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
'''융기대왕께서'''
'''수(壽)가 산하(山河)와 같이 길고,'''
'''위(位)가 알천과 같이 크길 바랍니다.'''
'''천명의 자손(千子)들은 구족(具足)하며,'''
'''칠보의 상서로움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隆基大王'''
'''壽共山河同久,'''
'''位與軋川等大.'''
'''千子具足,'''
'''七寶呈祥.'''
성덕왕 재위 5년에 바치는 기도문.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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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33대 임금. 문무왕이 삼국시대의 난세를 끝냄으로써 평화의 시대를 열고 신문왕이 내부를 다져 판을 깔아놓은 8세기 초반에 오랫동안 재위하면서[5] 통일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
제31대 신문왕의 둘째아들이자 제32대 효소왕의 동복아우로 친형 효소왕이 1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국인(國人, 나라 사람들)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태어난 해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효소왕이 16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한 것, 어머니 신목왕후의 사망년도를 감안하면 성덕왕 역시 10대의 소년기에 즉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재위 기간이 길기는 했지만 수명은 길지는 않았는데 40대 후반에 사망했다. 신라 상대의 전성기를 열었던 진흥왕과 비슷한 부분이다. 이름은 본래 김융기(金隆基)였으나 동시대 당나라 황제였던 당현종 이융기(李隆基)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피휘하여 김흥광으로 고쳤다.
그의 첫 왕비는 김원태의 딸 성정왕후(成貞王后)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716년 궁에서 쫒겨났다. 이후 성덕왕은 김순원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6] 를 새 왕비로 맞이했다. 장남 김중경은 성정왕후 소생이고 차남 효성왕과 삼남 경덕왕은 소덕왕후 소생이다. 선덕왕의 어머니 사소부인(四炤夫人)은 성덕왕의 딸인데 누구 소생인지 기록에 나오지 않지만 시기상 성정왕후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에는 왕권이 강화되어 집사부의 중시[7] 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화백회의 의장이었던 상대등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2. 생애
어린 나이로 즉위한 초기에는 효소왕처럼 섭정할 모후가 있는 것도 아니라 즉위에 기여한 국인 무리인 공신 세력에 벼슬을 내리고 척신 김원태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705년 오대산 진여원 개창, 706년 황복사 금동사리함 조성 등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711년에는 백관들에게 권력 남용을 경계하는 글인 백관잠을 내리기도 하는 등 강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정왕후를 쫓아내면서 김원태 세력을 축출하고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세력을 우대하는 한편 효소왕 시대에 파면당했던 김순원을 복권시키는 등 대신들 간에 견제가 이뤄지도록 했다.[8] 여러 기록에서 김윤중 세력에게 절영도 명마를 하사하는 등 우대하자 친족들이 그를 시기하는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단교에 가까울 정도로 교류가 줄어들었던 시기도 있었는데 성덕왕 시기에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횟수를 세어보면 문무왕 14회[9] , 신문왕 1회, 효소왕 1회, 성덕왕 46회인데 전쟁으로 거의 끊겼던 관계를 성덕왕 때 완전히 회복한 것. 714년 통문박사라는 대당 외교 문서를 담당할 기관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신문왕 때 설립한 국학의 내실을 보강하기 위해 공자의 화상을 안치하는 등 유교 문화를 수용했다. 717년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算博士)를 창설해 의학과 수학을 장려하였고 718년 한국사 최초로 물시계(漏刻)를 설치하고 관련 부서를 설치하는 등 실용적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 관심이 많았던 왕이었다. 722년 정전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성덕왕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실제로 국가가 토지를 수여한 것이 아니라 자영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되어서 국가 재정의 안정을 가져왔다. 율령제와 조용조 조세 방식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이다.
《삼국사기》와 《해동제국기》에는 당시 일본 왕인 겐쇼 덴노와 서로 공수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각각의 입장에서 실려있다.
