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특별시

 



개성특별시
開城特別市
Kaesong Special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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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소재지
수창동
지역
해서
면적
441.86㎢
하위 행정구역
2구역 27동 10리
시간대
UTC+9
인구
100만 명 추정
인구밀도
미상
당위원회 책임비서

장영록
인민위원장

오경룡
ISO 3166
미부여[1]
[image]
개성특별시의 위치
개성시내 풍경
개성시 한옥 보존지구

중국인 관광객이 촬영한 개성(2018)
[image]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개성역사유적지구
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 /
Les historiques monuments et sites de Kaesong
국가·위치
북한 개성특별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3년
등재기준
(ii)[2], (iii)[3]
1. 개요
2. 상세
3. 지리
4. 역사
5. 교육기관
6. 인문
6.1. 개성상인(송상)
6.1.1. 관련 문서
6.2. 풍속
7. 만약 개성시가 남한령이었다면?
8. 북한에서의 위상
9. 남북통일 이후
9.1. 통일 이후 행정
9.2. 통일 이후 교통
9.3. 통일 후 문화적 가치
9.4. 통일 이후 발전성
10. 개성 관광
10.1. 명승지
10.2. 근대건축물
11.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
12. 개성 출신 실존/가상 인물
13. 대중매체에서의 개성시
14. 여담
15.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1. 개요


북한특별시#s-3. 남한과 인접한 북한 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기도 하다. 개성특별시를 제외하고 휴전선 근처에 있는 북한의 도시들은 다 고만고만하다. 평강군이나 북한 강원도 고성군은 거의 인프라가 지어지지 않은 북한 내에서도 깡촌인 곳들이다. 남한과 인접한지라 개발이 덜 된 측면도 있고 1990년대 이후로는 북한의 경제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제대로 된 도시계획을 구축하기가 난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한에서도 김포와 파주의 시 승격이 1990년대에나 이루어졌다는것을 생각하면 이상할게 아니다.

2. 상세


바로 남쪽엔 휴전선을 경계로 남한의 경기도 파주시가 있으며 한강 하류를 건너 김포시, 강화군과도 인접해 있다.[4] 물론 파주시청은 한참 아래쪽에 있고, 바로 근처엔 대성동 마을이 있다.
고려 왕조의 전체 사직 474년 중 초반 1년의 철원 시기[5]와 38년의 강화 천도 시기[6], 1년의 남경 임시 천도 시기[7]를 제외한 중세시대 434년간 고려의 수도였으며, 당시에는 개경(開京)이라 불렸다. 과거 소나무가 많아 송악(松岳/松嶽) 또는 송도(松都)라는 별칭이 있다.[8] 참고로 개성이 1930년 개성부로 개성군에서 분리되기전 까지는 개성군 송도면으로 개성군의 중심지였다. 아무튼 이래저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근교의 옛 수도인 톨레도거리위상이나 모두 비슷하다.
현재 인구는 30~35만 명(2008년 통계)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것은 근교의 농촌지대의 인구를 합친 숫자로, 시가지 인구는 15만~19.2만 명(2008년 통계) 정도로 추정된다. 남한의 구리시와 비슷하다. 과거 개경의 면적은 25~30㎢로 추정되며, 1950년 당시에는 17개 동에 면적은 29.95㎢였다. 1950년 당시만 하더라도 개성시의 시역은 개성 외성과 거의 일치했다. 거의인 이유는 개성시 동쪽 방면(운학동, 덕암동 일부) 쪽은 개성시 영역이 나성 바깥으로 삐져나온 곳이 있어서다.
남한과 인접한 도시라는 점에서 2000년대 햇볕정책 당시 개성관광(2007~2008)이 시행되고 개성공단도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한 동안 개성이 북한내에서 잘사는 도시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이후 정권이 바뀌고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중단됐다.
그 후 보수 정권에서 문재인 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뒤인 2018년 4월 27일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온 판문점 선언에 의하면, 향후 남북간 대사관 역할을 하게 될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소재지로 예정되었고 9월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소되었으나, 2020년 6월 16일, 김여정에 의해 폭파되고 만다.

3. 지리


[image]
개성은 북쪽의 송악산(488m)을 중심으로[9], 시계방향으로 부흥산, 용수산(용백산), 오공산(蜈蚣山, 지네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이 분지 지형이 다시 한강 하류와 연결되는 예성강임진강으로 둘러싸인 형태라서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측면에서 거의 과 같은 지리적 위상을 지녔다. 때문에 평양직할시보단 못해도 상당히 수비하기 좋은 곳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란이 있을 땐 단골로 털리는 장소였다.(...)
분지 지형의 중앙에는 자남산(子男山)이라는 언덕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김일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교통 측면에서는 경의선 철도가 지나며, 분단에 따라 개성역이 사실상 평부선[10]의 종점이 되었다. 개성역 외에 손하역이 있다. 또한 개성은 개성평양간 고속도로의 종점이다. 신의주시서울특별시, 목포시로 가는 1번 국도, 개성을 출발하여 옹진군으로 가는 50번 국도가 지난다.

4. 역사


[image] 개성특별시 행정구역 변천사
개성군 (開城郡)
송악군(松岳郡)

개주 (開州, 919)

개경 (開京, 960)

경기도 개성부 (開城府, 1398)

개성부 개성군 (開城府 開城郡, 1895)

경기도 개성군 (京畿道 開城郡, 1897)

경기도 개성부 (京畿道 開城府, 1930)

경기도 개성시 (京畿道 開城市, 1949)

개성지구 (開城地區, 1951)

개성직할시 (開城直轄市, 1957)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黃海北道 開城特級市, 2003)

개성특별시
(開城特別市, 2019)

개성특별시/역사 문서 참조.

5. 교육기관


서기 1950년 당시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개성중학교[11][12], 개성여자중학교, 송도중학교, 호수돈여학교, 정화여학교, 개성사범학교, 개성상업학교가 있었다.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송도국민학교, 명덕국민학교, 만월국민학교[13], 선죽국민학교, 동현국민학교, 중경국민학교, 남산국민학교 등이 있었다.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부설 생약연구소(현 천연물과학연구소)가 목청전 건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 학교들은 전후 북한에서도 이름만 바뀐채 교육시설로 잘 쓰이고 있기는 하다.
6.25 전쟁 이후 일부 교육기관들은 남한으로 내려와 다시 문을 열기도 했다. 대전광역시에 있는 호수돈여자중학교·호수돈여자고등학교는 개성시에서 개교했고, 인천광역시송도중학교·송도고등학교 역시 한영서원에서 출발했던 유서깊은 개성지역의 교육기관이었다. 또 서울특별시의 정화여자중학교와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 또한 개성 정화여학교가 그 전신이다. 심지어 경인교육대학교 역시 원래 송도사범학교에서 출범했으니, 짧은 시간이나마 대한민국에 소속되어서 그런지 개성의 흔적은 우리 주변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위키백과에 보면 대한민국 시절까지 존재하던 옛 학교들이나 흔적들을 더욱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14]

