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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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獨立宣言書 | 기미독립선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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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1919년 3.1 운동
'''별칭'''
3.1 독립선언서
'''발표자'''
민족대표 33인
1. 개요
2. 내용
3. 문학적 특성
4. 전문
4.1. 현대어 풀이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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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한국(조선)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된 장문의 선언서.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라고도 한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1]는 구절로 널리 알려져있다.
민족대표 33인의 공동명의로 발표되었으며, 초안을 쓴 사람은 최남선,[2] 대원칙을 세운 사람은 손병희라고 한다.[3] 손병희가 독립선언서를 고쳐 쓰려고 했으나 시일이 얼마 안 남아 대원칙만 썼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단체에서 서로 자기 단체의 이름을 먼저 올리겠다고 격렬히 싸우자, 기독교계통으로 참여한 이승훈의 훈계로 결국 연장자이자 주최자인 손병희가 대표로 첫 번째로 실렸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주장으로 뒷부분에 '공약 3장'이 추가되었다.
당초에는 대중이 모일 탑골공원에서 발표하려고 했으나,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泰和館)이라고 하는 요릿집[4]으로 장소를 바꿔 조용히 선언식을 진행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은 선언문을 낭독한 즉시 일본제국 경찰에 자수하고 순순히 연행되었다. 그 덕분에 탑골공원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민족대표 33인의 선언식과는 별도로 선언식을 진행하고 만세운동을 개시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손병희 등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고,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사람도 많다. 당시 옥고를 치르는 것과 현재 교도소 생활하는 것은 처우가 천지 차이이기에 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적극적인 독립활동을 하지 않고 자수하는 어리석은 짓을 했으니 비겁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2. 내용


학교대사전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긴 독립선언서라고 한다. 사실관계는 불명.
선언서의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선언의 내용과 취지
  • 독립 선언의 배경, 일제로 인한 한민족의 고통
  • 독립의 정당성, 필요성
  • 시국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
  • 독립의 의의, 독립에 대한 결의
다른 선언문에 비해 기미독립선언서는 상당히 온건하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는 물론, 신채호조선혁명선언서와 비교하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선언문에는 무력을 이용해 투쟁하자는 내용은 눈씻고 봐도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정의라는 이름의 군대'와 '인도주의라는 이름의 무기'에 힘입어 독립을 주장할 뿐이며 '우리는 일본의 배신을 죄주거나 무도함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 잘못을 꾸짖을 겨를이 없다'는 등의 내용도 들어 있다. 일제 통치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부분도 일제에 합병되어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었다는 식의 애매모호한 글귀로 일관된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독립선언이라기보다는 일제 당국을 상대로 "지금 세계 추세가 독립이니까, 우리 조선도 독립시켜 달라. 결코 당신네 일본과 싸우거나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청원서에 가깝다. 이렇게 온건한 독립선언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국제사회와 관련이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해체로 자주독립 의지만 보이면 독립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람들이 바라던 것과 같은 식민지 독립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인 김산(1905~1938)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기미독립선언서와 3.1운동의 실패를 본 김산은 “조선은 어리석고 늙은 할머니처럼 평화와 자유를 구걸했으나, (세계 열강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말았다. 조선이 그렇게 외쳐댄 평화는 3.1운동이 피를 쏟으며 실패한 다음에야 왔다. 차라리 자유를 얻기 위해 모두가 싸우는 러시아가 조선보다 더 낫다!”라고 환멸감을 털어 놓기도 했다.[5] NLPDR 성향 사학자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를 지적한다.
더불어 민중의 관념과 동떨어진 선언 내용에 관해서도 비판이 제기된다. "식민지 노예로 전락한 민족의 입에서 무슨 한가하게 세계 문화 기여 운운이 나오느냐? 이건 마치 지하철역의 노숙자가 세계 평화를 지키자고 외치는 한심한 꼴이다."라는 식이다. 쉽게 말해 선언서를 쓴 최남선 등의 지식인들은 실제로 조선 민중들이 일상에서 겪던 차별과 박해 같은 고통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을 사람이라는 것. 3.1운동 당시 지방에 뿌려진 독립선언서들 중에는 기미독립선언서와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것들도 있다. 가령 3.1운동 당시 충무에 뿌려진 일명 '충무 독립 선언서'를 보면 아래의 내용이 언급된다.