720년에는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관련 내용이 안 나온다.원정 천황(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성덕왕 14년)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 해동제국기
731년 일본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지휘 아래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곧바로 격퇴하였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의 원인이 된 왕성국 사건도 734년인 이 때 벌어졌는데 일본에 보낸 신라 사신이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말한 것이다. 왕성국의 의미는 《서경》, 《주례》 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서는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 관계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 버렸는데 왕성국 사건은 앞서 신라가 일본의 침공을 손쉽게 격퇴했다는 자부심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규슈(九州) 미야자키 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서 전해 내려오는 《능백묵서(綾布墨書)》에 따르면 백제 부여풍(扶餘豊)[10] 의 아들 부여사(扶餘絲)를 비롯한 일가가 나라 현에 정착했으나 일본 내 정쟁에 휘말려 부여사의 손자인 정가왕(禎嘉王)은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 현 일대로 이주한 뒤 남부여왕을 칭하며 연호를 '정거(定居)'라 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가왕은 미야자키 현에 정착한 뒤에 지역민들에게 불교 신앙, 건축술, 농업 등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718년경에 나당연합군 또는 신라군이 미야자키 현을 침공하여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백제 유민들 및 토착 지역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만약 718년과 720년 신라의 일본 침공이 사실이라면 731년의 일본 군함 300척의 공격은 그에 대한 보복 공격일 수도 있다.성덕왕(聖德王) 30년(서기 731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삼국사기
733년 당나라의 요청을 받아 발해 무왕 시기 발해의 남쪽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11] 이 결과로 나당전쟁 후 50여 년만인 735년 당나라로부터 패강(대동강) 이남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어 이 무렵부터 9세기 전반기까지 대동강 이남에 대한 영역화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3. 기타
- 성덕왕의 치세는 태종 무열왕 때부터 상승하던 신라의 국력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대였다고 평가받는다. 비교적 짧게 간 아버지 신문왕이나 형 효소왕에 비해서 35년이나 재위했고 그 덕에 《삼국사기》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다른 삼국시대 왕들에 비해 기록이 상당히 많으며 신라의 태평성대를 완성시킨 왕이었으나 인지도는 꽤 낮은 편. 한국사 수험생들이나 정전으로 1번쯤 들어보지, 일상 생활 속에서 거의 들어보기 힘든 왕이다. 고려 문종이 그렇듯 큰 정치적 격변없이 나라의 내실을 다지고 태평한 나라를 통치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다만 재위 기간이 긴 탓도 있겠지만 성덕왕 조를 보면 가뭄, 지진, 벼락 등의 자연재해 기록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성덕왕이 백성을 위한답시고 사면을 자주 했지만 이런 식으로 자주 사면하면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없고 상습범이나 중죄인(역적 제외)까지 덕을 베푼다고 사면하다가는 사람들이 범법 행위를 우습게 알게 된다고 비판했다.
- 당대에도 성덕왕은 전제 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명군으로 평가받아 성덕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걸려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一年秋七月 성덕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사면하다
一年秋九月 관작을 한 급씩 올려주다
一年秋九月 일년간 조세를 면제해주다
一年秋九月 원훈[12] 을 중시로 삼다
一年冬十月 상수리나무 열매가 밤으로 변하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방물을 바치다
二年秋七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二年 도읍에 홍수가 일어나다
二年 원훈이 물러나자 원문을 중시로 삼다
二年 일본국 사신이 오다
二年 김사양을 당에 보내다
三年春一月 웅천주에서 영지를 바치다
三年春三月 김사양이 돌아와 《금광명최승왕경》을 바치다
四年夏五月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다