6. 인문



6.1. 개성상인(송상)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500년간 작동하며 원래부터 상업이 융성했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차별을 받아 상업이 융성했다는 주장은 두문동 72현처럼 17세기 이후 지어낸 이야기이니 무시하면 된다.
개성 송상(松商)은 한강한성의 시전을 본거지로 한 경강(京江)상인들과 양대 상인 세력으로 대립했다. 덕분에 개성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대신 상업의 거점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물산이 모이는 곳치고는 문화가 융성하지 않은 곳은 없었으니, 서경덕 같은 문사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개성상인들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개성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다. (...) 혹자는 조선의 유태인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풍은 지금도 남아있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성사람들은 깍쟁이[15]"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독한 면모 덕분에, 일본강점기 시절 상계를 잠식해오는 일본 자금에 맞서 거의 유일하게 상권을 지킨 것도 개성의 상인들이었다는 후문.
개성상인들이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덕목은 신용과 정성이었다. 특히 남에게 돈을 과도하게 꾸어서 사업을 할 경우 차후 신용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해 되도록이면 남에게서 돈을 꾸지 않는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했다. 이는 개성상인의 후예로 알려진 현대의 기업가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개성상인의 DNA를 이어받았다고 알려진 대한민국의 기업으로는 OCI아모레퍼시픽 등이 손꼽힌다. OCI아모레퍼시픽을 각각 창업한 송암 이회림 OCI 창업주와 장원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모두 개성 출신이다. 이회림 창업주는 실제 고향도 개성이었으며[16] 평안도 출신인 서성환 창업주는 개성에서 내려와 사업을 했던 어머니로부터 사업을 배워 개성에서 사업을 시작해 훗날 남한에서 사업을 번창시킨 이들로 유명하다. 이 덕에 현재도 OCI아모레퍼시픽은 국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탄탄한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큰 상관은 없지만 전원주 할머니도 개성 출신이다. 그도 그럴것이 투자 실력이 아직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시대 사람들과 비교해서 확실히 앞선 투자감각과 혜안이 있다.
절약이 재테크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며 주식책을 저술했고 단순하게 모으는게 아니라 사업보고서 분석법, 재무제표 분석법을 꼼꼼하고 깐깐하게 분석하고 분할매매로 리스크도 분산하여 첫 투자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돈 550만원으로 3천만원이라는 600%의 수익률을 올리고 국제전화 CF로 받은 광고료 5천만원도 주식을 해서 1억8천만원으로 불렸다. 무려 IMF때 남들은 건물값이 폭락해서 마구 파는 와중에 오히려 상가를 구매하여 그 상가가 현 시가 30억정도 된다고. 이렇게 돈이 많지만 실제로는 억척스럽게 절약하는 편이라 방송국 출퇴근시에 차를 사도 되는 여력이 되는데도 십수년간 대중교통을 이용한건 유명한 이야기.

6.1.1. 관련 문서



6.2. 풍속


분단 이전의 기록을 보면 전통적 식문화가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전통 사회에서 식문화가 발달하기 위해선 산물이 풍부하고 풍류 문화가 잘 발달해야 하는데, 잘 발달한 상업을 바탕으로 개성에 그런 기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데 고려의 궁중 음식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개성 음식 중 유명한 것으로는 개성 쌈김치, 조랭이떡국[17], 개성편수, 개성약과 등이 있다. 개성(및 그 이북지역)에선 설날만두를 먹었다. 본래 이남지역에서는 만두를 먹지 않다가 개성 요리가 남하하면서 만두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개성 사람들에게는 특이한 풍속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우선 개성 사람들은 매우 폐쇄적으로 다른 지역에 나가 사는 것을 꺼리고, 다른 지역에서 개성에 와서 사는 사람도 꺼렸다. 심지어 바깥으로 시집장가를 가도 언젠가는 반드시 개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개성 사람들을 불렀던 별명으로는 개성 깍쟁이가 있다. 서울 사람도 개성 사람과 마찬가지로 깍쟁이라고 불렀다.

7. 만약 개성시가 남한령이었다면?


