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거 레이 레너드
1. 개요
'''"Sugar" Ray Charles Leonard'''
"'''슈거" 레이 찰스 레너드 '''
아마추어 전적 150전 145승 5패, 프로 전적 40전 36승 1무 3패. 5개 체급 석권. 키 175.3cm[1]
양발을 앞뒤로 흔들며 춤을 추는 듯한 경쾌한 스텝,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풍차 회전 후 상대에게 날리는 오른손 훅, 그리고 때릴 테면 때려보라는 식으로 상체를 내밀고 상대의 펀치를 유도하는 심리전까지. 이 세 가지를 모두 겸비했던 전설의 복서로,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는 선수이다.
레너드는 순발력이 뛰어났고 양손을 모두 잘 사용했다. 특히 '현란한 풋워크'는 따라갈 선수가 드물었다. 또한 영리한 데다 기회 포착에도 능해 승부처에서의 폭발력도 대단했다. 쇼맨십도 갖추고 있었고, 경기마다 상식을 뛰어넘는 운동 능력까지 펼쳐 보이며 팬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단순히 쇼맨십만 있는 선수라 여기면 곤란하다.
아마 시절 전적이 150전 145승 5패, 프로 전적은 40전 36승 1무 3패였다. 프로 5개 체급에서 타이틀을 획득했고, 현역 시절 프로 챔피언들이 꼽은 최고의 복싱 챔피언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무하마드 알리가 2위에 그쳤을 정도니, 레너드의 당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2. 선수 생활
2.1. 어린 시절
레너드는 1956년 5월 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레이 찰스 레너드다. 슈거 레이 레너드라는 이름은 후에 레너드가 자신이 존경하던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의 이름을 쓰면서 생겨났다. 로빈슨의 이름을 쓰면서 '슈거'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데, 이것은 그의 아내가 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흑인 복서들이 겪는 필연적인 환경일지 모르지만, 그의 어린 시절도 불우했다. 가난한 빈민가에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는 빈민가의 흑인들이 성공할 길은 갱이 되거나 운동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맨주먹뿐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당시 엄청난 풀을 가졌던 미국 아마추어 복싱계에서 상대들을 연파하며 군계일학의 경기력을 보였고, 약관의 나이에 올림픽 대표가 되기에 이른다.
3. 화려한 복싱 커리어의 시작
3.1. 몬트리올 올림픽,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금메달
레너드는 이미 20살 이전에 아마추어 라이트웰터급을 제패한 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같은 체급 금메달을 따냈다. 몬트리올 올림픽은 그의 아마추어 마지막 대회였다.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올림픽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다. 아무리 레너드라도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라이트웰터급은 당시 쿠바의 슈퍼스타이자 'KO 아티스트'라 불리던 안드레스 알다마가 우승할 것이라는 전문가의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레너드는 이런 주위의 시선에도 조금의 동요 없이 차분히 경기를 풀어갔다. 한 라운드, 한 라운드 침착하게 상대의 허점을 노리던 레너드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펀치를 폭발하며 알다마를 5-0 심판 전원 일치 판정으로 꺾었다.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로 아마추어 시절 정점을 찍은 그는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그의 선택은 프로 진출이 아닌 대학 진학이었다.