四年春一月 원문이 죽자 신정을 중시로 삼다
四年春三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四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四年秋八月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다
四年秋九月 살생을 금지하다
四年秋九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四年冬十月 동쪽 주군에 기근이 들어 진휼하다
五年春一月 인품을 상대승으로 삼다
五年春一月 기근이 들어 진휼하다
五年春三月 뭇별이 떨어지다
五年夏四月 당에 공물을 바치다
五年秋八月 신정이 물러나자 문량을 중시로 삼다
五年秋八月 당에 공물을 바치다
五年秋八月 곡식이 익지 않다
五年冬十月 당에 공물을 바치다
五年冬十二月 사면하다
六年春一月 백성들이 굶어 죽어 곡식을 나눠주다
六年春二月 사면하다
六年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하사하다
六年冬十二月 당에 공물을 바치다
七年春一月 사벌주에서 영지를 바치다
七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七年夏四月 토성이 달을 범하다
八年春三月 청주에서 흰 매를 바치다
八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八年夏六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八年夏六月 죄수를 사면하다
八年春一月 천구 별이 떨어지다
八年 당에 방물을 바치다
八年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春三月 봄에 눈이 내리다
十年夏五月 도살을 금지하다
十年冬十月 왕이 남쪽을 순수하다
十年冬十月 중시 문량이 죽다
十年冬十一月 왕이 백관의 잠계을 짓다
十年冬十二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十一年春二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十一年春三月 위문을 중시로 삼다
十一年春三月 당에서 노원민을 사신으로 보내다
十一年夏四月 온수에 행차하다
十一年秋八月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으로 봉하다
十二年春二月 전사서를 설치하다
十二年 당에 방물을 바치다
十二年冬十月 당에서 김헌종이 돌아오다
十二年冬十月 당 현종이 성덕왕을 책봉하다
十二年冬十月 위문이 물러나다
十二年冬十二月 사면하다
十二年冬十二月 개성을 쌓다
十三年春一月 효정을 중시로 삼다
十三年春二月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고치다
十三年春二月 김수충이 당에서 숙위하다
十三年春閏二月 박유가 당에 가서 정월을 축하하다
十三年 가뭄이 들어 전염병이 돌다
十三年 상수리나무 열매가 밤으로 변하다
十三年冬十月 당 현종이 신라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다
十四年春三月 김풍후가 당에 가서 공물을 바치다
十四年夏四月 청주에서 흰 참새를 바치다
十四年夏五月 사면하다
十四年夏六月 가뭄이 들어 거사 이효가 비를 빌다
十四年秋九月 금성이 서자성을 가리다
十四年冬十月 유성이 자미원을 침범하다
十四年冬十二月 유성이 태미원에 들어가서 죄인을 풀어주다
十四年冬十二月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하다
十五年春一月 유성이 달을 침범하다
十五年春三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十五年 성정 왕후를 궁에서 내쫓다
十五年 태풍이 불어 숭례전이 무너지다
十五年 김풍후가 신라로 돌아오다
十五年夏六月 가뭄이 들어 거사 이효가 비를 빌다
十六年春二月 의박사·산박사를 두다
十六年春三月 새 궁을 세우다
十六年夏四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七年夏六月 황룡사탑에 벼락이 치다
十七年 물시계를 만들다
十七年 당에 공물을 바치다
十七年冬十月 유성이 묘성에서 규성으로 들어가다
十七年 천구가 간방에 떨어지다
十七年 한산주에 여러 성을 쌓다
十八年春一月 당에 하정사를 보내다
十八年秋九月 미륵사에 벼락이 치다
十九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九年 배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十九年春三月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다
十九年夏四月 큰 비가 내리다
十九年夏五月 해골을 묻다
十九年夏五月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十九年夏六月 왕비를 왕후로 책봉하다
十九年秋七月 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十九年 누리 떼가 곡식을 해치다
十九年 사공이 물러나자 문림을 중시로 삼다
二十年秋七月 정인을 시켜 북쪽 경계에 성을 쌓다
二十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다
二十一年春一月 선종을 중시로 삼다
二十一年春二月 도읍에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秋八月 백성들에게 정전을 나누어주다
二十一年冬十月 김인일을 당에 보내다
二十一年 모벌군에 성을 쌓다
二十二年春三月 당에 미녀를 바치다
二十二年夏四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二十二年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三年春一月 왕자 승경을 태자로 세우다
二十三年春一月 사면하다
二十三年春一月 웅천주에서 영지를 바치다
