자 가장 찬성한 사람도 송시열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김집은 김육이랑 무척 잘 교류하는 사이였다.
또한 관리의 녹봉을 금전으로 지급하자는 의견도 앞장서서 찬성했으며, 관리의 녹봉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 수탈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남긴 적도 있다.[40] 게다가 호포제를 주장, 사실상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자고까지 주장하였다.
송시열의 호포제 시행에 대해서는 흔히 부정적이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조금 좋게 봐주어도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본래는 찬성론자는 아니었으나 다만 자신의 라이벌 윤휴가 호포법을 적극 관철하자 이에 영향을 받아선지, 그 이후 자신의 제자 김수항을 필두로 하여 호포법 실시를 관철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족들의 끊임없는 반발로 실현시키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호포제 시행론은 서인 산림이 먼저다. 산림의 유계 등이 사족출포론을 처음으로 논의 제안한 것은 효종 10년 무렵이었고, 김수항과 박세당, 유계 등이 호포론 등 군역제 대변통론을 제시했으나 논의 미숙과 대사헌 강백년 등 대간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 또한 이 무렵이었다.
이 당시 윤휴는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상태였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유계의 호포론 논의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그의 호포론 논의는 숙종 초년에 출사한 그가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통해 라이벌 의식에 기인,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이루어진다면 도리어 윤휴가 서인계 산림에게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더 적합할 것이다. #관련글 다만 유계와 산림의 호포론이 송시열, 송준길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 하는 견해도 있다. 송시열이 적극 호포제 도입에 나섰다면 김육의 대동법처럼 얼마든지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포제는 일단락하고, 이외에도 송시열은 청나라를 본받아 수차(물레방아)를 활성화 하자는 말도 있었고,[41]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여 포를 많이 구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과의 궁술 시험을 포병 시험으로 바꾸자고 주장했으니, 이완보다도 시대를 앞서 본 셈.
또 그는 스스로를 벌레라고 자학하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 말은 성리학의 거두인 정자가 한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므로 그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발언으로 어떤 이의 성향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을 깊게 살펴야 한다.

신은 듣건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기한(祁寒)과 서우(暑雨)를 무릅쓰고 농부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내가 얻어 먹고 있는데, 이처럼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니 그야말로 이 천지간에 하나의 좀벌레라 하겠다.’ 하였다 합니다. '''신처럼 쓸모없는 자가 천지 가운데 헛되이 살면서 한 가지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농민이 생산한 곡식을 먹으니, 이미 좀벌레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10명 중 1명이 죽어나가는 시절이 있을만큼 사회 경제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식인 등 실제 정치 영역에서 지배 계층의 역할은 세금 제도를 개혁하거나 적극적인 진휼을 통해 백성의 삶을 구제해 주는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이런 맥락에서 송시열은 '외양', 즉 북벌의 전제로서의 '내수', 그리고 그 내수의 전제로서의 '정심'을 강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송시열의 행보 가운데에서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에 대한 추앙, 삼전도의 굴욕과 관련된 최명길[42]과 이경석에 대한 비판, 반청사상을 근거로 한 북벌 등을 두고 송시열을 수구적인 친명사대주의자라는 주장도 있다.
옹호 측에서는 당시 반청사상의 보편성을 들어 송시열을 옹호한다. 효종대의 북벌론 기조는 숙종 때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실제로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위적으로 언젠가는 행해야 하는 것이었고, 청은 그로 인해 어쨌든 운명적으로 망해야 마땅한 나라였다. 그만큼 조선 지식인들에게 중화라는 가치는 소중했다.
숭정제에 대한 추앙은 당시 유별날 것 없는 행보였다. 명이 사라진후 당파불문하고 조선 지식인들에게 깊숙히 자리잡은 '조선중화 사상'에서 중국, 중화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요순의 정치와 공맹의 학문이 자리한 문명에 가까운 개념이다. 조선에게 명은 중화의 원류인 중국땅의 마지막 문명국이었고 멸망후 중화를 대표하는 기재로 남았다. 망한 명의 후광을 사용해서 청은 야만이자 오랑캐의 나라로, 조선은 문명이자 중화의 나라로 보는건 어느 사대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중화의 마지막 황제가 숭정제다. 실학자들도 반청사상을 강하게 드러낸 경우가 많다.

우리 동방의 백성이 털끝 하나 황제(만력제)께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다. 청은 오랑캐지만 그 아래 백성들과 명문가들은 오랑캐가 아니다. 이를 알아야 한다. 만약 다시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우리가 당한 치욕을 설욕하고자 한다면 20년 동안 힘써 중국(만주족 오랑캐말고 그 아래 지배받는 중국인들)을 배운 다음에 함께 논의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몽상적인 북벌을 비판했던 박제가의 북학의 외편 존주론을 거칠게 요약한 것이다.

중국이란 무엇인가? 요순우탕의 정치와 공자, 안자, 자사, 맹자의 학문이 있는 곳이 중국인데 그것들은 이미 동국(조선)에 옮겨와 구할 필요가 없다. 오직 밭도랑에 씨 뿌리고 심는 데에 편리한 방법이 있어서 오곡이 무성하게 하는 것은 옛날 어진 벼슬아치가 남겨준 은혜고, 문장의 예술에 해박하고 아름다운 재능이 있어서 비속하게 하지 않은 것은 옛날 이름난 선비의 여운이다. 이제 마땅히 중국에서 이익을 취해야 할 것은 곧 이것일 뿐이다. 그 밖에는 곧 굳세고 세차며 사나운 풍습과 간사하고 교묘하며 기이하게 속이는 기술로 예속을 망치고 인심을 방탕하게 하는 것으로서 옛 임금이 힘쓰던 바가 아니니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

다산시문집의 정약용이 남긴 글이다.
비판 측에서는 "당대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당대의 일반인의 수준이 그러하다. 그렇기에 평가대상의 과로 볼 수 없다"는 식의 잣대는 전혀 변호의 대상이 될수 없으며 당대의 반청사상과 북벌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이용한 것은 분명 서인과 그 필두 송시열이고 이것은 심각하게 비합리적이고 시대착오적 과오로 조선의 발전에 심각한 저해를 가져온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실학자라고 해서 유학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애초에 실학자도 유학자이다. 다만 실학이 등장하게 된 시초를 따져보면 서인 위주의 일당 독재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유학자들이 서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인 송시열 중심의 주자 성리학 교조주의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부터이다.
수구 꼴통 성리학자 이미지는 송시열의 생전 시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길 송시열이 상경하자 송시열이 화폐와 돼지 사육을 폐지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했다. 그 때 송시열은 상경해서 그것은 오해이며, 오히려 상업을 발전을 위해 화폐 유통을 촉진해야 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조세의 금납화를 제시했다. 거기에 더해, 돼지 사육 역시 소를 죽이는 폐단을 감소시키므로 오히려 권장해 마땅하다는 주장을 했다. #
위에서 언급된 여성에 대한 교육은 분명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논어나 맹자에 여자를 교육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없다.[43]
또한 송시열이 조선 조정에서 했던 말의 상당수가 수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대동법 도입에 대해서 논의했을 때, 송시열은 왕이 덜먹고 덜쓰면 된다고 말하면서 내수사 폐지를 건의했다. 내수사는 '''왕의 금고'''이다. 왕의 금고를 폐지하자고 당당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4.2. 인간성 문제