개성은 서울에서 철도로 78km[18], 직선거리로는 58km[19]이다. 또 개성과 휴전선간의 거리는 판문점에서 겨우 12km밖에 안 된다. 그래서 1951년 이후 조금만 더 북진을 했으면 개성을 탈환할 수도 있었다는 전망도 있다.
개성 지역은 모두 미수복 경기도 권역이라 할 수 있는데, 전 경기도 지역을 다 수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므로 안타까운 이야기일 수 있다. 다만 개성의 서부전선 방면 휴전선이 제대로 유지되려면 개성의 감제고지인 송악산예성강까지 획득하여야 할 것이었으므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송악산 일대까지 해서 개성시 전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면 군사적으로 해주황해도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실제로 국군 대대가 개성까지 진출은 했다. 그러나 북측의 송악산을 장악하지 못했고, 관측과 방어에 불리한 분지라서 국군은 개성 시가지에서 철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송악산까지는 어떻게 해본다 쳐도, 문제는 그 바로 북쪽에 버티고 서있는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다시 송악산을 감제하기때문에 현 휴전선을 기준으로 30km 이상을 전진해야 간신히 개성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지라 여러모로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게다가 서부전선에 예성강 너머 연백평야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돌출부가 생기므로 북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한이 획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는 빠른 휴전을 원했던 미국과 UN사로써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대한민국령으로 남았다면 개성은 대한민국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우선 역사적인 상징이 많기 때문에 역사적 관광지가 될 수 있는데다가, 북한과 가까운 장소다보니 북한 관련 관광도 가능할 것이며, 군사적으로도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도시라는 점에서 주요 군사 요충지로도 가능하기 때문. 따라서 일본의 교토시, 나라시처럼 한국에서는 경주, 전주, 공주, 부여와 더불어 대표적인 관광도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대체로 통일이 되면 수원시급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통일 이후 수원시 급의 위상을 가진 도시가 될 것이라는 말이 허튼 소리는 아닌 게, 정조 대에 개성, 화성, 남한산성, 강화를 유수부(留守府)로 지정하여 한양의 외곽을 담당하는 주요 군사도시로 지정한 역사가 있어 대략 수원과 개성의 위상이 엇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분단 이전까지는 개성이 여러모로 수원보다 잘 나갔다. 시 승격도 훨씬 빨랐고. 물론 역사적 위상은 감히 비교도 안 된다.[20]
또한 수원이 서울, 인천과 삼각으로 수도권의 주요 공업지역으로 성장한 현대사를 생각해 볼 때 개성공단 및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등 향후 통일한국의 행정중심지 및 공업배후지가 될 개성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얘기다.
다만 시가지 주변 평지가 넓지 않아서 현대적인 큰 도시를 만들기가 어렵다. 개성 이전에 수도였던 경주시나, 남한 도시 중에서 개발 가능한 평지가 좁기로 손꼽히는 부산광역시도 개성과 비교한다면 평지가 훨씬 넓다. 그나마 동남쪽에 현 시가지보다도 좁은 수준의 평지가 있었는데 여기에 들어선 게 바로 개성공업지구. 평양개성고속도로 북쪽에 계획된 약 1천만 평 규모의 3단계 확장부지도 평지는 절반도 안 되고 죄다 언덕을 타고 올라가는 형태다.
이미 그 개성을 수도로 삼았던 고려 시대부터 틈만 나면 천도할 생각을 했을 정도로 워낙 협소하다는 단점 때문에 관광지로서는 몰라도 대도시로서 그리 큰 발전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북한에서 개성의 성장이 더딘것도 이 산지때문인데 아무리 북한이 다락밭을 개간할 정도로 개판이라지만 이래서야 체계적인 도시계획을 짜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통일 후 어떻게든 개성을 키우겠다면 성남시의 구시가지처럼 산을 다 깎아서 도시를 확장하거나, 개성의 구시가지를 놔두고 산들을 지나 개풍군, 장단군 쯤에 개성과 연계된 신도시를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21]
역사관광지로서의 가치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유적지 자체는 많은데 경주첨성대, 석굴암, 불국사, 안압지수원화성, 화성행궁 같은 킬러 컨텐츠는 부재상태이기 때문. 만월대나 각종 궁궐들이 대부분 터로만 남아있고 과거보다 규모가 줄어든 고려성균관이나 개성남대문, 숭양서원, 선죽교 정도가 현재 남아있는 개성시내 유적들이다.[22] 복원을 하기에도 전방이라는 특성상 대규모 투자가 진행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개성 성곽은 아직까지 보존된 구간들이 있고 개성 주변 왕릉유적들도 있는 만큼 지금 판문점·DMZ관광이 개성을 한국이 차지한 세계관에서도 활성화된다면 이와 연계해 상당한 시너지효과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라[23]-고려-조선의 한반도 삼대 통일국가 수도를 모조리 독식한다는 상징성은 이루 설명하기가 힘들다.[24] 유적이야 어찌 하기 힘들어도 유물은 발굴하는 족족 박물관행이 되니 국립개성박물관은 국립중앙, 국립경주박물관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네임드 박물관으로 군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성이 전방이라는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성권 유물까지 싹쓸이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6.25 이전에도 개성박물관 유물을 죄다 서울로 빼내기도 했고, 무엇보다 개성권 발굴을 주도할 지역 거점 국립대학이 탄생하기가 힘들다.
그 외에 대한민국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서울이 여전히 군사적 전방이긴 해도 지금보다 휴전선에서 한발 더 멀어졌을 것이며, 수도 방어의 중요 거점이 되어 개성에도 수방사가 위치했을지도 모른다.[25] 이 경우 송악산 일대를 1차 저지선으로 삼아 북한의 공격을 훨씬 더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어서 서울에 대한 보위력이 배로 증가한다. 또한 서울-고양-파주-개성 방향의 경의선 축선 및 서울-김포-개풍-개성 방향으로의 수도권 개발 또한 보다 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개성역 연장은 확정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도권 전철 경의선이 수도권 전철 1호선과 함께 개통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파주 버스 9710같은 광역버스 노선이 개성까지 운행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수원, 서울-인천 축이 발달한 것처럼 서울-개성 축도 고도로 성장할 것이라 했지만. 아무리 상징성과 역사성이 강하다 하여도 현재 전방도시인 철원과 십수년전 파주의 이미지를 상상해보면 그렇게 광역시급으로 크게 성장하기는 힘들고 의정부와 비슷한 중견+군사도시와 같은 포지션이었을 것이다.
또 개성시 시내버스가 경기도 시내버스에 편입되어 운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개성까지 우리 영토였으면 파주는 80~90년대부터 무섭게 성장해서 지금의 고양시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지금의 고양시, 파주시의 군사적 전방으로서의 포지션을 개성이 차지하여 군생활을 하러 개성까지 가야 됐을 것이다. 또한 개성의 한국 영유로 인하여 수도권 집중화가 더욱 심화되어 경기북도가 설치됐을 가능성도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북한 치하에서 개성직할시나 개성특급시, 개성특별시라는 이름으로 있던 것과는 달리 한국 영토로 남았다면 경기도 개성시 행정구역으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최전방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수도권이라는 특징 때문에 광역시 승격 수준까지 커지기는 많이 어려울 것이다. 일산신도시, 운정신도시, 김포 한강신도시나 심지어는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조차도 외국인 관점에서 볼 때 영락없는 군사적 최전방이라고는 하나, 개성시는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지경으로 바로 북한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접경지이다. 또한 경기도 수원시 같은 경우는 울산보다 인구가 많은데도 수도권이라서 광역시 승격을 못 하고 있다. 반면 북한과 바로 접해있는 도시라는 개성의 상황에 의거하여 지구, 특구, 특별구 등 특별행정구역 형식의 새로운 행정구역이 설치될 수도 있겠다. 남북분단의 현 상황에서 대한민국 입장에선 개성의 상실이 여러모로 아쉬운 일.

