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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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송병선(宋秉璿)

화옥(華玉)

동방일사(東方一士), 연재(淵齋)
시호
문충(文忠)
생몰
1836년 8월 24일 ~ 1906년 1월 24일
출생지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
(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44-27)#
본관
은진 송씨[1]
매장지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위정척사 운동
2.3. 을사조약 배격운동
2.4. 순절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학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송병선은 1836년 8월 24일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아버지 송면수(宋勉洙)와 어머니 완산 이씨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송시열의 9대손으로, 송시열 이후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계승했다. 송병선은 9살 때부터 백부 송달수(宋達洙)에게 《소학》을 배웠고 숙부 송근수(宋近洙) 밑에서 수학했다.
송달수는 조선 후기 성리학계를 이분했던 호락논쟁을 배제하고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연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며 순수학문적 자세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또한 송근수는 1882년에 좌의정에 재임하면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교섭에 반대해 사직했고 1884년 서양식 복장을 관복에 도입하자 "전통질서 중 하나인 복제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주장했다. 송병선은 이러한 백부와 숙부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자연히 성리학 본연의 학문에 집중하고 외세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견지했다.
송병선은 이상수(李象秀), 박성양(朴性陽), 정해필(鄭海弼)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교유했다. 송달수의 문하인 이상수는 조정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면서 몇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도(道)가 아니면 처(處)하지 않는다"며 끝내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박성양 또한 송근수의 천거로 관직에 들어서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동부승지, 호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지만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 문물을 단호히 배격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후 사직했다. 정해필 역시 송달수 문하에 들어간 인물로, 송변선에게 학문을 계속 익힐 것을 격려하며 ‘연재(淵齋)’라는 호를 추천했다.

2.2. 위정척사 운동


1865년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만동묘가 훼철되자, 송병선은 이를 춘추의리 정신의 파괴로 간주하고 이듬해인 1866년 입산지계(入山之計)를 결행하고자 아우인 송병순이 살고 있는 옥천의 오산(梧山)으로 이사갔다. 그는 그곳에서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를 간행했다. <송자대전수차>는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 가운데 난해한 구절을 뽑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쓴 것이다. 만동묘가 철폐된 시점에서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것은 만동묘 훼철로 약화된 송시열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을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송병선은 또 <벽사설(闢邪說)>을 편찬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정(正)’의 대상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의 기본질서이며, ‘사(邪)’의 대상은 양묵(楊黙)의 학을 비롯한 불교와 천주교라고 주장했다. 또한 천주교의 교리 가운데 예수를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생부를 잊겠다는 패륜적인 행위이며, 제사를 금하는 것은 영혼을 믿지 못해 스스로 오류에 빠지는 일이라며 배격했다. 그러면서 주자학이야말로 조선이 진정으로 수호해야 할 이념 체계라고 밝혔다.
그는 또 주자가 집필한 <근사록(近思錄)>에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송시열의 학설과 유훈을 덧붙인 <근사촉록(近思續錄)>을 1874년에 편찬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섯 선생의 글을 읽고 큰 뜻을 품어 오랫동안 천여 조의 글을 모아 (중략) 한 책을 만드니, 무릇 진실을 구하고 힘을 쓰고, 자기를 처신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에 미칠 것이며 이단을 판별하여 성현의 일을 볼 것이다"라고 밝히며 척사(이단을 판별)를 통해 위정(성현의 일)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후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결국에는 조선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며 비판했다.
송병선은 1877년부터 1903년까지 태능참봉(泰陵參奉), 서연관(書筵官), 경연관(經筵官) 등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거부했다. 그는 혼탁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나서 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상소를 10여 차례 올려 척사론에 입각하여 조선의 문물을 사수하고 서양과 일본의 문물을 단호히 거부할 것을 요구하는 등 정치에 아예 관심을 끊지는 않았다.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고 개화정책이 시행되자, 송병선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궁궐 수비를 엄하게 해 간신배들의 출입을 끊고 무위영(武衛營)을 없애고 진무(鎭撫)를 설치하여 변방을 수비해야 하며, 묘원을 복원해 사림을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신사봉사(辛巳封事) 8개조를 담은 상소를 올려 조선책략의 내용을 단호히 배격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고수할 것을 요구했다.

