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순(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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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창순은 1880년 3월 17일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역사를 탐독했고 위인의 사적을 귀감으로 삼았다고 한다. 1906년 홍주에서 일어난 의병에 참가했으며, 1913년 영주군 풍기에서 채기중, 유장렬, 한훈, 강순필, 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정진화 등과 함께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주로 의병적(義兵的) 성향의 인물이 참여했던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방략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후 그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할 때 이에 참가하여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혁명기지로는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경상도 지방의 친일부호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친일부호 처단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했다.
1917년 11월에 채기중·강순필·임봉주(林鳳柱) 등과 함께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1] 을 처단하였으며, 이때 대한광복회의 처단고시문을 붙임으로써 광복회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8년 1월 박상진, 김한종, 임세규(林世圭)와 함께 붙잡혔고, 10여년의 옥고를 치르다 가출옥했다. 이후 천안에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조용히 지내다 1943년 10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유창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