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시호
신문왕(神文王)
성씨
김(金)

정명(政明) / 명지(明之)(?)

일소(日怊)
왕후
폐비 김씨(廢妃 金氏),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
왕태자
김이홍(金理洪)
왕자
김융기(金隆基), [1]
부왕
문무왕
모후
자의왕후(慈儀王后) 김씨
생몰연도
음력
? ~ 692년 7월 2일[2]
재위기간
음력
681년 7월 22일 ~ 692년 7월 2일 (11년)
1. 개요
2. 생애
3. 개혁
3.1. 국학 설치
3.2. 지방 행정과 군제 정비
3.3. 관료전의 지급과 녹읍 폐지
3.4. 달구벌(대구) 천도 시도
3.5. 대당 관계
3.6. 일본과의 관계
3.7. 최후
4. 평가
5. 삼국사기 기록
6. 오늘날의 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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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31대 임금. 삼국통일이 완수된지 5년 후인 681년에 즉위하여 11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왕권을 전제화시키고 통일신라의 중앙·지방 제도, 군사 제도, 교육 제도를 정비하여 통일신라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다.
자는 일소(日怊).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의 장남이었다.[3] 내물왕 때부터 계산하면 내물왕의 10대손. 참고로 신문왕 즉위 후 100년 후에나 즉위하는 제37대 선덕왕도 내물왕의 10대손이라 한다. 이는 선덕왕의 족보가 부정확하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고 가족별로 대손 차가 크다는 이야기가 되겠다.[4]
문무왕이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 바깥으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오랜 전란 과정 속에서 전쟁 영웅, 공신 세력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졌고 외교도 불안정했으며 옛 고구려계와 백제계 유민들은 아직 신라의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지도 않은 상태에 국토는 삼국통일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신문왕은 그가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잘 알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해 통일신라라는 나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즉, 조선태종고려광종처럼 냉혹한 숙청으로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에 열을 올린 철혈 군주.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이 오랜 난세를 끝내고 통일신라라는 한반도 왕조의 형태를 갖춘 창업군주형에 가까웠다면[5] 신문왕은 수성형 군주의 전형. 특히 수성형 군주의 모범 답안을 온몸으로 보여준 임금이다.[6]
전체적으로 보면 통일 신라가 이룩한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명군이지만 통일 전쟁기의 전쟁 공신들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숙청한 귀족과 관련된 왕비까지 폐출시켰던 무시무시한 임금이기도 하다.[7][8] 신라 내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가졌던 고구려 유민들까지 신문왕이 즉위 초에 가차없이 숙청해 버렸다. 그만큼 신라 역대 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임금.
그런데 재위 기간은 11년 정도로 한 나라의 주요 임금으로 꼽을 수 있는 행적치고는 별로 길지 않다. 그럼에도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긴 임금이라 각급 한국사 시험에서 신라 중대를 물을 때 90% 확률로 선정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대입 준비나 공무원 시험 등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수험생들은 신문왕의 업적을 필수적으로 알아둬야 한다.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삼국통일전쟁은 다들 잘 아는 편이라 임팩트에 비해 변별력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후의 경덕왕이나 성덕왕교과서 수준으로 단독 출제하기에는 업적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이한 시험에서 신라 중대를 묻는다면 안심하고 신문왕 관련 내용을 찍으면 되는데 각종 임용 시험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같은 경우에는 예외이다.
삼국사기 신문왕조를 보면 신문왕의 휘(諱)와 자(字)를 소개하는 첫 부분의 원문이 神文王立諱 政明明之字日怊라고 되어 있다. 이 원문을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에서는 "신문왕이 즉위하니 휘는 정명이고 정명의 자는 일소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와는 달리 원문의 '명지자일(明之字日)' 부분을 "(휘를) 명지(明之)라고도 하는데 자(字)는 일소(日怊)이다"로 해석해서 '명지(明之)'도 신문왕의 또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의 해당 부분 각주에서 해석에 대해 '명지'를 문맥상 휘로 보기 어렵다고 적혀 있지만 대부분의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김명지' 역시 신문왕의 휘로 적어두고 있기에 본 문서에서는 둘 다 표기한다. 신문왕은 역대 신라 국왕은 물론 한국의 모든 임금 중에서 기록상 최초로 가 확인되는 인물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를 가진 인물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기록상으로는 신문왕이 최초.[9]