8. 북한에서의 위상


분단 이후, 본래 남한 지역에 속해 있었다는 문제, 사실상 현대의 수도권이라고 봐도 될 법한 서울과의 거리, 북한의 입장에서도 최전방인 도시라는 이유 등으로 썩 좋은 지방은 아니다. 경기도와 바로 접하고 있다보니 이산가족도 많은 편. 그래서 주민들이 북한에서의 출신성분이 나쁜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 때문에 조선로동당 입당이나 군인의 승진 등에도 영향을 끼쳐 군인들로서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최전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것만 보면 마냥 푸대접받았을것 같지만 그건 아니었다. 비록 지형의 한계로 도시개발에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려의 수도인데다가 판문점이 위치한 만큼 명분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한강만 타고 넘어가면 바로 남한이라서 특별히 지원해줄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북한에서도 중시는 받아 상위급 행정구역으로 꾸준히 지정되었고, 평양에서 직통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찾아왔을때도 배급이 중단되지 않고 이루워진 지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즉, 출신성분이 나쁘다고는 해도 마구 푸대접할수 없는 특수한 사정상 당국에게 배려를 받은 지역이라는것이다
또한 개성공단이 생긴 이후로는 부유층의 도시가 되었다. 우선 개성공단이 존속했을 당시에는 급여수준이 북한기준으로 매우 높은 좋은 직장으로 물건 공급권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평균적인 경제사정에 비해서 훨씬 좋은 소비생활을 누릴수있었고 남한산 과자와 커피믹스, 소시지나 불펜, 속옷등을 몇벌식 가져다가 장마당에 팔아 짭짤하게 부수입을 낼수있는 이점또한 있었으며, 개성평양간 고속도로를 통해 이들 남한산 물품들이 사리원, 평양으로까지 팔려나가다보니 자연스레 개성공단 직원들은 북한 기준으로 잘사는 부유층이 되었다. 또한 기준에 주거하던 개성주민들도 남한산 물품 유통으로 번창하는 개성장마당을 통해 꽤 이득을 보았으며 그 덕택에 북한 기준으로 평양, 라선, 남포에 뒤이은 상류층의 도시가 되었다. 게다가 개성공단으로 인해 개성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에 대해 관리를 엄격하게 하다보니[26] 당연히 치안도 좋아지게 되었다.
요약하면 평양은 자기네들 체제의 중심지라서, 개성은 남한에서 퍼줘서, 라선은 러시아가 퍼줘서, 남포는 평양 앞마당 멀티라서 부유하고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꼽사리 끼자면 중국자본의 맛을 본 신의주 정도.
2021년 현재 북한의 경제수준(지하경제 포함 RGDP)이나 생활수준, 인프라 수준은 평양은 대한민국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나머지 네 도시는 80년대 중후반 수준이라고는 한다. 다른 도시는 더 못 살수는 있으나, 저런 곳은 남한 인구를 대입해봐도 인프라가 갖추어지기 어려운 환경일 것이다. 다만 이런 비교를 일대일로 하면 곤란한 것이, 정보화 수준은 저 당시의 한국보다는 나은 수준이고, 수도, 전기 사정 같은 것은 저것보다 열악하다. 최근에 태양광 패널을 수입하는 가정이 늘어 전력 사정이 개인 기준으로는 나아지지만 국가 차원의 전력 생산은 갈수록 열악해지며 갈수록 비교가 힘들다.
사실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이는 적합한 추측이라 할 수 있는게 북한 전체의 1인당 유효 GDP(PPP)는 2018년 기준 2700달러는 된다. 명목은 1300달러긴 하지만 이는 지하경제 비중이 60%대를 넘나드는 막장국가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테고...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자료를 봐도 75년까지는 대한민국보다 경제수준이 (약간의 뻥튀기를 감안해도) 우위였고 78년 대한민국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1200)하며 확실히 추월당하였다.
허나 북한도 80년대까지 한국보다 훨씬 더디게나마 계속 성장하다 90년대 꼬라박고 00년대 말 다시 북한의 80년대 수준으로 회복한 다음[27] 2010년대에는 (북한 치고는) 상당히(10년치 다합쳐서 평균내면 매년 1~3% 정도) 경제성장을 하고 있던 상황이기 때문에 코로나19 유행을 감안해도 2021년 지금쯤은 최소 2500달러 수준은 된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28][29] 그리고 대한민국의 80년대 초중반 국민소득이 2500달러 선이였음을 감안하면 대충은 맞아 보인다.
사실 기성세대들이나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북한은 잘해봐야 한국의 70년대 경제 수준, 나머지는 한국전쟁 시절 그대로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건 90년대 확실한 체제경쟁 승리 이후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당시의 통계자료로 그렇게 선전한 시점에는 그게 사실이었고, 그 이후에는 북한 따위에 관심가질 필요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어서(IMF 금융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굳이 일반대중 상대의 선전내용을 고치지 않고 30년 가까히 우려 먹어서 그런 게 크다. 90년대, 00년대만 해도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었지만 2021년 지금은 거의 반 세기가 지난 먼 과거가 되었다. 90년대만 해도 현재 시점에선 무려 30년 전의 일이다.
역설적으로 북한 경제제재 덕분에 석탄을 수출하지 못해 남은 석탄들을 발전소에 넣고 때워버려서 저 4개도시의 경우 24시간 전기공급과 일부 산업시설, 철도망 가동이 재개되었다고... 물론 나머지는 답이 없지만...
그리고, 흡수통일,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좋든싫든 이웃국가로 존속하는 상황을 가정하면 차라리 적당히 잘사는게 낫다. 전자는 통일비용 문제가 조금이나마 완화되고 후자는 어쨌든 생계를 이유로 이탈하는 탈북자를 지원하는데 드는 복지 예산이 절감될 것이므로... 후자의 경우, 최근에 입국한 탈북자일수록 자본주의 적응 능력이 강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요즘은 통일 연구에서도 소상공인 한정 남한과 비슷하다고 여겨 자본주의 제도 적응에 대한 우려 자체는 빼고 있다. 게다가 저렇게 잘 살게 된 것도 주민들이 이제 자본주의를 해야 잘 사는 것을 알게 된 측면이 강해, 기존 방식의 북한 당국의 정치적 선전은 어려워지는 반면, 주민들의 세계화 수준은 예전보다는 그나마 나아지는 것이다.
또한, 개성공단이 들어오면서 개성 시내 지역에 상수도 시설이 깔리면서 인기도가 급상승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제대로된 상수도망을 갖춘 도시라고 해봐야 평양이나 남포, 청진 등과 같은 극히 일부의 대도시에 불과하고, 이런 곳도 1990년대 이후로 개보수가 부실하게 이루어진 관계로 수도 시설이 노후화되어 제대로된 급수가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개성은 개성공단이 설치되면서 상수도 시설을 새로 설치했고, 용수가 풍부하여 급수 제한 없이 마음껏 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30]
물론 개성공단 폐쇄 이후 2년간 사정이 달라졌을 게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2018년부터 다시 정수장이 정상 가동되기 시작했다. 개성공단 정수장, 개성연락사무소 개소 맞춰 2년8개월 만에 재가동남한 인력 철수해도 홀로 도는 개성 정배수장
또한 휴전선과 가깝지만 탈북자들이 굉장히 적은 지역인데, 당연하지만 휴전선 근처는 전부 지뢰밭에 경비가 삼엄해서 탈출하기가 너무 어렵고, 그렇다고 중국 쪽 국경까지 가자니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 출신성분이 나쁜 지역으로 낙인 찍혀 외부로 여행허가를 받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3년 9월에 직할시에서 해제되고 황해북도 관할의 특급시로 격하된 시점에는 법적 지위가 많이 애매해졌었다. 하지만 북한 내부에서도 개성 차량 번호판을 유지하는 등 그 특수한 지위를 알음알음 용인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사 남포시 역시 평남에 흡수된 이후에도 꽤 특수한 지위를 누리긴 했다. 특히 특급시 격하 즈음에 개풍군을 완전히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31][32]
하지만 위에서 보듯 결과적으로 이런 인문적 풍토와 지리적 배경(삼면이 물), 역사적 배경(접경지역)이 도시를 확고한 "섬"으로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전후 북한 치하의 도시가 되어 결국 도시의 위상 역시 대폭 떨어진 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2019년 10월 말에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드디어 남포특별시, 라선특별시와 동급의 대우를 회복하게 되었다. # 통일부가 2020년 2월에 공식 확인하기는 했으나, 2019년 10월 28일자(아래 사진)부터 조선중앙텔레비죤 오후 8시 '보도' 중 날씨 예보에 표출되는 지도에서 개성시가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시점에 승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 개풍군 지역 역시 포함되어 승격되었다. 다만 예전 직할시 당시에는 포함됐던 장풍군은 제외되었다.
[image]
2020년 4월 경에는 구 개풍군 지역을 개풍구역, 구 판문군 지역을 판문구역으로 부활시켰다.

