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식(1864)
그는 종종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며, 나중에 이강년의 부대와 연합한 뒤 소모후군장(召募後軍將)의 소임을 담당하였다. 이에 대해 일제는 그의 본가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보복했다. 1908년 9월, 신태식은 홍주 전투에서 패한 뒤 횡성으로 퇴각할 때 총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양주 산안 전투에 참전하여 왜장 장삼랑(長三郞)을 사로잡아 총살했다.
그러나 1908년 12월 경기도 연평군 이동 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1909년 2월 16일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1월 19일 경성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는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가세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도 방면에서 조선 독립 후원 의용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김찬규(金燦圭)·이응수(李應洙)·김돈희(金敦熙)·김동진(金東鎭) 등 경상북도 지방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1920년 가을에 서로군정서와 연락해 가면서 국내에서 독립군 활동에 호응·협조를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을 조직하고 김찬규가 경상남도 단장에, 신태식이 경상북도 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일본 경찰에 기밀이 탐지되었다.
이로 인해 또다시 체포된 그는 1922년 12월 28일 대구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23년 12월 22일 대구 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5일 출옥한 뒤에도 항일운동을 꾀하다가 1932년 1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신태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