2. 생애


태어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681년에 승하한 문무왕이 56세였고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남이라는 점을 볼 때 즉위 시점에 대략 30대 중반으로 추정한다면 640년대 중반인 선덕여왕 치세(632년~647년)쯤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 보면 백제 멸망 때는 10대 중반이었고 고구려 멸망~나당전쟁 때는 20대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문무왕이 태자 시절에 전쟁터에 자주 나섰던 것과 달리 신문왕은 665년 8월 태자에 책봉된 것 외에는 즉위 전까지 활약상이 없다. 기록이 부실해서 행적이 안 남아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치가 아닌 전쟁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거나 아버지 문무왕이 굳이 전쟁터에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10] 즉위 이전에는 청년기에 상당히 시끄러운 시대를 살았음에도 신문왕의 이름으로 기록된 사건은 거의 없다.
아버지 문무왕의 장례를 마친지 1개월 뒤인 681년 8월 신문왕은 삼국통일전쟁 때 김유신 지휘하에서 종군해 많은 군공을 세우며 군부의 실력자가 된 김군관상대등에서 해임한 뒤 병부령으로 강등시켰고 대신 각간 진복을 상대등에 임명한다.[11] 김군관은 백제와 고구려 공격은 물론 나당전쟁 때도 종군한 백전의 노장이었는데 그를 이렇게 강등시킨 것은 삼국통일전쟁을 통해 비대해진 무관 진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그 달에 바로 장인 김흠돌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김흠돌 역시 김군관처럼 삼국통일전쟁에 상당한 전공을 세웠으며 자신의 을 당시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으나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김흠돌을 견제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김흠돌이 모반 사건을 일으키자 진압군으로 김흠돌의 반군을 제압하였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상대등을 비롯한 상당한 수의 귀족들을 숙청하였다. 원래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버지의 모반죄에 함께 엮어 폐출시키고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새 왕비로 맞이했는데 신문왕의 후계자효소왕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 신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개원, 삼광, 문영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개원은 태종 무열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숙부, 삼광은 김유신의 아들, 문영은 황산벌 전투의 선봉장이었던 김유신의 심복 출신이었다. 김흠운은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자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수이고 납비의 절차에 참가한 이들이 하나같이 왕권과 밀착된 인물이었던만큼 새 왕비를 맞이하는 절차 자체가 전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2] 김흠돌의 모반에 대해서도 여러 이설이 엇갈리고 있다.[13] 며칠 뒤 김흠돌의 난을 완전히 진압한 신문왕은 앞서 병부령으로 강등했던 김군관 역시 처형시켜 버렸다. 죄목은 김흠돌의 모반을 알면서도 이를 고하지 않았다는 것. 다만 반역에 연루되었음에도 김군관의 혈족을 멸족시키지는 않았고 김군관의 아들 1명만 자결시키는 정도로 끝냈다.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이 정치판의 유혈사태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런 숙청극을 통해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무소불위의 강력한 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이후 신문왕은 반포한 교서에서 역적 무리의 높은 벼슬이 자신의 능력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은전(恩典)(능력과 무관한 신분 서열을 통한 것)임을 강조했는데 추진한 여러 정책과도 일맥상통하듯 귀족 신분보다는 능력을 더 우선시하겠다는 인사의 방향을 천명한 것이다.
신문왕은 681년 10월에 왕을 경호하는 부서인 시위부의 장 위에 6인의 장군직을 더 설치했는데 이 조치만 봐도 왕권을 강화하려는 신문왕의 의도가 드러난다. 지금까지가 부왕 문무왕이 사망한 즉위 원년 가을 한철에 다 있었던 일이다. 684년에는 고구려인 자치 국가였던 보덕국을 없애기도 했다. 기록상으로는 보덕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벌하면서 없앤 거기는 하지만 신문왕은 이미 서라벌 귀족들도 잔혹하게 숙청한 사람이라 애초에 보덕국도 신문왕의 숙청 리스트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3. 개혁