9. 남북통일 이후



9.1. 통일 이후 행정


통일 이후에는 행정구역 측면에서의 논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타 지역은 개편이 되더라도 권역 내에서 왔다갔다 하는 거지만, 개성은 개편시 경기권 - 황해권이라는 권역 단위로 움직이게 되는 경우를 상정해야 하기 때문. 혹은 세종특별자치시의 경우처럼 별도의 독립 행정구역으로서 황해도나 경기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행정구역으로 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황해권에 편입되거나 독립 행정구역이 되더라도, 도시 자체는 결국 충청남도의 천안시, 아산시처럼 범수도권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더 자세한 사항은 남북통일/행정 문제/행정구역 개편 문서를 참조.
심지어 개성시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통일 한국의 수도 후보로 추진했던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33]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세종특별자치시로의 행정조직 이전을 반대하는 반대 급부로 서울시장 시절부터 퇴임 전까지 개성시가 통일수도가 되어야한다는 의견을 여러차례 피력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남북통일/수도 문제남북통일/수도 문제/후보 지역#s-3.1.5 문서 참고 바람.

9.2. 통일 이후 교통


교통적인 차원에서 서울특별시와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문산에서 약 6정거장만 더 가면 개성역이 나오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수원보다는 멀지만 천안보다 가깝다. 정확히는 개성공단은 서동탄이나 병점역 정도 위치이고, 개성 시가지는 오산역 정도 위치이다. 개풍군은 대충 동탄신도시와 같은 입지. 고속버스도 아니고 지하철로 70분 거리[34] 이며,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을 기존 경의선을 활용하여 임진강역에서부터 연장하면 된다.
도라산 기점으로 18km 정도 남은 구간을 마저 단선전철화 하면 당장 문산~임진강 셔틀 전철을 연장하여 운행은 할 수 있고, 제대로 하려면 문산 기점으로 27km 정도를 복선화/현대화 개량을 하면 되는데 복선화 부지가 100% 완비되어 있어서 전차선 깔고 시운전만 하면 된다. 실제로는 현대화 과정에서 선형 개량, 직선화 등이 필연적이므로 연장은 문산 기준 20km대 초반 정도로 다소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가장 큰 난관이 임진강역 북단의 철교 정도.
게다가 수도권 전철 3호선이 연장되거나, 신분당선이 일산까지 연장될 경우 추가 연장이 논의될 수 있다. GTX A선을 연장할 경우 30분 이내까지 단축된다.[35]
게다가 수많은 계획이 이미 대기되어 있다. 이미 남한에서 장기간 개성 지역에 투자를 많이 했으므로, 인프라도 평양이나 라선을 제외한 북한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잘 갖추어진 편이다. 사실 2018년 남북 도로철도 착공식으로 상징적이나마 착공식은 이미 한 상태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계획한 문산개성고속도로도 있고, 인천국제공항과 해상교량을 통해 바로 이어지는 서해남북평화도로 사업 역시 계획되어 있다. 사업 계획이 진행만 된다면 구 북한 지역과 구 남한 지역을 바로 잇는 교통의 요지로 거듭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다. 도로만 준비된다면 광역급행버스직행좌석버스 또한 서울과 개성 사이를 잇는 노선이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개성시에는 공항이 없으므로 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을 이용할 가능성이 큰 편이다. 그중 김포국제공항국제선 노선 취항에 제약이 걸려 있으므로 인천국제공항이 실질적인 관문의 역할을 할 듯 하다.[36] 공항은 활주로 용량이 허용하는 한 한 곳에 뭉쳐 허브가 될수록 좋기도 하고. 또한 철도도 수도권 전철 경의선이 개성까지 연장될 가능성이 크고 경의고속선, 경의고속도로 등의 기점이 될 수도 있다.

9.3. 통일 후 문화적 가치


개성 특유의 역사 관광 콘텐츠도 빛을 발할 가능성이 높다. 한옥 보존 지구를 비롯한 선죽교, 만월대고려 왕궁 유적 등의 사적들이 나타내듯이 500년 고려 왕조의 수도란 역사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37] 경주처럼 '고려 문화 지구' 같은 것을 만들어 역사 문화/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시키거나, 만월대보제사 흥왕사등 고려의 건축물 등을 복원할 가능성도 있다.[38] 이미 개성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어서 발전에 쉬울 것으로 보인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도 이미 개성 관광을 시행했던 선례가 있는데, 아예 통일이 되어서 이 역사 분야를 개발한다면 그 잠재성은 대단할 것이다. [39] 옛 고려 개경의 영화를 재현하는 것.
도시 발전적으로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이는 바로 400년 넘는 세월 동안 고려 왕조의 심장부였던 곳이라 경주시처럼 땅 파면 유적이 나올 곳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건물 건설이 추진되다가 유물이 쏟아져나와 중단되는 경우가 매우 숱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강화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수천 채에 달하는 옛 한옥들도 경주시부여군처럼 개발제한 크리를 먹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유적지가 몰려 있는 개성시내가 아니라 그 옆 개풍군, 장단군 지역을 편입,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장단은 부지 면적은 둘째치고 엄연히 역사적으로 완전히 다른 동네인데 거길 개발하면 그게 과연 개성 땅이라고 할 수 있나는 회의적 시선도 있다. 결국 뚜껑을 까봐야 알 수 있을 둣 하다.[40]

9.4. 통일 이후 발전성


결론적으로 통일 이후에는 북한 지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할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은 틀림이 없다. 인구 면에서도 다음과 같은 수요가 적지 않을 것이다.
  • 서울경기도 지역에서 살고 있는 새터민들이 이북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지척에 두고 싶어해서 살게 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크다.
  • 새터민들의 직계 가족들 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 중 남한 지역을 내심 동경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접근성이 좋은 개성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경우가 꽤 될 지도 모른다.
  • 게다가 개성공단이 재건되면서 취업 희망자들이 북한 전역에서 모여들어 이들이 이주하게 될 것이다.
  • 덤으로 남한 대기업 파견 직원들을 위한 숙소와 사무실, 여기에 부설될 주거, 교통 및 편의시설까지...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가능성이 높은데, 당장 통일이 이뤄지는 것과 동시에 남한의 자본과 개발이 먼저 투입될 지역이기 때문에 주거용, 상업용 부지로 사용될 토지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 명약관화이기 때문이다.[41] 여기에 난개발과 교통문제가 겹치면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아닌 헬 그 자체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개성시의 가용면적이 좁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성뿐만이 아니라 개풍 전체가 산투성이 땅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정도전이 괜히 한 목소리로 개성 잔류를 희망하는 사대부층에 홀로 맞서 개성을 대놓고 깐 게 아니라는 것. 개성의 기존 인구만 이미 30만인데, 적은 인구도 아니다(...)

