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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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 Chapin이 그린 시카고 대화재의 그림.
19세기 최악의 피해를 끼친 재해 중 하나인 시카고 화재는 1871년 10월 8일에 시작되었다.[1] 원인은 알 수 없다. 캐서린 올리어리라는 이주민의 암소[2]가 헛간의 등불을 걷어찬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이는 당시 신문기자가 꾸며낸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였다.[3] 여러 가지 다른 설도 있지만 현재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설은 없다.
당시 화재는 수평화재였다. 한 곳에 불이 나면 가연성 물질로 지어진 다른 건축물에 순식간에 옮겨붙었다. 화재가 나기 직전 한 주에만도 20건의 화재를 다루었던 시카고 시 소방 당국은 화재신고가 들어왔을 때 신속히 대응하지 못했고, 소방관들이 도착했을 때는 많은 수의 목조 주택과 농장이 불길에 휩싸인데다가 강한 바람이 불길을 걷잡을 수 없이 퍼뜨리고 있었다. 목조 건물, 도시에 쌓여 있는 많은 양의 재목, 나무로 된 보도가 불길이 타오르는 데 일조했다. 하필이면 당시 시카고에서 축산 엑스포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축사들 사이사이에는 나무 보도블럭과 톱밥을 섞은 흙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기까지 했다.
소방국은 비교적 폭이 넓은 시카고 강을 마지노선으로 삼아 진화에 나섰지만, 불길은 '''시카고 강을 건너''' 상수도 시설을 파괴했고,[4] 따라서 소방관은 더욱 애를 먹었다. 10월 9일 월요일 이른 오전에는 중앙 상업 지구가 황폐해지고, 은행들도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지하의 은행 금고들은 불길로부터 버텨냈지만 며칠 동안 문조차 열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문을 열자마자 외부 공기와 접촉하면 과열된 금고 안에서 자연발화가 일어나 내용물이 모조리 타버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 새로 지은 오페라 하우스와 법원 건물도 불탔다. 카운티 홀(군청)의 종탑은 오전까지 버텼으나 그 날 오후 결국 지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지역에서만 수천 명이 불길을 피해 피난을 가야 했다.
결과적으로 화재는 시카고 시의 건물 3분의 1 가량을 전소시키고 10만 명을 이재민으로 만들었으며 300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소위 '불타버린 지역'은 길이 6.4㎞에 너비 1.2㎞에 이르렀으며, 8㎢ 넓이에 34개의 블록, 45㎞ 길이의 도로, 190㎞ 길이의 보도, 2천 개의 가로등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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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으로 표시된 곳이 전소된 구역, 인접지역은 피해를 입은 지역을 나타낸다. 사실상 시카고 구 시가지가 몽땅 불탔다...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뒤, 즉시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세기 후반 시카고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5년 후에는 도시 어느 곳에서도 화재로 인한 피해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이 화재를 계기로 시카고에는 목조 건축 대신 강철과 석조를 이용한 건축들이 대세를 이루었고, 19세기 말~20세기에 빠르게 발전하는 건축 기술이 반영되어 시카고에는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마천루의 밀집도가 대단해져서 이후 시카고는 미국 마천루 건축의 박물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1937년, 이 사건을 주제로 타이론 파워가 주연한 '''인 올드 시카고'''라는 영화가 있다.

[1] 공교롭게도 같은 날 위스콘신 주의 '페시티고'라는 도시 근처 숲에서도 초대형 산불이 발생해 최소 15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발생시키며 산불 희생자수 역대 1위에 남아있다.[2]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The Great Disasters"에서는 "미국 역사상 제일 유명한 소"라고 평했다.[3] 어느정도 증거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이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당시 올리어리 부인의 집에서 일하던 잡역부(문맹이라서 이름을 X라고 서명했다)가 법원에서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했기 때문. 그러나 정황증거상 증언이 실제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현대 사학자들에게는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중이다.[4] 불길이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로 일어나면 화재폭풍이 일어나는데, 이 불의 회오리는 불똥을 마구 사방에 흩뜨린다. 대형 산불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 시카고 도심에서 벌어진 것. 실제 증언에 의하면 베개만한 불덩이가 시카고 강을 건너서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