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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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채기중(蔡基中)
이명
채소몽(蔡小夢), 채기중(蔡基仲)
자 / 호
극오(極五) / 소몽(素夢)
본관
인천 채씨
생몰년도
1873년 7월 7일 ~ 1921년 8월 12일[1]
출생지
경상도 함창현
(현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2]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채기중은 일제강점기에 비밀결사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채기중은 1873년 7월 7일 경상도 함창현(현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아버지 채헌락(蔡獻洛)과 어머니 곡부 공씨(曲阜孔氏)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함창현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여러가지 곤욕을 겪어 1906년 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또 한학을 배워 76편의 한시를 짓는 등 문학적 소양이 있었고 억울한 일을 그냥 바라보지 못하는 의협심을 갖고 있었다.
경상북도 영주로 이주한 채기중은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영주는 이주민들이 많아 독립운동가들이 비밀결사 운동을 하기 좋은 지역이었기에 1913년 풍기광복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때 의열단의 전설 김상옥을 만나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풍기광복단의 첫 번째 목표는 군자금 확보였다. 군자금 확보는 몇몇 일본인 부호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곧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박상진과 만나 박상진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광복단을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는 데에 일조하여 채기중은 경상북도 지부장을 맡았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 같은 조직이 모여 만들어진 단체로, 앞선 조직과 마찬가지로 군자금을 모아 만주의 독립군들에게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또한 참여 인원들 중 과거 의병 세력이 있었기에 이들이 주도하여 친일 부호 처단이나 독립군 양성 같은 일도 했다.
당시 채기중은 대한광복회에서 군자금 조달을 맡았다. 군자금 조달 방법 중 하나는 대부호들에게 의연금을 지원해달라는 문서를 전달해 기부금을 모으는 형식이었다. 이때 일부 부호들은 자금 지원을 거절했는데, 그는 이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광복회원 강창순·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 등을 보내어 군자금 지원을 거절한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 전 경상도 관찰사와 박용하(朴容夏) 전 아산군 도고면장 등을 처단하는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조직이 탄로나고 채기중도 곧 체포당하고 만다.
채기중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김한종(金漢鍾)·김경태·임봉주·강순필과 함께 1918년 2월 1일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살인죄·총포화약취체령 위반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결국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한다. 이 당시 대한광복회의 임원들이 많이 체포되어 조직이 흔들렸지만, 다행히 다른 조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는데에는 성공했다.
사후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03~204p

[1] 음력 7월 9일[2] 소암리 290-1번지에 그의 생가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