10. 개성 관광


북한내에서도 개성이 수학여행지나 관광지로 이름이 높기도 했고,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금강산 관광 이후 2007~2008년 잠깐 시행됐으나, 얼마 못 가 2008년 박왕자 씨 피살사건을 계기로 중단되어 한국인이 공식적으로 관광할 방법은 없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개성 관광 문서 참조.

10.1. 명승지


옛 고려 왕조의 오랜 수도였던 만큼 신라의 수도 경주시나 백제, 조선의 수도 서울특별시 못지않게 명승고적이 많다.
2013년에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 만월대, 첨성대,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왕릉, 7왕릉, 명릉, 공민왕릉의 12개 유적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42] 자세한 내용은 개성역사유적지구 참조. 교외에는 왕건릉, 흥왕사지, 대흥산성과 박연폭포 등의 명승고적들이 많다.
특히 옛 고려왕궁인 만월대는 남북 공동발굴 종종 진행되었는데, 2018년 10월부터 12월까지 8차 공동발굴이 진행되었고 9차 공동발굴은 2019년 2월부터 다시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되었다.
  • 만월대 - 옛 고려 왕궁.
  • 개성 남대문 - 시가지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내성(內城)의 남대문이기 때문이다. 개성 나성의 남쪽 문은 고남문(古南門).
  • 관덕정 - 자남산에 있는 정자로, 서울의 황학정과 비슷하게 활쏘기에 이용되었다.
  • 개성 성균관 - 조선시대 이후로는 향교이고, 간판만 성균관일 뿐이었다.
  • 개성유수영 문루 - 고려 성균관 부지 내로 건물 이전.
  • 숭양서원 - 정몽주의 제사를 지내는 서원.
  • 선죽교 -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곳으로 유명한 곳.
  • 표충사 - 선죽교 옆에 있으며 정몽주의 충절을 기념하는 비각.
  • 목청전 - 태조 이성계의 옛 집.
  • 경덕궁 터 - 태조 이성계의 옛집으로, 개경으로 잠시 환도했을 당시 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터만 남았다.
  • 안화사 - 송악산 기슭의 절.
  • 보제사
  • 고려왕릉
  • 내봉장(來鳳莊) - 구 고려동 396번지에 있던 고급 요정이었는데, 1951년 이 곳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10.2. 근대건축물


  • 남성병원(南星病院)
[image]
1901년 선교사 레이드(Reid)가 설립하여 6.25전쟁 발발 전까지 운영되었던 병원. 특히 아편환자를 잘 고쳤다. 북한 치하에서는 소아병원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용도는 알 수 없다.
여담으로 6.25 전쟁 전전날에는 이 병원 앞 노상에서 총탄 수십개와 수류탄이 든 수상한 봉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11.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




[image]
시기
개성시
開城市
Gaeseong City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시청 소재지
수창동 217
광역자치단체
경기도
하위 행정구역
17
면적
29.95㎢
인구
90,081명[43]
인구밀도
3,007.71명/㎢
명예동장
4석
홈페이지
이북5도위원회 개성시 소개
이북5도위원회 기준 개성시 행정구역지도
각 동의 면적과 더 자세한 소개는 여기로
1950년 당시 기준 17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식 동명 개정은 1948년 2월 1일부로 적용되었다. 이북 5도 체계하의 다른 도시들이 일본식 지명이 개정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과 달리, 개성시는 광복 후 짧은 시간이나마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현재 이북 5도 체계하에서도 일본식 동명이 없다.
  • 수창동(壽昌洞): 이름은 고려의 별궁이자 조선 초기에는 조선의 궁궐로도 쓰였던 수창궁에서 유래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야마토마치(大和町, 대화정)라 불렸다. 개성시청을 비롯해 관공서가 밀집해 있었으며, 개성 제일의 번화가였다. 지금은 개성학생소년궁전이 들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동흥동(東興洞)
  • 서흥동(西興洞)
  • 남안동(南安洞)
  • 북안동(北安洞):
  • 선죽동(善竹洞):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 그리고 숭양서원이 있는 곳. 동네 이름도 선죽교에서 따왔다. 그런데 선죽동이 남북으로 긴 행정구역이라 선죽교는 선죽동 남쪽에 치우쳐 있고, 시가지 북쪽에 있는 개성 성균관과 송악산 기슭까지 선죽동 관할이다.
  • 자남동(子男洞): 이름 그대로 개성의 산인 자남산에서 따온 동네 이름이다.
  • 용산동(龍山洞)
  • 관훈동(冠訓洞)
  • 동현동(銅峴洞)
  • 손하동(孫河洞)
  • 고려동(高麗洞): 송악산 바로 남쪽이다. 이름 그대로 고려에서 따온 동네 이름으로 송도고등학교의 원 소재지.
  • 만월동(滿月洞): 고려의 정궁인 만월대가 있는 곳. 동네 이름도 만월대에서 따왔다.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의 원 소재지다.
  • 태평동(太平洞): 개성역 소재지.
  • 사직동(社稷洞):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사직동과 이름이 같다.
  • 운학동(雲鶴洞)
  • 덕암동(德巖洞)
광복 직후 일본식 지명 청산 과정에서 대화정(大和町)은 수창동으로, 지정(池町)을 자남동으로, 원정(元町)을 선죽동으로, 경정(京町)을 관훈동으로, 궁정(宮町)을 동현동으로, 동본정(東本町)을 동흥동으로, 서본정(西本町)을 서흥동으로, 북본정(北本町)을 북안동으로, 남본정(南本町)을 남안동으로, 남산정(南山町)을 용산동으로, 황금정(黃金町)을 손하동으로 개칭하였다.
이북 5도청에서는 북부, 서부, 남부, 동부 4명의 명예동장을 임명하고 있다. 특히 북부는 한옥이 집중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한 곳.

