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홍익범'''
'''洪翼範'''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7년 3월 7일
함경남도 정평군 광덕면 용응리
<color=#fff> '''사망'''
1944년 12월 19일
서대문형무소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익범은 1897년 3월 7일 함경남도 정평군 광덕면 용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으로 상경하여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1925년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에 재학했다. 1926년 졸업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이승만과 교류하면서 시카고 동지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민족운동을 이끌었고, 1930년 오하이오 주 데니슨 대학을 졸업한 뒤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외교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1932년 11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1933년 10월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는 정치부 기자로서 1940년 8월 10일까지 재직하면서 정치, 외교와 관련된 여러 논설을 게재했다. 그러다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가 폐간된 뒤 경신학교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에드윈 웨이드 쿤스(Edwin Wade Koons) 북장로회 선교사와 의기투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에서 이승만이 국내에 보내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 내용을 입수했다. 그는 이 내용을 송진우, 김병로, 이인, 허헌 등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2년 5월 쿤스 선교사가 간첩 혐의로 추방된 뒤, 홍익범은 아동문학가로 경성 방송국에서 방송 원고를 쓴 적이 있던 송남헌과 접촉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경성 방송국에서 어린이 방송과 강연을 담당하는 양제현(楊濟賢)과 연결되었다. 양제현은 청취한 해외 단파방송 내용을 송남헌에게 건넸고, 송남헌은 다시 이를 홍익범에게 건네줌으로써, 정보 유통의 연계 고리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청취한 단파방송은 중국 중경방송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의 소리'를 통해 이승만이 내보내는 한국어 방송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해외에서 전달되는 소식을 통해 조국 광복이 머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비하고자 했다. 항일단파방송 사건 참조.
그러나 1943년 봄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동료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43년 11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4년 12월 19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홍익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