패자, 약자, 떠돌이, 고향을 잃어버린 자, 조국에서 쫓겨난 자, 국경 없는 유랑군이 우리의 별명이요, 오대양 육대주 사람 사는 거리 거리 가는 곳마다 발구르는 소리요, 피눈물이었다. 엄청난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죄가 나라 없는 죄요, 뼈저린 설움이 나라 잃는 설움이어라. 벽옥같은 조국의 하늘, 기름진 이 강산을 두고 갈 곳이 으드메뇨? 제 어깨로 제 몸뚱이를 지지는 못할지니 형제여 금수로 살려하는가? 나라 없는 개가 되랴? 이 피맺힌 목청으로 조국의 서울에서 함성이 솟았다. 삼천 리는 전민족의 함성과 발등마다 핏물이 흐르는 세기의 행진곡이 시작되었다. 동포여, 대도의 거리로 나아오라! 봉사여, 귀먹이여, 입 있는 벙어리여, 굶주린 내 동지여! 삼천 리 내 땅 내 거리, 내 형제, 내 누이 저통히 죽은 혼들이여 모두 나오려무나!

이런 식의 직설적이고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내용들이 기미독립선언서의 난해하고 온건한 문체보다 민중들의 호응을 얻기에 더 적절했을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과 편집자 이광수는 3.1운동의 실패를 보면서 좌절하여 조선 독립의 희망을 버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최남선 본인은 1940년 중국 동북 지역(만주)을 방문해서 조선인 독립군들한테 "조선 독립은 불가능하니, 일제에 항복하라."는 글을 직접 썼고, 이광수는 일제의 침략적 제국주의에 열렬히 찬성하면서 조선인 청년들한테 일본군에 자원입대하라는 글을 연이어 썼다. 최남선 본인이 기미독립선언서에서 말한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다."라는 내용을 그 스스로 부정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미독립선언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정신적 자위에 불과했다고 냉혹하게 비평할 여지도 있다.

3. 문학적 특성


문장력은 매우 깔끔하고 수려한데 현대에 비해 한자어 및 한문투 표현이 많이 사용했다. 예를 들어 "이로써"는 "此로써", "얼마이뇨"는 "幾何ㅣ뇨"라고 하는 등 실질형태소는 거의 다 한자어로 표현했고, 恒久如一(항구여일)[6], 壓縮銷殘(압축소잔)[7], 土昧人遇(토매인우)[8] 등 사자성어나 오늘날에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가 무더기로 나온다. 한문에 익숙했을 당대 지식인에게는 그리 어려운 문체가 아니었겠지만, 문맹률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당시에는 다수 민중에게는 이해하기 훨씬 까다로웠을 것이다.[9] 오늘날에도 그다지 읽기 쉬운 문장은 아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에게는 온건함과 더불어 민중에게 어필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4. 전문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천하) 何物(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저지) 抑制(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유사) 以來(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지 今(금)에 十年(십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전)의 障礙(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세계) 文化(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기여) 補裨(보비)할 奇緣(기연)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소잔)을 興奮(흥분) 伸張(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產(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최대) 急務(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과 時代良心(시대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10]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아) 祖宗世業(조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ᄲᅮᆫ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犖(탁락)한 民族心理(민족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辯(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ᄲᅮᆫ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覉縻(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한 政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과 統計(통계) 數字上(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심조)하는 今來(금래) 實積(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ᄯᅩ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ᄲᅮᆫ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동양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全局(동양전국)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야금 正當(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야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恐怖(불안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것이며, ᄯᅩ 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어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래)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이 世界(세계)에 來(래)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란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차) 一時(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부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오인)은 아모 躕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락)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로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羣象(만휘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어도다. 千百世(천백세) 祖靈(조령)이 吾等(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ᄯᅡ름인뎌.
 公約三章(공약삼장)
一(일)、今日(금일) 吾人(오인) 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료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一(일)、最後(최후)의 一人(일인)ᄭᅡ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ᄭᅡ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一(일)、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야금 어대ᄭᅡ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조선건국)4252年(년)3月(월)1日(일)