정치적, 학문적 위치와 별개로, 당시의 대유학자라는 지위를 가진 인간 치고는 졸렬하기 짝이 없는 행보를 보였다. 이경석에게 저지른 '''수이강 사건'''과 윤선거 묘갈명의 '''술이부작 사건'''이 대표적이다.[44] 두 사건 모두 타인을 비난하는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 비난을 대놓고 한 게 아니라 치졸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돌려 까거나 아예 죽은사람의 아들에게 사실상 욕설 비문을 써줘서 문제가 되었다. ''' 그 결과 생전에 그가 자신과 뜻이 맞지 않은 사람들을 대부분 적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송시열을 죽음으로 몰아간건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숙종한테 저지른 비난.''' 숙종이 태어날 때는 '''숙종의 탄생을 신하들 중 혼자서만 축하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고,''' 현종 재위 시기에는 아예 현종이 송시열은 숙종이 종묘에 제향되고 자손이 보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대놓고 깠다. 경종이 태어날 때는 혼자서만 원자책봉에 반대하다가 결국 사약을 받았다. 심지어 '''숙종은 적장자였다.'''


4.2.1. 수이강 사건


백헌 이경석은 본래 송시열과 잘 지냈었고, 애시당초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게 백헌이었다.[45] 송준길과 송시열이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백헌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담소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관련기사

그런데 이후 송시열은 백헌과 윤선도 처벌에 이론이 생겼다 하여 자신의 은인이었던 백헌을 비방하려는 마음을 몰래 가졌고, 한편으로는 삼전도 비문을 적은 일을 고깝게 생각하여[46] 백헌이 궤장을 받을 때 글을 구하니 "오래 살고 건강했다(壽而康)"라고 써주었다. 처음엔 그냥 좋은 표현인 줄 알았지만, 현종이 온천 여행 갈 때 조정 중신 중에서 아무도 환송을 안 가자 낙향해 있던 백헌이 이들을 까는 상소를 올렸고. 송시열이 반박 상소를 올리면서 '수이강'의 정체가 드러난다.[47] 수이강은 송나라금나라에 끌려가서 아첨한 후에 살아남은 손적이란 자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당시 손적은 금나라 황제에게 항복문을 지어바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는데, 이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너는 그렇게 아첨을 하니 참 오래 살고 건강하겠구나(壽而康)"라고 비아냥 거렸다는 고사를 들어 이경석이 삼전도비의 비문을 쓴 것이 손적과 같은 아첨행위라고 매도한 것이다. 삼전도비 항목에 나와있지만 당시 청 태종은 비문 내용을 조선이 어떻게 짓는지 봐서 조선을 다시 손봐줄 꼬투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비문을 써야 했던 것이니, 절대 손적과 백헌이 같은 평가를 받을수는 없는 일이었는데도.

이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백헌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48] 어쩌면 그 자신도 별로 떳떳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헌이 이 사건을 가지고 얼마나 대인군자의 자세를 보였는지는 백헌의 이후 대처에도 나오는데 백헌의 문집 백헌집 52권의 내용중 하나인 사궤장식감록(謝几杖識感錄)에 따르면 1668년 11월 27일 백헌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리고 교서(敎書)와 제가(諸家)들의 축시(祝詩), 화시(和詩)를 모아 첩(帖)으로 만들어서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보내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주석이 있다. 이때 은인을 수이강으로 조롱한 송시열의 비방문은 주변 사람들이 넣지 않으려 했는데 '''백헌이 특별히 없애지 말라고 하여 붙여두었다고 한다.''' 참으로 군자의 자세였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에 송시열의 비방문이 그대로 남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런 백헌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백헌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4.2.2. 술이부작 사건


평생지기였던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죽겠다고 해놓고 혼자 살아남은 일[49]과 남인 윤휴사문난적으로 지목한 송시열의 태도를 비판했던 일 때문에 사후에 무척 배척했다.[50] 송시열의 큰형 송시희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전사했고 형수 김씨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다 뒤따라갔다. 아버지 송갑조는 국치를 당한 슬픔에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상처가 더해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종형 송시영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목숨을 끊었다. 호란으로 가족을 잃은 송시열 입장에선 죽자고 결의하고 다른 선비들과 부인까지 죽었는데 아버지 핑계대고 살아나온 윤선거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당하게 교류를 끊거나 하는것도 아니고 평생을 친하게 지내놓고서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묘갈명으로 불만을 표시하는것은 치졸하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윤선거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교류할때 송시열은 윤선거가 혼자 살아나온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정말 그게 곱게 안보인게 원인이라면 교류를 처음부터 거절하는 것이 옳은 방식이지, 죽은 다음에 고인을 뒤에서 씹는건 명색이 대유학자라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즉, 윤선거를 곱게 안 보았다던 송시열은 정작 윤선거 생전에는 아무 소리 안하고 친구로 지냈을뿐더러, 그 아들인 윤증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수제자 위치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윤선거가 죽자 고인 아들이자 자기 제자의 뒤통수를 때린 셈인데, 결코 좋은 소리 들을 만한 행위는 아니다. 그리고 거물 정치인이나 국회의원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도 장례식에 참석 할 때 조문문과 조서에 뒤에 생전의 오점과 약점을 집필하는 건 무례의 극치이다. 살아 생전에 사이가 안 좋은 정치인이래도 예의를 지키며 유가족을 위로해주고 조문문과 조서의 위로의 말과 생전에 업적과 장점을 집필하는게 예의이다.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사망하였을 때, 죽은 친부에 대한 묘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윤선거와 송시열이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40년이나 되는 데다, 송시열이 윤증 자신의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만큼 이런 부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송시열은 분명 윤선거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묘비문을 지어주는 것을 허락했다. 망자의 묘비문에는 좋은 말만 써주는 것이 관례였다. 좋지 않은 말을 쓸 정도로 사이가 안 좋거나 망자를 나쁘게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묘비문 짓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수락하고서,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을 인용했다. 문제는 여기서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이란 말을 썼다는 것이다.[51]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렇다. 송시열이 인용한 것이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인데, 송시열이 그것을 인용하면서 술이부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망자의 묘비문인 만큼 박세채의 글이 참 좋으니 옮겨서 인용은 해주겠지만(述而) 내 생각으로 지은 글은 아니다(不作)." 라는 뜻이 된다. 해석하자면 '''내 생각으로는 이 양반은 이런 말을 들을 정도는 못된다'''라고 망자를 돌려까며 조롱하는 내용을 써 준 것이다. 오늘날에도 죽은 사람 평판 갖고 장난치는 건 욕먹을 짓인데, 하물며 유교 윤리가 최고로 교조화(그것도 송시열 본인이 주도한)되는 조선 후기 기준으론 패륜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아버지의 묘비문에 이런 표현이 들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윤증은 이후 몇 번이고 송시열에게 묘비문을 고쳐줄 것을 요청했다. 지은 사람만이 수정도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결국 이를 수정해주지 않았다. '''윤증이 죽는 순간까지도.''' 이는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가 틀어지는 이유가 되었고, 회니시비의 단초가 되었으며, 장차 서인노론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4.3. 허목 윤휴와 의견 대립


