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근

 


성명
송진근(宋珍根)
일본식 이름
靑木珍根
생몰
1916년 3월 9일 ~ ?
출생지
경기도 개성군 개성읍 동본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진근은 1916년 3월 19일 경기도 개성군 개성읍 동본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2년경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부 보도과 현업주임(現業主任)으로서 아나운서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조선방송협회(朝鮮放送協會) 기술부 제1현업과(第一現業課)에서 기술원 박택청(朴澤淸) 및 제2방송부 방송원들과 함께 단파수신기(短波受信器)를 이용하여 미국의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6월 말경 밤 9~10시 사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태평양전쟁 전과(戰果) 발표에 대한 일본어 방송을 청취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의 군함이 많이 침몰했고 미국이 크게 승리하였다는 선전방송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5일 밤 9~10시 사이에 우리말 방송을 청취했는데, 그 내용은 샌프란시스코 솔로몬 방면의 해전에서 미군의 승리, 미군의 버마 진격, 독소전(獨蘇戰)에서 소련의 승리 등에 대한 선전방송이었으며, 또 “조선 동포를 간악한 일본의 정치에 기만당하게 하지 말고 조선독립운동을 하자”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방송을 들은 이틀 뒤인 같은 달 27일경 송진근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원구(李元九)에게 청취한 내용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그는 1942년 말부터 1943년 봄 사이에 동료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단파방송 사건’으로 인해 송진근뿐만 아니라 성기석·염준모·박용신 등 경성방송국과 개성방송국(開城放送局) 관계자 다수와 송남헌·홍익범·허헌·문석준 등 150여 명의 인사가 함께 검속되었다.
1943년 7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육군형법 및 해군형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9월 17일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의 이후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송진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