3.1. 국학 설치


이러한 숙청을 바탕으로 전제 왕권 확립을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단행하였다. 우선 682년 국학을 확립해서 국학의 경(卿) 1인을 설치한다. 본래 국학은 진덕여왕 재위기인 651년에 설치되었지만 이때는 아직 국학이 좀 미비된 상태였고 신문왕이 경을 설치하면서 국학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3.2. 지방 행정과 군제 정비


683년에는 보덕국안승을 소판(蘇判)[14]으로 삼고 김씨 성을 하사했으며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황금서당(黃衿誓幢)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흑금서당(黑衿誓幢)을 설치한다. 이로써 통일 신라의 '9서당(誓幢)' 중 6서당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684년에는 보덕국에 사는 고구려 유민들의 대대적 저항이 일어났는데, 안승의 조카인 대문이 금마저(金馬猪, 현재의 익산)에서 거병하려다가 실패해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보덕국인들이 관리들을 죽이고 거병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신문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을 보냈고 토벌군도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이 난을 진압했다. 이 때 바로 1년 전 만들어진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 황금서당도 파견되었는데 아이러니한 건 보덕국인들도 고구려계고 황금서당도 고구려계라, 동족상잔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역사 속에는 비슷한 사례가 많았는데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투항한 항왜들은 조선인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맞싸워 김충선처럼 큰 공을 세우기도 했고, 이후 항왜들이 다수 참가한 반란 이괄의 난을 같은 항왜인 김충선이 토벌하는 항왜간의 동족상잔이 일어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미국에 살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오히려 일본군과 더 용맹하게 싸웠던 것처럼 황금서당 소속 고구려인들은 의심받기 쉬운 출신을 극복하고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동포들과 처절하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이 때 황금서당의 지휘관 중 하나인 김영윤이 전사한다. 이 김영윤은 반굴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손자다. 신문왕은 진압 후 보덕국 유민들을 남쪽의 주나 군현으로 옮겼고 금마저는 이때 이르러 금마군으로 행정단위에 편입되었다.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하였으며 이 해에 지방 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했다. 신라의 9주는 일선주, 삽량주, 한산주, 수악주, 하슬라주, 소부리주, 완산주, 청주, 발라주를 가리키는데, 685년에 설치된 것은 완산주로 신문왕 대에 9주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5소경은 이전에 북원경, 금관경, 중원경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해에 설치된 것은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으로 이렇게 신라의 지방 통치 체제가 완성되었다.
686년에는 예작부(궁궐, 관청 보수 담당 부서)의 장관직을 개편했고 이 해에도 여러 지방 행정 체제를 개편했다. 오늘날의 충청도 지역에 새로운 현을 설치하거나 군과 현을 승격하거나 단위를 내리는 작업을 했으며 이 해에 보덕국 유민들로 이루어진 적금서당과 벽금서당을 만들어 8서당을 완비한다.
690년에는 남해안 도서 지역에 군을 설치하고 개지극당(皆知戟幢)과 삼변수당(三邊守幢)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한다. 개지극당은 '극병'을 중심으로 한 부대이고 삼변수당은 한산주(지금의 경기)나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시, 강원도 일대) 등의 북방을 지키는 부대였다.

