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

 



'''역임 지위'''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
제1대
장병만

제2-5대
''' 장택상 '''

선거구 개편
송한철
(제6대 / 칠곡군, 성주군)


'''대한민국 제3대 국무총리
장택상
張澤相 | Chang Taek-sang
'''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출생'''
1893년 10월 22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오태동#
(現 경상북도 구미시 지주중류4길 15-14)[1][2]
'''사망'''
1969년 8월 1일 오후 7시 15분 (향년 7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고려병원
(現 강북삼성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3]
'''자'''
치우(致雨)
'''호'''
창랑(滄浪)
'''재임기간'''
초대 외무부 장관
1948년 8월 15일 ~ 1948년 12월 24일
제2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1950년 6월 19일 ~ 1952년 5월 6일
제3대 국무총리[4]
1952년 5월 6일 ~ 1952년 10월 5일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003478> '''부모'''
아버지 장승원, 어머니 풍양 조씨
'''형제자매'''
형 장길상, 장직상
'''배우자'''
진주 정씨[30] (사별)
풍산 류씨[31] (사별)
김연식[32] (사별)
이유앵 (4번째 재혼)
'''자녀'''
아들 장병철, 장병갑, 장병은, 장병문, 장병청
딸 장병민, 장병채, 장병엽, 장병혜, 장병초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 / 학사)
에든버러 대학교 (경제학 / 중퇴)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종교'''
개신교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2''', '''3''', '''4''', '''5'''
'''경력'''
수도경찰청장
초대 외무부 장관
제2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제2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제5차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제6차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제3대 국무총리
제3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원내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제4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제5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생애 초기
2.2. 유학과 독립운동
2.3. 해방 이후
2.4. 정부 수립에 참여
2.4.1. 장관 시절
2.4.2. 화려한 외출과 복귀
2.5. 야당 정치인
2.6. 말년
2.7. 사후
3. 대중매체
4.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외무부 장관이자 제3대 국무총리.
자는 치우(致雨)이며 어릴 적의 이름은 삼욱(三旭), 호는 창랑(滄浪), 본관은 인동(仁同). 경상북도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장승원(張承遠)과 어머니 풍양 조씨 조준구(趙駿九)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이다.
그의 형제로는 친일 악덕 지주[5]이자 경일은행장을 지낸 장길상(張吉相), 벼슬을 하다가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직을 무려 3차례나 지낸 장직상[6]을 형으로 두고 있었다.
가족은 친일파인데 본인은 독립운동을 한 이례적인 케이스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생애 초기


1893년(고종 30) 10월 22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오태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11대 선조는 조선 중기의 사림파 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으로[7] 할아버지 장석룡(張錫龍)[8]은 1846년(헌종 12) 정시(庭試)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여# 정2품 공조판서에 올랐고 아버지 장승원 또한 1885년(고종 22)에 증광시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여# 종2품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내는 등 당시의 이른바 문벌 가문이라 불릴만한 배경을 타고 났다.
그의 부친인 장승원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탐관오리 중 한 명으로 청송군수로 재직할 때에는 경상북도 관찰사 자리를 꿰어차기 위해 고을 주민들을 족치다 결국 면직되었다. 하지만 어찌어찌하여 결국에는 목표로 하던 관찰사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 세태를 기록한 황현매천야록에 의하면 공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장석룡과 함께 악행을 일삼아 가는 곳마다 탐학과 도둑질로 가산을 수만 냥 쌓았다'라고 했으니 실로 견부견자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 어용 단체였던 일진회[9]에서조차 영남 지방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인간을 관찰사로 앉히냐고 소리내기도 하였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앞서 관찰사에 임명된 기록에 대해서는 장승원이 고종에게 환심을 사려고 막대한 뇌물을 갖다바쳐서 관직을 얻은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10] 시세를 보는 눈도 뛰어나 일제 치하에서도 재산을 굴리며 경상북도 최고 부호인 동시에 한강 이남 10대 부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실제로 그가 살고 있던 선산 지역에서는 선산으로 들어가는 사람치고 이 사람 땅을 안 밟은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대지주[11]이기도 했다. 그 후 1915년에 박상진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을 때 그들로부터 군자금 응모 권유를 받았으나[12] 협조치 않고 도리어 일본 경찰에 밀고하려 했다가 1917년 단원 채기중(蔡基中), 강순필(姜順必), 유창순(庾昌淳) 등에 의하여 암살당한다.[13]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근대식 학교에 입학했으며 12세 되던 1905년 진주 정씨와 혼인하였으나 1908년 사망하였다. 이후 선조 때 명재상 류성룡후손풍산 류씨재혼했으나 이 또한 일찍 죽고 청년기에 이르러서야 부인 김연식과 재혼했다. 김연식에게서는 장병혜, 장병민, 장병초, 장병화 등의 딸과 아들 장병청 등이 태어났다.

