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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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명나라 말기의 관리.
2. 생애
인화(항주, 항저우) 출신으로 1565년 명나라 과거 최종시험에 합격한 진사 출신으로 등용되었으며, 강주지주(絳州知州)에 임몀되었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에서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형과우급사중(刑科右給事中), 예과좌급사중(禮科左給事中)까지 2년간 탄탄대로를 걸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파직되었다 3년만에 다시 예과좌급사중에 복직한다.
이 이후론, 지방직을 돌며 산동(山東) 제남부지부(濟南府知府)에서 산서부사(山西副使), 하남부사(河南副使), 하남좌참정(河南左參政)에서 산동안찰사(山東按察使), 강서포정사(江西布政司) 우포정사(右布政使)로 승진되었다. 이후 복건포정사(福建布政司) 좌포정사(左布政使)에서 도찰원우부도어사(都察院右副都御史) 산동순무(山東巡撫)로 올라갔다. 이 지역들은 명나라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던 만큼 한직이라 볼 수 없다.
산동순무를 맡은지 3년만에, 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임명되며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郎)으로 또 승진했고, 병부우시랑이란 관직을 수행하게 된다. 여러 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관리로서의 수완을 인정받았고, 지방직에서도 행정 처리를 잘한다는 평을 받았다.
2.1. 임진왜란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부우시랑[1] 겸 경략비왜군무(兵部右侍郎經略備倭軍務)로 임명되어 사실상 조선 파병 명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조선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사실상 임진왜란 초기 조선 내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그는 1592년 12월 내내 조선에 파견될 명군과 보급 및 물자를 점검하였으며, 이여송이 이끄는 요동군을 주축으로 한 4만 2천명의 명군을 조직하여 조선에 파견한다. 임진왜란 직전 터진 영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단기간에 대병력을 편성하여 신속하게 전개한 데엔 송응창의 관리 수완이 한 몫 했으며, 결과적으로 조명 연합군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명군 병사들이 조선인들에게 행패를 부리자 이를 항의하는 조선의 관리들과 장수들에게 사과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민약탈, 부녀자 강간, 조선인 살해를 저지르는 병사들을 참수형에 처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군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애를 썼다.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화 협상을 시작하자 이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다 그의 정적이었던 병부 상서 석성에게 탄핵되어 파직되고, 본국으로 소환된다. 그래도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도찰원우도어사(都察院右都御史)가 되었으나 나중에는 낙향했고 죽을 때까지 인화에서 지냈다.
3. 여담
- 저서로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을 편찬하였으며, 이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군의 1차 사료로서,임진왜란을 명군의 입장으로 관찰할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명 연합군이 펼쳤던 여러 작전 및 조선 장수들에게 내리는 지령 등. 읽어보면 당시 송응창이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보급 문제로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수있다. 개념이 있었고 일본의 음모와 조선 분할에 대한 명의 논쟁을 조선에 알리고 왜군의 터무니 없는 요구 조건을 일축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을 무시하는 기록이 곳곳에 보이기도 한 인물이다. #
4. 대중매체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최일화 씨가 맡았다. 굳이 특이점이 있다면, 심유경과의 국제 사기극이 탄로나자 울화통이 터진 나머지 심유경에게 니킥을 먹인다는 것이다(…). 조인트 까인 심유경의 반응은 덤.
임진록 2에서는 확장팩 조선의 반격에서 명군의 핵심 영웅 중 하나로 등장한다.
[1] 조선으로 치면 병조 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