12. 개성 출신 실존/가상 인물


  • 베니스의 개성상인: 안토니오 꼬레아, 유명훈[44]
  • 박완서: 정확히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출신. 원래 개성군이었다가 1930년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되면서, 개성군의 잔여지역이 개풍군으로 개칭되었다.
  • 오자복: 제21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 윤여정: 집안 대대로 개성 출신이라고 한다.
  • 왕건
  • 임광정: 한국화장품 창업주.
  • 전원주: 개성 출신이다.
  • 최순우: 미술사학자이자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 오청성: 2017년 5발의 총알을 맞으며 판문점으로 귀순한 북한 군인. 개성에서 나고 자랐다.
  • 개성댁
  • 서경덕

13. 대중매체에서의 개성시


복거일의 연속 세계관인 역사 속의 나그네와 파란 달 아래에서는 남북연방 하의 명목상의 수도(파란 달 아래)에서 2037년 진정한 통일 이후로 2078년 '현재'까지 '조선공화국'의 수도가 된다(역사 속의 나그네). 만수대 의사당과 진봉구 유릉동 등의 지명이 나온다.
징기스칸 4에서는 고려의 수도로 나온다. 이슬람 상인이 말을 찾아 주지 않으면 기병 생산이 불가능하며 일본과 중국의 공격을 받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공예소를 지어서 공예 수치를 100 이상 올리면 재정이 넉넉해지고 식량도 금으로 사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신비아파트 크리스마스 특별편 : 할머니의 소원, 북에서 온 밀동귀에서 만식이와 만두집 할머니의 고향이 개성이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14. 여담


원래 경기도 소속 도시였던지라 분단 이후에도 흔히 떠올리는 "북한 억양"이 그리 없는 지역이다. 개성 출신으로 2017년 판문점 귀순오청성 군이 방송에서 쓰는 말투를 보면 그냥 경기도 청년이다. 유튜브 링크 본인의 말에 의하면 워낙 서울말이랑 비슷해서 귀순후 딱히 말투 교정할 필요가 없었다고.[45]
북한이탈주민 강화도 경유 월북 사건 이후로 봉쇄 사실이 유일하게 대외 매체에 공개된 지역이다. 봉쇄가 장기화되자 북한 권력 2인자 최룡해가 급파되는 등, 개성시 내 생활고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이런 봉쇄는 드문 일은 아니며, 11월만 해도 북중 국경의 혜산, 라선, 자강도[46]가 봉쇄되고 남포, 평양까지 봉쇄된 적이 있다고 한다. # 특히 혜산은 중국 전파로 휴대전화를 이용한 연락이 가능하며 사람 모습까지 찍히는 지역이라 11월 1~2일부터 20일 동안 봉쇄해서 주민들이 아우성이였다는 소식을 복수의 매체에서 찾을 수 있다.
평창올림픽 기간 동안 통일부경기도, 서울특별시 그리고 강원도개성만월대 남북공동 평창특별전을 열었던 적이 있다.

15.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 구도 개성 유후사
  • 해풍군[47]

