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의 이집트 원정
1. 개요
아예 이집트가 목표였던 5차, 7차 십자군 외에 우투르메르 (레반트)의 십자군이 이집트를 공격한 것에 대해 다룬다. 특히 아모리 왕의 5차에 걸친 이집트 원정은 모두 실패하였고 결국 살라흐 앗 딘의 집권과 시아파 파티마 제국에서 수니파 아이유브 왕조로의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2. 목록
2.1. 1118년 : 보두앵
3월 초,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은 고작 216명의 기사와 4백의 보병을 이끌고 베두인들의 보급을 받으며 시나이 반도를 지났다. 그는 별 저항 없이 알 파라마를 점령항 후 나일 강에 도달하였는데,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는 보두앵은 그곳에 이르러서야 몸을 씻으며 첫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후 펠루시움을 공격하자 수비대는 도주하였고 이로써 나일 강으로의 길이 확보되었다. 하지만 곧 보두앵이 병에 걸렸고 급히 철수하였지만 성도에 닿지 못하고 시나이 반도 북동쪽 끝의 알 아리슈에서 객사하였다. 비록 카이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가해지지 않았지만 너무도 쉽게 방어선이 뚫린 것에 대한 책임으로 와지르 알 아프달은 실각하였다. 그는 3년 후 길거리에서 암살되었다. 한편 예루살렘에선 보두앵의 사촌이 보두앵 2세로 즉위하였고 일 가지가 알레포를 차지, 1119년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안티오크 공작 로제르를 전사시키며 십자군을 격파하였다.
2.2. 아모리 1세
1153년 아슈켈론이 함락된 이후 이집트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한편 시칠리아 왕국 함대가 이집트 북부의 티니스를 두 차례 (1154, 1156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상태에서 1162년 2월에 예류살렘 왕으로 즉위한 아모리는 누르 앗 딘처럼 검소하고 신실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집트 정복을 일대 숙원으로 삼았다. 한편 그해 12월 파티마 조의 와지르가 된 샤와르는 전임자의 가문을 숙청하고 전권을 장악하였다.
2.2.1. 1차 원정 (1163년)
1163년 8월, 샤와르 역시 부관인 디르감에게 재상직을 내주고 구사일생으로 카이로를 빠져나와 누르 앗 딘의 궁정에 피신하였다. 그러한 혼란기를 겪은 파티마 조는 1160년 경부터 내정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예루살렘 왕국에 바쳐오던 6만 디나르의 조공을 늦게 지불하였는데, 아모리는 이를 트집으로 원정에 나섰다. 그는 수백마리의 낙타에 물을 싣고 3일만에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카이로의 동쪽 방어선인 빌베이스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넘치는 의욕에 비해 십자군은 이집트의 범람기에 대해 무지하였다. 9월이 되자 수위가 상승하였고 이집트 인들이 둑 몇개를 허물자 십자군 진영은 물에 잠겼다. 그들은 황급히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다.
2.2.2. 시르쿠의 원정 (1164년 봄)
한편 샤와르의 설득에도 이집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누르 앗 딘은 아모리가 카이로를 노린다는 것을 깨닫자 생각을 바꾸었다. 노쇠한데다 내란까지 이어지는 파티마 왕조가 자연의 도움 없이 십자군을 버텨낼 수 없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십자군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누르 앗 딘도 그들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던 틈에 샤와르가 정권 회복의 대가로 원정 비용 부담 및 매년 나일 강 동쪽의 세금 1/3을 바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누르 앗 딘의 심복이자 대담한 성격이던 시르쿠가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원정군이 꾸려졌다. 1164년 4월,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누르 앗 딘과 시르쿠는 다마스쿠스 성문을 나섰다. 전자가 팔레스타인 북부로 행군하여 아모리의 관심을 끄는 동안 시르쿠는 샤와르와 2천 기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하여 요단강을 건너 남하한 후, 재빨리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재차 강을 건넜다.