일단 예송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의 주장을 이견으로 접수는 했다.[52] 그러나 윤선도가 자신을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으로 규탄한 뒤, 윤휴가 이에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허목은 아예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을 조성한뒤 허목 자신도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는 상소를 여러번 올리게 되면서 송시열의 태도와 행동은 경직되고 만다.
그래서 송시열의 후학들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허목은 독물(毒物), 독극물, 연인(漣人), 또는 연한(漣漢), 지비공(紙鼻公) 또는 지비옹(紙鼻翁)이라 불렀다.[53]

4.4. 정몽주


당시 정몽주의 후손이 포은집을 중간하자 서문을 써주는데 그 내용은 그야말로 정몽주에 대한 찬양으로 넘친다. 그래서인지 그 종가에 대해서도 그야말로 오지랖 넓게 간섭하여 제사 문제 등에도 관여 했으며, 후에 종손이 자손 없이 죽자 입양 등의 문제에 끼어들었는데 자신의 제자로 정몽주의 직계 후손이었던 정찬휘라는 인물을 종손으로 올리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유림에서 정몽주가 받은 존경심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 강화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했다는 비판도 받았으며 남인과 대립하기도 했다. 후에 후손 정찬휘가 스승의 잘못에 연좌되어 처벌될 위기에 처하자 '차라리 내가 벌을 받을지언정 포은 선생의 대가 끊기게 할 수 없다.'라고까지 하였다. 사실 정몽주에 대한 유림의 존숭은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송시열이 유난했던 것은 아니나 그가 워낙 당시 정국에 끼친 영향력이 강해서 좀 더 돋보이는 면도 있긴 하다. 덕분에 숙종 ~ 영조 시대에 종가의 후사 문제는 조정에서까지 논의가 되며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했다. 자세한 것은 연일 정씨 항목 참조.

4.5. 숙종과의 관계


장거정의 조선 버전.
마치 장거정이 만력제에게 그러하였듯 송시열 역시 숙종 임금에게 엄격함과 근엄함, 그리고 검소와 부지런함을 강요하다시피했다. 이는 두가지 극단적인 측면으로 갈리는데 하나는 송시열이 숙종에게 임금으로서의 청렴결백함을 강조했지만 그 수준이 지나쳤다는 점, 다른 하나는 숙종을 바지삼아 실권은 자신이 쥐려 했다는 점이다. 어떤 의도이든 간에 송시열의 행동은 장거정과 굉장히 닮아있다.
그러나 숙종은 만력제가 아닌 게 문제였다. 만력제는 순진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저 장거정이 죽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장거정이 죽자 뭐든지 장거정과는 정반대로 행동했지만 숙종은 그 성품이 타고난 제왕이자 권모술수의 화신이기 때문에 되려 자기가 직접 송시열을 제거하기 위해 머리를 쓰게 되었고 그래서 희빈 장씨를 이용해 송시열에게 트집을 잡아 실각시켰다. 송시열이 검소함에 목숨거는 위인이라는 것을 간파한 숙종은 자신과 장희빈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고 이 아들의 돌잔치를 과도할 정도로 호화롭게 하도록 조치했는데 이에 송시열이 검소함을 강조하며 숙종을 지적하자 숙종은 종묘사직에 대한 불경죄[54]로 송시열을 실각시켜버렸다. 두 대신의 사망 후 두 임금의 행동도 상반되어있는데 만력제가 출근을 아예 안하는 등 놀고 먹기만 한 반면 숙종은 되려 송시열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 제대로 일을 했다.[55]

4.6. 정명공주를 평가하다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 오복을 향유했다.

정명공주와 동시대를 살아간 송시열의 평가.
송시열의 묘지 글대로라면 정명공주에게 오복은 ‘존귀함, 겸손, 공손, 어짊, 후덕’이었다.

4.7. 단종의 복위를 주장하다


육신사기를 엮어, 사육신 및 생육신은 물론이고 당시 사육신·생육신만큼 드러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도 예우와 추증을 공평하게 할 것,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김시습, 남효온 등의 절의는 백세에 교화해 기릴 만하니 사당에 모셔다가 향사할 것, 육신들 외에 권자신, 송석동 등을 향사해 공주의 동학사에서 행하고 있는 것처럼 향사할 것, 노산군의 사당 옆에 육신사우를 세우고 영령을 위로하는 것, 엄흥도 또한 여기에 함께 배향되어야 한다고 언급 하였다. 송시열의 육신사기는 이후 정조 임금 시기 단종 복위를 하다 사사됐음에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시호와 은전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똑같이 베풀 것을 임금에게 아뢸때 다시 언급된다.(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현종 때에는 김수항과 함께 세조의 단종 살해는 측근들의 오도에 휘둘린 것이며 본심은 단종 살해에 있지 않았다'며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를 건의하였다.
다만 이건 특별할 것은 아닌게 단종에 대한 평가는 수백년 전부터 우호적이었다.

