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규

 


성명
신현규(申鉉圭)
이명
신양춘(申陽春)
생몰
1888년 ~ 1928년 8월 12일
출생지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옥성리
사망지
종로경찰서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현규는 1888년생이며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옥성리 출신이다. 그는 가난한 농가의 자제로, 20대까지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던 1915년경 광복회 충청도 지부원인 유창순의 권유를 받아들여 광복회 총청도지부에 가입했다. 이후 1917년 채기중, 강순필 등이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일본 경찰에 밀고하려 한 장승원(張承遠)[1]을 암살하고 피신할 때 정운기(鄭雲淇)와 함께 도왔다가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출옥한 그는 밀양에 있는 윤창선(尹昌善)을 찾아가 그로부터 윤홍선, 손양윤 등과 함께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징수한 후 만주에 있는 신민부의 김좌진에게 송금하여 독립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전해들었다. 이에 그는 손양윤과 함께 신민부 국내 공작원에 가입한 후 군자금을 모집한 후 만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먼저 손양윤과 함께 1926년 6월 13일 경북 칠곡의 일본인 부호 이쿠타 세이이치 집을 습격해 무기를 회고득한 후 군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7년 4월 신민부 중앙위원장 김좌진의 지령을 받은 이병묵(李丙黙)이 국내에 잠입하자 손양윤, 손호, 손봉현, 윤창선과 더불어 대구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27년 5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경북 칠곡군 왜관면 매원리에 거주하는 이이창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렇듯 그는 1927년부터 1928년 7월 말까지의 기간 동안 7회에 걸쳐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8년 7월 말 서모(徐某)의 밀고로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던 중 같은 방에 수감 중인 사람이 아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8월 10일 그 사람이 옷 소매 안에 감춰둔 아편을 꺼내먹고 이틀 뒤인 12일 새벽 유치장에서 사망했다. 유족은 종로서에 가서 시신이라도 수습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가진 돈이 없어서 시신을 인도받을 수조차 없었다. 그의 부인은 "누구든 우리 남편의 시신을 화장만이라도 해주오."라며 울부짖었다. 결국 그의 시신은 가족의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화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신현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제2대 국무총리 장택상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