4.1. 현대어 풀이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딸 아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 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공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의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물리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인 4억만 지나#s-3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11]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지나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 되어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공약 3장
1.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1.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1.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12]을 세운 지 4252년 3월 1일

5. 기타


고등학교 국어책에 높은 확률로 실려 있다. 또 3.1 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자료라서 한국사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한 번쯤은 살펴 보게 되어 있다. 실제로 이게 지문으로 나왔는데 뭔지 몰라서 6.10 만세 운동하고 헷갈린 경우도 있다 카더라(...)
딸깍발이로 유명한 이희승이 한글화한 바가 있다.
보성고 내의 인쇄소인 보성사[13]에서 인쇄하였다. 여담으로 민족대표 33인손병희, 최린[14], 이종일 등등 상당수의 인물들이 보성고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야사에 따르면 보성사와 인쇄물을 보관해 둘 임시 창고 사이에 경찰서가 있어 발각될 뻔했는데, 인쇄물들을 이송하던 날 갑자기 일대 부근이 정전되었고, 그 틈을 타 관련자들이 새벽에 수레로 몰래 날랐다고 한다.
영문학자들과 학원 원장의 지적에 따르면, 영문번역이 '''아주 엉망진창'''이라고 한다.연합뉴스 링크 참고 그런데 경향신문 취재 결과 이 영역본은 1919년 당시 3.1 운동에 참여했던 대한국민회 소속 미주 한인 동포가 번역했다고 밝혀졌다.기사
2018년 3.1절 99주년 기념식에서 낭독한 기미독립선언서의 번역문은 나무위키에서 번역된 내용과 사뭇 차이가 있다.
그날이 오면[15]에서 밝혀진 것이나, 조선 부분이 선조로 거꾸로 찍혀있는 판본이 있다고 한다.
2019년 5월 28일 일본 나가사키현의 전직 교사 사토 마사오(佐藤正夫·67)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평양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 원본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조선일보), (매일경제), (연합뉴스), (YTN) 이 판본에도 선조로 되어있다고.
2020년 삼일절 기념식에서 6개 국어로 낭독되었다.#

[1]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2] 이 사람은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다.[3] 그런데 정작 손병희 본인은 경찰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나는 한일합병에 대하여 별로 찬성이라든가 불찬성도 하지 않았다."라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 과연 조선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 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출처: 손병희에 대한 경성지법 조서, 4월 10일자.[4] 당대 가장 유명한 기생집 명월관의 분점. 자세한 것은 요릿집 문서의 태화관 부분 참고.[5] 출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6] 오래도록 변함이 없음[7] 눌리어 쪼그라들고, 힘없이 사그라짐[8] 미개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대우함[9] 1920년대 조선의 문맹률은 전체 인구의 무려 80%에 달했으며, 1945년에도 조선인 문맹률은 78%나 되는 등 일제 강점기 때의 문맹률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전체 조선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다 읽고 그 내용과 뜻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심지어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한국 국민들을 상대로 한글 보급과 의무 교육을 도입하여 문맹률을 낮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음에도 1950년대 한국에서는 서울 전체의 3분의 1이 문맹이었고 농촌에서는 무려 전체 인구의 절반이 문맹이었다.[10] 여기서 나온 병자수호조규는 강화도 조약을 말하는 것이다.[11] 이 부분을 두고 최남선이 당시 시대적 정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12] 당연하지만 고조선이다[13] 현 종로구 수송공원 자리. 보성고고려대의 설립자인 이용익 선생이 세운 인쇄소이다.[14] 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15] 2019년 KBS 1TV에서 방영된 3.1절 특집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