4.8. 야사


야사에서는 대단한 대인배여서 자신을 몰라보고 싸다귀를 갈긴 무관을 중용하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송시열은 어느 비오는 날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한 무관과 장기를 두다 통성명을 하게 된다. 그 전까지 무관은 그를 알아보지 못해 거만하게 굴었는데, 그가 송시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황하지만,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어디서 감히 우암 대감 행세를 하냐!"라고 하며 싸다귀를 갈기고 튀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오히려 재치와 배짱에 감탄해서 얼마 뒤 그를 중용하려했으나, 이미 죽은 후여서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종류의 야사는 웬만한 조선 시대 거물들이라면 다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신빙성은 별로 높지 않다.[56]
또한 힘이 장사라고 하여 장정 여럿이서 겨우 드는 비석을 혼자서 이리저리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몸이 안좋아 누웠을 때[57] 정적이지만 의학에 능통했던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許穆)에게 처방을 부탁했는데, 극약인 비상을 처방하자 모두가 먹지 말라고 했는데도 태연하게 비상을 먹은 결과 병이 나았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송시열의 아들이 비상을 빼고 약을 지어온 것을 알고 '허미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다시 가서 약을 지어오너라.'라고 꾸짖고 정말로 병이 낫자 그에게 아들 대신 사과했다는 후일담도 있다.[58]
하긴 비상(비소)이 항상 독한 것은 아니니까.[59] 송시열은 건강 관리를 매우 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든이 넘어서 사사되기 전까지 건강하게 살았던 그는 소식(少食)의 습관을 가졌다고 한다.[60]
그러한 체질 때문에 훗날 사사될 때에도 고역을 치렀다.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켰는데도 멀쩡하니 급기야 금부도사가 송시열에게 빨리 일 좀 끝내게 해달라고 애걸을 했다고. 결국 입천장을 긁어 상처를 낸 뒤 내리 3사발이나 마신 뒤에야 겨우 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당시 사약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잦았다. 설계해서 만든 즉사형 독약이 아니라 그냥 게알, 짐독, 부자 등의 치사량이 높은 것들을 내의원에서 마구 조합해서 만든 약이니 효과가 검증될 리가 없었고, 때문에 사사를 집행하러 갈 때는 예비용으로 사약을 몇 사발 더 챙겨가야 했다.
그래도 죽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미리 활줄을 챙겨가서 사약이 통하지 않으면 그냥 사지를 잡아놓고 활줄로 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송시열은 당시 노론의 거물은 물론이요, 왕들까지 존경을 표하던 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방법을 써서 죽일 수도 없었으니 금부도사가 애간장을 태운 것이다.

5. 붕당


'''소속'''
'''기간'''
'''비고'''

