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목왕후

 

神穆王后
(655? ~ 700)
1. 개요
2. 내용


1. 개요


신라 신문왕계비이자 효소왕성덕왕 형제의 어머니.

2. 내용


서기 681년, 문무왕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하자 왕의 장인이었던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태자 시절 혼인했던 왕비를 폐출시킨다. 그리고 2년 뒤 683년에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던 김흠운의 딸과 재혼하니 이가 곧 신목왕후다. 즉, 신문왕과 신목왕후의 혼인은 고종 사촌끼리의 근친혼인데 이는 신문왕이 무열왕계의 결속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아버지가 이미 전사한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외척의 개입을 차단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기로 하고, 우선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 남자 집에서 혼인을 하고자 예를 갖추어 청하면 여자 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백3십5수레였으며, 벼가 1백5십 수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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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이찬 문영과 개원(愷元)을 김흠운의 집에 보내 책봉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大常)ㆍ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ㆍ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梁)과 사량(沙梁) 두 부(部)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도록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의 곁에서 시종하는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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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문왕과 신목왕후의 혼례는 삼국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식으로 거행된 최초의 왕실 혼례로서, 유교적 이념의 확산을 통해 왕권강화를 추구하려는 중대 왕실의 정치적 목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692년 신문왕이 사망하자 효소왕이 6세의 나이로 즉위했고 신목왕후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 태후로서 섭정했을 것이라 추정된다.[1] 효소왕과 황복사 석탑을 조성했는데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명에 따르면 태후는 700년(효소왕 9) 6월 1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 참고로 이때 중국에서는 그 유명한 측천무후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신라와 당나라 모두 여성 통치자가 다스리는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였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