기존 도로를 우회하여 시나이 반도 중앙부의 황야를 횡단한 시르쿠는 4월 24일 빌베이스에 나타나 당황한 적으로부터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5월 1일, 역시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카이로 앞에 나타나 진영을 세웠다.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난 디르감은 추종자들에게도 버림받았고 도주를 준비하다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길거리의 개 들에게 던져졌고 샤와르는 재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10여일만에 속전속결로 이집트를 차지한 시르쿠는 카이로에 계속 남았다. 시르쿠의 능력을 옆에서 지켜본 샤와르는 찬탈의 공포에 휘둘렸고 은혜도 잊은채 그에게 철수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시르쿠로부터 자신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머물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샤와르는 자신의 능력으론 역부족임을 깨닫곤 아모리에게 시리아 인들을 몰아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저번 원정의 아쉬움을 삼키고 있던 예루살렘의 왕에게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었다.
2.2.3. 2차 원정 (1164년 여름)
1164년 7월, 아모리는 재차 시나이 반도를 지났다. 그러자 시르쿠는 두 달간 머물던 카이로 근교의 진지를 버리고 다시 빌베이스로 향하여 방어전에 나섰다. 그곳에서 그는 몇주간 십자군과 대치했지만 갈수록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지난 원정으로 지쳐있던 시리아 병사들이었다. 상황을 보고받은 누르 앗 딘은 아끼는 부하 시르쿠를 위해 십자군의 후방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들의 정예 병력은 아모리와 함께 이집트에 묶여있던 터였다. 그는 주변의 아미르들에게 지하드를 권하는 편지를 보낸 후 안티오크 공국의 중요한 요새인 하림[1] 을 포위하였다. 이에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3세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동로마 제국의 킬리키아 총독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 등의 연합군을 편상해 맞섰지만 8월 12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십자군은 크게 패하였다. 1만에 달하는 십자군이 전사하였고 보에몽 3세를 포함한 수뇌부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하림 전투)
승리를 거두고 며칠 후 하림까지 점령한 누르 앗 딘은 십자군의 깃발들과 기사들의 머리 가죽을 모아 빌베이스로 보내게 하였다. 장기간 포위되어 있던 시리아 군대는 사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 전투의 결과를 알게 된 아모리는 지도자 없이 노출된 우투르메르로 돌아가야 했다. 몇번의 협상 끝에 그는 시르쿠와 동시에 이집트를 떠나기로 합의하였다. 1164년 10월 둘은 각각 팔레스타인과 다마스쿠스로 귀환하였다. 한편 그해 11월 누르 앗 딘은 십자군으로부터 바니야스를 함락하였다. 2번의 원정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것은 역시 샤와르였다. 이이제이를 통해 정권을 되찾은 그는 시르쿠의 분노가 두려워 아모리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이에 누르 앗 딘은 십자군이 이집트에 개입할 경우 그에 바로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을 시르쿠에게 부여하였다. 그리고 1166년 말엽 시르쿠가 조카 유수프를 포함한 원정대를 꾸리자 샤와르는 아모리의 개입을 청하였다.
2.2.4. 3차 원정 (1167년)
1167년 초, 아모리가 먼저 이집트에 도착하였다. 샤와르의 이집트 군대와 아모리의 십자군은 카이로 앞의 나일 강 동편에 주둔하였다. 하지만 시르쿠는 그들의 예상을 엎고 빠른 기동력으로 카이로를 남쪽으로 우회하여 나일 강 서편인 기제의 피라미드 군락에 진을 쳤다. 그는 샤와르에게 서신을 보내어 십자군에 대한 협공을 제안했으나 와지르는 전령을 처형하고 그 편지를 아모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십자군은 칼리파가 직접 동맹을 확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아랍어에 능한 두 명의 기사들이 알 아디드의 궁정으로 가서 칼리파를 알현하였다. 그들은 동맹의 상징으로 칼리파의 맹세를 요구하였는데 이때 장갑을 벗고 하도록 요구하는 고압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묘한 회담이 끝나고 '동맹군'은 나일 강을 건너 시리아 군대의 분견대를 물리쳤다. 시르쿠와 아모리는 나일 강 서안의 알 바바인에서 서로를 마주하였다. (1167년 3월 18일)
이때 시르쿠는 유수프에게 중앙을 맡기며 적이 공격해오면 후퇴할 것을 명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고 아모리와 기사들이 돌격해오자 유수프는 작전대로 후퇴를 가장하였다. 이에 십자군이 추격해왔고 그들은 이내 시리아 군대의 좌우익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전투는 학살로 변하였고 아모리는 간신히 전장을 탈출하여 카이로의 나머지 부대와 합류하였다. 그리고 쉴틈도 없이 북쪽으로 행군한 시르쿠는 다음날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였다. 그러자 샤와르와 아모리가 도시를 포위하였다. 십자군 함대가 항구까지 봉쇄하자 알렉산드리아는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는 와중에 시르쿠는 조카에게 도시를 맡기곤 수백명의 정예 기병대를 선발하여 밤을 틈타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그는 상 이집트 (누비아)로 향하였다. 29세의 유수프는 투석기의 폭격과 기아로 인한 역병이 도는 도시에 남겨졌다.