3.3. 관료전의 지급과 녹읍 폐지


687년에는 종묘의 시초격인 5묘제를 설치하여서 태종 무열왕계의 전제 왕권을 확립시켰다. 5묘에는 태조대왕(성한왕,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음[15]) - 진지대왕(진지왕) - 문흥대왕(김용춘) - 태종대왕(태종 무열왕) - 문무대왕(문무왕)을 모셨다. 또한 이 해에 문무 관료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차등 있게 내려준다. 이른바 '관료전(官僚田)'을 분급한 것인데 이것은 실제 정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에게 일정한 보수를 지급한 조치라는 데 의의가 있는 조치이다. 즉 골품보다는 후천적인 '직분'을 중시하여 진골 귀족의 기득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는 아직 미흡했다.
결국 689년에 폭탄 조치를 취하는데 바로 녹읍(祿邑)을 폐지한 것. 본래 신라에서 진골 귀족들은 녹읍을 지급받았고 6두품과 그 이하들은 '축년사조'라고 해서 일종의 월급처럼 한 해 혹은 한 달을 기준으로 국가에서 일정량의 곡물이나 토지를 제공받았었는데, 신문왕은 이 해에 녹읍을 폐지하고 진골이든 6두품 이하를 막론하고 전부 축년사조로 돌려 버렸다.[16] 녹읍이 진골 귀족의 세력 기반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신문왕의 조치는 진골들의 경제 기반에 타격을 입혀 진골도 6두품과 같은 행정 관료층으로 편입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70년 뒤 경덕왕이 녹읍을 부활시킬 때까지 진골들은 6두품 이하들처럼 축년사조를 받아가며 생활해 간다.

3.4. 달구벌(대구) 천도 시도


녹읍을 폐지한 그 해, 신문왕은 장산성(경산)에 행차해 거동했고 도읍을 달구벌(지금의 대구)로 옮기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삼국사기 '악지'를 보면 이 해 신문왕이 신촌(新村)에 거동해 잔치를 열고 악인들에게 신라 음악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 '신촌'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해 이곳은 대구 천도 시도와 관련된 지명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17]
신문왕이 경주를 떠나 대구 천도를 시도했던 이유는 불분명하나, 이 역시 신문왕의 왕권 강화 시도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본래 신라의 수도 경주는 진골 귀족의 세력이 막대했던만큼 이곳을 벗어나 천도하여 새 수도로 가면 대부분의 귀족들은 연고지를 떠나 권력이 약화되고 강력한 왕권 아래의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대구인가?'에 대한 이유는 통일 수도로서 경주의 입지 자체가 너무 구석에 위치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신라 영역, 즉 진한, 변한 권역[18]양주#s-6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국가 중심부에 가까운 지역이 대구이기 때문에 경주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곳으로 천도를 계획했다는 의견이 많다. 경주 분지보다 대구 분지가 넓으므로 도시 개발이나 식량 생산에서도 좀 더 유리하고[19] 지정학적으로 살펴보면 교통 역시 동해 바다와 육로로만 이어지는 경주보다는 낙동강금호강의 수운을 이용해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대구가 편리한데, 철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전 근대 시대는 육로보다 수운이 대량 수송에 훨씬 효율적이고 속도도 빨랐으며, 그 중에서도 경주의 바닷길과 대구의 강길을 비교하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여러 번 제기됐던 문제지만 아무리 연안 항해를 한다고 해도 풍랑이 이는 바닷길보다는 언제나 잔잔한 강길이 항해하기가 훨씬 쉽고 안전했다. 신라 시대에도 고려나 조선 시대처럼 강물길을 통해 수도로 물자를 수송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20] 후대의 방식을 참고한다면, 조선 시대에는 경상도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낙동강 수로를 통해 상주로 옮기고 거기서 육로로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의 가흥창으로 옮기고, 거기서 다시 배편으로 남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운송했다. 낙동강과 남한강의 상류가 가깝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는데, 만약 수도 위치가 대구라면 역순으로 적용하면 수도가 중부 지방 한강변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교통이 편리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3.5. 대당 관계