2.2. 유학과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해외 유학 때 열차로 만주에 갔다가 아버지 장승원의 친구인 이상설을 만났다. 그에게서 민족혼에 대한 것을 주입받은 뒤 곧바로 그의 추천장을 들고 열차로 시베리아에 갔다가 여러 사람을 만나 중간중간 숙박하면서 추천장을 들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식으로 소련을 거쳐 독일에 도착했다.
안창호가 잠시 독일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독일을 헤매다가 우연히 안창호를 만났다. 안창호는 그에게 왜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가, 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며 장택상 스스로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며,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 스스로의 입으로 답하게끔 질문했다. 달변에 감동받은 장택상은 안창호가 후에 해방 조국의 진짜 대통령감인 분인데 일찍 돌아가셔서 아쉽게 됐다며 한탄하기도 했다.[14]
프랑스에서 여비가 떨어졌을 때 그는 한 프랑스 아가씨와 사귀며 그로부터 차비를 얻기도 했다. 장택상은 프랑스를 떠나면서 그녀를 잊지 못해 1950년 UN에 파견되는 대표로 왔을 때 그녀의 집을 찾아 길을 헤매다가 못 찾았고 보좌진들이 그를 찾아다녀서 겨우 찾았다. 그러나 쪽팔려서 차마 그녀를 찾으러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소리는 차마 못했다고 한다. 그 뒤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도착했으며 1915년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15] 나중에 중퇴했다.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해 국내에서는 몇몇 독립운동가를 숨겨두었다는 이유로 가택 수색을 당하기도 했고 청구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바 있었다. 그리고 집안의 재력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자금 지원도 했다.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었던 그는 1940년 이후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고향에 칩거하였다. 1942년에는 이승만미국의 소리를 통해 방송하던 단파안재홍, 송진우, 여운형, 윤치영, 김성수 등과 함께 밀청하다가 걸리기도 했으며 이후로 "일본은 패망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2.3. 해방 이후


1945년 8.15 광복 직후 친일파들이 대거 포함된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해[16] 미군정에 채용되어 경기도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한국 정부 수립 직후 초대 외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 공간에서 경찰 총수로 일하면서 좌익 및 중도파에 대한 수많은 극우 정치 테러[17]를 주도(혹은 방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좌익 킬러, 정치깡패의 괴수로 알려졌으나 정작 본인은 여운형, 여운형의 사돈 이만규, 조봉암 등의 중도파 및 좌익계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때문에 여운형과 이만규에게 좌우 대립이 극심하여 목숨이 위험하니 정계를 은퇴하여 시골에 은거하거나 북으로 가라고 권유하지만 장택상이 단독 정부 수립에 찬성한 한국민주당에 가담했고 미군정에 채용된 수도경찰청장 직위에 있는 상황에서 그의 인정은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특히 통일에 목숨을 걸었던 정치가 여운형에게는 말이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그날 장택상이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자 맏딸 여난구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뭐하러 여기왔느냐? 썩 나가라"고 소리질렀고 장택상이 우물쭈물하다가 가버린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한편 이만규는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였기 때문에 장택상 조언대로 북으로 건너가서 잘 살게 되었다. 여운형 암살 당시의 정황을 보면 상당 부분 관여 내지는 방조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여운형 암살 당시 축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집으로 돌아가던 여운형의 차를 트럭이 막았고 저격이 있었다. 같이 있던 여운형의 비서가 저격범을 쫒으려하자 옆에 있던 경찰들이 비서를 암살범이라 붙들었다. 당시 경찰 총수가 장택상이었으니 최소한의 관련성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악질 고문 경관 노덕술 등을 총애하고 의열단을 이끈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붙잡아 고문해서 끝내 월북시키고 김구의 암살에도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며 발췌 개헌이 통과하는데 공헌하는 등 근현대사 막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장택상 본인도 독립운동가였고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이런 선택을 했던걸보면 지금의 시각과 달리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니까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친일파도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청천, 이범석, 손원일 등 거물급 독립운동가들도 친일파 출신들을 내치지 않고 기용했다. 이런걸보면 정작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오히려 현대의 우리가 너무 과도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2.4. 정부 수립에 참여