[1] https://www.iso.org/obp/ui/#iso:code:3166:KP[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원래 과거엔 장단군이 동쪽, 개풍군이 서남북쪽에 있었다. 허나 1960~70년대 장단군이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파주시, 연천군에 임시 편입되어 일단은 지금까지 개성시와 파주시가 맞붙은 형국이 되었다.[5] 918~919년[6] 1232~1270년[7] 1382~1383년, 1390~1391년. 참고로 우왕과 공양왕대 기간을 모두 합쳐도 1년이 채 안된다.[8] 송(松)이 소나무가 아니라, 고려의 수도로서 수도를 의미하는 서울(솔)의 음차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궁예의 수도 철원(鐵原, 쇠벌, 서라벌)도 마찬가지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9]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북악산이 342m, 북한산은 836m이다.[10] 남한에 남은 서울역~도라산역 구간을 제외한 경의선의 북한 구간을 평양역을 기점으로 반으로 나누어 북쪽을 평의선, 남쪽을 평부선으로 나눈 것이다. 평양역~부산역이라는 의미로 서울역을 지나가는 흔한 중간역 1로 치는 것이다. 한국에서 서울역을 기점으로 경의선/경부선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11] 1951년까지는 고등학교가 없었고 중학교 6년제였다.[12] 부산에도 같은 명칭을 가진 학교가 있다. 다만 이쪽은 부산상업고등학교가 인문계로 전환되면서 교명이 바뀐 학교이며, 한자가 다르다.(開城과 開成)[13] 1907년 개교하여 개성 최고(最古)의 초등학교다. 전원주도 이 곳 출신.[14] 다만 야구부로 유명한 개성고등학교는 이름과 달리 개성시에 있다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간 학교가 아니다. 애초에 유래한 이름 자체가 개성시와 아무 관련이 없다.[15] 말이나 행동이 얄밉도록 약사빠른 사람[16] 장학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이회림 창업주는 개성 출신이라는 인연을 앞세워 1975년 당시 시가 1억 원 상당의 주식을 송도중, 송도고에 헌납하며 학교 재단인 학교법인 송도학원의 이사를 맡았고 1982년에는 결국 학교재단을 통째로 인수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현재까지도 송도학원은 OCI가 운영하고 있다.[17] 조랭이떡은 눈사람 모양으로 생긴 떡인데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에 대한 증오심을 피력하려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가래떡의 목부분을 나무칼로 짓눌러서 눈사람과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내는데 이성계의 목을 졸라버리겠다는 뜻이라고 한다.[18] 평택역(서울역 기준 75km), 여주역(강남역 기준 71km)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19] 평택시 송탄, 이천시 부발읍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20] 하지만 역사적 위상과 장래 도시의 발전 가능성은 별 관계가 없다는 건 유념해야 한다.[21] 사실 이런 점에서 통일 후 더 기대가 되는 쪽은 평양이긴 하다. 부지도 넉넉하고 교통도 좋으며 이쪽 또한 역사적인 가치가 높고 무엇보다 개성보다 더 북쪽에 있어서 대중 외교 창구가 될 수 있기 때문.[22] 툭까놓고 서울도 백제조선의 1000년 도읍 치고 백제 쪽은 다 파괴되어 남은 문화재가 토성왕릉밖에 없고 조선의 경우도 궁궐과 종묘, 도성, 그리고 왕릉 정도 말고는 볼만한 역사 컨텐츠가 없는 편이다. 이는 조선의 전각들이 동시대 중국, 일본, 서양에 비해 소박하고 또 불교가 융성한 시대가 아닌지라 불교 관련 화려한 문화재가 전무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서울은 조선이 최근의 왕조인지라 경복궁, 창덕궁, 종묘 등 훌륭한 문화유산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지만 개성의 경우 고려가 오래된 왕조인지라 개성남대문이나 조선시대 때 향교의 지위를 유지한 개성 성균관 정도를 제외한 주요 전각들이 터만 남아있다. 무엇보다 고려 문화재의 정수인 만월대보제사가 터만 남아있고 고려왕릉도 오랜 전란으로 인한 수도 파괴로 인해 남한의 신라왕릉이나 조선왕릉보다 허접한 편이니... 또한 한성백제와 조선시대를 제외한 시기의 서울의 위상이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제외한 시기의 개성의 위상보다 높아서 고려시대 유적을 제외하면 개성의 유적은 전무하다. 이는 서울이 한반도의 중심인 한강을 끼고 있는 덕택이다. 예성강은 위상 측면에서 한강에 비할 바가 아니니...[23] 삼국통일인지는 이견이 많으나 적어도 한반도 통일을 이룩했음을 부인할 순 없다. 지금의 한만국경선을 기준으로 얘기한다면 고려와 조선 초도 통일왕조가 아니게 된다.[24] 현재 북한은 북부 중심 사관을 정립하고자 '통일신라'론을 부정하며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조선-북한의 적통을 주장하나 당장 지금도 수많은 서지자료들이 죄다 남한 소유라 그 고구려 타령에 비해 실제 연구성과는 보잘것 없다. 게다가 고조선-고구려와 발해-고려는 이어진다고 보기도 힘들다. 여기에 개성이 남한령이라 고고학적 성과마저 남한 몫이 된다면.... 연구 성과 떠나서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3대 통일 왕조의 도읍을 모두 확보한 남한의 정통성 우위는 말하면 입아팠을 것이다.[25] 김경진의 전쟁소설 데프콘에서는 통일한국이 수원과 개성에 수방사를 놓고 각각 경기 남북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언급이 있긴 하다.[26] 타 지역 북한 인민이 개성에 들어가려면 서류 5장을 기본으로 낸다고 한다.[27] 1인당 1200~1500달러 수준으로 추정[28] 사실 북한은 방역대책이 워낙 극단적이라 코로나19가 치명적인 영향을 줬을지도 의문인데, 극단적인 전제정치 폐쇄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국경을 아예 걸어 잠그고, 그냥 봉쇄를 한다고 한다. 진단키트 부족으로 급성폐렴, 결핵 등과 구분을 못해 확진자가 있는지를 모른다는 말도 있는데, 그 집을 잠근다고 한다. 외출 제한, 도내 이동 제한 보도도 있어 정말 막았을 수는 있다. 다만 현재까지 확진자가 있는 아파트를 모두 총살한다는 보도는 없으며, 설령 그렇게 한다면 집단 자살을 하던 2008년 화폐개혁 당시보다 더 말을 안듣는 주민들이 반발할 것이다.[29] 다만 북한 무역액이 2020년 전년 대비 4~5분의 1로 급감하여 아예 원료나 내다 팔 물건조차 못 구하고, 도 사이의 이동을 거의 막아 시장 운영도 어려워 힘들다는 말은 있다. 코로나로 인한 의료 붕괴보다 이쪽의 타격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국경 쪽은 코로나보다 시장을 운영하기 힘들어 굶어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는데, 이쪽은 어떤지 알기 어려우나 개성쪽은 방역조치가 느슨해도 중국의 물자를 들여오기 어려워 더 어려워졌을 가능성이 있다.[30] 북한이 잘나가던 시절의 흔적으로 상수도 요금이나 상수도 이용상에 제한이 없다.[31] 북한 조선중앙년감을 참고하여 연합뉴스가 매년 만드는 북한연감에 따르면 개풍군은 2016년판부터 사라졌다.# 하지만 연합뉴스 북한연감은 업데이트가 다소 늦는 경우도 있고, 오류도 간간이 보인다. 특히 2008년 유엔이 시행한 인구 센서스에서도 개풍군은 찾아볼 수 없다.[32] 한편 북한 언론에서는 이미 2003년을 기점으로 개풍군이 거의 자취를 감췄으며, 개풍군 산하였던 리들도 모두 개성시 소속으로 적었다. (3일째 되는 날인 21일 개성시 신흥, 령정, 해평, 풍덕, 룡산리를 비롯한 분계연선 리들의 주민들은 놀라운 자연현상을 목격하였다. - 2011년 12월 22일자 조선중앙통신)[33] 이 점에서 통일한국의 수도가 서울에서 이전 된다면 파주시철원군, 고양시보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에 버금가는 고려 500년 수도의 역사성, 인지도, 개성공단이나 개성관광 같은 남북협력 시도의 현장, 한때나마 남한 관할이었던 점 등.[34] 홍대입구<->문산 완행전철 55분, 역간거리 수준이 금촌~문산 수준인 점을 감안, 해당구간 수준으로 복선전철화를 완비할 경우 대략 15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와 역 갯수이다. 급행전철로는 50분대 초반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편도 한시간 반 정도면 서울도심 출퇴근은 가능하다. 다만 일부 전문직, 고위급 일자리들을 제외한 대다수가 희망하는 일반사무직은 워낙 강남으로 쏠려있어서 서울도심 접근이 의미가 있을 지는 모르겠다만.[35] 더구나 공사 진척에 있어서도 경부고속도로강릉선 KTX 수준의 최고 순위 예산 투입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36] 영종도에서 강화도를 지나 개성까지 서해남북평화도로가 지어질 예정이며, 같은 경로로 제2공항철도가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37] 남한에서 이 개성과 맞먹는 역사성을 가진 곳은 고대 백제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신라의 수도 경주시 정도뿐이다. 공주시부여군 등도 있지만 수도였던 기간이 합쳐봐야 185년밖에 안되기도 하고 통일왕조의 수도는 아니었다는 점 때문에 조금 밀린다.[38] 물론 멀쩡히 남한 땅에 있는 황룡사미륵사도 가만히 냅두는거 보면 복원을 미룰 가능성도 적지 않다.[39] 통일이 되면 대성리 대신 개성 (+ 그 주변의 황해도 지역)으로 MT를 가는 대학이 늘어날 듯하다.[40] 이건 역사성이 안 받혀줄지 몰라도 행정구역을 통합시키면 되는 동네니까 큰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서울특별시도 다른 동네였던 곳들(성저십리, 강남, 영등포)을 합쳐서 만든 거다. 지금와서 저 세 지역을 다른 동네 취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41] 물론 평양 역시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개발 1순위가 될테지만, 남한 자본의 투자 측면에서 평양은 개성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서울과 평양 간의 도로 실태 조사 및 확충내지는 재공사 등의 여부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42] 평양 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북한의 2번째 세계유산이다.[43] 1947년 말 호구조사[44] 실향민이다.[45] 개성 출신 탈북자가 말하길 개성 출신은 아나운서가 절대 될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개성 사람들이 남한 억양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평양출신 선생이 개성의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 선생과 학생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46] 아예 도 단위의 봉쇄가 있었다는 것이다.[47]개성특별시 개풍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