시르쿠는 샤와르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무장 농민 수백명을 규합하여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고 그들과 함께 카이로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샤와르가 포위에서 빠져 카이로로 돌아왔다. 그러자 시르쿠는 아모리에게 서신을 보내어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다 해도 샤와르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이니 이쯤에서 서로 용서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자는 뜻을 전하였다. 자신이 부재한 동안 누르 앗 딘이 공격해 올 것을 염려한 아모리 역시 그에 동의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포위를 풀었다. 3년 전과 마찬가지로 둘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1167년 8월)
2.2.5. 4차 원정 (1168년 말)
한편 파티마 칼리파와 십자군이 맺은 동맹은 공짜가 아니었다. 샤와르는 매년 10만 디나르의 조공을 약속하였고 이집트를 떠나기 전 아모리는 카이로에 프랑크인 관료들과 그들을 보호할 기사들을 각 성문에 배치하였다. 늘어난 세금 부담과 외국군의 주둔은 카이로 시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심지어 칼리파의 측근들이 누르 앗 딘과 접촉하기도 하였는데 저번 원정에서 정예 병력을 잃어버릴뻔 했던 그는 이집트 개입을 꺼렸다. 한편 험악한 분위기를 느낀 카이로의 구호기사단이 본국에 도움을 청하자 아모리는 마침 서유럽에서 도착하여 혈기가 넘치는 기사들을 대동하고 이집트로 향하였다. (1168년 10월) 자신감이 넘치던 아모리는 당시 진행되던 동로마 황제 마누엘과의 군사 동맹이 타결되기도 전에 출정하였다. 작년의 '동맹'이 빌베이스를 공격해오자 샤와르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기가 충만했던 십자군은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빌베이스를 손쉽게 함락하였다. 그리고 시내의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였는데, 무슬림뿐만 아니라 콥트파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전 이집트가 공포에 휩쌓였고 항복을 준비하던 카이로는 결사 항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십자군의 학살은 종종 그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십자군이 다가오자 샤와르는 직접적인 저항을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구시가지인 푸스타트에 2만여개의 기름 항아리를 뿌리고 불을 놓았다. 주민들은 파티마 왕조 대에 세워진 알 카히라의 신시가지로 소개되었다. 거대한 화염은 58일간 지속되었고 십자군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한편 조정 내에서의 입지가 흔들리던 샤와르는 아모리에게 시르쿠가 당도하기 전에 사태를 종결시킨다면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한편 보다못한 샤와르의 아들 할릴은 칼리파 알 아디드의 허락 하에 누르 앗 딘과 접촉하였다. 칼리파의 친서를 받아든 누르 앗 딘은 유수프로 하여금 홈스의 영지에 있던 시르쿠를 불러오게 하였다. 따라서 유수프는 성문을 나섰는데 이미 이집트의 소식을 들은 숙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마주하였다. 그리고 1168년 말엽, 시르쿠는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고초를 언급하며 동참을 꺼리던 유수프를 대동하고 이집트로 향하였다. 한편 십자군 함대가 당도하여 만잘라 호수 남쪽의 타니스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불타는 도시를 앞에 두고 시리아 군에게 포위당할 것이 두려워진 아모리는 샤와르와 협상하여 원래대로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하에 회군하였다. (1169년 1월 2일) 6일 후 카이로에 당도한 시르쿠는 칼리파의 승인으로 무혈입성 하였고 파티마 지배층을 포함한 주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이것은 내 여인들의 머리카락이오. 그대가 와서 프랑크인들로부터 당한 치욕을 씻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소.