2.4.1. 장관 시절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 그는 경찰로 근무한 경력을 살려 내무장관에 임명됐으나 인선 과정에서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던 이범석의 실수로 외무장관으로 나가게 됐다. 그러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기로 했다가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윤치영과 서로 오해하면서 앙숙이 되어버린다.
정부 수립 초기에 그는 이승만에게 건의하여 장건상[18]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장건상의 회고[19]에 의하면 어느날 자신을 부른 장택상이 수도청에 앉아있다가 장건상 본인이 들어오자 감격받은 듯이 무릎을 탁 치며 "형님! 됐습니다!"라는 것이다. 장건상이 연유를 묻자 장택상은 장건상을 장관으로 임명하라는 이승만의 승인이 떨어졌음을 말했으나 장건상은 원래 복에도 없는 벼슬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단독 정부는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이니 참여할 수 없다며 거절 의사를 나타냈고 장택상은 이에 대해서 아쉬워 했다고 한다.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기도 한 장건상도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으로 장택상과는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다. 그래서 10년의 나이 차이에도 형과 동생이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20]
6.25 전쟁 중에는 조봉암, 신익희와 함께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 해 놓고 피난간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퇴짜 맞았다. 이승만 曰, "내가 당덕종이냐? 사과하게!"[21]
이후 이범석, 윤치영,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을 하게 된다. 장택상은 이범석과 함께 우익 청년 단체를 동원해 부산정치파동사사오입 개헌을 도왔으며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국무총리 재직 중에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이범석의 제3대 부통령 출마를 낙선시키기도 했다.[22] 이범석은 장택상을 경찰에 고소했지만 경찰에서는 통할리도 없었다. 이범석과 조선민족청년단계는 그 뒤 장택상이 일제강점기에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부산 항구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혐의로 "장택상은 친일파~" 라는 노래를 불러서 장택상을 낙마시켰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만 해도 일본과 정식 외교 관계가 없었고 만났다는 혐의의 일본인이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이다. 다만 이 사건은 진짜로 있었는지는 논란이 심하다. 장택상은 친일파~ 정도 노래가 아니라 '''장택상은 조선총독부 고관 아무개와 일본에서 회담해서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논의했다'''식의 이적 행위로 몬 것이다.[23]

2.4.2. 화려한 외출과 복귀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발하여 훗날 민주당으로 발전하게 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이때 혁신계 정치인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가 논란이 되는데 장택상은 절친인 조봉암을 적극 지지하였다. 하지만 반공 우익 성향이 강한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의 맹렬한 반대로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입성은 결국 좌절되었고 실망한 장택상은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다.[24] 1959년 조봉암이 구속됐을 때 홍진기[25] 법무장관 등에게 조봉암의 무고함을 설명했고 그를 변호하는 글까지 직접 작성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조봉암과 친분이 있었는데 장택상 자신이 UN 대표로 파견될 때는 가족들에게 내가 없는 동안 조봉암을 따르라 하고 출국 전에 조봉암에게 가족을 의탁하니 조봉암은 감동받았다 한다. 조봉암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차마 이승만이 조봉암을 어찌 못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결국 조봉암은 사형되었다.

2.5. 야당 정치인


1958년 이범석과 손잡고 공화당이라는 당을 만들려다 실패했으며 이승만이 떠나고 이기붕 일가의 집단 자살 이후 썰렁해진 자유당을 떠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기간 중에 정치 활동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한일협정 반대 시위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가담하기도 했다.

2.6. 말년


말년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칼럼과 회고록을 냈으며 박정희와의 관계는 여전히 나빴다. 박정희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영남 지역에서는 민주공화당의 지지가 강해졌으나 김영삼, 신현확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을 후원하였다.
1969년 7월에 폐렴 증상으로 입원했으며 1969년 8월 1일 오후 7시 15분에 사망하였다.