제1조 성학에 힘써 마음과 뜻을 바로잡을 것.

제2조 말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 과실을 들을 것.

제3조 세자를 보좌함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것.

제4조 상과 벌을 미덥게 하여 기강을 세울 것.

제5조 검소한 덕을 밝혀서 재용을 절약할 것.

제6조 벼슬자리를 중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것.

제7조 공물의 진상을 정지하여 일의 근본을 보존할 것.

제8조 왜국과의 화의를 배척하고 예수교를 단절할 것.

특히 8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이웃 나라와의 교류는 나라의 큰일이지만 지금 말하는 이웃 나라란 바로 오랑캐일 뿐입니다. 우호를 맺는 것은 물론 나쁜 일이 아니지만 다만 기미를 살피지 않는다면 한갓 스스로 어리석은 데 귀결되어 마침내 나라를 망치게 됩니다.

그리고 1884년 정부의 의복 및 관복을 개량화시키는 조치에 대해서도 "기본질서인 의복제도가 변화된다면 나라의 기본 질서또한 보장될 수 없다"며 의복 개량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지금까지 사용한 한복을 고수할 것을 요구했다. 상소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듣건대, 요즘 의복 제도를 변경하는 일로 명을 내리고 절목을 이미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인심을 거스르고 듣기에 놀라운 천만뜻밖의 지나친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감히 많은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대개 제왕의 정사를 보면 연혁(沿革)하고 손익(損益)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거기에는 모두 곡절이 있어서 혹은 옛것을 가지고 오늘의 것을 바꾸기도 하고, 혹은 중하(中夏)의 문명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기도 하며, 혹은 등위(等威)를 밝게 보이기도 하고, 혹은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게 하기도 하였을 뿐인데, 지금의 조치는 이 네 가지 중에 해당되는 게 과연 있습니까?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큰 원칙이 있고 요령이 있으며, 일정한 규정이 있고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인륜을 닦고 도술(道術)을 숭상하며 성헌(成憲)을 지키고 민생(民生)을 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옷차림이나 물채(物采) 같은 부차적인 것은 비록 좋게 바꾸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명왕(明王)이 급급해할 것이 아닌데, 더구나 좋게 바꾸는 것이 아닌 경우이겠습니까? 또 차림새나 물채는 설사 부차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국조(國朝)의 전헌(典憲)과 관계되어 매우 중대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혹 이에 대하여 생각하셨습니까?

아, 우리나라의 공복(公服)과 사복(私服) 제도가 옛 제도에 다 부합되지는 못하지만 실상 이것은 명(明) 나라의 제도이니, 어찌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온 세상이 오랑캐의 복장을 하게 되었으나 오직 한 모퉁이의 우리나라에만 그 유물이 겨우 보존되고 있으니, 세상에서 우리나라가 중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며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단히 이를 바꾸어 괴이하고 법도에 맞지 않게 한다면 중화(中華)를 따르고 생각하는 뜻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세상이 바뀌어 명나라가 망한 갑신년(1644)이 다시 돌아오니 대소 신민이 다 같이 나라를 잃은 명나라에 대하여 슬픈 감회에 젖어 있는데, 바로 이러한 때에 겨우 보존되고 있는 의물(儀物)마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보아 버린다면 천리(天理)와 민이(民彝)의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미치니 신은 통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또 듣건대, 새로 제정한 절목이 저 사람들의 복식과 거의 유사하다고 하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저들에게서 그것을 취하셨는지 내심 의아스럽습니다. 넓은 소매의 옷과 늘어뜨린 띠는 여유 있고 위엄 있는 모습이 저들의 몽땅한 것에 비해 편리함과 겉보기가 천지 차이입니다. 더구나 귀천(貴賤)과 존양(尊攘)의 뜻이 그 가운데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조(高麗朝)에 세자(世子)가 원(元) 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가 머리를 땋아 늘이고 오랑캐의 복장을 입은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고 하니, 여기에서 인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왕래하는 저들의 차림새는 우리 도성 사람들의 의상 속에서 가라지와 쭉정이 같이 눈에 거슬려서 나라 사람들이 원래 미워하고 있는데, 더구나 저들의 복식을 본떠서 만백성이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입게 한다면, 신은 필부(匹夫)의 뜻은 필시 빼앗지 못할까 염려스러우며 야만의 땅이 될 것이라 했던 이천(伊川)의 한탄이 당장에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아! 전하께서는 이런 점을 어찌 미처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반드시 말없이 도와주고 일깨워주어 중천(中天)에 나타난 일식(日食) 현상이 잠시 보였다가 곧 회복되는 것처럼 될 것이니, 신은 삼가 기다리겠습니다.