당나라와는 아버지 문무왕 대에 있었던 나당전쟁 이후 오랫동안 형식적인 조공조차 보내지 않으면서 교류가 없는 사실상 단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21]
단교 상태가 지속되던 중 686년 신문왕은 당나라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해 유교 경전인 "예기"와 문장을 요청하면서 당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이에 당시 당의 실권자 측천무후가 여러 유교적 예법과 모범으로 삼을만한 유교 경전 글을 정리해 50권의 책으로 만들어 신라에 보내주었다. 이는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실질적인 첫 교섭인데 예기 전체를 그대로 보내주지 않고 일부만 발췌해서 보내 준 것은 아직 나당 관계가 미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692년 봄, 당나라에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에 대해 시비를 걸고 묘호(廟號)를 쓰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신문왕은 답사를 보내 정중하게 이를 거절했다. 답사의 요지는 무열왕 역시 덕이 있고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큰데 묘호는 원래 폐하 같은 용어처럼 천자국 전용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조선도 모든 왕에 태조, 문종, 고종 등등 묘호를 올렸지만 전부 일단은 중국 몰래 올린 것이다. 그런데 신라는 태종 묘호를 취소할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당나라에 통지해 관철시켰으니, 신라 역시 당군을 나당전쟁으로 싸워서 격퇴한 후 자신감이 붙어 당에 대해서 당당한 외교적 자세를 유지했고 자국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22]
이후 신라와 당의 관계 개선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효소왕조공이 재개되고 성덕왕 때에 가서 완전한 국교 회복이 이루어졌다.

3.6. 일본과의 관계


당나라와 서먹서먹했던 반면 후방의 일본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신을 많이 주고받았으며 이는 삼국사기일본서기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신라는 열심히 싸웠던 당나라와 아직 사이가 좋지 못한 만큼 후방에 있는 일본의 도움이나,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도록 일본과의 사이를 개선해놓을 필요가 있었으며, 일본 역시 원래 친밀했던 백제가 패망한 지 오래인 이상 신라와 계속 적대할 수만은 없었다. 일본은 아직 견당사를 본격적으로 파견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불교 등 선진문물을 전파 받으려 했고 신라는 지식인 승려들을 일본에 보내주기도 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89년(신문왕 9년) 4월에 “신라가 김도나 등을 보내어 영진인왕(瀛眞人王)의 죽음을 조문하고, 아울러 학문승(學問僧) 명총(明聰)과 관지(觀知) 등을 보내어 별도로 금동아미타상·금동관세음보살상·대세지보살상 각 1구와 채백금릉(綵帛錦綾)을 바쳤다.”고 한다.

3.7. 최후


692년 7월 2일에 승하했다. 삼국사기에는 그냥 692년 7월에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신문왕 사후 그의 추도를 위해 건립된 황복사 3층 석탑의 '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신문왕이 7월 2일에 승하했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 문무왕과 아들 효소왕의 나이로 유추해 보면 짧게는 30대 후반에서 많아봐야 40대의 꽤 젊은 보령에 붕어(崩御)한 것으로 추측된다.
신문왕이 승하했을 때 원자 이홍(효소왕)의 나이는 아직 6세, 둘째 융기(성덕왕)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였다. 비록 젊은 왕비 신목왕후가 살아 있긴 했지만 어린 후계자를 남긴 채 붕어했으니 근심과 걱정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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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은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데, 경주시울산광역시를 잇는 7번 국도 바로 옆에 있고 신문왕릉 정류장에 서는 경주시 시내버스도 대단히 많아서 접근성이 매우 좋은 편이다. 이전 시대의 신라왕릉보다 좀 더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해진 것이 보인다. 다만 2017년 발굴 조사 결과 효성왕의 가묘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4. 평가