3.2. 경기력과 스타성을 갖춘 최고의 스타
몬트리올 올림픽을 통해 레너드는 검증된 복서로 거듭났다. 빼어난 경기력을 기본으로 스타성과 상업성까지 갖춘 그를 향한 프로모터들의 적극적인 구애가 끊이지 않았다. '레너드를 링에 올리기만 해도 대박'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안들을 거절하고 결국 메릴랜드 주립대에 입학했다. 혹자들은 대학 진학을 대전료와 몸값을 올리려는 레너드의 '베팅'으로 보기도 했다. 결과론적으로 레너드가 경제적 어려움과 아버지의 병환을 이유로 은퇴 번복 후 1977년 2월 프로에 데뷔했으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금방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천재적인 복서가 프로 무대에 데뷔한다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의 첫 대전료가 4만 달러(약 4155만 원)로 당시 신기록이었으며, 신인 선수의 데뷔전을 CBS가 전국에 생방송 했다. 그의 인기와 지명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프로 데뷔전 승리 이후 레너드는 승승장구하며 무려 25연승을 달렸다. 1979년 마침내 세계 챔피언에 오를 기회를 잡게 되는데, 상대는 천재 복서로 알려진 윌프레드 베니테스였다. 대표적인 기교파 복서였던 두 선수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섰고, 결국 체력이 달린 베니테스를 레너드가 마지막 15회에 눕히고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그의 프로 통산 전적은 40전 36승(25KO) 3패 1무승부. 링 위에서 그는 넘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복싱 천재'였다.
프로 데뷔 2년 만에 챔피언에 오르면서 레너드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복싱 영웅이 된다. 그 외에 마빈 헤글러, 토마스 헌즈, 로베르트 두란 등이 미들급과 웰터급에서 전성기를 누렸는데, 레너드까지 포함해 이들 4명을 1980년대 복싱 황금기를 이끌었던 4대 복싱 영웅으로 꼽는다. 비슷한 체급의 선수들이다 보니 서로 경기를 치른 적이 많았다. 이들의 대결은 당시 복싱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명승부로 회자된다. 이 중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은 경기가 바로 파나마의 복싱 영웅 두란과 경기다.
3.3. VS 로베르토 두란
1980년 6월 레너드는 캐나다 퀘벡에서 라이트급에서 체급을 올린 두란과 방어전을 치른다. 대부분의 전문가가 6-4 정도로 레너드의 우세를 점쳤지만, 레너드의 완패. 지금 경기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드시, 레너드는 치고 빠지며 도망다니다, 두란의 돌주먹에 걸려 상당히 고전했다. 레너드의 껴안기와 빠른 스텝이 없었다면 일치감치 레너드의 KO패가 될뻔한 경기였다. (다만 영화를 보면, 두란이 레너드를 자극해서 레너드가 흥분한 상태로 경기에 임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절치부심한 레너드는 같은 해 11월에 열린 두란과 2차전에서 빠른 풋워크로 두란을 농락하며 8회 TKO승을 거둔다.
하지만 이 경기는 레너드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두란이 경기 중 갑자기 등을 돌리며 시합을 포기해 의혹을 남겼다. 두란 자신은 갑작스러운 위경련으로 경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고 후에 밝혔다. 이 경기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있었는데, 두란이 생리 현상을 호소했다고 하는 이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은 레너드가 라이벌전에 걸맞지 않은 상대를 자극하는 쇼맨십을 계속해 두란이 짜증이 나서 그만두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6월에 경기를 치르고, 5개월만에 다시 재경기를 치르는 강행군. "hands of stone" 영화상에서는 두란이 쉬고 있었는데, 매니저가 돈 때문에 같은 해에 또 재경기를 잡은 것으로 두란의 준비 부족이었다고 나오기도 한다.)
3.4. VS 토마스 헌즈
듀란과 방어전에 승리한 레너드는 1981년 10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숙명의 라이벌 토마스 헌즈와 웰터급 통합전을 가진다. 지금까지 열렸던 수많은 라이벌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최고로 꼽는 시합이다. 레너드의 우세를 점친 미국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헌즈의 우세를 점친 전문가들이 많았다. 레너드의 기술보다 헌즈의 공격력이 워낙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레너드는 시합 전 왼쪽 눈 부상이 있었고, 헌즈의 잽을 계속 허용하는 바람에 중반전 이후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악조건 속에서 경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레너드는 조금씩 경기 분위기를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면서 초반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마침내 14회 헌즈를 눕혀 버렸다. 헌즈는 프로 데뷔 후 첫 패배를 당했고, 그것도 실신 상태의 KO패라 더욱 충격이 컸다. 이 경기에 승리하며 레너드는 헌즈와 양분한 웰터급을 통합하게 된다. 스타성 역시 폭등했다. 참고로 89년에 재대결을 펼치는데, 내용상 헌즈의 완전한 승리였지만, 무승부 판정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3.5. VS 마빈 해글러
'''The Super Fight'''
1982년 들어 프로모터들은 레너드와 마빈 해글러의 일전을 준비한다. 둘의 대결은 성사만으로도 관심을 끌었고 프로모터들에게는 떼돈을 안겨줄 회심의 카드였다. 해글러와 레너드 역시 목돈을 만질 기회로 생각한다.
