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3세
- 생몰년: 720년 ~ 772년 2월 1일
- 재위기간: 768년 8월 7일 ~ 772년 2월 1일
어렵게 교황이 된 스테파노 3세였지만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768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 카를루스와 카를로망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다. 결국 프랑크 왕국은 둘로 쪼개졌고, 롬바르드 왕국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로마를 지켜주던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자 교황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처음에는 두 형제를 어떻게든 중재해보고자 노력했으나 가볍게 무시당했고, 이에 롬바르드족의 데시데리우스 왕에게 중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중재는 스테파노 3세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롬바르득족과 프랑크 왕국이 혼인으로 동맹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뜩이나 전임 교황 때부터 동로마 제국과 롬바르드 왕국의 간섭에 신경 끌 날이 없던 로마는 믿었던 프랑크 왕국마저 롬바르드 족과 붙어먹자 패닉에 빠졌다. 스테파노 3세는 피핀 3세의 맹세를 상기시켜 카를루스와 카를로망을 회유해 봤지만 가볍게 무시당했다.
이런 대외적 여건 속에서 동로마 제국에 강경하게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문제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했다. 무기력한 교황은 자신을 교황이 되도록 만들어준 크리스토포로와 그의 아들 세르지오에게 더욱 의지했다. 하지만 롬바르드족의 왕 데시데리우스는 과거 자신의 도움으로 권력을 얻었고도 자신이 내세운 교황 후보 필립보를 축출한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 부자에게 앙금이 있었고, 로마를 자신의 세력하에 두기 원했기에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비롯한 로마 교회 전반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두어 공작했다. 마침내 771년 데시데리우스는 로마를 침공하여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1] 를 축출하고, 심복이었던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로마 교회의 요직에 앉혔다.
이후 교황은 데시데리우스의 간섭에 저항해 보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다. 오히려 파울루스 아피아르타가 로마 교회에 휘두르는 힘만 커질 뿐이었다. 이듬해인 772년 초 스테파노 3세가 중병에 걸리자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는 로마 교회의 권력을 장악해 유력한 귀족과 성직자들을 내쫓고, 1월 24일에는 소경이 되어 라테라노 궁전의 독방에 수감된 세르지오를 교살해 후한을 없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롬바르드 왕국과 프랑크 왕국간의 동맹이 깨져서 롬바르드 족을 다시금 견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카를로망이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이 데시데리우스에게 자신을 도와서 카를로망의 유산을 유지하도록 해주길 부탁했고, 이에 격분한 카롤루스가 프랑크 왕국 전체를 장악하고 롬바르드 왕국과 대립했다.
재위 내내 외환에 시달리던 스테파노 3세는 772년 2월 1일에 사망하였으며, 유해는 바티칸에 안장되었다.
[1] 이때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안구를 적출했다. 결국 크리스토포로는 후유증으로 3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