11년이라는 비교적 꽤 짧은 재위 기간을 보냈음에도 강력한 임팩트를 남긴 임금으로 숙청을 기반으로 한 왕권 강화책이나 행정제도의 정비라는 업적을 보면 뒷날 고려광종이나 조선태종과 비슷한 유형을 지닌 수성형 군주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성격이 크게 바뀐 통일 신라를 이전의 신라와 사실상 별개로 볼 경우 2번째 ~ 3번째이므로 후대의 광종, 태종과 더욱 유사해지는 부분. 전제 왕권을 강화했다는 점이나 쉬지 않고 일했다는 점, 네임밸류에 비해 결국 오래 재위하지 못했다는 점 등 청나라옹정제와도 이미지가 비슷한 임금이다.
유명한 전설 속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왕권 강화책을 펼친 영향으로 만파식적 설화가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관한 것은 만파식적 항목을 참고할 것. 또한 설총으로부터 <화왕계> 이야기를 듣는 왕도 신문왕으로 이것은 유학자였던 설총이 화왕계를 통해 신문왕에게 바라는 군주상을 제시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삼국통일 이후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여 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는 신라의 최전성기를 연 철혈 명군으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제도 정비를 통해 통일 신라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는 한편 문화 면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긴 만큼 오늘날 국사 교육 과정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임금이다.
위의 행적을 보면 길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굵직굵직한 치적(治績)을 해마다 남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쉬지 않고 일했던 워커홀릭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 어쩌면 비교적 이른 붕어의 원인은 과로였을 가능성도 높다.[23]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문왕 본기
一年秋七月 신문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진복을 상대등으로 제수하다
一年秋八月八日 김흠돌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죽임을 당하다
一年秋八月十三日 보덕국의 왕이 축하 사신을 보내다
一年秋八月十六日 왕이 소집한 군대를 돌려보내라는 교서를 내리다
一年秋八月二十八日 왕이 이찬 군관을 죽이라는 교서를 내리다
一年冬十月 시위감을 없애고 장군을 두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면하다
二年夏四月 위화부령에 두 사람을 배치하다
二年夏五月 태백성이 달을 범하다
二年夏六月 국학을 세우다
二年夏六月 공장부감과 채전감을 두다[24]
三年春二月 순지를 중시로 삼다
三年春二月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맞기 위해 납채하다
三年夏四月 여름에 눈이 내리다
三年夏五月七日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하다
三年冬十月 보덕국안승을 소판으로 삼다
三年 혜성이 나타나다
四年冬十月 유성이 떨어지다
四年冬十一月 대문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다
五年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다
五年 청주를 설치하고 복세를 총관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서원소경을 설치하다
五年春三月 남원소경을 설치하다
五年春三月 봉성사가 완성되다
五年夏四月 망덕사가 완성되다
六年春一月 대장을 중시로 삼다
六年春一月 예작부에 경을 두다
六年春二月 석산현·마산현·고산현·사평현을 설치하다
六年春二月 사비주를 군으로 하다
六年春二月 웅천군을 주로 하다
六年春二月 발라주를 군으로 하다
六年春二月 무진군을 주로 하다
六年 당에 《예기》와 문장에 관한 책을 요청하여 받다
七年春二月 원자가 태어나다
七年春三月 사벌주를 설치하고 관장을 총관으로 삼다
七年夏四月 음성서의 수장을 경으로 고치다
七年夏四月 조묘에서 치제를 올리다
七年夏五月 관료에게 전지를 하사하다
七年 사벌주와 삽량주에 성을 쌓다
八年春一月 대장이 죽다
八年春一月 원사를 중시로 삼다
八年春二月 선부에 경을 더하다
九年春一月 녹읍을 폐지하다
九年秋閏九月二十六日 서원경성을 쌓다
九年 달구벌로 천도하려 하다
十年春二月 선원을 중시로 삼다
十年冬十月 전야산군을 설치하다
十一年春三月一日 왕자 이홍을 태자로 삼다
十一年春三月十三日 사면하다
十一年 사화주에서 흰 참새를 바치다
十二年 남원성을 쌓다
十二年 대나무가 시들다
十二年 당 중종이 태종의 묘호를 고치라는 조칙을 전하다
十二年 태종 묘호를 못 고치겠다고 답하다
十二年秋七月 신문왕이 죽다
신문왕부터 삼국사기 8권이 시작된다.