2.7. 사후


사후 수교훈장 광화장을 추서받았으나 건국훈장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대중매체


해방 전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늘 간신배 비슷하게 나온다.
  • 1973년작 조긍하 감독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서 배우 허장강이 역할을 맡았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탤런트 이정길이 장택상 역을 맡아서 김무생이 맡은 조병옥과 공작 정치를 수행하는 것으로 나온다.
  • 1990년작 MBC 드라마 <반민특위>에서는 배우 김용건이 역할을 맡았다.
  • 1994년 2월 13 ~ 20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배우 김창봉이 연기했다.
  •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선 배우 임혁주가 연기했는데,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른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의 행적이 미화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장택상(야인시대) 항목 참고.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배우 김동현이 연기했으며 야인시대와는 반대로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그의 독립운동 경력은 전혀 소개되지 않고 오로지 '좌익세력을 축출하는데 앞장섬.'이라고 인물 자막 소개 등에 강조하면서 친일파들을 등용하여 오로지 빨갱이만을 축출하는 데만 앞장선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이승만과 함께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나온 탓에 3녀 장병혜가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와 함께 담당 연출자 윤창범 PD 등 2명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2010년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4. 기타


  • 이상한 소문[26]도 있지만 장택상은 독립운동가가 맞다. 다만 후에 노덕술을 중용한 것은 장택상의 비판점 중 하나가 되었다. 일화에 의하면 친일 경찰들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그를 고문한 적이 있던 경찰도 등용했는데 경찰관은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된 장택상의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장택상은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직무를 수행하는 열의는 대단했다고 치하했다고 한다.
  •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재학 중인 김영삼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킨 것도 장택상이다. 1958년 공화당을 조직할 때는 김대중을 일시적으로 대변인으로 채용하기도 했다.[27]
  • 도자기, 그림 등 고미술품 수집이 취미였으며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것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 1967년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파텍 필립 시계는 국내 존재하던 시계 가운데 가장 고가였다고 한다.[28]
  • 위의 이유에서인지 브루스 커밍스의 책에는 당시 미군정청 관리들의 평가를 인용해서 네로괴링을 합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라는 말을 남겨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다.
  • 양반가 가문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해서 박정희를 경멸했다고 한다. 특히 박정희의 아버지와 형이 장택상 집안의 머슴과 소작농으로 있었던 지라 박정희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며 그를 얕잡아보았다고 한다.[29] 이러한 개인적 악연 때문에 그는 건국훈장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한뉴스 409호에서 박정희와 회담하는 장택상 박정희의 쿠데타 성공 이후에도 그를 '박정희 군'이라 부르며 그를 낮춰불렀는데 이는 박정희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탄압은 없었으나 견제는 있었는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박정희 측에서 장택상 후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무장 경찰 몇을 파견했는데 이것이 독이 되어서 유권자들이 무섭다는 이유로 장택상 선거 유세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결국 장택상은 낙선되고야 만다. 이때 이후로 장택상은 현실을 깨닫고 박정희에게 일종의 항복 선언서인 '박정희 대통령 각하 전상서'를 보냈고 충격으로 병이 들었다고 한다. 하기야 얕보던 상대와 신분이 완전히 역전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번째 부인이었던 성혜림의 부친인 성유경과 먼 친척 사이였으며 친척이라는 인연으로 성혜림의 자매인 성일기와 만난 적도 있다.
  • 실제 성격은 아첨꾼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자존심이 대단했고 심지어 오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5동에 장택상의 별장이 있었다. 그래서 별장이 있었던 호암산이 '별장산'으로 불리기도 했었고 별장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빌라와 상점이 많이 있었다. 시흥계곡 복합환경생태공원에 별장터 안내 표지가 있다.