이에 고종은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진달한 것이 모두 근거가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전의 공복(公服)과 사복(私服)의 제도는 본래 고제(古制)가 아닐 뿐 아니라, 또 지금은 법도가 문란하고 습속이 타락하여 떨쳐 일어날 기약이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전후의 칙교(飭敎)에서 고제를 원용하고 지금의 것을 참작하여 번잡한 것을 제거하고 간편하게 하되 먼저 의복 제도부터 변통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때에 경이 산림(山林)의 숙망(宿望)으로서 분연히 달려와서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보좌하고 인도해 준다면 지금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풍속을 순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떠나려고만 하지 말고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송병선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85년 3월 가족과 함께 옥천의 원계(遠溪)에 집을 짓고 동생 송병순과 함께 문인 양성에 치중하여 '연재학파(淵齋學派)'를 형성해 위정척사사상을 심화시켰다.

2.3. 을사조약 배격운동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갔다. 며칠 후인 11월 24일 이 소식을 접한 송병선은 "나라의 변괴가 이에 이르렀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식음을 접했다. 그리고 12월 2일, 그는 을사조약을 거부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삼가 듣건대,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토 히로부미가 겉으로는 유지한다는 명색에 핑계대고 속으로는 완전히 집어삼킬 계책을 품고서 방자하게 와서 꾀어내기를 마치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고 빈 고을을 타고 앉듯이 하였으며, 군사들로 대궐을 포위하고서 협박하여 조약(條約)을 체결하였다고까지 하니, 무엄하고 의리가 없기가 어찌 이처럼 극도에 달할 수 있겠습니까? 소문이 들끓고 인심이 불안합니다. 신(臣)은 이 소식을 듣고부터 넋이 빠져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 대체로 근년 이래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고 한 번도 대의(大義)를 가지고 꺾어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형상을 허물고 우리의 복장까지 고치게 되었으니 애석해할 것이 없습니다. 저들의 마음에 우리나라가 없은 지는 참으로 이미 오래입니다. 오늘날의 변고는 돌아보건대 우리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원인을 따져보면 대체로 간사한 무리들이 몰래 서로 결탁해서 폐하의 총명을 가리고 자기들의 사적인 요구를 성취했지만 폐하께서 끝내 깨닫지 못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게 되고 백성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고인(古人)이 이른바 통곡하고 눈물을 흘려도 부족할 것이라고 한 것도 오히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말이 되었으니, 삼천리 강토의 500 년 내려오는 종사(宗社)에 이처럼 개벽 이래 처음 만나는 변고와 씻기 어려운 수치가 있으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같이 초야의 변변치 못한 사람도 이미 일찍이 스스로 죽지 못하고 숨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바로 폐하의 은택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이러한데도 끝내 온 몸에 가득한 피끓는 심정을 폐하 앞에서 토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신이 폐하를 저버리는 것이고, 폐하를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열성조(列聖朝)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이처럼 본분을 벗어나서 주벌 받을 죄를 범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아! 고금천하에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영원히 존재한 나라도 없었습니다. 원수에게 머리를 숙여 요행히 살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군신 상하가 한마음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사직(社稷)에 부끄러움 없이 한 목숨 바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국력이 비록 몹시 피폐하였다고는 하지만 선왕(先王)의 강토가 예전대로이고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며 나라와 운명을 같이할 자들도 있으며 군민(軍民)과 이서(吏胥)들 중에 선왕의 덕을 노래하면서 폐하께 보답할 것을 생각하는 자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저들이 만일 기필코 제멋대로 무례하게 굴려고 한다면 300주(州) 중에서 어찌 피눈물을 흘리며 몽둥이를 잡고서 폐하께 닥칠 어려움을 막을 자가 없겠습니까? 애초에 저들과 수호(修好)를 맺는 것에 대해 온 나라 신민(臣民)들은 분개했었습니다. 설사 수호를 맺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의리로 맞아주고 신의를 지켰다면 저들이 아무리 헤아릴 수 없이 사납고 탐욕스럽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군사로 위협하고 우리를 이처럼 기만하였겠습니까?