1607년 - 1680년
입문

1680년 - 1689년


6. 그 외 후일담


오늘날에도 기호 지방(경기도 / 충청도)에 잔존하는 유림들에게는 말 그대로 '송자'로 대우된다. 왜냐하면 기호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서인 - 노론 당파가 조선 말까지 집권하는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기 때문이다.[61] 그러나 이는 조선의 기호학파 유림 한정이며 학맥상의 최고격 스승은 당연히 지폐에까지도 얼굴이 올라간 이이이황이다.
그와는 반대로 동인 - 남인 당파의 지역 기반이었던 영남에 잔존중인 유림층에게는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으며, 영남 유림층은 송시열을 송자라는 어감과는 반대로 '시열이'라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담은 단어로 지칭한다. 심지어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짓기도 했다고.[62]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의 성이 은진 송씨일 경우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지은 유홍준은 남인의 본거지였던 안동 지역의 노인들과 대화하는 사람이 만약 자신이 은진 송씨인걸 밝히면 은근히 분위기가 험악해진다고 말한다.
현대에 성리학의 위상이 추락하고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면서 송시열은 성리학 교조주의자, 사대주의자 등으로 저평가되었다. 그나마 조선의 역사가 연구되면서 이런 오해는 다소 해소되었지만 비록 정치적 계산이라고는 해도 송시열의 행보가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이유로 송시열을 저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더불어 송시열이 치졸하고 소인배적 행동을 여러번 보여주었고 이것이 연구과정에서 드러나면서 이쪽으로도 저평가를 받는다.
이후에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정조 때엔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이 홍국영과의 결탁을 이유로 파직되었는데 전국에서 송덕상을 처벌한게 잘못되었다고 하여 한동안 파란이 일었다.
현대에 이 시대의 인물들이 재평가되었는데 숙종은 바지사장에서 권모술수를 이용해 왕비를 바꿔치기해가며 살아남은 정치의 달인, 장희빈은 권모술수를 이용해 서인들을 괴롭히는 악녀에서 되려 권력의 희생양, 송시열은 충신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권신으로 각각 재평가되었다. 재미있는 건 송시열과 죽은 뒤 5년 후에 태어난 영조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영조나 송시열은 노론의 지지를 받아 최상위에 올랐고 정치철학이나 학식도 높았고 83세에 장수하다 죽은게 공통점이다. 다만 차이점은 정치적 포용력이다. 송시열과 영조의 차이점은 송시열은 자신의 뜻에 맟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하여 서인 내부에서도 적을 많이 만들었다.[63] 그리고 자신과 친한 사이래도 속으론 사이가 좋지 않으면 조문에다 조롱하는 조문문을 쓰고 나중에 권신인 김석주와 김익훈의 전횡을 묵과하는등 영 좋지 않은 면모도 보였다.[64]
반대로 영조는 탕평이라는 정책으로 자신을 지지해준 노론에 무조건 들어 주는게 아니라 자신과 대척점에 있던 소론을 준론을 배척하고 완론을 등용하였다 나중에 무신년의 난과 나주괘서사건으로 인해 소론의 위세가 위축되자 노론측이 다 멸당시키라는 요구에 단호히 거절하고 노론에게 당론을 다시 지껄이면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사실 영조가 후기에 노론 편향이 된 건 소론 준론과 남인 탁남이 역모를 저질러서 그렇다.[65] 그렇게만 되지 않았더라도 중립을 지키고 탕평을 완수시킬 수 있었다.[66] 그러니 정치적인 포용성인 면모를 보면 영조가 송시열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대 국왕들을 제외하면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이다. 살아있을 때에는 1000여번, 사후에도 2000여번 이상이나 언급될 정도이다.
  • 한명회, 윤원형, 박원종, 허목, 홍국영, 흥선대원군 등과 더불어 조선의 파벌 정치인의 한사람.[67][68]
  • 시드노벨에서 송시열을 모에화한 라이트 노벨이 2014년 8월 1일에 발매되었다. 제목은 <모애모애 조선유학>. 게다가 조선 최고의 거유라는 듯. 벌써 은진 송씨 가문 홈피에 이거 괜찮느냐 문의한 사람도 있다. 까임방지책인지 송시열(宋始悅)로 한자 표기를 바꿔놓았지만 실상 눈 가리고 아웅. 게다가 유학자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에 팬티가 보일 만큼 심한 노출도를 자랑하는 기모노를 입혀놨다고 까이는 중. 역사 카페에서는 상당히 의견이 분분한 상태. 그래도 상당히 충격과 공포에 벙찐 데다 개드립인 줄 알았다고... 참고로 정말 나오면 분서 인증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결국 진짜로 분서 인증 했다. 급하면 2분경부터.
  • 그러나 한국 복식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저 옷이 전통 한국 복식의 면모가 분명 있으나 허리에 띠를 두르는 오비(기모노 허리띠)가 나오니 무리수다. 한국에 대대라는 허리띠가 있지만, 허리띠 위에 하얀 끈을 두르는 형상은 아무리 우기더라도 오비에 가까운 형상이다. 또한 논란을 잠재우기란 무리니 현재의 주요 쟁점은 굳이 송시열이란 이름을 쓴 무리수, pv와 표지 일러스트 문제 때문이라 내용이 잘 나오더라도 현상유지, 아니라면 최악의 결과가 나타날 확률이 높다. 결국 시드노벨은 7월 28일 등장인물의 이름을 변경한다는 공지를 내놓았고, 바뀐 이름은 '송시연.'
  • 다만, 이름의 경우 작가가 당초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는 얘기가 있어서, 시드노벨의 노이즈 마케팅이란 해석도 있다.
  • 1990년대 후반에 효종의 북벌을 주제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잃어버린 제국'에서 이완과 함께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 전례가 있다. 여기서 송시열은 무기가 큰 붓이고 황소를 타고 다닌다.
  • 대체 역사 소설 천윤의 비사에서는 김상헌과 마찬가지로 원래 역사와 달리 보수 꼴통에 문제있는 인물로 나오며 암군 인조의 명으로 교사 자격으로 성경(심양)에서 봉림 대군을 왕재로 만들려한다
  • 시집 가는 큰딸에게 교훈으로 써주라며 써 준 <우암선생계녀서>(우암계녀서尤庵戒女書)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소경(여기서는 법사를 말한다)들이 하는 기도는 어쩔 수 없지만 무녀나 화랭이가 굿하는 집은 머잖아 상놈이 될 집안이니 굿구경 가지 말라는 내용이 있어 충청도 지역에서 경을 읽는 앉은굿이 발달한 게 이 사람 영향 아니냐는 설도 있다.[69]
  • 이상하게도 조선사에 있어서의 존재감이 엄청나는데도 사극에서 다뤄진 적은 별로 없다. 심지어 숙종 시기 장희빈을 다루는 사극들이 많지만 이때도 다뤄진 적이 별로 없는건 마찬가지. SBS 장희빈에서는 이대로가 송시열 역을 출연했는데, 거의 까메오 수준으로 초반부에 한번 나왔다. KBS 2002년 판 장희빈에서는 이순재가 연기했다. 사실 송시열 초상에 드러나는 이미지와는 달리 왜소하고 깡마른 인상의 배우들이 연기한 것이 나름 특징이라면 특징인 듯. 그 외에는 KBS의 역사 다큐 프로그램에서 재연극 수준으로 나온 정도가 유일한데 김성겸[70][71], 맹호림[72] 등이 분한 바 있다.
  •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은 본래 쇠뿔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소바우 또는 우암곡이라고 불렸으나, 구한말인 1907년에 이 곳에 현감으로 부임한 송헌면(宋憲冕)이 자기 조상인 우암 송시열의 호와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여 소 우(牛)의 뿔 각(角)과 바위 암(岩)의 산 산(山)을 따 와서 각산동으로 지명을 고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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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기 전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남긴 말이다.[2] 송촌동(宋村洞)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바로 이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 이름은 선비마을이다. 선비마을 3단지 맞은편에 송준길의 호를 딴 동춘당 공원이 있는데 송준길 선생의 고택도 있다. 그리고 송촌동 근처에 작은 야산의 이름도 어르신들은 송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 세도 정치한 홍국영 일파나 경주 김씨 김귀주 가문, 안동 김씨 김조순과 김문근 가문,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도 모두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다. 다만 그때쯤 되면 다른 노론들마저 밟아버리고 족벌 체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4] 조선에 한정. 같은 유교 문화권이라 해도 타국에서는 성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퇴계 이황의 경우는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에게서도 성인 대접을 받았다.[5] 비슷하게 퇴계 이황도 추종자들로부터 이부자(李夫子)라 불리기도 한다. 