6. 오늘날의 신문왕


대중적으로는 삼국 통일의 주역들인 할아버지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에 비해 덜 유명한 편이고 대중 매체에서도 다뤄진 적이 없다.[25] 한 일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걸 보면 투명라인일지도?
2012년 KBS 사극 대왕의 꿈에서 무열왕과 문무왕을 넘어 신문왕 치세까지 다루려 했으나 조기종영 크리로 무산되었다. 후반에 나온 아역은 조용진이 맡았다.
말장난으로 신문왕에 대해 강의하다가 News Paper King 이라고 하는 역사선생들이 드물게 보인다. 물론 그 신문新聞이고, 이 신문왕은 神文이다. 의자왕과 비슷한 사례.
여담으로 진짜로 신문왕(News paper King)이 별명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다.
[1] 이 둘은 모두 성덕왕의 동생으로 서술되어 있기는 한데, 둘 모두 하정사로 갈 때만 등장해서 왕제라는 표현이 정말 친동생인지 단순히 왕족을 이르는 수사인지는 다소 불명확하다.[2]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기록[3]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차남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소명태자라는 장자가 있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 신문왕이 태자에 올랐다고 기록된다. 화랑세기는 위서론이 다수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4] 참고로 선덕왕이 부계로는 신문왕과 같은 항렬이지만 모계로는 신문왕의 증손자인 혜공왕과 사촌이 된다(...). 실제 나이는 혜공왕의 아버지 경덕왕과 비슷하지만.[5] 발해는 아직 건국되지 않은 시점이다.[6] 고려 광종과 조선 태종의 대선배.[7] 기나긴 전란 끝에 평화가 찾아오면 평화의 시대에는 필요가 없는 그동안 쌓여온 군인과 공신의 처리가 문제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전국시대를 통일한 뒤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몽골 제국여몽연합군의 대마도 침공남송 잔당군을 10만명 단위로 보내서 잉여 전력을 소모했다. 신문왕, 한고제, 홍무제, 광종 등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처리한 것. 물론 송나라처럼 좋게 지낸 케이스도 있었다.[8]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이때는 아직 나당전쟁 중인 시기인데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매소성 전투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군이 이긴 것은 안동도호부로 대표되는 당나라의 동북방 군대들이고 당나라의 주력 부대들은 이 시기에 관중에서 토번과 싸우고 있었다. 이때 시기적으로 강성해진 토번이 서역과 관중 일대를 위협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했던 부대들을 일부 돌려서 관중 일대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의 시기는 후대 성덕왕 시기에 가서야 당나라와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고 패강 이남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라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신라가 이미 영역화하고 있었기에 당나라의 인정 유무가 상관은 없지만 명목상이나마 인정한 것은 옛 백제 지역과 평양 이남 지역을 공격하지 않겠다라는 약속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만주에 발해가 건국되면서 당나라가 육지로 올 가능성이 없어진 상황과 발해를 견제하려는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신라로서는 진정한 종전 선언과 같다고 할 수 있다.[9] 신문왕의 숙부인 김인문도 '인수(仁壽)'라는 자를 썼다. 이로 미루어보면 정황상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도 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10] 그럴 수도 있는게 신문왕은 형제가 많았던 문무왕과는 달리 형제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만 신문왕의 형제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오는데 정황상 왕족이라는 구색을 맞추려고 그런 것 같고 실제 문무왕의 자식은 신문왕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치면 왕의 유일한 자식이자 차기 왕위 계승권자를 위험한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는게 당연하다.[11] 진복도 삼국통일전쟁에서 활약한 장군이다.[12] 여기서 묘한 것은 위서로 판단되는 <화랑세기>에서 김흠돌이 김유신의 조카이자 김유신의 딸 김진광의 남편으로 나온다.