그러나 레너드는 그해 11월 두 번째 은퇴 선언을 한다. 이제 이룰 것은 다 이뤘고, 눈 부상도 심각하며 가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등 이유가 골고루 나왔지만, 실상은 헤글러와 시합에서 그에게 돌아갈 대전료가 마음에 안 들고, 이길 가능성이 낮아서 은퇴를 했다는 소문이 설득력을 얻었다. 진실이 어떻든 그는 이번의 은퇴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안티팬들이 늘었고, 끊임없이 가십 소식으로 작아졌다.
우여곡절 끝에 레너드는 1983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경기력으로 자신이 최강자라는 것을 입증하겠다며 다시 링으로 돌아왔다. 실상은 당시 해글러 체육관에 첩자를 심어 1년 동안 추적관찰을 했었는데, 그 자료를 바탕으로 원래도 나이가 많던 해글러가 스피드가 더 느려졌다는 것을 파악하고 복귀했다는 의견이 많다.
그리고 1986년 4월 6일 마침내 모두가 바라던 '슈퍼파이트' 레너드와 해글러의 경기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야외 특설 링에서 시작됐다. 1만5336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아, 입장 수익만 790만 달러(약 82억원)였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75개국에 동시 생중계가 됐던 경기였다. 전문가들은 헤글러의 절대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경기 분위기는 달랐다. 레너드는 자신을 괴롭힌 두란과의 경기처럼 아웃복싱 스타일로 치고 불리하면 클린칭하는 전법으로 해글러의 러시를 막아냈다. 경기 내내 링 주위를 돌며 아웃복싱을 펼치는 레너드를 해글러가 쫓아다니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 해글러는 묵직한 정타를, 레너드는 많은 펀치를 상대방에게 날렸다는 분석이 있었고, 최종 판정은 레너드의 승리였다. 하지만 레너드의 지루한 경기 운영에 해글러와 해글러의 팬들, 그리고 화끈한 경기를 고대했던 수많은 시청자의 엄청난 비난이 이어졌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어 메이웨더vs파퀴아오로 비슷한 양상의 역사적 경기를 세계인들은 또 보고 만다.
이 일전 후 해글러는 깨끗하게 은퇴를 선언해버렸다라고 세간에 알려져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해글러는 판정에 크게 불만을 표하며, 반복해서 재대결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레너드는 재대결을 계속 거부했다. 해글러와의 대전은 링사이즈나 글러브 무게, 라운드 수에서 WBC 표준이 아닌 아웃복서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행해졌는데, 재대결에서는 해글러가 불리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을테니 이길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도 해글러가 계속 재대결을 요구하자 레너드는 얼마 뒤 아예 재은퇴를 해버린다. 레너드가 은퇴한 후에도 해글러는 1년 넘게 재대결을 요구하지만 레너드는 두문불출하며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해글러는 이런 더러운 수작이 복싱이냐며 분노하고 은퇴를 선언, 이전부터 계속 러브콜이 오던 B급 영화계에 입문해 이탈리아로 촬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며칠 뒤 레너드는 귀신 같이 은퇴를 번복하고 링에 복귀한다.
결론적으로, 세기의 기량과 쇼맨쉽으로 권투 역사상 최고의 인기 선수 중 하나였지만, 헌즈나 해글러 같은 동급 선수들과 생긴 문제로 오점을 남긴 것은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