이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6] 송시열이 대동법을 반대했다는 기록은 없다. 시행되고 나서는 대동법을 인정하는 발언이 보이는데 효종실록 20권에 '좋은 법이다', 정조 때 정리된 송자대전에서는 '스승이 몰라서 그랬던 거다' 등의 발언을 한다. 물론 대동법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라 그를 비롯한 산당들의 태도가 중심을 잡는데 도움이 됐다는 의견도 있다.[7] 이정철 교수는 자신의 저서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에서 송시열은 산림 중에서 대동법 확대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고 했으며 김집의 반대는 전체 사림의 생각을 대표하기보다는 김집 개인의 의견이라고 주장했다.[8] 임금의 음식물을 관장하는 종8품의 하급 관리.[9] 송시열은 귀양 중에도 학문을 연구하며 학식을 전파하였고 제자들이 그를 기려 세운 반곡서원이 거제에 남아있다.[10] 사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것이라기 보다는 숙종과 외척인 청풍김씨의 중심 김석주가 만든 조작에 가깝다. 외견상 영의정 허적은 도체찰사라는 군직까지 겸임하며 막대한 권력을 가진 듯하게 보였지만, 실제 풍문에 가까운 소리<왕의 외숙 김석주와 장인 김만기를 죽인다.>에 왕의 유막을 하사하기 전에 가지고 갔다는 별것 아닌 사건이 결합되면서 갑자기 정권이 교체되었다. 구체적으로 역모를 일으키려고 한다는 정황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허적 아비가 추숭되는 연회시간에 군부 수장을 교체하고, 정승과 이판을 교체한다는 것은 누가봐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이때 병판이 김석주>[11] 庚申大黜陟 중 출척이란, '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뽑아 씀'을 의미한다. 왕정이 폐지되고 민주 국가가 들어선 마당에 '누구는 못된 놈이고 누구는 착한 놈'이란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국내의 역사적 사건을 편향되게 바라보는 것으로서 옳지 못하다. 정국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하는 환국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이다. 관련자의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출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라면 족보에 도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12]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한다. 송시열이 살았던 '회'덕('懷'德, 현 대전)과 윤증이 살았던 '이'성('尼'城, 현 논산 노성면)의 머릿글자를 딴 것.[13] 사실 역모조작 사건이 드러난 이후에 조정에서는 실세 김석주가 연루된 일이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에 당시 중망받던 송시열, 윤증, 박세채를 불러다가 의견을 묻자는 이야기 나와서 이들 3인이 상경하여 입조하게 되었다. [14] 그러나 유득일, 유집일 등은 후에 노론으로 전향한다.[15] 숙종이 김화로 보내려고 했는데 김석주가 너무 가깝다며 영동의 아홉 고을 중 하나로 정하자고 했다.[16] 그래도 갑술환국 이전까지는 범 서인이라 칭할 만 했지만 갑술환국 이후에는 완벽히 분당된다.[17] 송시열이 언급한 송나라 신종은 첫째부터 다섯째 자식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죽는 바람에 결국 6남인 철종이 뒤를 잇게 되었다. 따라서 숙종에게 자식이 아직 하나뿐이고 장성하지도 않았는데 미리부터 원자를 책봉할 이유가 없다는 시기상조론이다. 물론 중전의 소생이 아닌 이유도 크겠지만 어느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는데 굳이 송나라의 고사 중에 찾아내서 상소를 올린 건, 그만큼 송시열이 원자 책봉 문제에 대해 완곡한 반대의사를 피력한 것이다[18] 사실 숙종이 파놓은 함정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숙종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두둔하진 못하고 적당히 말리면서 숙종이 벌이는 생쇼를 방관할 뿐이었다.[19] '종묘사직에 고한다'는 것은 선대 임금과 왕비들을 모신 사당인 종묘와 조선의 지신(地神)과 오곡의 신을 모신 사직에 제사를 지내며 고한다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헌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고 국민에게 공포하는 것과 같거나 그 이상으로 엄중한 정치적 행위이다. 따라서 종묘사직에 고하기 전에 떠드는 것은 어떻게든 허용되더라도, 이미 고한 후에는 별수 없다. 물론 숙종의 행위가 독단적이었고 국통을 따지는 유가적 그냥 넘어갈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숙종에게 알면서도 당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20] 실록에서는 송시열에 대한 반박상소로 한명제한장제를, 송진종송인종을 서자 출신이지만 적자처럼 키워서 즉위시켰는데 왜 뜬금없이 후대의 송나라 신종의 사례를 끌어들어오냐는 비난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경우는 극소수일 뿐이고 나라의 근본인 유교적 측면에서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용납될 수 없는 경우였다.[21] 그냥 장살이 아니라 아주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난리굿을 피웠다. 단 이때 기록을 보면 박태보와 오두인의 절개와 의리를 강조한 걸 보면 서인 측의 윤색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박태보와 오두인은 소론이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박태보의 아버지는 송시열의 흑역사인 이경석에 대해 쪼잔한 면을 비판한 박세당이고, 아버지 윤선거의 조서 때문에 갈라진 옛 제자 윤증의 외조카가 된다. 친외숙은 소론의 영수이고 친우였던 송준길의 제자인 남구만이고 다만 윤증은 박세당의 셋째형의 처남이고 후사가 없자 박태보가 양자로 들어갔다. 서인내에선 정적인 소론의 친족과 아들이지만 송시열이 박태보의 장렬한 죽음에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 것이라고 가족과 제자들에게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노론이나 남인편을 들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박태보는 아버지 박세당보다 더 깐깐하고 대쪽같아서 정적이 많았다. 살아있다면 송시열과 노론을 아버지보다 강도 높게 비판했을 것이고 남인들을 처벌할 것을 주청했을 것이다. 저 정도에 죽어서 노소론 망라해 충신이라 불러서 다행이지 만약에 아버지인 박세당보다 오래 살았으면 사문난적 낙인이 아니라 노론과 남인들로부터 간흉, 흉물이라 멸시받았을 것이다.[22] 이 처분에 대해 남인들이 복수심에 불타서 조사도 없이 그냥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차피 송시열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80 넘은 노인이자 상대 당의 영수라는 것에 대한 배려로 마지막에 갈 때 국문을 당하는 것만은 피하게 해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송시열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후자일지도 모른다.[23] 참고로 이 사람은 사약을 '''3번'''이나 마시고 나서야 죽었다. 흠좀무. 보통 사약을 먹고 바로 죽지 않으면 활줄로 목을 졸라 죽이는데, 송시열은 노론의 거두인 만큼 목졸라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약을 세 번이나 먹인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사사된 사람들 중의 절반 가량은 사약이 통하지 않아 활줄로 교살되었다.[24] 이것은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한 말이다.[25] 국보 제239호인 송시열의 영정에 직접 정조대왕이 친필로 남긴 어제시다. 대로사(大老祠)의 비문 또한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송시열을 송자(宋子)또는 송부자(宋夫子)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송자대전을 간행하였다.[26] 주자어류소분의 어류소분 권수목록(卷數目錄)에 의하면, 전30책은 원본(原本/元本)의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첨지가 원본에만 붙어있는 걸로 보아 원본은 우암과 직전제자들의 작품인 반면, “보본은 원계(遠溪)에서 완성된 것이라는 목록의 기록으로 보아 보본은 고종 22(1885)년 3월에 원계로 이사해서 살았던 송병선이 제자들과 함께 산실된 자료를 수집하여 필사하고 교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존 필사본 주자어류소분은 우암과 직전제자들이 기초작업을 했던 17세기 후반부터 송병선과 제자들이 보완작업을 했던 20세기 말엽까지 우암학파의 주자어류 연구가 결집된 학문적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27] 아이러니하게도 송시열의 후학이 조선 정계에서 독주하게 되는 현상을 초래한 인물은 다름 아닌 송시열을 죽인 숙종이다. 숱한 환국 끝에 결국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하는 노론의 손을 들어주었으니...뭐 사실 숙종 때는 노론이건 소론이건 동인이건 숙종의 괴랄한 잦은 환국으로 몇 번씩이나 갈려나갔다.[28] 송시열의 절친한 친구이자 서인 학풍의 중요 인물, 그리고 윤증의 아버지. 