二十三年春二月 김무훈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二十三年冬十二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二十三年冬十二月 소덕왕비가 사망하다
二十四年春一月 흰 무지개가 나타나다
二十四年春三月 3월에 눈이 내리다
二十四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四年 선종이 물러나자 윤충을 중시로 삼다
二十四年冬十月 땅이 움직이다
二十五年夏四月 김충신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二十五年夏五月 김근질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六年春一月 죄수를 사면하다
二十六年 당에 하정사를 보내다
二十六年夏四月 위원을 대아찬으로 삼다
二十六年夏四月 대양을 사찬으로 삼다
二十六年冬十二月 수창궁을 수리하다
二十六年冬十二月 배부에게 궤장을 하사하다
二十七年秋七月 김사종을 당에 보내 방물을 바치다
二十七年秋七月 당에 자제들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二十七年 김사종이 숙위하다
二十七年 배부가 물러남을 수락하다
二十七年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十八年春一月 당에 하정사를 보내다
二十八年秋九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二十九年春二月 김지만을 당에 보내 조회하게 하다
二十九年冬十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三十年春二月 당 현종이 김지량을 태복소경원외치에 제수하다
三十年夏四月 사면하다
三十年 늙은이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다
三十年 일본군이 습격하다
三十年 백관이 거노를 쏘는 것을 보다
三十一年冬十二月 사공 등을 장군으로 삼다
三十二年秋七月 당 현종이 군대를 요청하다
三十二年冬十二月 김지렴을 당에 보내 사례하다
三十三年春一月 김충신이 당 황제에게 부사로 삼아줄 것을 요구하다
三十三年夏四月 김단갈단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三十三年 당 황제가 김지렴에게 홍려소경원외치의 관작을 주다
三十四年春一月 형혹이 달을 범하다
三十四年春一月 김의충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三十四年春二月 김영이 당에서 죽다
三十四年 '''당 현종이 패강 이남의 땅을 주다'''[13]
三十五年夏六月 패강 이남의 땅을 준 것을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다
三十五年冬十一月 김상을 당에 보냈는데 도중에 죽다
三十五年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살펴보다
三十五年 개가 사흘 동안 짖다
三十六年春二月 김포질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고, 방물을 바치다
三十六年 성덕왕이 죽다
문무왕 급으로 기록이 많다.
삼국사기 8권은 신문왕부터 시작하여 성덕왕에서 끝난다.
[1]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2] 불교식 미칭.[3] 《구당서》에서는 김지성(金志誠)이라고 하는데 이는 성덕왕의 신하인 중아찬 김지성의 이름이다. 책부원귀에 나오는 新羅王金志誠 遣使朝貢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金志誠과 遣의 위치가 바뀐 것으로 본다.[4] 삼국유사 탑상 오대산 오만진신조에는 효소왕이 26세에 사망했다고 하였고, 효소왕의 동생인 성덕왕이 22세에 즉위하였다고 한다. 실제로는 16세에 사망했으니, 성덕왕은 실제로는 12세로 즉위한걸로 추정되어, 그래서 추측 년도는 691년이다.[5] 재위 기간 35년. 통일신라에서는 압도적으로 가장 길고 한국사 전체에서 찾아봐도 오래 재위한 편이다.[6] 점물왕후(占勿王后)라고도 불린다.[7] 훗날 시중[8] 성덕왕의 행적을 보면 태종 무열왕을 롤모델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본인은 장남도 아니고 국인들에게 추대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태종 무열왕처럼 서라벌 토착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신 김씨(김해 김씨) 김윤중을 중용했으며 태종 무열왕을 위한 사찰 봉덕사를 창건하기도 했다.[9] 문무왕 대의 사신 파견은 나당전쟁 동안 물밑으로 시도되는 교섭의 의미가 강했다.[10]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부흥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11] 이때 대장으로 참전한 사람이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신라에 파병을 요구할 때 '듣건대 신라에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이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을 보내시오'라고 김윤중을 콕 찍어서 언급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김유신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기사에는 태복원외경 김사란이 갔다고 한다. 신라군은 발해군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은 아니고 북진하다가 눈이 많이 내려 귀환했다고 한다.[12] 선덕왕 양상의 祖父이다.[13] 패강에 수자리를 설치. 패강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