[13] 김군관과 김흠돌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김군관이 강등되자 위기 의식을 느꼈으며 딸이 신문왕의 비였지만 소생이 없었던 것도 그의 위기 의식을 부채질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김흠돌은 어차피 왕의 장인이었던만큼 굳이 모반을 꾀할 정도로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으며 오히려 이 사건은 신문왕이나 그 수하가 조작한 친위 쿠데타였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로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다는 해석이 통설이다.[14] 소판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셋째 등급 잡찬의 다른 이름. 참고로 신라의 관직 체계상 진골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므로 외지인인 고구려 왕가 출신 안승을 진골 골품으로 대우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토착 신라 왕가 이외에 외부 출신 세력을 진골급으로 대우한 것이 기록으로 남은 것은 금관국 가야계 신김씨, 고구려계 안승, 발해 왕가 셋 뿐이다.[15] 대체로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나 김세한으로 추측된다고 한다.[16] 神文王九年 春正月 下敎 罷內外官祿邑 逐年賜租有差 以爲恒式 이 기록대로 녹읍을 폐지하고, 매해 직위에 따라서 조세를 주었다는 것은 조선시대 관수관급제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데, 약 700~800년 이전에 이러한 고도의 제도<조선의 관수관급은 관료들에게 지급한 기존의 수조권 토지에서 관료가 직접 받는 것을 막고, 관청에서 수급받아 관료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중앙과 지방행정체제가 고도로 정비된 15~16세기에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인데, 행정제도가 약간의 붕괴가 시작면서 바로 사라진다.>가 시행되었는지 많은 의문이 들면서 2년 전에 지급한 관료전과 연계되어서 생각해 보면 기존의 녹읍으로 지급한 토지를 관료전으로 바꾸고, 이를 각 지방의 관청에서 조세로 받으면, 수급량에 따라서 중앙관청에서 수도에 거주하는 관리에게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17] 다만 이 신촌이 삼국사기 지리지를 참조해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이라고 보아서, 삼국통일 직후의 지방 안정이 목적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다만 본기에서는 689년에 신문왕은 장산성(경산시)에 행차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서해안에 있는 보령까지 갔다왔다는 기록이 없어서 이름만 같은 다른 신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8] 여기에 추가적으로 신라 투항 후 왕족인 진골로 대접받고 문무왕의 모친이자 신문왕의 조모인 문명왕후부터 모계 혈통으로 실제 신라 왕실에 혈통으로도 합쳐진 옛 금관가야 지역도 이 양주에 포함된다.[19] 고구려 역시 비슷한 이유로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바 있다.[20] 충주상주시는 신라 때도 매우 중요한 도시로 취급되었는데, 삼국사기 진흥왕 18년, 19년(557년 ~ 558년) 지금의 광역시 비슷한 지역 중심 도시격인 소경을 설치하고 서라벌의 귀족과 부유한 백성을 이주시켜 신도시를 만들었는데, 이게 고구려에게서 이 땅을 551년에 빼앗은 지 겨우 6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충주 지역이 무엇 때문에 요충지인지 생각해본다면, 신라 때도 한강 - 낙동강 수운을 활발히 이용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21] 당나라에 사신 보낸 횟수를 세어보면 무열왕 때 6회, 문무왕 때 14회, 신문왕 때 1회, 효소왕 때 1회다. 나당전쟁의 후유증으로 거의 교류가 끊긴 상태.[22] 이 당시에는 묘호를 피휘하는것을 신라측에서 거부하였지만 성덕왕 때에는 당 황제와 휘가 같아서 이름을 바꿔달라는 요구는 들어주게 된다.[23] 일리가 있는게 왕권이 강할수록 왕 자신이 직접 손볼 일이 많아진다. 거기에 신문왕은 신라의 제도를 정비까지 하는 걸 맡았으니... 실제로 청나라옹정제도 막강해진 왕권 때문에 수많은 일을 직접 처리하다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다만 신라 왕실에 만연하던 근친혼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리고 후대 왕들은 대부분 신문왕보다도 훨씬 명이 짧았다. 물론 이건 자기네들끼리 왕 자리 놓고 권력 투쟁하다가 서로 칼로 죽인 탓.[24]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는 문무왕릉비를 재위 2년차였던 682년 7월 25일에 세웠다.[25] 하지만 의외로 콘텐츠화 하기 좋은 인물이다. 일단 한국 사극에서 선호하는 강력한 왕권의 소유자에다 각종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개혁군주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