[1]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46번지.[2] 인근의 신동, 구평동, 황상동, 인의동, 양호동, 구포동, 임수동과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3] 남산(南山)파 16대손 상(相) 항렬. 인동 장씨 31세.[4] 제2대 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52년 5월 30일 ~ 1952년 8월 14일)[5] 아버지 사후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들을 가지고 은행을 차렸는데 성공했다고 한다.[6] 1938년 2월 14일에 중추원 참의 대표로 난징을 방문하였다. 여기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을 만난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 했다.[7] 장현광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당파로는 남인 계열이었으며 정조 독살설을 제기하고 거병하려다가 실패한 장현성 형제 등도 장현광의 후손이다.[8] 초명 장용규(張龍逵). 1868년(고종 5) 종3품 예조참의로 재직 중에 장석룡(張錫龍)으로 개명했다.#[9] 1904년 8월 설립 당시에는 황실 존중과 국가 기초 공고, 인민의 생명 재산 보호, 정부의 정치 개선 실시, 군정 재정의 정리 등을 취지로 삼은 어용 단체였는데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완전한 친일 매국 단체로 변질되었다.[10] 여기서 고종의 매관매직 실체가 드러난다.[11] 실제로 박정희대통령의 아버지 박성빈이 장승원 집에 갔고 그 결과로 둘째 형 박무희가 소작농으로 일하기도 했던 바가 있었는데 이런게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대지주였다. 때문에 박정희는 장택상을 껄끄럽게 생각했다고 하며 장택상의 정치적 제자가 후에 야당 총수가 된 김영삼이란 것도 박정희가 장택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12] 일설에 의하면 장승원이 왕산 허위고종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고 이를 이용해 자신을 경상도 관찰사 직에 천거를 해주면 20만원을 주겠다며 청탁을 해왔다고 한다. 이때 허위가 을 받지 않고 거절하려 하니 당시 허위의 제자였던 박상진이 이런 모습을 보고서 허위에게 '그 돈을 미리 받지 말고 나중에 독립 자금에 협조하라는 식으로 약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고한다. 허위는 이에 장승원을 고종에게 경상도 관찰사 직에 합당한 인물이라며 천거하였다. 그런데 허위가 의병 활동 도중 체포되어 1908년에 순국한 후 장승원은 그새 오리발을 내밀며 모른체 했다는 것이다.참조[13]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단원들이 검거당하고 결과적으로 박상진 또한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된다.[14] 1938년 안창호가 병원에서 죽었을 때는 부인 김연식을 데리고 안창호의 빈소에 당당하게 문상을 다녀오기도 했다. 문상 정도야 무슨 문제인가 하겠지만 당시에 조선총독부령에 특정 혐의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입원이나 장례에 대해서 언론인이나 관료들의 접근 및 보도를 제한할 정도로 감시가 심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대인배라 볼 수 있다.[15] 윤보선도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부인 장택상과 고고학과인 윤보선은 학과가 달랐다.[16] 이에 대해서 알려진 비화는 다음과 같다. 장택상이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는데 여운형이 명망가인 자신을 안 불러줬다고 삐져있는 상황에서 김성수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가 날아들어와 경성에 오게 되었다. 때마침 안국동 로터리에서 친구였던 야자 이만규를 만났고 이만규는 "오 창랑! 마침 자넬 찾고 있었네. 어서 몽양 댁으로 가세."라고 하였으나 "난 선약이 있으니 다음에 만나세"라며 거절해 장택상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아닌 한국민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17] 그 외 불법적인 감시, 사찰, 수색, 자산 몰수 등 미군정의 묵인하에 온갖 탄압을 주도했다.[18]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장택상의 12촌 형이며 서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19]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기록한 것에 의하면.[20] 장건상이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장택상이 직접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장건상은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의 부당수 노릇을 하다가 여운형이 암살된 뒤에는 근로인민당의 당수로 남북협상에 참여해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21] 장택상의 회고록[22]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이범석의 족청의 규모가 커지자 이를 경계한 이승만의 의도와 이범석, 윤치영 등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을 이승만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미국의 압력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범석이 쫓겨난 뒤 어부지리 격으로 2인자 자리는 이기붕이 차지했다. 이범석이나 장택상 중 2인자가 나올 거란 예상을 뒤엎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건 허약하고 세력도 가장 약했던 이기붕이었던 것.[23] 비슷한 류의 폭로가 신익희가 당시 납북돼서 북한에 체류 중인 조소앙이랑 인도 뉴델리에서 만나서 중립화 통일을 논의했다는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이 있다.[24] 호헌동지회에서 배제된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1956년 3대 대선에 출마해서 무려 200만 표를 득표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25]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인.[26] # 이 글에는 출처가 리영희의 저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 책에도 이런 내용이 없다.[27] 그 때문에 좌파 킬러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과 친하게 지낸 점, 김영삼의 정치적 스승이라는 점 등 때문에 현재의 우익이나 뉴라이트로부터는 껄끄러운 인물 정도로 기억되기도 한다.[28] 1967년 기준 휘발유 1리터가 21원이었으니 당시 60만원은 요즘으로 치면 3,700만원 정도 된다. 현재 양산되는 IWC 시계의 국내 가격이 600~900만원 수준임을 생각하면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29] 박정희는 자신의 신분이 천했다는 것을 콤플렉스로 삼고 있었던 반면 장택상은 양반 가문 출신에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엄청난 재력가였다. 그렇기에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장택상은 그의 마음 속 약점을 간파하며 내리 깔보았다. 거기다가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출신에다가 남조선로동당에도 가담한 전적이 있는 흑역사가 있었던 반면 장택상은 독립운동가 출신에다가 수도경찰청장 재임 이후에는 친일 경찰들을 등용해 적극적으로 반공 활동을 펼쳤으므로 명분상으로도 장택상은 꿀릴 것이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