저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5개 조항은 폐하께서 나라를 위해 죽기를 맹세하고 시종일관 윤허하지 않은 것이며, 이른바 조인되었다는 것은 위조 문건을 사적으로 주고 빼앗고 한 것이지 나라의 조약으로 공정하게 결의(決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이것을 쥐고서 각국(各國)으로 왕래하는 사신들에게 증명한다면 원래 공의(公議)가 있는 만큼 당일 협박으로 체결된 조약은 자연히 폐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저들이 이렇게까지 억지를 썼기 때문에 앞서 이른바 몰래 서로 결탁한 무리들을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국노를 어찌 잠시라도 천지(天地) 간에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나라의 형률을 시행함으로써 국법(國法)을 펴고 울분을 씻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이미 무너진 나라의 기강이 조금이나마 진작될 수 있고 이미 동요된 인심이 조금이나마 진정될 수 있으며, 위태로움이 거의 안정되고 혼란이 거의 다스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께 있어서 전환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이니 성명(聖明)께서는 결단을 내려 시행하시되, 의심하지 마소서.

12월 16일, 송병선은 다시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아! 사람과 집과 나라를 망하게 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나라가 생긴 이래 어찌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무리와 같은 극악무도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삼천리 강토는 조종(祖宗)의 토지이고 수많은 백성들은 조종의 백성들이므로 비록 폐하의 존엄을 가지고도 오히려 사적으로 남에게 줄 수 없는데 더구나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제멋대로 주고 빼앗고 하면서 우리 500년 종사를 망하게 한단 말입니까?

아! 저 오적(五賊)들은 종실(宗室)의 지친(至親)이면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오는 신하들로서 저들의 아비와 할아비들이 열성조(列聖祖)의 은혜를 많이 받은 것도 생각하지 않고 군부(君父)를 협박하며 결론을 위조하여 동의를 표하고 마음대로 조인(調印)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이것이 얼마나 큰 변고입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아직도 처단을 내려 시원스레 신민(臣民)의 울분과 원한을 씻어주지 않고 환히 천지의 신령들에게 사죄하지 않았으니, 또 어떤 화기(禍機)가 언제 생기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은 어떻게 되며 천하 후세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이른바 5조약은 바로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를 통치하려는 것입니다. 선왕(先王)의 종묘를 어느 땅에다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며 온 나라 백성들을 어찌 차마 남에게 도륙을 당하도록 내맡길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의 막중한 보좌(寶座)인들 장차 어디에 가서 구차하게나마 보존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영부사(領府事) 조병세, 보국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민영환, 참판(參判) 홍만식, 주사(主事) 이상철(李相哲) 및 징집되어 올라온 군사(軍士) 김봉학(金奉學)은 울분을 안고 풀길이 없어서 순절(殉節)로써 나라에 보답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관원들과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울부짖다가 저들에게 수모와 치욕을 당하고 인민(人民)들이 말때문에 미움을 사며 다들 같다고 의심을 받고서 저들의 군사들에게 구속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 그 수가 수백 인(人)이나 더 됩니다. 포학하고 간사한 저들은 우리가 무력함을 멸시하고 온 세상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허위를 진실로 날조하기를 마치 귀를 막고 방울을 도적질하듯 하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에서는 아무리해도 시비를 가려내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한 번 열국(列國)의 공판(公辦)에 붙여 잘잘못을 가릴 것 같으면 한 마디 말이 끝나기 전에 천하의 맹약 앞에 저들이 용납되지 못할 것이며, 우리에게 허위 날조된 명색없는 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고심하며 간하는 것은 여기에서 보는 것이 있어서입니다. 폐하 앞에서 바른 말을 올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죽기를 무릅쓰고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신의 말일 뿐 아니라 곧 온 나라의 공론(公論)입니다. 폐하께서 분연히 결단하는 것은 폐하의 독단이 아니라 실로 천하의 본래 그러한 의리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국법을 시행하여 오적의 죄를 다스리고 속히 열국에게 단죄 결판해 줄 것을 요청해서 거짓 조약을 폐기함으로써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를 회복하여 천하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게 하소서.

