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누라다푸라 왕국

 

'''아누라다푸라 왕국'''
'''අනුරාධපුර රාජධානිය'''

''Anurādhapura Rājadhāniya''싱할라어
அனுராதபுர இராச்சியம்타밀어
B.C.E. 377년 ~ C.E. 1017년
수도
아누라다푸라
언어
싱할라어
종교
상좌부 불교
종족
싱할라인


1. 개요
2. 상세
3. 멸망


1. 개요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고대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시에 세워진 왕국으로 오늘날의 싱할라인의 기원이 되는 왕조이자,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를 보급한 왕조이기도 하다. 벵골 일대에서 스리랑카 섬으로 이주한 인도유럽어족 부족들을 중심으로 기원전 337년 창건되었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성군 아소카를 모방하여 관료제를 정비하고 무역과 관개 농업에 힘썼으며, 이를 통해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남인도 촐라 왕조타밀족과의 전쟁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서기 1017년 멸망하였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스리랑카의 고전기 그 자체이며, 유럽인의 도래로 근세가 시작되기 전까지 스리랑카의 역사는 전아누라다푸라기(Pre-Anuradhapura period, 탐바판니 등), 아누라다푸라 초기(377 BCE–463 CE), 아누라다푸라 중기(모리야 왕조 시대, 463–691), 아누라다푸라 후기(후고전기, 람바칸나 제2왕조 시대, 691–1017), 그리고 중세(1017–1521)로 나뉜다.

2. 상세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최초의 위자야 왕조(477 BCE–237 BCE, 215 BCE–205 BCE, 161 BCE–103 BCE, 89 BCE–66 CE) 이래 여러 번 왕조가 바뀌며 존속하였는데, 기원전 3세기 타밀족 족장 세나(Sena)와 구티카(Guttika)의 침공으로 위자야 왕조의 국왕 수라티사(Suratissa)가 살해당하고 기원전 237년부터 기원전 215년까지 아누라다푸라가 타밀 지배 하에 놓인 이래, 남인도 타밀인의 침공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고 일부는 성공하였다. 기원전 3세기 말에도 촐라 왕국의 침공으로 44년간의 촐라 지배기를 겪었고[1], 기원전 103년부터 기원전 88년까지의 15년간은 풀라하타(Pulahatta)를 시작으로 '다섯 드라비다인'으로 불리는 판디아 왕국의 타밀계 토후 다섯 명이 아누라다푸라를 지배하였다.
기원후 1세기 오백 년간 불안정하게 지속된 위자야 왕조가 끝나고 람바칸나 제1왕조(Lambakanna I, 66–436)가 시작되었으나, 타밀인의 침공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5세기 중반에는 마침내 판디아의 타밀계 침공군이 람바칸나 제1왕조를 멸망시키고 '여섯 드라비다인'으로 불리는 판디아의 타밀계 토후 여섯 명이 아누라다푸라를 지배(436–463)하였다. 이후 다투세나(Dhatusena) 왕이 타밀인을 물리치고 모리야 왕조(Moriya, 463–691)를 열었고, 모리야 왕조는 7세기 말에 람바칸나 제2왕조(691–1017)로 교체되었다. 10세기 말 마힌다 5세(Mahinda V, 재위 982–1017)가 통치하던 말기에는 람바칸나 제2왕조의 지배가 3세기를 걸쳐 지속되며 여러 폐단이 누적되어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고, 정부는 세금도 제대로 걷을 수 없었다. 신민들도 빈곤하였고, 심지어 병사의 급료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병사들이 명령 이행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3. 멸망


타밀계 촐라 제국의 라자라자 1세(Rajaraja I, 재위 985–1014)는 아누라다푸라의 상황을 관찰하다가 993년 원정으로 스리랑카 북부를 점령하였다. 북중부의 수도 아누라다푸라 역시 이때 타밀군이 점령하고 약탈하였으며, 타밀군은 북동부의 폴론나루와(Poḷonnaruwa)를 지방 거점으로 하여 스리랑카 통치를 시작하였다. 마힌다 5세는 남동부의 루후나(Ruhuna, Rohana) 지역으로 일단 도피하였다. 그러나 촐라 제국의 스리랑카 남부 원정은 계속되었으며, 결국 라자라자 1세의 아들 라젠드라 1세(Rajendra I, 재위 1014–1044)가 1017년까지 스리랑카 전토를 정복하였다. 마힌다 5세는 1017년에 촐라의 포로가 되어 인도로 끌려갔다가 1029년에 인도에서 죽었다. 이전에도 타밀계 영주가 스리랑카를 점령하여 아누라다푸라의 국왕이 된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촐라 제국의 군주가 직접 스리랑카를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원정을 왔으므로 상황이 달랐다. 아누라다푸라의 국가 체제는 해체되고, 스리랑카는 일시적으로 촐라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으며 이로서 스리랑카의 고대사는 일단락되었다.


[1] 이때 아누라다푸라 왕으로 군림한 타밀인 엘라라(Eḷāra, 타밀어로는 엘랄란Ellalan)는 타밀인으로는 예외적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왕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스리랑카 신민들 일부의 지지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