회니시비와도 얽혀있다.[29] 지난해에 왜적의 변란 때문에 때맞추어 수확을 못하였고 겨울이 깊어서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비로소 추수를 했는데, 지금 파종기에 미쳐 모 한 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벼의 종자 값이 백미와 같았다. 민간이 궁하고 곤란하여 기아가 날로 심했다. 계사ㆍ갑오년에는 공가와 사가에 아직도 창고에 간직한 것이 있어 매매할 길도 있었으나, 오늘은 사변이 난 지 3년이 되어 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 분탕은 너무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 데다, 더욱 길가의 곡식은 전부 왜적이 거두어 가니, 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그러나 다행히도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힘입어 산동성의 소미 백여만 석을 우리 나라에 운송하여 각처에 나누어 구제 하게 되니, 전라의 고금도ㆍ전주ㆍ남원 같은 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 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 명을 연장하였다. 다음 가을에 대미(大米)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換大米)라 하였다.난중잡록(亂中雜錄)[30] 사실 윤휴와의 논쟁에서 송시열의 학문이 성리학에 片道되어 있고, 윤휴는 다양한 학설을 수용하자는 개혁적인 인물로 보일 수 있는데, 처음 윤휴의 주장을 들었을 때에 송시열은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과격함을 지적하고, 이것을 수정할 것을 이야기하였다. 비교적 좋게 이야기 하였음에도 윤휴는 이를 계속 거부하자, 조선 예학의 宗主를 자처하던 송시열로서는 최후의 방법으로써 수정하지 않으면 斯文亂賊<일명 '''넌 더 이상 성리학자가 아님!!!'''>으로 지정하겠다는 것을 공표하였고, 윤휴는 앞에서 이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또 다시 번복하면서 문제를 크게 키웠다. 이 때문에 문제가 정말커졌는데, 윤증의 父親인 윤선거가 윤휴와 비교적 가까워서 교류하였다가 이 사태에서 송시열 앞에서는 윤휴와 절교하였다고 했다가 사망 이후 송시열에게 절교하지 않았음을 들켰다. 이밖에 다른 이유까지 포함하여 송시열은 윤선거까지도 죄인 취급하였고, 제자였던 윤증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노/소론이 생겨나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다.[3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26436[32] 다만 당대에 한글이 상층 사대부 사회에서 부녀자들의 소통 수단으로 널리 쓰이고 있었고 남편이 부인이나 딸에게 편지를 쓰거나 소설을 지어줄 때도 한글을 쓴 것을 고려하면, 한글로 편지를 쓴 것 자체가 특출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3] 송자대전 제131권[34] 현종개수실록 12권 5년 12월 30일 1번째 기사[35] 광해군때 난정과 사르후 전투 파병, 인조대의 이괄의 난과 호란을 거치면서 서북 지방 방위 상태가 너무 심각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현종대의 여포수 제도는 인력손실을 성인 남성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내놓은 궁여지책에 가깝다. 이후 경신대기근이 발생하여 현종때까지도 복구를 못했고, 경신대기근보다 더한 참사였던 을병대기근이 발생한 숙종때도 외형적으로 대충 맞춰놓기만 한채 복구를 못하다 영조 재위 중반에나 가야 겨우 복구된다.[36] 과부들의 재혼은 허용은 되어있다시피하나 재가녀자손금고법(재가한 여자의 자손을 등용하지 않는 법)에 의해서 거의 불가능했다.[37] 왕실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기관으로, 내수사는 기본적으로 조선왕실의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그래서 국고는 메말라가도 내수사는 메마르지 않았을 정도. 송시열은 대동법 관련 논쟁이 발생했을 때, 주장했던 것 중 하나가 내수사 폐지이다. 당연히 현실정치 논리상 폐지되지는 않았다.[38] 다만 송시열 본인이 반대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다른 김집의 문하생인 유계와 송준길은 대동법에 찬성하였다.[39] 공납을 쌀과 무명으로 걷는것이 대동법인데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수송이다. 당시에는 세금 납부란 서울로 수송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냥 관아에 쌀냈다고 끝이 아니다. 그래서 쌀과 무명을 걷는 대동법은 백성을 더 힘들게 할수있는데, 예를들어 한 지역의 공납품이 꿩 5마리라 하고 토지가 100결이 있다고 하자. 공납제에 의하면 꿩 5마리를 수송할 사람 한명이면 되지만 대동법을 시행하면 200말(=20가마)을 수송할 사람 네다섯명은 필요해지고 백성들의 수송부담이 높아진다.[40] 일차적으로 녹봉이 늘어나면 수탈이나 부정부패에 대한 유혹에 덜 흔들릴 것이고, 또 걸렸다가는 좋은 보수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덜 감수하려 할 것이므로. 이는 훗날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한 주장과 똑같다.[41] 이는 훗날 박제가도 주장하게 된다.[42]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 윤3월 16일 병진 3번째기사[43] 논어에 여자와 소인을 양육하는 것은 어렵다.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라고 적혀있지만 양육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 가르치지 말아라가 아니다.[44] 회니시비 문서를 참고할 것.[45] 일찍부터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김집이나 십여세나 아래인 서인 산림들인 송시열, 송준길 등을 만나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쳤던 백헌은 인조 반정 이후 자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는 등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보고 분개하여,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리고 적극 천거하여 관직에 등용하게 했다. 이로써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반정 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백헌은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46] 송시열은 호란 때 가족을 잃어 청나라를 증오하는 마음이 강했다.[47] 당시 송시열은 온양 근처에 살았는데 백헌이 자기를 깐 줄 알고 쓴 것이라고도 한다.[48] 자신의 사직을 청한 것도 있긴 하다.[49] 윤선거는 평생 이 일을 부끄러워하여 이후 다시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50] 윤휴와의 문제에서 송시열이 처음부터 아주 강경하게 나간 것이 아니였음에도 윤휴가 그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커졌다. 이를 윤선거가 중간에서 주재하려고 했으나, 윤휴의 주장이 '''주자의 견해에 대한 비판'''(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이니, 공자의 생각과 주자의 견해가 차이가 있다면 말할 필요가 없지만, 공자와 여러 유학의 선배들에 기록을 가지고 해석하는 측면에서 사람에 따라서 견해의 차이가 생긴다. 이것까지 좋은데, ''자신의 해석으로 공자의 기록을 살펴보니 주자의 견해가 틀리다''고 주장하는 윤휴의 주장을 '''성리학'''적 관점에서 수용이 되겠는가? 다만 주자와 다른 해석을 하는것이 수용이 안되는 것 자체가 조선 후기 사상계의 배타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긴 하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주자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맹종하고, 주자와 다른 의견을 낸다고 남에게 절교까지 강요하지는 않았다)을 하는 것이였기에 사실 윤선거의 어중간한 태도는 매우 위험한 일이였다. 다행히 생전에는 잘 숨겼으나, 하필이면 송시열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둘 사이에서의 어중간한 태도와 절교하겠다고 해놓고 실은 교류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송시열이 알게 되면서 문제가 터졌다. 그러나 윤선거 입장에서는 양쪽 다 친구였고, 잘 지내왔는데 송시열이 윤휴와의 절교를 요구해왔으니 상당히 난처했을것이다. 이를 '이중적인 태도'라고 봐야할지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봐야할지는 각자 생각해볼 문제다.[51] 망자를 추모하며 쓰는 묘비문의 경우, 다른 사람의 평을 인용할 수는 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더 좋은 평을 인용함으로써 추모와 함께 저자의 겸손을 드러내는, 말 그대로 술이부작의 정신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자의 묘비문에 다른 사람의 망자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글을 인용해 놓고, 술이부작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52] 계모가 전처 소생의 장자가 죽은 이후에 대우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처 소생의 차자 내외가 사망했을 때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례가 거의 처음이였다. 