이에 고종이 비답을 내렸다.

당장의 위태로운 형편은 기울어져 엎어지기 쉽게 생긴 물그릇이나 물이 새는 배에 비길 정도가 아닌데 덕망이 있고 충성스러운 경(卿)이 어찌 이렇게까지 화락하지 못할 수가 있는가? 진달한 것은 가납(嘉納)하겠지만 앞서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을 통해 거의 이해하였을 텐데 어찌하여 다시 제기하는가? 이처럼 극도로 어려운 때에는 더욱 잘 이끌어줄 훌륭한 사람이 그리우니, 원컨대 경은 속히 나의 뜻을 따를 것을 생각하고 한 번 조정에 모범을 보임으로써 옆자리를 비워놓고 간절히 기다리는 짐(朕)의 바람에 부응하라.

이후 송병선은 황제를 알현해 속에 있는 생각을 모두 진술하고 물러가 초야에서 죽도록 해달라고 청했고, 고종은 이를 승낙했다. 이에 송병선은 제자들을 인솔해 서울로 상경한 뒤 1906년 1월 19일에 수옥헌(漱玉軒)에서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실록 고종 43년 1월 18일자 기사에 수록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덕망에 대해서 돌보아주고 살뜰히 생각하는 마음이 실로 깊기 때문에 이처럼 어려운 때를 당하여 여러 가지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짐은 몹시 바라는 바이다."

하니, 송병선이 아뢰기를,

"이것은 시골에 파묻혀 있는 신하가 감히 아뢸 문제가 아니지만 이러한 나라의 큰 변고를 당하여 부르신 뜻이 매우 간곡하여 의리상 제 집에 편안히 누워 있을 수 없었기에 비록 오랜 병환에 시달리고 있는 처지였으나 일어나 올라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하의 모든 일에 대하여 군신(君臣) 상하가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이 함께 수습해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시국이 달라진 것은 유현(儒賢)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송병선이 아뢰기를,

"우러러 성상의 옥안을 보고 동궁을 보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 보는 것이라면 앞으로 나와서 보고, 동궁의 얼굴도 보아라."

하니, 송병선이 앞으로 나와서 우러러 본 다음 물러나 엎드려 아뢰기를,

"감히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진달해야 하겠으나 기가 막히고 정신이 혼몽하여 성상 앞에서 일일이 구두로 이야기를 올릴 수 없습니다. 삼가 짧은 차자를 마련한 것을 직접 올리니, 이 글을 보신 다음 속히 처분을 내리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비서감 승(祕書監丞)은 받아 오라."

하였다. 송병선이 아뢰기를,

"나라에는 법이 있는데도 역적 신하들이 제멋대로 조약을 체결하였으니, 그 죄는 이미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변명하는 상소에서 거리낌 없이 폐하를 협박하였습니다. 안중에 성상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선 처단하는 것이 국법에 맞을 것 같은데 아직도 윤허하는 명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나라의 법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현재 나라의 안위(安危)는 어떻게 역적을 엄하게 토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중대한 문제와 관련되는 만큼 다른 문제를 결속지은 다음에 즉시 변통할 것이다. 그리고 경의 말에 대하여 누가 옳지 않다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짐도 생각하는 것이 있다. 차자를 자세히 본 다음에 또한 속으로 생각해 볼 것이니, 물러가서 사차(私次)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송병선이 아뢰기를,

"마땅히 엎드려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석 중에 엎드려 있을 필요가 없다. 차자를 자세히 본 다음에 짐이 비답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으니, 경도 그것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경의 성실한 마음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였다. 송병선이 아뢰기를,

"보빙(報聘)을 들여보내는 일은 무엇 때문입니까? 저들이 우리를 노예나 첩으로 만들고 있는 판에 우리가 이번에 보빙하는 일에 대하여 신은 수치로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각 나라들에서 이미 공통적인 규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보내는 것이다."