ㅡ 알 아디드가 누르 앗 딘에게
2.2.6. 5차 원정 (1169년)
1월 18일, 샤와르는 매복조에 의해 사로잡혀 감금되었다. 유수프는 그를 칼리파 앞에 대령하였고 알 아디드는 10여년간 자신을 좌지우지한 샤와르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후 시르쿠가 신임 재상으로 선임되었다. 마침내 이집트의 정권을 얻은 시르쿠는 그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그해 3월 23일 식후 호흡 곤란으로 사망하였다. 이에 파티마 대신들은 칼리파에게 유수프를 후임으로 추천하였는데, 시리아 군대의 아미르들 중 가장 경험이 부족하고 세력이 약하며 튀르크/쿠르드 계열의 반목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알 아디드로부터 알 말리크 앗 나시르 (승리하는 왕)의 칭호를 받은 유수프는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이었다.
31세의 유수프는 취임 직후부터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우선 기존 시아파 파티마 왕조에 충성하고 '수니파 외국인'의 지배에 경계심을 지니던 군대와 관료들과의 대결이 급선무였다. 알 아디드 궁정의 시종장이던 흑인 환관이 유수프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들통이 나자 처형당하였는데 그를 따르던 흑인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수프는 신속히 반란을 진압하였고 시리아 출신의 측근들을 파티마 군대의 요직에 앉혔다. 그리고 1169년 10월, 동로마 함대의 지원을 이끌어낸 아모리가 이집트로 쳐들어와 다미에타를 포위 공격하였다. 하지만 동로마-십자군 연합군은 물자 부족과 상호 갈등 때문에 와해되었고 유수프는 협상을 통해 아모리의 마지막 원정을 무산시킬 수 있었다. 1170년, 이집트의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자리매김한 유수프는 부친 아이유브 등 가족들을 초청하여 각종 요직에 앉혔다. 같은 해 유수프는 지하드의 일환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홍해 항구인 아얄라 (아카바)를 점령하였다.
2.3. 살라흐 앗 딘
자신감이 생긴 유수프는 파티마 왕조라는 허물을 벗어던지기 앞서 몇가지 시험을 하였다. 그는 칼리파 알 아디드의 애마를 타고 궁전을 산책하는 등 칼리파에게만 허용된 특권을 행하며 파티마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결국 알 아디드가 사망하자[2] 파티마 왕조는 멸망하였다. 유수프가 이집트에서의 권력을 강화하자 자연스레 그의 주군인 누르 앗 딘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1171년 함께 케라크 원정에 나섰을 때에 유수프는 부친 아이유브의 위독함을 내세워 주군과 마주하기도 전에 회군하였다. 2년 후 아이유브가 병사한 것을 보면 이는 사실이었지만 누르 앗 딘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 중재자 역할을 맡았던 아이유브가 사망하자 돌이킬 수 밖에 없었다.
이집트에서 바치는 연공이 너무 적다고 여긴 누르 앗 딘은 1173년 카이로에 특사를 파견한 후에도 별 차이가 없자 마침내 군사적 해결을 택하였지만 1174년 병사하였다. 같은해 파티마 조의 와지르였던 탈라이의 후손들이 시도한 복벽 움직임을 철저히 진압한 유수프는 완전한 이집트의 독립 군주가 되어있었다. 한편 아이유브 가문의 다른 일원들은 영토 확장에 나섰다. 1173년 살라딘의 조카 타키 앗 딘 우마르가 리비아를 점령하여 무와히드 왕조와 국경을 맞대었고 이듬해 동생 투란샤는 예멘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1174년 말 별 저항도 받지 않고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살라딘은 바야흐로 대제국의 군주가 되어 있었다. 본인의 능력과 시대적 행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