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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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중턱에 위치한 사자의 문.[4]
싱할라어 සීගිරිය
타밀어 சிகிரி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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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중부의 정글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높이 약 180m 정도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위에 만든 요새와 그 일대. 시기리야(Sigiriya 또는 Sinhagiri)는 사자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자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싱가포르의 Singapura와 유사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455년부터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다투세나 왕에게는 장남 카샤파와 차남 목갈라나라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그런데 장남인 카샤파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차남 목갈라나의 어머니는 왕가의 출신이었다. 이는 카샤파가 장남이긴 하지만 왕위를 상속받기에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결국 473년에 카샤파는 다투세나의 조카이자, 군대의 지휘관인 미가라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인 다투세나를 투옥시킨 후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샤파 1세가 되었다. 왕이 된 카샤파 1세에게 미가라는 다투세나가 숨겨둔 보물에 관한 얘기를 하였고 카샤파 1세는 투옥한 다투세나에게 그 보물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투세나가 보여준 보물이라는 것은 카샤파 1세의 기대와 달리 그가 재임 중일 때 만들었던 관개 시설용 저수지였다. 이에 화가 난 카샤파 1세는 아버지를 죽이고 말았다.
아버지를 죽인 일 때문에 카샤파 1세의 평판은 스리랑카 전역에서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쿠데타 때 동생 목갈라나가 인도로 도망쳤는데 왕권의 정통성을 가진 동생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 한 카샤파 1세는 477년,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시기리야로 옮겨 거주하게 된다.
시기리야 일대는 이미 기원전 3세기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특히 불교 승려들의 거주지였다. 그렇지만 카샤파 1세 이후 시기리야 일대는 왕의 도시이자 요새로 변모하게 되었다. 바위 정상에는 궁전과 부속 건물들, 바위를 파서 만든 거대한 수조가 만들어졌으며 중턱에 위치한 작은 평지에는 사자의 문이라 불리는 관문, 바위를 깎아 만든 거대한 벽에는 프레스코화와 낙서들, 그리고 지상에는 정원과 해자, 성벽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기리야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약 20년 후인 495년, 인도에서 세력을 키운 목갈라나가 돌아오면서 동생과의 전투에서 패한 카샤파 1세가 스스로 자결하고 만 것이다. 이후 왕이 된 목갈라나는 이곳을 원래 수도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승려들에게 다시 돌려줬고 시기리야는 1831년 영국인 조나단 포브스(Jonathan Forbes)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될때 까지 잊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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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중턱 평지 지대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길이 140미터 높이 40미터에 달하는, 거울의 벽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갤러리가 있는데 현재 이 곳에는 위와 같은 프레스코화가 약 20여점이 남아있다. 여기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 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쓰고 간 낙서들도 남아 있는데 낙서들의 내용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는 최대 500여점 이상의 그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낙서라고는 하지만 싱할라어로 쓰여진 오래 전의 시 같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 곳의 낙서들 중 8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쓰여진 낙서 685개를 해독해보니 이런 내용도 있다고 한다.
"나는 부달입니다. 시기리야를 보러 수 백명의 사람들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시(낙서)를 썼기 때문에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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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중턱에 위치한 사자의 문.[4]
싱할라어 සීගිරිය
타밀어 சிகிரி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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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리랑카 중부의 정글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높이 약 180m 정도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위에 만든 요새와 그 일대. 시기리야(Sigiriya 또는 Sinhagiri)는 사자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자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싱가포르의 Singapura와 유사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2. 역사
455년부터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다투세나 왕에게는 장남 카샤파와 차남 목갈라나라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그런데 장남인 카샤파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차남 목갈라나의 어머니는 왕가의 출신이었다. 이는 카샤파가 장남이긴 하지만 왕위를 상속받기에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결국 473년에 카샤파는 다투세나의 조카이자, 군대의 지휘관인 미가라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인 다투세나를 투옥시킨 후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샤파 1세가 되었다. 왕이 된 카샤파 1세에게 미가라는 다투세나가 숨겨둔 보물에 관한 얘기를 하였고 카샤파 1세는 투옥한 다투세나에게 그 보물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투세나가 보여준 보물이라는 것은 카샤파 1세의 기대와 달리 그가 재임 중일 때 만들었던 관개 시설용 저수지였다. 이에 화가 난 카샤파 1세는 아버지를 죽이고 말았다.
아버지를 죽인 일 때문에 카샤파 1세의 평판은 스리랑카 전역에서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쿠데타 때 동생 목갈라나가 인도로 도망쳤는데 왕권의 정통성을 가진 동생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 한 카샤파 1세는 477년,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시기리야로 옮겨 거주하게 된다.
시기리야 일대는 이미 기원전 3세기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특히 불교 승려들의 거주지였다. 그렇지만 카샤파 1세 이후 시기리야 일대는 왕의 도시이자 요새로 변모하게 되었다. 바위 정상에는 궁전과 부속 건물들, 바위를 파서 만든 거대한 수조가 만들어졌으며 중턱에 위치한 작은 평지에는 사자의 문이라 불리는 관문, 바위를 깎아 만든 거대한 벽에는 프레스코화와 낙서들, 그리고 지상에는 정원과 해자, 성벽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기리야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약 20년 후인 495년, 인도에서 세력을 키운 목갈라나가 돌아오면서 동생과의 전투에서 패한 카샤파 1세가 스스로 자결하고 만 것이다. 이후 왕이 된 목갈라나는 이곳을 원래 수도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승려들에게 다시 돌려줬고 시기리야는 1831년 영국인 조나단 포브스(Jonathan Forbes)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될때 까지 잊혀지게 된다.
3. 프레스코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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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중턱 평지 지대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길이 140미터 높이 40미터에 달하는, 거울의 벽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갤러리가 있는데 현재 이 곳에는 위와 같은 프레스코화가 약 20여점이 남아있다. 여기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 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쓰고 간 낙서들도 남아 있는데 낙서들의 내용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는 최대 500여점 이상의 그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낙서라고는 하지만 싱할라어로 쓰여진 오래 전의 시 같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 곳의 낙서들 중 8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쓰여진 낙서 685개를 해독해보니 이런 내용도 있다고 한다.
"나는 부달입니다. 시기리야를 보러 수 백명의 사람들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시(낙서)를 썼기 때문에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