하였다. 송병선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현임 대관(大官)들과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마다 저들이 반드시 위협하고 잡아 가두는데, 이것이 어찌 만국의 공법(公法)이겠습니까? 무례하기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엄하게 금지하지 않습니까? 현재 시급한 문제로는 역적을 토벌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다른 일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문제에 대해서는 응당 유념하겠다. 그리고 연석 중에는 엎드려 있을 필요가 없다. 장례원 경(掌禮院卿)은 짐의 뜻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함께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그 후 그는 국망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10가지의 시책을 담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모든 적(賊)을 참(斬)하여 왕법을 바로잡을 것.

둘째, 현자(賢者)를 등용하여 각 부에 임용할 것.

셋째, 의(義)로써 각국 공사관에 변론할 것.

넷째, 기강을 세워 명분을 바로잡을 것.

다섯째, 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순찰할 것.

여섯째, 재정을 정비하여 국력을 배양할 것.

일곱째, 학문을 바로잡아 인재를 기를 것.

여덟째, 사설(邪說)을 금지하여 적당(賊黨)을 물리칠 것.

아홉째, 법률을 밝혀 사송(詞訟)을 정비할 것.

열번째, 군력을 배양하여 비상시에 대비할 것.

그러나 고종은 지금은 시세상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답한 후 그를 돌려보냈다. 송병선은 이후 수일 동안 서울에 머물며 재차 황제를 독대하고자 했지만, 고종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대궐 문 앞에 며칠간 엎드려 접견을 청했으나 경무사 윤철규가 "합문(閤門)에 들어가 엎드려 있자면 앓은 몸으로는 근력이 허락치 않을 것입니다"라며 억지로 교자에 태운 뒤 성밖으로 내보냈고, 뒤이어 순검과 일본 순사들이 황제의 지시로 보호한다는 핑계를 대고 송병선의 몸을 수색한 뒤 강제로 기차에 태워 고향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송병선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2.4. 순절


고향으로 강제로 보내진 송병선은 자결을 결심했다. 그는 자결하기 전날 임금께 올리는 유서를 작성하고 북향 재배한 뒤 지니고 있던 약물을 먹은 후 문인들을 불러 들어오게 했다. 문인들이 "선생께서 처의(處義)를 반드시 이렇게 하셔야만 올바르게 됩니까. 산으로 들어가 도를 지키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며 만류하자, 송병선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 것은 오히려 평상시의 일이다. 지금 인류가 스러지고 우리 도가 이미 망했다. 이는 만고에 없는 일이다. 한번 죽는 것 밖에 다시 다른 도리가 없다. 내 뜻이 이미 결행하기로 정해져서 갖고 있던 약물을 내가 이미 먹었으니 그대들은 다시는 얘기를 하지 말라.

결국 송병선은 1906년 1월 24일에 약을 먹고 순절했다. 향년 70세. 고종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이 유현(儒賢)이 학문에 정교하고 심원한 것은 선정(先正)의 연원을 계승한 것이니, 노숙하고 높은 덕망으로 세교(世敎)를 유지하였다. 한 번 조정에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만나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는데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만나 울분이 치밀어 시골로 돌아가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어두운 거리에 등불이 꺼졌으니 어찌 애통한 마음을 이길 수 있겠는가? 죽은 경연관 송병선의 상사는 특별히 2등의 예장(禮葬)을 하사하고, 예식원(禮式院)으로 하여금 마을에 정려문을 세우고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시행하되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의시(議諡)하도록 하며, 특별히 대광 의정(大匡議政)에 추증하고 아경(亞卿)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제문은 직접 지어서 내릴 것이다.

이후 송병선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추서받았다. 또한 그의 여비(女婢) 공임(恭任)도 모친과 남편에게 "내가 저승으로 따라가서 시중드려야 한다."며 자살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2월 23일자 기사에서 이 사실을 보도하며 공임을 '의비(義婢)'라고 지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송병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23세손 석(錫) 병(秉)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