禮曹의 관원들이 몰라서 당시 禮學의 최고권위자라는 송시열에게 물었던 것이고, 송시열은 소현세자를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기에 '체이부정'을 이유로 1년복을 주장하였다. 서인 내에서도 3년복을 주장한 사람들이 여럿이였으니 이견이 많았다. 송시열도 단순히 학문적인 것으로만 이야기했다면 그 주장을 틀리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대통을 승계했으니, 남인들이 주장하는 3년복이 말도 안되는 괴이한 것은 아니였다.)[53] 지비공이나 지비옹이란 송시열과 송시열의 제자들 중 허목을 부를 때 그나마 비교적 온건한 표현이었는데, 이는 허목이 평소에 축농증이나 비염 증세가 있어 코에 종이나 휴지를 붙였던 것을 두고 비꼰 것이다.[54]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숙종의 논지는 "우리 아버지도 고명아들이고 나도 고명아들이다. 이렇게 요즘 임금의 대를 잇기가 무진장 어려운데 이 상황에서 나의 아들이 태어났다. 이건 종묘사직에 있어서 기뻐할 수 있는 최대한 기뻐해야 한다. 근데 경(송시열)은 어찌하여 내 아들이 태어난 것을 문제삼는 거냐?"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네가 뭔데 내 가문('''즉 왕실''')의 대를 끊으려 하느냐?"라는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55] 송시열은 성리학적인 군왕<청의 강희제와 비슷하게 스스로 절제하며, 사대부 중에 첫번째가 되기를 희망>을 요구하였나, 숙종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군왕<조선의 태종과 세조와 같이 신하들 위에 선 군주>이 되고 싶어했다. 말하는 자와 듣는자가 이렇게 생각이 달랐으니 그 다음은 뭐...[56] 흥선대원군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며 이쪽은 상대가 진짜 이하응인 걸 알고도 모른 척 한게 아니라 왕족의 체통을 지키라고 싸다귀를 날렸다고 하며, 그 역시 나중에 대범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게다가 여기선 더 패기가 있는게 뒷날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그 사람을 다시 불러서 내가 또 그러면 또 그러겠냐고(=뺨을 치겠냐고) 하니까 왕족으로서 체면을 안 지킨다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답했다.[57] 원인은 평소에 건강 관리를 한답시고 아이의 소변을 마시는 일이 잦았는데 그 때문에 체내에 노폐물이 쌓였던 것이라고 한다.[58] 혹은 아들이 비상을 빼고 지어온 약을 먹었을 때는 낫는 듯 하다가 다시 병이 도졌는데, 송시열의 아들이 허목에게 가서 사죄하고 다시 한 번 처방을 받아와 그대로 만들어 먹이자 이번에는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59] 비상은 흔히 사약의 재료로 알려져 있지만, 독이 아니다. 양 조절에 실패하면 부작용이 큰 약재 중 하나일 뿐이며, 체질에 따라서는 아무리 마셔도 안 죽는다.[60] 이는 영조의 식습관과 같다. 송시열도 영조 사망할 때 80대가 넘은걸 것과(특히 송시열은 자연사한게 아닌데다가 나이조차 영조보다 1살 많았다.) 영조의 장수가 소식한 것으로 꼽히는걸 보면 송시열도 소식한 것이 장수에 도움이 된듯[61] 정확하게 말하면 '송자'라는 명칭을 기호지방 유림들이 추숭하듯이 붙였겠지만,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을 정조시기에 국가에서 편찬하는 등 조선후기에 공인된 명칭이다.(중앙 정계를 노론이 장악한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공인된 것은 되었다고 해야 한다.)[62] 이름 가지고 놀리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이름이란 함부로 마구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니 호니 관직이니 존칭이니 하면서 인칭 표현이 극도로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며, 따라서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경우는 집안 어른이 연소자도 아니고 아주 어린 아이를 대할 때 정도가 고작이었다. 때문에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모욕에 해당했다. 영조 초기에 노론들이 소론 영의정 이광좌를 두고 "광자"니 "광"이니 하면서 어린아이까지 찧고 까불었던 것이고, 이게 영조의 격노를 샀던 것이다.[63] 영조는 숙종과 천한 무수리 최씨 사이에서 나온 孼子로 조선시대 통념상 별볼일 없는 출신으로 왕이 되기 위하여서는 여러 사람들을 잡아야 했다.(노론들로서는 희빈 장씨의 소생인 경종이 왕이 되는 꼴을 보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를 지지한 것이지 영조의 능력과 성품에 감동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송시열은 율곡에게서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사계 김장생의 노년에 제자로 들어가서 아들인 신독재 김집에게까지 제자로서 배움을 받은 학문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학문이 조선 성리학의 가장 정통성이 있는 것인데, 다른 이상한 논쟁을 받을 이유는 전혀없다. 그리고 초년에 송시열은 비교적 포용력을 보였으나, 자신의 학문적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에 점차 독선적으로 가게되었다.[64] 김익훈은 송시열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의 손자로 숙종의 1번째 장인인 김만기의 숙부였으며, 김석주는 숙종의 외숙이였다. 즉, 김석주와 김익훈이 벌인 남인을 공격하기 위한 조작은 숙종의 의중이 들어간 일이였다.(처음 이사건을 들었을 때에 송시열은 이것을 비판하였지만, 이후 서인의 중진들이 와서 설명하자 이후 말을 바꾸었다. 이로인하여서 소장파들에게서 송시열에 대한 권위가 추락했는데, 송시열로서는 스승의 손자를 처벌하기에도 그렇고, 경신대출척때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을 실질적으로 몰아낸 김석주를 비판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이러한 조작의 배후 자체가 왕인 상태에서 비판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그가 왕과도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좀 그렇다.)[65] 정말로 역모를 저질렀을 지는 알 수가 없다, 남인들과 소론 준론들이 영조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하게 잡지 못하였다.(경종시기 노론4대신이 처벌받았을 때와 경종 사망시에 돌던 독살설 등은 영조에게 있어서 큰 약점이였다. 무엇보다 노론4대신이 처벌받은 것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쳤지만, 영조가 세제로서 다음 후계가 되도록 하였는데, 소론 완론을 포용한다고 그들을 무죄방면하지 못하였다. 즉, 경종의 죄인인 영조는 왕이 아니라는 생각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이에 결국 노론4대신에 대한 무죄방면을 하면서 영조의 포용은 실패가 되고말았다.)[66] 영조의 탕평은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되는 탕평파라는 세력을 만드는데에 있었다. 학문적 권위가 없이 부평초 같이 변신하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여들면서 이해타산만 따지는 집단이였기에, 다음 왕인 정조는 정반대가 되는 집단을 구성하고자 하였다.[67] 한명회, 윤원형, 박원종은 자신들이 모으기도 했지만,사실은 권세를 쫓아서 모여 든 것이고, 송시열허목은 학문적인 권위를 가지고 주변에 영향력을 끼쳤으며, 홍국영흥선대원군은 대세를 장악한 적들에 대항하고자 세력을 모았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68] 송시열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친구인 송준길은 좌참찬을, 그의 애제자인 김수항은 영의정을 지냈고, 김수항의 형인 김수흥도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또다른 제자인 민유중도 병조판서를 지냈다. 또 그의 형인 민정중도 좌의정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의 제자였다. 또 숙종의 첫번째 장인인 김만기도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의 제자였고 김만기의 동생인 김만중도 송시열의 제자로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또 숙종 때 서인의 영수인 이상진도 우의정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고 조복양도 예조판서를 하면서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다.[69] 참조 학술 자료 : <앉은굿 무경> 안상경 저, 민속원 P.145[70] 역사 추리[71] 배우 본인이 키가 180이 넘고 덩치가 커서 이미지는 초상화랑 가장 닮았는데, 여기서는 무려 자기보다 5살 위에다가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를 제치고 상석에 앉아서 서인을 좌지우지하는 송시열이 나온다. 심지어 정태화가 꺼낸 '관례 강조'도 송시열이 시킨걸로 나온다.[72] TV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